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을 때도 많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1-3)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동행하심에 대해 혼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혼동이라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혼동은 두 개 이상의 비슷한 것들이 있는데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동행하심을 단순히 동일한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구별하지 못하고 있고 또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매번 동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이 무소부재(無所不在) 하다는 진리를 부인하는 이단성 발언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이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의문문 형식을 빌려 얼마든지 동행하지 않을 수 있다고 오히려 더 강조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동행의 의미를 확실하게 밝혀놓았습니다. 사실은 동행의 문자적 의미가 바로 그러함에도 우리가 미처 몰랐을 뿐입니다. 우선 동행에는 상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 길을 가는 것을 두고 동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교인들 중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확신조차 없으면서 단순히 교회 생활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기독교를 여느 종교와 같이 취급해 도덕적 훈련과 인격적 수양만 합니다.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세상만사를 운행 섭리 하신다는 확고한 인식이 없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일을 세밀하게 이끄신다는 믿음과 체험이 없어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동행은커녕 함께 하지도 않는 셈입니다.
동행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과 신자의 뜻이 반드시 일치해야, 즉 의합(意合)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치시켜야 할 뜻은 당연히 하나님 쪽의 뜻입니다. 신자가 하나님더러 자기 뜻에 맞추어 따라 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방적으로 자기 소원만 붙들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동행하심과 함께하심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자가 자기 뜻만 일방적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무소부재하신 그분이 바로 그곳에 와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는 응답 안 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무소부재는 존재가 거하는 것만 뜻하는 반면에 동행은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계시기는 해도 즉 신자와 함께는 해도, 응답 즉 동행은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사림이 함께 길을 가려면 최소한 목적지, 출발지, 방향, 수단이라는 네 요소가 필수이며 또 그 모두가 동일해야 합니다. 예컨대 출발지는 같되 각기 서울과 부산을 향해 가면 동행이 아닙니다. 같은 서울을 목표로 가도 부산과 목포에서 따로 출발하거나, 같이 부산에서 출발했는데도 다른 곳을 경유하는 것과 직선 코스로 가는 것도 동행이 아닙니다. 심지어 부산에서 서울을 향해 직선코스를 잡아도, 즉 출발지 목적지 방향 셋 다 일치해도, 각기 자동차와 도보로 가면 동행이 아닙니다. 길을 가는 수단까지 같아야 합니다. 같은 길을 두 사람이 함께 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다 동행이 아닙니다.
그럼 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필요한 네 요소는 각기 무엇입니까? 본문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경우에 비춰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또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다”고도 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출19:5, 말3:17), 제사장 나라(출19:6),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삿5:11, 삼하14:13)으로 불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사단에 붙잡혀 있는 곳으로 먼저 찾아와서 그들을 구원해내어 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목표로 해서 광야 길을 통과하되 약속의 땅에 도착하면 율법대로 따르며 모든 민족들 앞에 복의 근원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살아계신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증거 함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상천하지에 여호와 한 분만이 하나님임을 입술로 고백케 하고 전심으로 경배케 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출발지’는 아무 자격과 공로 없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 받은 자리입니다. ‘목적지’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방향’은 당연히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으로 신자가 찾아가는 것이며, 그 ‘수단’은 오직 성령의 인도에만 따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사나 죽으나 복음을 위해 존재하되 증거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뿐이어야 합니다. 본인부터 평생을 두고 죄에서 의로, 흑암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행해야 할 뿐 아니라 사단에 붙잡힌 영혼들도 자기처럼 주님과 동행토록 해야 합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살아도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나눠주는 통로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함께 할 수는 있어도 동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신자는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당신께서 먼저 택하여 구원해주시고 또 보호 인도하면서 당신의 소명을 심어준 자입니다. 또 그분이 신자만 알았다는 의미는 사랑하는 부부가 살을 맞대고 살면서 서로 속속들이 아는 것과 같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부가 의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평생을 두고 함께 같은 길을 동행해야 함에도 어느 한 쪽이 그러지 못하면 이혼하든지 다시 돌아오도록 고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와 함께 감에 있어서 그 출발지, 목적지, 방향, 수단에서 하나님이 어긋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신자와 함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행할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신자를 사셨기에 절대 이혼을 허락지 않습니다. 문제는 항상 신자입니다.
막상 하나님의 신부였던 이스라엘은 다른 동행 상대를 찾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바람피울 수 있는 유흥비까지 본 남편더러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보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바람 피웠으니 무조건 벌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행할 상대가 도저히 그럴만한 상태가 아니므로 억지로라도 동행할 수 있는 상태로 바꿔주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길은 이 땅입니다. 하나님이 신자 곁에, 즉 이 땅에 와야 동행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분이 이 땅에 왔다면 어떤 길로 어떻게 가겠습니까? 두말 할 것 없이 처음 오셨을 때에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의 길입니다. 신자가 그분과 의합하여 동행해야 할 길도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 당당하게 맞서는 의로운 길 뿐이며 당연히 핍박과 멸시가 동반되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세상과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하나님더러 동행하라고만 하면 과연 동행하시겠습니까?
9/2/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