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조회 수 1974 추천 수 0 2018.04.23 07:34:49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6-19)

 

 

인생살이는 결코 녹녹치 않고 많이 고달픕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 못할 문제 질병 고난이 수시로 닥칩니다. 거기다 나로선 최고의 예의와 성의와 진심을 담아 다른 이와 관계를 유지하려 해도 때로는 질시 모략 음해 핍박으로 돌아오는 일이 있어서 인격적으로 큰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일들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죽을 때까지 크고 작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이 믿음 없이 사는 것보다 인생의 고난들을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에 믿음이 꼭 종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취미생활, 운동, 여행, 마음수양, 업무성취, 속세를 떠남, 자연과 동화, 나아가 다른 이에게 베푸는 삶 등등이 인생살이의 스트레스를 없애거나 줄여준다고 믿습니다.

 

한마디로 각자가 옳다고 믿는 모습과 방향으로 자신이 결정해서 그대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언뜻 아주 타당한 진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부족한 측면, 미처 감안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본문 19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선언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목적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 하나뿐이라면 그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하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고난을 없애는 데에 다른 종교나 여타 방식들보다 효과가 훨씬 모자란다고 합니다. 역으로 말해 이 땅의 고난만 없애려면 각자가 좋아하고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실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신자들에게 현실적 문자적으로 적용됩니다. 남들이 취미활동을 즐기거나 여행가는 일요일에 교회에 출석해야 합니다. 아무 보상 없이 봉사는 물론 헌금까지 해야 합니다. 휴일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종일 교회에서 보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예수님과 교회를 섬겨도 현실의 고난이 없어지거나 줄지도 않습니다.

 

거기다 교회에선 원수도 사랑하라, 잘못한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주라, 말로 형제를 바보라 욕하면 살인한 것이라고 아주 엄격한 도덕률을 가르칩니다. 그런 가르침대로 살려다보니 이래저래 걸리는 일들이 많아 실제 삶은 활기차지 않고 죄책감만 늘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때로는 부러울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은 스스로도 자신이 가장 불쌍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바울이 뜻하는 바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인생이 이 땅뿐이라면 가장 불쌍하니까 예수 믿을 필요가 없지만, 만약 그 반대로 이 땅뿐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도 인간의 존속이 가능하다면 가장 불쌍한 위치에서 오히려 가장 행복한, 정확히 말해 유일하게 구원 받는 신분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가 부활하여 천국에 좌정해 계시듯이 그를 따르는 자들도 천국에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라고 전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본문 19절과 연결하면 그 일차적 의미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확실히 증명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육체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로마 군병이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고 또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를 쏟게 해서 죄송한 표현이지만 한 번 더 확실하게 죽였습니다. 시신에 향료를 바르고 세마포를 입혀서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삼일 째 되는 날 아침에 장정 여럿이 덤벼도 움직이기 힘든 무덤을 막아놓은 돌이 열려 있고 무덤 안은 텅텅 비어져 있었습니다. 신령한 육신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꽁꽁 잠그고 숨어 있는 방안으로 순간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후 제자들과 사십 일간 교제한 후 승천했고 그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 오백 명이 넘었습니다.

 

본문의 고백을 한 사도 바울은 예수의 부활이 제자들이 꾸며낸 사기극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이단 중의 괴수로 간주했고 신자들을 철저하게 증오했습니다. 신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외국인 다마섹까지 가는 도중에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비췄습니다. 그리고 “사울아(바울의 이전 이름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또 그 빛으로 완전히 3일간 봉사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일반 신자 아나니아가 환상을 통해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그를 찾아와 기도해주자 눈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이 사기극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그분이 천국에 좌정해 있을 뿐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신자들을 보호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셨기에 이 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도 깨달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를 열렬히 옹호하는 자로 바뀌었고 그를 믿으면 부활이 보장됨을 적극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이 이 땅이 전부가 아니기에 반드시 부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자기들이 꾸며낸 사기극이라면 초대교회 신자들이 살아있는 채로 맹수 밥이 되어 죽는 어리석은 짓을 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에 당연히 그를 따르는 자기들도 부활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 하나님이 그들에게 힘을 주어 담대하게 만들고 처형의 고통도 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신자를 박해하러 가는 바울에게 “왜 신자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지 않고 “왜 나(예수)를 박해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신자 안에 예수님의 영이 임재 해있고 또 그들을 주님이 항상 동행 보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여 할머님 추모 예배를 드리는 근거도 이와 동일합니다. 만약 인간의 삶이 이 땅이 전부이고 부활이 없다면 구태여 예배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 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 땅이 전부면 하나의 물질에 불과한 인간은 그 실존이 죽음으로써 완전히 멸절됩니다. 따라서 단순히 할머님의 생전의 추억을 회상하고 서로 우애를 다지며 죽을 때까지 각자가 옳다고 믿는 대로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면 끝입니다.

 

예수님 부활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의 실존이 절대로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예수님부터 따라야 합니다. 그분만이 부활을 가르쳤고 몸소 부활을 실현해 보인 유일한 분입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인간들에게 눈으로 직접 보게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여 예배드리는 이유는 이미 돌아가신 할머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천국보좌에 좌정해 계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정성을 보여 복을 간구하는 뜻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정말로 부활 신앙을 갖고 있는지 점검하고 부활을 진정으로 소망하며 이 땅의 삶을 주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고자 다시 헌신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신자에게 부활은 소망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미래입니다. 그 부활생명을 이 땅에서부터 소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부활할 것이 확실하기에 세상의 어떤 상처 음해 고난 핍박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이 전부라면 어떤 자가 가장 현명합니까? 법에 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출세 형통 사치를 누리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인데 그 전까지 가능한 문제와 고통 없이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간혹 재물 권세 명예를 과도하게 밝히는 것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런 것들이 인생의 참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삶의 체험으로 깨달은 자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이라도 맘껏 해보고 죽자고 작정합니다.

 

예컨대 버킷 리스트를 실천하고 요로(한번 뿐인 인생, You only live once.)인생을 구가합니다. 그중에는 남을 위해서 기부 봉사하는 기쁨으로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이 땅이 전부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정한 것으로 자기 힘으로 행하다 끝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실존은 이 땅이 절대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본문은 이렇게 고쳐져 읽혀져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자만이 죽은 후의 영원한 복락까지 누릴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왜 꼭 그리스도여야만 합니까? 다른 종교는 안 됩니까?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만이 부활을 즉, 이 땅 너머 있는 인생을 정확하게 가르쳤고 또 몸소 실증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또 본문의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예수 믿기 전과 후가 정반대의 인생으로 완전히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전의 자기가 아니라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자기 속에 실질적인 부활이 이미 일어난 것을 체험합니다. 예수님 같은 죽은 후의 신령한 부활이 있음도 당연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신자를 진멸하려 들었습니다. 단 한 번도 예수가 옳다거나 그를 믿어보겠다거나, 알아보겠다는 생각조차 꿈에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영원히 살아계시는 구주 예수님이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렸습니다. 인생 밖의 절대적 초월자가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주었습니다. 그 후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과 진리대로 예수를 적극 변증하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저작하게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바울더러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또 이 땅이 전부가 아닌데도 이 땅에서부터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면 죽은 후에 그냥 구원해줘도 될 텐데도 말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 혹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해도 죽은 후에 절대자 신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이 땅에서 그냥 내대로 살면 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증명해 보이라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할머님을 추모할 때에 우리의 불효했던 것 반성하는 것도 선하며, 또 남은 후손들이 더욱 사랑하고 화목하며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돌아가신 분에 대해 추모하는 예배이기에 그 무엇보다 어떤 인간도 피할 수 없는 육체적 죽음에 대해 직면해 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제일 먼저 결정해야 할 문제는 육체적 죽음으로 인간 실존이 멸절되는가 아니면 죽음 이후에도 존속되는지 여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며 예배 자체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님도 한줌 흙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어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라면 부활 생명을 주변에 증거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여 교회로 인도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살고 있어야 합니다. 부활을 이미 소유한 자로 영원을 향해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을 초월 도피하는 종말주의자처럼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의 것들이 살아가는 데는 필수적이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영원한 가치가 없음을 확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 땅의 것들에 두려워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질병 문제 고난은 물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상처 억울함 모순 등은 이 땅이 전부인 사람한테만 중요하고 시급하게 해결할 과제입니다. 신자는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문제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과 함께이기에 그것들이 더 이상 우선적 문제나 걱정거리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 직전의 질병이나 환난을 이겨낸 사람이라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지 않고 살아있음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자는 죄에 찌든 옛사람이 죽고 성령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전과 완전히 가치관이 달라졌고 부활 생명을 소지했습니다. 마땅히 이 땅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 땅에서 끝나는 것들이기에, 특별히 사람들에 대해서 더 이상 두렵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신자도 주님처럼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만이 가치 있는 인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그 방식이 삶에 감사와 기쁨과 평강과 자유가 넘치는 유일한 길임을 주님과 동행하면서 날마다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 외에는 죽음 이후는 당연히 그렇지만 이 땅의 삶조차 진정으로 만족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모인 모든 사람에게 임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11/2018

 

*** 지난 2/11은 제 어머님이 소천하신지 일주년이었습니다. 한국의 가족들이 모여 드린 추모 예배에 제가 보낸 설교문으로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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