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가 와닿지 않습니다.
[질문]
정말 불경스러운 생각인줄 압니다만, 전능한 신이 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이 사건이 제겐 슬프거나 괴롭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그렇게 되어 하나님이 그를 자기 아들로 삼으신 것도 아니고 애초에 성삼위일체, 하나님 본인이 다른 모습으로 오신 것이라 하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순신 장군, 독립운동가 같은 역사속에서 희생된 나약한 그들의 희생이 더 숭고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누구는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또 누구는 날 위해 예수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너무 놀랍다고 하던데 저는 그 앞에서 참회가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사실이라면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믿으라면 믿겠으나 개신교 내에서는 십자가 앞에 진실된 참회가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가르치지 않나요? 사실 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답변]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배우 멜 깁슨이 2004년에 감독 제작한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은 예수님에 관한 영화로 유일하게 미성년자 관람불가(R) 등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마지막 12시간을 당시의 관습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로마 군인들의 폭력이나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해서 청소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영화에 관한 평가도 찬반으로 나뉘었습니다. 영화적인 수준과 메시지가 그리 우수하다고는 볼 수 없었으나, 주님의 십자가 처형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은 사줄만 했습니다. 신자는 물론 불신자에게도 예수님이 당했던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 실상을 정확히 알리는 데에 이바지한 공로는 분명 있었습니다.
질문에서 진솔하게 밝혀주신 속내가 어쩌면 많은 신자의 생각을 대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십가가 사건에 대해 상기의 영화처럼 접근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안타깝습니다. “전능한 신이 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이 사건이 제겐 슬프거나 괴롭게 다가오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한 가지만 인상에 깊이 남는데, 예수님의 수난이 정말로 슬프고도 괴롭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질문자께선 자신도 십자가에서 슬픔과 고통을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뜻을 피력한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 십자가 사건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슬프거나 괴로운 인식을 안기려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바꿔 말해서 그렇게만 느껴선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껏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그런 점만 너무 강조하느라 진짜 본질은 조금 부족하게 혹은 틀리게 다뤄졌습니다.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숭고한 희생적 사랑을 보라. 어찌 우리가 그분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가르친 것입니다. 감히 추측하건대 질문자님이 “이순신 장군, 독립운동가 같은 역사속에서 희생된 나약한 그들의 희생이 더 숭고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라고 본인의 생각을 설명했는데, 혹시라도 그런 맥락으로 십자가를 접근하고 있지 않나 염려됩니다.
물론 십자가에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로 그 본질이 아닙니다.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서 도덕적 차원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서 수고 희생한 것으로 따지자면 자기 부모가 가장 고맙습니다. 나와 직접 연관이 없는 이천 년 전의 유대인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 그리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인간의 영적 실체
기독교의 구원 교리를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감당하고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믿으십시오”일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드린 대로 예수님의 숭고하고도 고통스러운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면 나의 구원 혹은 믿음과 연결되는 점이 없어 보입니다. 반드시 십자가에서 나 자신과 직접 연결되는 맥락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주님이 죽으신 사건 자체에 주목하지 말고 그 죽으심의 영적인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질의하신 그대로 예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실제로 체감되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주님을 알기 이전에 혹은 그와 동시에 자신의 영적 실체를 정확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그분이 언제 죽여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런저런 윤리적인 죄들을 지었으니까 죄인이고 또 그래서 그 죄들을 용서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정도가 전혀 아닙니다. 종교와 무관하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차원의 인식은 언제든 가질 수 있습니다. 정말로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선은 단 하나도 없고 철두철미 추악한 죄뿐이라는 처절한 고백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교묘한 것인지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우선 윤리적인 죄부터 행동의 죄에 국한시키지 않았습니다. 말로서 형제를 바보라고 욕을 하면 인격적인 살인을 한 것이고, 심지어 예쁜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만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18,19)라고 가르쳤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의 속이 죄악으로 완전히 썩었기에 그 속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도 필연적으로 추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죄를 자동으로 생산해 내는 공장이라는 것입니다.
개신교를 제외한 세상 모든 종교는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므로 죄를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행위구원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사람 자체가 죄인이므로 죄를 짓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람 자체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꿔야만 구원이 되므로 성령이 역사하여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죄인과 의인
그렇다고 죄인을 완전하게 착한 사람으로 바꿔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으로 사람들의 죗값을 치뤄 주신 예수님의 의를 그 죄인에게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만 주는 것입니다. 심판받아야 했던 사형수였으나 예수님이 그 벌을 이미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죄인에게서 그 형벌만 사면하는 법정적 선언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성령이 역사하여 죄에 묶여있던 영혼을 풀어주고 또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해서 그 후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의롭게 살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신의 내면이 철두철미 추악한 죄의 덩어리였다고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감나게 됩니다. 자신의 그런 실체를 온전히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선, 십자가는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없이 계속 이천 년전 골고다 언덕에 서있을 뿐입니다.
혹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의로운 사람도 많은데 기독교가, 즉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인간을 너무 비하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난이 절대 성립되지 않는 이유를 앞에서 이미 설명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이나 마음으로 짓는 죄가 더 음흉하고 치사한데 행동의 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시로 엄청나게 많이 범하고 있다고 산상수훈에서 가르쳤습니다.
나아가 주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를 통해서 착하게 보이는 사람의 위선적 형식적 가식적 의로움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세리는 성전 구석에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죄를 겸손히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긍휼만 소원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남들보다 훨씬 의롭게 살았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다른 이보다 더 많이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성전 중앙에 서서 하늘을 향해 당당히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 없으며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당시에 금식과 기도와 구제에 열심이라서 사람들로부터 의롭다고 칭찬받은 바리새인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만 유일하게 저주하면서까지 야단쳤습니다. 자기들이 남들보다 훨씬 의롭다고 자부하면서 다른 이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속마음으로는 인간 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를 탐하면서 겉으로만 아주 의로운 척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대체로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종교를 믿는 까닭도 자기는 평소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금전적 피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남들보다 의롭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의에 합격할 자신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생각이야말로 구원받지 못할 최악의 죄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의롭다는 착각에 빠진 바리새인의 기도는 전혀 듣지 않고 자신이 악하다고 겸허히 인정한 세리의 기도에 귀기울이며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죄란?
성경은 그래서 사람이 구원 받아야만 할 죄가 윤리적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전부 악이고 사람 전체가 죄의 덩어리이므로 사람을 바꿔야만 구원받는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며 배척한 것이 구원받아야 할 죄의 본질입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인간이 스스로 이 땅과 자신의 주인이 되려한 것입니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온전한 선을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배척해버림으로써 그분과의 교통이 끊어졌으며 그 이후로는 참된 선을 공급받을 수 없어졌습니다. 대신에 오직 자신만 높이려 드니까 모든 이들 사이에 시기 분쟁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그래서 온갖 윤리적인 죄들이 파생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기 전의 바울처럼 하나님을 열렬히 믿고 따르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높이려고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위선적 형식적 가식적으로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인간은 얼마든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으며 자기 의로 하나님에게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고는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형제들마저 율법은 물론 안식일 규례 같은 부차적인 전통과 관습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정죄하고서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더 의로운 사람은 있으나, 엄밀하게 그 속을 잘 따져보면 자기를 높이려는 교만한 마음이 숨겨져 있으며 은근히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려 듭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아도 자기 의가 드러남으로써 자연스레 그러지 못하는 이를 비하시키는 효과를 낳습니다. 정말로 그런 마음조차 없이 순전한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지만, 어쨌든 자신은 의로우니까 굳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자신이 말과 마음으로 추하고 치사한 죄를 얼마나 많이 짓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서 말입니다.
성경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의 이런 영적 상태를 두고 아담의 원죄하에서 그 영이 죽어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두고 너무 심오하고도 초자연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을 두고도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가 가르치는 아주 간단한 윤리 규정마저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불신자도 인정하는 만고불변의 진리인데, 모두가 죽기 직전에는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한번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기는커녕 제대로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공포에 질려서 형식적이고 때늦은 회개를 해보지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의 의미
자신의 그런 영적 실체를 정확히 안다고 해서 예수님을 실감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철저히 부패해서 시체나 다름 없음을 절감한 위에, 그런 상태를 인간적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해결이 되지 않더라는 처절한 인식도 반드시 따라와야 합니다. 평생 아무리 노력해도 초등학교 수준의 도덕률 하나도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는데, 세상에선 그렇게 의로워지게 만들어주는 방안이 하나도 없더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누구나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는 인식과 구원에 대한 소망은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철두철미 영적으로 완전한 시체라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를 짓기는 지었어도 인간적 노력으로 죄를 안 지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바로 그런 점이 하나님과 단절되고서 대신에 사탄에게 영혼이 묶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영적 부패를 세상에 통용되는 인간적 수단과 노력으로는 절대로 깨끗하게 할 수 없음을 실제로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자신은 영적으로 완전히 무력하며 무능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성전의 세리처럼 오직 하나님의 자비어린 처분에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상태대로 계속 놓아 두면 속에선 죄악만 나온다는 처절한 절망에 빠져야 합니다. 어쩌다 가뭄에 콩나듯이 실현하는 선행도 사실은 자신의 인간적인 의를 드러내려는 교만임을 알아채야 합니다. 그런 자신을 보고서 영적인 사망의 문턱에까지 다다른 처절한 탄식이 저절로 새어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가 없이는 자기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고안한 도덕, 윤리, 철학, 사상, 종교가 가르치는 대로 따른다고 해서 영적인 충만은 전혀 생기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더 허망해지더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내가 하나님과 온전히 개인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절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 쪽에서 나를 사랑과 긍휼로 완전히 용납해주어야만 한다는 필요성까지 절감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
모든 인간 앞에 가로막는 바로 그런 영적 딜레마를 해결해주려고 성자 하나님께서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가 똑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무조건 다 용서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죗값을 하나님 당신께서 다 짊어지시기로 하시고서 그 은혜 앞에 온전히 엎드리는 자를 구원해 주기로 하셨습니다. 또 그런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은 자에게 성령을 내주시켜서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진정한 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면서 신자가 느끼는 감정이 슬픔이나 괴로움이어선 안 됩니다. 물론 가장 먼저 나타나는 감정적인 반응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희생적 죽음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 죽음에 대해 인간 쪽에서 애도나 동정을 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애도나 동정을 받을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또 그런 정도의 정서적 감동만 주려고 십자가에 달린 것이 절대 아닙니다.
신자는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자신에겐 아무 소망이 없이 지옥 형벌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절감해야 합니다. 이제 그 십자가로 인해서 그 멸망을 면하고 구원을 얻고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참 안식을 얻게 되었다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궁극적인 안도감을 느껴야 합니다. 나아가 앞으로의 여생도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참 인간으로서 보람차고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벅찬 기쁨과 설렘이 생겨야 합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에 정작 달려서 죽었어야 할 자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는데 주님이 대신 죽으심으로써 나는 살아났다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그 십자가가 아니면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하고 심지어 법 없이 살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어도 나만이 아는 내면의 영적인 갈등과 허망함을 평생토록 절대 해소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은 다 속여도 내 속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하나님만은 아십니다. 아니 그 전에 자기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 스스로는 압니다. 예수 십자가가 없어도 남들 앞에서 위선적 가식적 의인으로 평생을 살 수 있겠지만, 죽기 직전에는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지옥에 떨어질까 불안해할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멸망뿐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예수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 식으로 접근 이해하면 사실상 그런 불신자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보는 신자는 이전에 그랬던 나를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어서, 이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차게 해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고백이 절로 나와야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못갚겠지만, 사나 죽으나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살아가기로 결단 헌신하게 됩니다.
영생의 의미
지금껏 간략하게 설명드린 십자가 구원에 관한 영적 진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당장 창세기에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아담을 유혹해 하나님을 거역 타락케 만든 사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저주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로 탄생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예언대로 사탄은 주님의 발꿈치만 상하게 하는데, 즉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데에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데, 사흘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인간을 묶고 있는 사탄의 멍에를 깨트리게 됩니다. 아담이 타락할 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미리 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기 말씀을 성경에서 최초로 십자가 구원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서 ‘원시복음’(the Primitive Gospel)이라고 부릅니다.
또 그래서 바울 사도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라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창세기의 그 첫 예언과 연결해서 해석해준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의 죗값을 대신 지불해 주었다고(속량의 의미) 합니다. 어떤 인간도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푼 것입니다. 그 은혜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하는 법이므로, 당신과 원수된 상태의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해서, 먼저 자신이 아무 소망 없었던 영적 시체였음을 철저히 깨닫지 못하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무 죄없이 억울하게 로마 사형수가 되어서 이천 년전에 십자가에 죽은 한 의인이자 기독교를 창시한 종교가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가 신자와 개인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하는 접점은 하나뿐입니다. 자신이 사망과 지옥으로 달려가던 철저한 죄인임을 먼저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예수 십자가가 자신의 그런 옛사람을 완전히 깨트려서 새사람으로 바꿔줄 수 있는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전제가 되는 영적 절망은 자신의 진짜 영적 실체를 계속 면밀히 추적해야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만 알 수 있는 자신의 진짜 내면을 신구약 성경 전체가 계시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연결해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도덕적으로 조금 더 의로워지고, 종교적으로 더 경건해지는 씨름이 절대 아닙니다. 자신의 인격체 전부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은혜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교통과 동행이 다시 완전히 회복된 실존입니다.
그래서 모든 진선미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평강과 자유를 받아서 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살아 역사하는 예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입니다. 자연히 주변 이웃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자기 삶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이해는 되나 실감이 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수록 성경을 오직 예수님 중심으로 열심히 파고 또 파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만 가장 중요한 사항이 하나 남았습니다. 성령이 내 심령에 역사하여서 십자가 구원 진리를 정확히 깨달아서 그 크신 은혜 앞에 내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리며 엎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또 꾸준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4) 구원받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자신이 영적 시체임을 알고서 처절하게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예수님과 그 십자가가 나와 직접 연결되어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2/11/2025)
마침 이전에 이순신 장군의 구원에 관해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아래의 글도 참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