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조회 수 471 추천 수 4 2012.03.10 01: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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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95:7,8)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 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시95:7,8)

신자는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분의 음성을 계속해서 잘 듣고 있는 신자가 드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는지에 관한 책들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시편 기자가 대변한 것이지 신자들의 기도나 소원은 아닙니다. 이미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명이나 인도대로 순종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신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모를 때에 그분의 확실한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해답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명하게 제시된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않은 아주 대표적인 예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불순종한 예에 비추어 보면 신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는 보편적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역으로 그 원인만 제거하면 그분의 음성을 쉽게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본문은 그 원인을 한 마디로 “마음이 강퍅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죄악으로 가득 찼거나, 우상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마른 광야에서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차서 물을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하나님에게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끝까지 요구하는 고집스런 마음입니다.

따라서 자기 뜻과 계획을 다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용이하게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그리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갓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신나게 진군하고 있는데 젖과 꿀은커녕 물 한 방울 구경 못하는 바위산에 다다랐습니다.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정말 모든 시간과 여유를 다 바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집 안에 우환이 겹치고 자신은 직장에서 해고되어 끼니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 된 것입니다. 그런 때에 우리 같으면 과연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환난에서 건져달라고 떼를 쓰며 기도할 것 아닙니까?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엇이 크게 다릅니까? 물이 없는 환난을 겪게 되자 물 달라고 아우성 친 것이나 동일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에서 너무나 큰 은혜를 체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 얼마나 큰 감격을 맛봅니까? 그런데도 그 직후에 힘든 일이 생기면 당장 없애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까?

신자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완악하고 믿음이 형편없었던 자들로 취급하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성정(性情)이 똑 같은 자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바로 저를 필두로 모든 완악한 인간을 대표할 따름입니다. 만약 내가 그 때 맛사에 있었더라면 모세에게 결코 불평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만큼 큰 착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와 성정은 똑 같되 전혀 다른 모습의 신자들도 나옵니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를 바울이 말씀 한 마디로 일어나 걷게 하자 사람들이 그를 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자기들 가운데 내려왔다고 경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행14:8-18)  
    
성정은 동일한데 한 부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듣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부류는 그 분의 뜻을 알아서 실제로 실현해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당연히 그 마음이 강퍅한 것과 강퍅하지 않은 것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바울과 바나바라도 맛사에 있었더라면 물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간절히 기도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떼를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떼를 쓴다는 것은 자기 고집을 결코 꺾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반드시 자기 계획과 뜻대로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들은 환난이 닥치면 감수하면서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믿음을 동원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날의 많은 신자는 단지 환난을 없애는 데만 믿음을 동원하고 있는 차이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자기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원한 반면에 후자는 자기 뜻을 하나님이 이뤄주기만 원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나왔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겠다는 갈급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계획과 뜻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자기 뜻과 계획마저 세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에 소원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떼를 쓰듯이(쓰는 것이 아니라 쓰듯이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완전하게 듣게 될 때까지 무슨 일이 닥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 환난이 사방을 옭아매어 오더라도, 눈앞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펼쳐져도 그분의 음성을 듣기만을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갈급해 하는 심령에 하나님이 당신의 음성을 안 들려주실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본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실제로 그분의 온전한 양육을 받고 있으며 모든 힘의 공급을 그분께로만 받고 있다는 철저한 자각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교리적으로 수긍하는 믿음이 아니라 정말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분의 사랑과 간섭에만 의지하는 실제적인 삶이 따라야 합니다. 급한 환난 때만 그분께 기도하는 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매일 매 순간 교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어쩌다 그것도 신자 쪽의 급한 사정에 의해서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들은 잘 들을 수 없습니다. 대화는 자주 할수록 상대의 의중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법입니다. 나중에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다 오랜 만에 만난 자들끼리는 말이 잘 안 통할 것은 너무나 빤한 이치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그런 큰 기적을 보고도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잊어버렸다고 단순히 정죄할 수 없습니다. 기적들은 오히려 쉽게 잊어버립니다. 큰 은혜는 받을 때는 감사가 크지만 그 때뿐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은 곧 꺼지지만 은근히 타는 약한 숯불은 더 오래가고 불길도 더 뜨거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은 그렇게 큰 은혜를 쉽게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맛사에 도달하게 된 것도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였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잊은 것입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 따라 왔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설마 목이 타서 죽게 하려고 그곳으로 인도한 것이 아닐 것 아닙니까?

물론 당장 이해가 안 되고 불만이 솟구칠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곳에서 너무나 허기져 힘들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 드러낼 뜻이 있고 또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인식은 최소한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분의 손으로 길음을 받고 있는 양이라는 확신이 없기에 자기들 기대와 예상과 달라지자 바로 대놓고 불평부터 터트린 것입니다.  

신자가 문자 그대로 매일 매순간을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분의 손으로 기르는 양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부터 배우려 하지 말고 먼저 그분의 양이 되어 있으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3/6/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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