사람은 오직 악만 내어놓을 뿐이기에 하나님의 경륜은 언제나 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면 우리가 갖는 의문중 열의 아홉은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구십구퍼센트는, 적어도 하나님과 사람을 동등하게 여기거나, 오히려 사람을 더 중히 여기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문 자체에 골몰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한낱 먼지에 불과한 우리 자신을 먼저 알아야만 합니다.
솔로몬의 탄식처럼 우리의 모든 것은 다만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입으로는 '헛되고 헛되다'하고 중얼거릴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생각과 삶은 언제나 그 반대로 움직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 처해 있는 딜레마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런 우리의 처지를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흔히 오해하듯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격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맹신'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은 정확한 지적입니다. 신자는 그의 믿음에 대해 묻는 자에게 언제 어디서나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믿는다는 말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을 좇으려는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삶은 언제나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제 아무리 훌륭한 말로 변증한다고 해도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우리의 처지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삶은 은혜라는 진리를 잊는 순간 피조물은 권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하여 이 진리를 잘 설명하지만 이미 권리 위에서 사유하고 행동하고 있는 우리의 귀에 들릴 리 없습니다. 성경의 다른 모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아시기에 당신의 희생을 통해 자기를 부인하는 길을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삶은 은혜임을 진실로 아는 자만이 신자입니다. 탈레반의 공포정치 아래서 태어났든, 한국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 아래 태어났든, 장님으로 태어났든, 호르몬수용체가 제 역할을 못하게 태어났든, 모든 삶은 온 피조세계와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증거이자 결과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의 처지를 비교하고, 육신적 능력의 차이나 그밖에 타고난 조건의 차이 등등을 따지는 것은 아직 삶이 은혜임을 참으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타고난 조건이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내게 이미 족함을 진실로 아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