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29:11-13)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비결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심어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1-13)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면을 소망합니다. 그분과의 실질적인 교제를 통해 신앙을 더욱 성숙시키기 원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신자가 전심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되 끈질기게 찾고 또 찾으면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이 정말 간절히 그렇게 했는데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확신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정말로 직접 만나려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는 잘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죄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를 아무리 믿음이 좋더라도 아직도 죄에 찌든 인간이 대면하면 그 자리에서 소멸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실체가 아닌 인간적 이해 수준에 맞게끔 낮춘 대체 수단으로 인간을 만나주십니다.
물론 분명한 이미지나 음성을 통해 당신을 계시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통상적으로 널리 쓰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사람에게 특수한 목적이 있을 때만 그렇게 하십니다. 예컨대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세울 때에 떨기나무 불꽃의 형상 가운데 음성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는 80 노인 혼자서 지팡이 하나로 세계 최강대국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임무를 주신 아주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만약 신자가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을 헌신과 준비가 되어 있거나 하나님이 그럴 계획으로 일방적으로 찾아주는 경우라면 지금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가 하나님의 일은 먼저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직접 만나고 싶다는 기대 내지 소망만으로는 그런 대면은 절대 이뤄지지 않습니다. 또 설령 직접 계시가 이뤄져도 수단, 때, 장소 등은 인간의 예상과는 별도로 오직 당신께서 정하십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인식부터 가장 먼저 확실히 해야 합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1:17)입니다. 또 그분은 빛들의 아버지로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약1:17)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빛을 받는 가시적 형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분은 빛들의 아버지로서 빛들을 지으시고 그 모든 빛들 넘어 계신 분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현상은 빛의 작용인데 빛을 넘어 계신 분을 인간이 볼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대신에 신자는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통해 보고 들으며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게 만들었다는 가장 기본적인 뜻이 바로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그러나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교통한다고 해서 또 다시 초자연적 신비한 체험을 기대해선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함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0-12)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영적 교통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드러난 그분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계시로 이미 그분과 교통이 이뤄진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도 영이신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요4:23,24)고 했듯이 예배드릴 때에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은혜를 받으면 바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단순히 감정적 흥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분명한 뜻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간단한 원리 아닙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이미 하나님을 만난 것이지 않습니까? 영적인 교통이 이뤄졌고 인격적 대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신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응답이 되거나 혹은 기도 가운데 그분의 뜻을 깨달으면 바로 그분을 듣고 보고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울부짖으며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주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을 찾으면서 진심이 아닌 가식으로 또 전심이 아니라 그저 재미로 찾는 자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울부짖으며 기도할 때는 위급한 일이 있는 법이라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만난 것 같지 않고 또 하나님이 구태여 전심으로 찾으라고 했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전심과 하나님이 원하는 전심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저 힘과 열심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 전심(全心)인 줄 압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찾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강조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 이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을 역으로 추적하면 이렇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울부짖으며 빨리 포로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기도에 하나님이 제대로 귀를 기울이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선민 백성에게 이런 재앙을 허락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로 그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교제란 벌써 서로간의 만남이 전제가 된 것입니다. 또 어떤 이와 대화하며 교제하려면 가장 먼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상대를 모르면 말은 주고받을 수 있어도 의미 있는 교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상대와 말을 나누는 것은 서로 분명한 의도를 가진 만남이 아니라 우연히 스쳐 지나가다 마주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이미 그분과의 대면은 실제로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역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 특별히 신자를 향한 근본 마음을 알지 못하고선 아무리 울부짖고 찾고 또 찾아야 그분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생각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전심입니다. 또 그런 확신의 바탕에서 찾고 찾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신자를 향한 생각도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문제는 신자의 그분을 향한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현실의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지 않으면 그분의 성품을, 심지어 그분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지 않습니까? 당장 눈앞의 문제만 빨리 해결해달라고 기도하니까 그분과의 만남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분을 만났다면 그 문제의 해결은 그분의 뜻과 방법과 시기대로 이뤄질 것은 너무나 틀림없지 않습니까?
더 쉽게 말해보겠습니다. 예배, 찬송, 기도, 말씀 볼 때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전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또 다시 하나님더러 자기를 만나 달라고 찾고 또 찾아야 합니까? 그런 간구 자체가 이상하고 모순이지 않습니까?
지금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생각이 재앙일 것이라고, 즉 현실의 문제를 왜 빨리 내 방식대로 해결해 주지 않는지 의심과 불만을 갖고 있는 한에는 이미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아가 내주하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진정성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전심의 상태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5/1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