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라.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욘1:14,15)
악의 도성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요나로 인해 다시스로 가던 배가 폭풍우에 휩싸였습니다. 항로의 기후상태를 잘 아는 선원들이 신의 분노라고 여겼다는 것은 분명 마른하늘에 벼락 치듯이 비정상적인 태풍이었기에 그 저주를 산 자를 찾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당사자로 지목된 요나는 가뜩이나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차라 담담히 폭풍우를 잠재우는 제물의 역할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 죽게 되었어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려니 양심에 꺼린 선원들이. 먼저 힘써 노를 저어보았지만 풍랑은 점점 더 흉용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며 선원들은 요나의 신 여호와께 이 일로 인해 자기들에게 벌주지 말라고 간구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신의 저주를 받았다면 회개하거나 제물을 바쳐야하고 그 회개나 제물이 신의 마음에 든다면 저주를 거둘 것이라는 믿음을 요나와 선원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선원들은 요나가 믿는 신이 그로 인해 폭풍우까지 일으켰다가 잠재우는 모습을 보고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1:16) 하였습니다.
어떤 신을 섬기던 여기까지가 인간이 갖는 믿음의 한계입니다. 폭풍우 속에 던져진 요나가 생명을 건지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종교적 의미로도 바쳐진 희생 제물이 다시 살면 그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러면 폭풍우가 그쳐선 안 됩니다. 또 그런 큰 풍랑 속에 던져진 인간이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한 상식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에 던져진 순간 큰 물고기를 예비해 놓으시고 요나를 살리셨습니다. 그것도 그 배 속에서 3일 간을 지내게 한 후에 말입니다. 최고로 현명한 학자나 경건한 종교인이 지성, 경험, 사상, 철학, 종교 심지어 믿음을 전부 동원해도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과 믿음의 경계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 인간이 도무지 짐작도 못하는 영역에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모함한 자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뼈까지 부수며 삼킨 사자들이 그의 근처에는 아예 얼씬거리지도 않았습니다. 곁에 있던 병사가 불길에 휩싸여 죽을 정도의 극렬한 풀무 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도 머리카락 하나 그슬리지 않았습니다. 신자에게 베푸신 기적적인 권능을 주목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사자나 불을 만드시고 나아가 세상의 군왕들을 세우신 이가 하나님입니다. 그런 정도는 그분에게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이루고자 하는 일은 인간의 상태가 어떠하든, 말하자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치 못해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요나가 당신의 명령을 거역했어도 캄캄한 물고기 배속에서 3일간 진정으로 회개하게 한 후에 니느웨로 가게 했습니다. 또 명령에 순종은 해도 아직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던 그의 메시지를 듣고도 죄악의 도성 전체가 순간적으로 회개케 했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당신께서 드러내보였습니다. 고래는 장차 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표 했고, 니느웨는 이방인도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당신의 사랑을 모든 세대에게 분명히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당신 혼자서 하지 않고 요나라는, 그것도 고집 센 종을 통해서 했습니다. 당신의 뜻을 그에게 먼저 계시해주었고 비록 거역했지만 폭풍우와 고래를 동원해서라도 그 뜻을 이루었습니다. 단순히 죄를 회개하면 바다를 잠잠케 해 구원해주신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분의 계획에 훼방을 놓을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의 경우처럼 필요하면 초자연적 이적을 손쉽게 동원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자기 소망의 질과 양을 키워서 큰 이적을 기대하라는 단순한 차원이 아닙니다. 대박 같은 축복을 간구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너무나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간적 이성과 믿음의 협소한 범위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려고 작정하신 일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에 지금 내가 부름 받아 쓰임 받고 있다는 확신, 아니 실제로 쓰임 받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사를 그분의 관점으로만 이해하고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죄악과 사단의 세력 앞에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비록 내 이성과 믿음은 보잘 것 없더라도 그것마저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는 항상 인간의 전부를 아우르는 경계선 바로 밖에 예비 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믿음마저 아니 생명마저 내려놓고 온전히 그분의 처분에 내어맡기는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포기의 순간이 바로 그분의 크고 신비한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의 목표 특별히 기도의 목표는 바로 이 믿음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강권적 간섭으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지만 그분이 죄악에 찌든 이방 전백성이 한 유대인의 메시지를 듣고 금식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자원하며 주를 따르려 기도하였더니 성령의 권능을 받아 하루에 삼천 명을 구원하는 종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채우려 믿음을 동원하여 애끓듯이 기도합니다. 그것도 너무나도 불완전하고 연약한 우리의 지성, 사상, 경험, 믿음의 한계 안에 하나님을 어떡하든 붙들어 매려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자꾸 의심과 불평이 생기면 어쩌면 그분의 뜻을 공개적으로 거역하는 것이 나을지 모릅니다. 정말 택함을 받은 그분의 자녀라면 요나처럼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할 여지라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평생을 두고 정말 보잘 것 없는 우리 믿음의 한계 속으로 그분을 끌어넣으려는 무지, 고집, 욕심을 아예 버리지 않고 버릴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9/17/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