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족하지 족해지지 않는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8,9)
바울이 자기 육체의 가시가 떠나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어도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과 그에 반응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이해해서 실천하고 있는 신앙과는 아주 다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아주 신실한 사도가 하나님의 일을 더 잘 하겠다는 목적으로 기도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로선 심한 고통에서 해방되겠다는 의도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복음 전파 사역에 자꾸만 방해 되니까 꼭 없애달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기도 응답으로 받은 말씀 즉,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진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 가운데 가장 먼저 확실히 해둘, 아니 고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실제 자기 모든 것을 희생하여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서 기도한다고 해서 다 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신앙의 초점을 기도한대로 다 응답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우리의 것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기도할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나아가 그 뜻을 알아서 자신의 뜻을 그에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더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기도한대로 응답이 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 없이는 애당초 기도할 기분조차 생기지 않을 것 아닙니까? 기도한 대로 응답이 안 될 수 있다는 것은 기도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때로는 전혀 엉뚱하게 응답이 될 수 있다는 뜻이므로 응답의 범위를 아주 넓게 잡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실지 모르니까 계속해서 기도하되 그 인도에 즉각 응할 준비를 기도하는 중에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응답의 범위가 넓어지니까 기도의 범위도 그에 맞추어 넓혀야 합니다. 쉽게 말해 자기 소원하는 것만 아뢰고 치우지 말고 그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감지해야 합니다. 때로는 성령의 미세한 음성으로, 때로는 주위 환경을 통한 강권적 인도로, 심지어 자기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기도나 고백을 시키는 그분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넓어진 기도 응답에 귀도 넓게 열어야 합니다. 바울도 지금 우리 생각으로는 기도 응답이 안 된 것을 응답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응답 같지 않는 그 응답에 절대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 또 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해질 것이다”라고 하지 않고 “족하다”고 현재 시제로 말씀하셨습니다. 응답 되지 않은 것, 즉 육체에 가시가 계속 번창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은혜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비유컨대 질병을 낫게 해주거나 부도가 나려는 사업을 회생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 질병으로 더 고통을 겪고 부도가 나서 망하는 것이 당신의 응답이자 은혜, 그것도 족한 은혜라고 응답한 셈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달라도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거기다 바울의 반응은 더 기가 막힙니다. 그 응답을 온전한 응답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는 자기 약한 것들을 크게 기뻐하면서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라면 “하나님께 병이 낫고 부도를 막아달라고 기도했더니 병으로 더 고생하고 아예 부도가 나게 해주겠다고 응답하셨어! 얼마나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야!”라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랑을 듣는 주위 사람들 특별히 믿음 좋은 교회 동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못할 것 아닙니까?
바울이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덧붙였다고 해서 나중에 그 능력이 그의 형편을 개선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현재는 내가 약하지만 앞으로는 그분의 능력으로 나를 강하게 해주리라 믿고 미리 기쁨으로 자랑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겪은 질병을 두통, 귀앓이, 안질, 심지어 간질로 추측하고 또 혹자는 핍박, 동족의 불신앙으로 겪는 심리적 고통 등으로도 해석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사도가 그것을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한 만큼 고통이 극심했을 것이므로 고질적인 육체적 지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쉽게 말해 밤새 끙끙 앓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기뻐한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초인적 의지와 심오한 영성과 강철 같은 믿음 때문이었겠습니까? 지병만 제외하고는 지중해 연안을 세 번이나 전도 여행을 다닐 만큼 육신이 강건했던 것입니까? 아니면 위대한 사도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일부러 안 그런 척 가장이라도 한 것입니까?
그 어느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시가 제거되었다는 고백은 성경 어디에도 없으므로 죽을 때까지 무척 괴로웠을 것입니다. 또 어지간해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그가, 그것도 기도한 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실을 밝힐 정도이니 말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성숙한 신자라도 막상 병마에 시달리거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똑 같이 힘들고 괴로운 법입니다. 고통은 어디까지나 고통입니다. 신앙이 마취약 혹은 환각제 같은 역할을 하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신자를 마취시키거나 환각으로 인도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신앙을 그런 용도로 동원한다면 너무나 어리석은 짓 아닙니까?
그가 기쁨으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 내용이 우리와 달랐을 뿐입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게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9:22,23)
동정을 구하거나 다른 숨겨진 의도가 없는 한 인간적 약함을 부러 자랑하는 바보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약함을 자랑한다”는 말이 맞으려면 어쨌든 남들이 약하다고 인정해주거나 약한 모습을 보아야만 합니다.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약한 자들에게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 바울이 약함을 자랑한 내용입니다. 오로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의 은혜 안으로 초대하려고 각 사람의 처지와 형편에 맞추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자신도 복음에 참예하고자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복음을 듣는 자나 전하는 자 모두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십자가 앞에서 죄 씻음을 받는 역사가, 신자는 자신을 부인하며 죄의 본성을 더 죽이는 역사가, 그리고 전하는 자신에게도 다른 성도와 동일한 역사와 함께 복음을 향한 열정이 더욱 깊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당장은 현실적 인간적으로 약하지만 즉 질병과 궁핍에 시달리지만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강하게 채워져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아주 큰 축복으로 인도하리라는 우리가 갖는 은근히 숨겨져 있는, 아니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기대심리는 아예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 내용이, 그래서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요컨대 그가 말하는 강함과 약함의 내용 자체가 우리가 정의하는 차원과는 달랐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것과 다르듯이 말입니다. 정확히 말해 그는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길대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사람들 사이에는 약함을 자랑하는 모습이 되었지만 대신에 그의 안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전해지고 자랑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 그리스도의 영광뿐이었습니다.
알기 쉽게 다시 말하면 그 자신이 인간적으로 약하든 강하든 상관없이, 즉 육체의 가시에 계속해서 시달림을 받았든 설령 그가 기도한대로 응답되어 그것이 제거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루시는 복음 전파의 사역은 온전하게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의 인생 여정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을 갖게 될 지에는 아무 상관하지 않고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갈급한 소원으로 붙들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거짓 사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참 사도가 취해야 할 자세를 논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가 개인적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드러내며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거짓 사도들은 바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생을 살며 자랑하는 내용도 정반대였다는 뜻입니다.
간단하지만 대표적 예로 거짓 사도들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질병을 주실 리가 없고 또 기도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준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원은 하지만 힘이 모자라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이뤄내려는 본능적 욕구에 영합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달성시키는데 사역의 방향을 정하고 교회를 그렇게 이끌어 갔습니다. 최소한도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사람들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마저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했지 족해질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상황과 여건이 나에게 비록 힘들고 고달플지라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기에 복음이 증거되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한 그분의 은혜를 참다운 은혜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또 현재 그러지 못하면 당연히 미래에도 그러지 못할, 즉 족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본문도 바울이 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진다고, 즉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강함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분명히 확언했지 않습니까?
바울이 체험했고 후세 모든 믿는 자에게 자랑했던 은혜의 구체적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육체의 가시에 계속 시달리지만 약한 사람에게 약한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은혜였습니다. 따로 더 받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장래에 내 열성어린 믿음과 교환해서 더 얻어낼 은혜는 없었습니다.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는 등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당한 것이 은혜요,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날마다 속으로 눌린 것이 은혜요, 그래서 자신의 인간적 자랑은 완전히 배설물로 여기며, 마치 쓸개 없는 사람처럼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람 식으로 저 사람에게는 저 사람 식으로 섬기는 관계를 맺은 것이 은혜였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현재 하나님께 받고 있는 아니 누리고 있는 은혜에 족합니까? 혹시 장래에 강한 은혜가 채워질 것을 믿기에 내 약한 것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꾸 응석과 투정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최소한 내 약함이 바로 하나님의 강함이요 그것이 바로 그분의 은혜라는 점을 인정이라도, 아니 아시기라도 합니까? 은혜는 지금 족해야 족한 것이지 미래에는 좀처럼 족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변덕은 너무나 식은 죽 끓듯 할뿐만 아니라 그 탐욕은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장래에 족해질 은혜라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장 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정말로 당신의 자녀답게 살 때에는, 최소한 그렇게 살기로 진정으로 소원하고 헌신만 해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는 절대로 부족하지 않도록 채워주십니다. 그것도 현재 시제로 말입니다. 문제는 신자의 소원과 준비와 헌신이 현재 형이 안 되어 있으니 현재 채워주지 않으시는 것뿐입니다. 바꿔 말해 미래의 족한 은혜만 찾는 자는 미래에 가서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고 작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할 뿐입니다.
3/5/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