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은?
[질문]
누가복음 10:25-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궁금합니다.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이 이야기의 시작이 영생을 얻기 위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잘못 해석한다면 마치 선한 행동으로 영생을 얻는 다는 뜻이되고 또한 그렇게 설명하는 교수님도 있었습니다. 선한 행실에 대한 많은 성경구절이 있지만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요?
[답변]
전체 문맥의 구조와 의미의 흐름
질문자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을 정확히 알려면 그 비유를 말씀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야 합니다. 이 비유 하나만 따로 떼어내어서 해석해선 안 됩니다. 비유가 속한 전체 문맥의 구조와 그 의미의 흐름을 정확히 분석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성경해석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절대적 원칙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영생을 얻는 방안을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24절) 주님은 그에게 율법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되물었습니다.(25절) 율법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26절) 주님은 그것이 옳으니 그대로 행하라고 답해주었습니다.(27절)
그러자 그 율법사는 다시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으며(29절) 주님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었습니다.(30-35절) 따라서 이 비유 자체의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는 선행을 독려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사랑으로 섬겨야 할 이웃의 범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의 결론으로 누가 강도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36절)
주님이 율법사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고 두 번이나 반문하면서 비유를 동원한 것은 당시의 유대 랍비의 전형적인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질문을 받으면 거꾸로 동일한 주제로 조금 더 발전된 질문을 던져서 스스로 생각하여 정답을 유추하게끔 하는 방식입니다. 비유는 실제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나 익숙한 관습을 생생한 그림 언어로 보여주어서 질문에 대한 정답을 쉽게 얻도록 하려는 방안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이웃이 될 대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셋을 예로 들어서 비유를 통해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비교는 초등학생이라도 쉽게 답을 고를 수 있는 객관식 문제나 다름없었습니다. 율법사도 당연히 정답을 골랐기에 주님이 옳다고 확인해주면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명했습니다.(37절)
전체 문맥의 흐름을 다시 정리하면 율법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지 물었고 주님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답했으며 마지막에도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베풀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언뜻보면 주님이 선행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허술한 기록이 아니며 아주 정미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경우에 따라서 바뀔 리는 결코 없습니다. 특별히 구원의 방안이 은혜와 행위 둘을 다 지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런 뜻이 아님을 여러 곳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맥에서 정확한 뜻을 유추해야 한다는 원칙만 간단히 따져봐도 그렇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21-24절) 어떤 내용의 말씀이 있었습니까?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22절)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이뤄진다는 절대적 대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야만 하는데 당신께서 당신을 계시해주셔서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원리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긴 것도 아버지의 뜻”(21절)이라고 하면서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이 보고 듣지 못했다”(24절)고 재확인 했습니다. 이어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럼 이 율법사도 그 원리를 보고 듣지 못한 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예로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컨대 그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특별히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며 하나님과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 사마리아인 비유를 드신 주님의 참 의도인 것입니다.
문맥상의 의미의 흐름도 단순히 [영생 얻는 방안-이웃 사랑 행위]의 구조가 아니라, [영생얻는 방안-이웃 사랑의 본질-이웃의 범위-구원의 원리]라는 구조입니다. 구원을 얻는 방안을 서두에 발제한 후에 결론으로 묶여 있고 그 중간에 이웃 사랑의 본질에 관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포함된 것입니다. 요컨대 이 비유는 율법 구원이 아니라 은혜 구원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과연 그런지 본문의 정미한 기록을 추적해보도록 합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은?(2)
율법사의 질문 (25절)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순전한 궁금증과는 거리가 멀고 주님을 시험할 목적이었습니다. 주님께 무엇을 왜 어떻게 시험하려 했습니까? 그가 뱉은 말 안에 진의가 숨겨져 있으며 또 그 진의는 당시의 전후 사정과도 일치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는 방안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전제하고 질문했습니다. 행위구원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으니 어떤 선한 행위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사는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거룩한 율법을 이미 소유하고 있고 또 그대로 따르니 구원은 확정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태여 영생을 얻는 방안이 궁금할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율법대로 행해 봐도 구원의 확신과 평강이 없어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서 겸손한 자세로 진지하게 질문했던 니고데모와는 그 태도가 상반됩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가라는 질문은 역으로 따지면 예수와 그 제자들이 율법대로 따르지 않기에 영생과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하여 비평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치유사역을 행했고(눅4:31-37), 밀 이삭을 잘라 먹었으며(눅6:1-5), 제자들도 세리와 죄인(복음서에선 이방인을 주로 지칭함)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했으며(눅5:30-32),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금식하고 기도하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눅5:33-39) 나아가 주님은 당신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선언도 했습니다.(눅 5:24)
본문 앞에 있었던 일들만 간단히 살펴보아도 주님은 이미 유대종교지도자들로부터 여러 면에서 미움을 사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준 일로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눅6:11)했을 정도입니다. 본문의 율법사는 그런 의논 끝에 대표로 나서서 주님을 유대 법정에 고소할 거리를 찾으려 한 것입니다. 최소한 예수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심어주려는 의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는 방안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정답이 하나 밖에 없는 닫힌 질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성적을 올릴 수 있습니까?”와 같은 성격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정답입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율법대로 행해야 한다가 정답이므로 당신과 제자들은 율법대로 행하지 않지 않느냐고 따질 참인 것입니다. 안식일도 어기고 세리 이방인과도 교제하고 금식 구제 기도에도 열심을 내지 않는다고 비방하여서 최소한 자기들이 영적으로 훨씬 의롭고 신령하다고 증명하려는 꿍꿍이였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26절)
주님이 그 질문의 숨을 뜻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율법사의 의도를 집어내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 이 반문의 숨은 뜻은 무엇입니까? “너는 지금 율법대로 행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으면서 왜 이런 질문을 내게 하느냐? 그냥 네가 그 율법을 해석하는 바에 따라서 행하면 될 것 아니냐?” 인간 심령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대답입니다. 표현은 온유했으나 상대로 하여금 당신의 영적 권위 앞에 엎드리게 하는 내용입니다.
행위 구원이 옳다고 인정해주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숨은 진의를 정확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질문한 의도와 방식에 맞추어서 다시 묻는 랍비의 교육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이 반문으로부터 공격과 방어가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율법사는 주님을 꼬투리 잡으려 왔다가 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들켜버렸습니다.
그가 지금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구체적인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려하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예수와 제자들이 율법을 위반한 행위들을 비방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율법을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었습니다. 율법의 전체적인 뜻과 주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토론의 주제를 율법이 규정하는 개별적 행위에서 율법을 제정하신 뜻으로 바꿔버렸습니다.
만약 주님이 “율법에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기록되었느냐? 그럼 그대로 행하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율법사는 첫마디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습니다”라고 답한 후에 “그런데 선생과 제자들은 왜 안식일을 안 지킵니까?”라고 따질 참이었던 것입니다. 저자 누가가 본문 서두에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라고 분명히 밝힌 후에 이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율법을 네가 어떻게 읽느냐?”는 율법의 전체 주제에 대한 질문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법체계로 따져 헌법에 해당되는 것은 십계명입니다. 알다시피 십계명의 전반(1-4계명)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후반(5-10계명)은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바탕에서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웃도 그와 같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율법의 핵심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으니 구원에서 구체적 행위가 필수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비유하자면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것은 성적을 올리기 위한 원리인 반면에, 자습서를 갖고 새벽 한적한 시간에 노트에 적어가며 암기해야 한다는 것은 공부하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것과 같은 원리인 반면에, 겉옷을 저당잡지 말아야 하며 이자를 받지 말고 돈을 꾸어주라는 등은 구체적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두 말씀은 다시 말하지만 행위가 아닌 원리입니다.
원리는 또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온 율법을 제정한 정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라면 당연히 이웃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22:40)을 이룬다고 재확인해준 것입니다. 율법사에게 “율법을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반문하신 주님의 뜻을 정확히 아셔야 전체 문맥의 흐름도 정확히 짚을 수 있습니다.
율법사의 대답(27절)
다행히도 율법사는 주님의 그 질문에 정답을 말했습니다. 율법사답게 십계명을 온전히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대답을 할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는 그 뜻대로 즉,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그런 확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밝혀주실 것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나는 십계명도 잘 지키니까 믿을 필요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인간관계를 규정한 수평적 계명(5-10)들을 위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 잘하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한 적도 없으며,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고 검소하게 절제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윤리적으로 큰 하자가 없고 최소한 평균 이상의 선함은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형제를 말로 바보라고 비방해도 살인한 것이며,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말입니다.(마5:22,28)
나아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며 그 나오는 것들이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등이라고 말했습니다.(마 15:15-20) 사람이 외부 여건이나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 행동으로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죄인이기에 말과 행동으로 죄를 범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들이 바로 십계명의 인간관계 계명을, 불신자들이 잘 지키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위반하는 죄입니다. 거기다 십계명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탐심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죄의 본질이 아니라 마음이 죄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근원은 바로 첫째 계명을 위반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주인을 섬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그래서 동일한 의미의 첫째와 열 번째 계명으로 괄호처럼 앞뒤에서 묶은 셈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기에 탐심이 생기고 그래서 다른 여덟 가지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에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결국 돈이라고 주님은 강조했습니다.(마5:24)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의 이런 구조와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죄가 무엇인지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본 홈페이지의 출애굽기 강해설교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모든 인간은 십계명으로 구원받는다.”(출애굽기강해 #41 / 출20:1-17)를 참조하십시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 그분의 자녀가 되는 뒤집어짐이 있기 전까지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는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수준도 제대로 못 지킨다고 선언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 그분을 모르기에 십계명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고, 그래서 그분은 더더욱 믿을 필요 없다고 고개를 쳐드는 것입니다.
본문의 율법사도 자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도 온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윤리적인 측면에선 오늘날 불신자들의 십계명에 대한 반응과 동일합니다. 최소한 평균 이상으로 선하다는, 율법사의 경우는 아주 상위에 속한다는,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주님 보시기엔 그만큼 큰 교만과 죄가 없었습니다.
평균 이상으로 선하다고 자부하는 것은 자기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자기 눈에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자들은 모두 지옥 가서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은 의인이고 남들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이 절대로 품어선 안 되는 탐심입니다. 또 십계명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 즉, 성전 중앙에서 하나님의 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고개를 쳐드는 바리새인 같은 자들은 외면합니다. 스스로는 탐심을 도무지 절제하지 못하기에 태생적인 죄인이오니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소원한다고 간구하는 세리의 기도에는 귀를 기울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주님의 반응(28절)
율법사가 주님이 바라는 정답을 맞혔지만 이제부터 주님이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 가실지 전혀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얄팍한 종교적 지식만으로 무장한 율법사의 교만과 무지는 너무나 컸고 그와 동시에 인간과 하나님과의 차이도 그 이상으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맡은 일이 율법 연구인만큼 율법의 뜻은 알았으나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너무나도 초라한 영적 실상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정답을 맞혔다는 것은 주님이 지금부터 비유로 드러내려는 사랑과 구원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의 맥락 안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온 셈입니다. 주님을 비방하러 왔지만 자신의 영적 가난함은 물론 윤리적인 죄마저 살아 역사하는 말씀에 의해 여지없이 주님 앞에 벌거벗겨져 드러날 것입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주님의 대답은 너무나 쉽고도 간단했습니다. 율법이 말하는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옳다고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행하라고”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원리이고 실제로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한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율법대로 탐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순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전혀 섬기지 않는 참 믿음을 소유한 자의 사랑입니다. 또 그런 사랑을 하는 자는 당연히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믿음을 소유한 즉, 이미 구원을 온전히 얻은 참 신자만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지할 것은 그런 사랑을 전혀 할 수 없었고 알지도 못하던 상태에서 구원 후로는 가끔이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지 매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율법사가 사랑을 아주 쉽게 생각 판단했기 때문에 주님도 그에 맞추어 아주 쉽게 대답해준 것입니다.(지금 주님과 율법사 간의 대화 진행이 시종일관 그러합니다.) 율법사는 자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하고 있으니 나는 살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자기 믿음대로 따지면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 영생의 길을 물어봤기에 주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이 간단한 주님의 반응을 정확하게 풀어쓰면 이렇게 됩니다.
“네가 율법을 정확히 알고는 있구나. 그럼 그 아는 대로 실제로 실천해 봐라.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해봐라. 네가 지금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율법을 제정한 하나님의 더 근본적인 목적은 다르다. 십계명의 마지막 탐심을 갖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정확한 뜻을 안다면 함부로 사랑하고 있다고, 나아가 율법을 실행하고 있다고 아니, 알고 있다고 큰소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도 제대로 못하고 율법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지금 율법을 제정한 나에게 와서 감히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따질 작정이냐?”
주님은 지금 율법사의 믿음이나 그 믿음의 실천이 옳다고 인정해 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정반대였습니다. “율법의 뜻은 맞추었지만 어느 누구도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정말로 율법대로 실천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실제로 이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구원 받을) 수 있는 방안은 다르다. 이제 곧 비유로 말해주겠다.”
이 율법사의 율법에 대한 또 불신자들의 십계명에 대한 오해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울의 선언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의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 실제로는 “이를 온전히 행할 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율법으로 살 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율법사가 너무나 당당하게 따져드니까 그의 생각과 태도에 맞추어준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럼으로써 당신께서 의도하신 대로 이 토론을 이끌고 가시는 중입니다.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주님의 그 말씀이 본문의 율법사에겐 부정적인 의미로 적용되었지만 구원을 얻은 신자에겐 말씀 그대로 긍정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 불신자는 주님 말씀대로 온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으나 신자는 그런 참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마음 밭이 거듭 났고 성령의 인도에 따르면 실제로 실현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성실히 실천하라는 권면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사의 헛된 자부심 (29절)
주님의 너무나 간단하고 쉬어보이는 답변에 율법사는 이제 한껏 신이 났습니다. 그의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헛된 자부심은 물론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음흉한 의도가 이어지는 질문에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쭈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율법대로 하나님을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도 그만큼 잘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행하고 있으니 영생을 얻은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라고 겸손히 대답하고 그쳤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주님을 시험하려고 덤빈 것이 아니라 정말로 구원의 길이 궁금해서 물은 꼴이 됩니다.
율법사는 어떻게 하든 주님과 제자들의 잘못을 꼬투리 잡아야만 합니다. 어쩌면 그는 주님이 바로 그 대답을 해주길 바라고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첫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주님의 그 대답을 듣고서 주님에게 이제 올무를 걸 기회가 왔다고 섣불리 판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이웃 사랑을 잘하지만 예수와 제자들은 이웃 사랑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사탄의 계략에 진 것 같은 모습이지만 주님은 그마저 들어 사용하여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을 온전하게 실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도록 모든 상황과 사람들을 주관하신데다, 사탄은 주님이 죽음으로써 죄인을 구하는 사역이 끝날 줄 알았지만 주님은 부활함으로써 그 흉계를 완전히 깨트렸습니다. 도리어 구원의 길을 완벽하게 완성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율법사는 자기들은 이웃 사랑을 잘하고 있지만 예수와 제자들은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했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고 정반대가 옳다고 지적할 참입니다.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물은 까닭은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 동족만 이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끼리 서로 사랑했지만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사랑할 필요가 전혀 없고 상종 교제마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들 동족 중에도 로마의 앞잡이라고 보는 세리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저주 받아 지옥 갈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반면에 주님과 제자들은 세리, 창녀, 과부, 고아, 불치병자, 불구자, 귀신들린 자는 물론 이방인과도 식사 교제를 하며 영혼과 육신 모두를 치유해주었습니다.
이 율법사의 관점에선 자기들은 이웃(유대동족) 사랑을 아주 잘하고 있으나 예수와 그 일당은 하나님의 대적과 어울려 다니느라 이웃 사랑을 오히려 잘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밝혀줄 것입니다. “이웃이 누구인지, 진정한 이웃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나아가 구원을 얻는 길은 무엇인지”가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추적해야 할 과제들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은? (3)
예수님의 비유와 그 해석법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절씩 살펴보기 전에 먼저 비유해석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특징은 당시 랍비들의 교육방식이기도 했지만 당신만의 고유하고도 적절하면서 아주 예리한 비유(parables)를 많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4,35) 창세로부터 감춰진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경륜에 관해서 정확히 계시하기 위해서 특유의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들은 자들에겐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0-13)
같은 비유를 들어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택하여 은혜를 베푼 순전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정확히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구원 안에 들어올 수 있으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주님에 대한 거부 적대감을 갖고 들으면 전혀 깨닫지 못하여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주님이 말씀하신 이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한쪽은 그 내용이 선행을 독려한 것이기에 행위 구원을 강조한 비유라고, 다른 쪽은 오히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구원을 계시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는 실화나 예화나 간증과는 다릅니다. 전하고자 하는 어떤 진리를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사물, 사안, 관습 등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는 수사법입니다. 따라서 비유 자체는 전하고자 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정작 진리는 따로 있고 비유는 그 진리를 정확하고도 실감나게 이해시키는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비유를 통해 진리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기에 전해질 진리도 아주 단순 명확한 한두 가지로 제한됩니다.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른다.”는 한국 속담으로 비유의 기능을 설명해보겠습니다. 기억 자의 모습은 바로 낫과 같습니다. 낫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사물로 한글 철자법을 몰라도 낫을 보면 기억 자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낫이라는 비유의 역할은 사람들로 기억 자의 형상만 알게 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낫이 칼날과 나무자루로 구성되었고 칼과 나무의 소재는 어떤 것이라는 등을 설명하려는 의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비유를 해석할 때는 비유가 밝히 드러내고자 하는 한두 개의 진리에만 주목해야 합니다. 비유 자체의 구체적인 설명에 묶이면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전에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모든 구절과 단어와 숫자 하나하나에까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한 해석법이 성행했습니다. 전문용어로 우의적(寓意的 allegorical) 해석법이라고 하는데,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한두 개의 진리에 주목해야 하는 비유에 그런 해석법을 적용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16:1-13)에서 청지기가 행한 일은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주인의 재물을 훔친 죄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비유에서 그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인정하고 주인도 그를 칭찬했다고 말합니다. 마치 주님이 신자더러 그렇게 따라하라고 권면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주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진리는 “장래의 심판을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장래를 잘 대비한 자의, 또 신자의 재물관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반의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뿐입니다. 그 청지기가 행한 일이 선하고 지혜로우니 그대로 본받으라는 의미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비유해석법을 잘 몰라 한두 가지 진리에 주목하지 않고 각 구절 하나씩 세부적으로 이해하려 했기에 그런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은 그 비유를 듣는 사람들로선 너무나 쉽게 이해되는 아주 익숙한 관습이었습니다. 당시 부재지주(不在地主)들이 많았는데 그런 부자들이 청지기에게 자기 재산 관리업무를 완전히 일임했습니다. 쉽게 말해 주인의 인감도장을 갖고 상업적 계약을 자기 임의로 체결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비유는 당시의 관습과 문화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서 화자가 강조하려는 한두 가지 주제에 주목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오래 동안 각 단어마다 신령한 의미를 부여하는 우의적 해석이 주를 이뤄왔지만 그래선 주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 율법사가 나눈 대화를 앞에서 살펴보면서 내린 결론이 바로 주님이 이 비유로 강조하려는 주제입니다. 그대로 다시 인용하자면 - “이웃이 누구인지, 진정한 이웃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나아가 구원을 얻는 길은 무엇인지”가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추적해야 할 과제들입니다.
벌어진 상황 (30절)
주님은 먼저 세 부류의 사람들이 대조되는 기본 상황을 설정했습니다. 비유는 다시 강조하지만 실화, 예화, 간증이 아니라 실제로 흔히 일어나는 사안을 바탕으로 지어낸(fiction) 이야기입니다. 생활권이 같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들으면 너무나 익숙하여서 금방 머리에 그림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반죽음의 상태로 길가에 버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인적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두 가지 거의 확실한 사항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일단 성전에서 제사나 절기를 지내고 거주지인 여리고로 내려가는 자입니다. 그럼 유대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를 도운 사람을 주님이 구태여 사마리아인이라고 밝혔으니 그와 대조되는 유대인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때에 철저히 진멸하였고(수6장) 하나님이 다시는 도시를 건축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수6:26)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폐허가 된 구 성읍과 별도로 신시가지를 건설하여 아주 번창한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약 36킬로 떨어져서 제사장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강도당한 사람이 유대 제사장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고지대이고 여리고는 저지대인데다 남쪽에 위치했기에 내려가는 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가파르고 길가에 바위들이 많아 강도들이 자주 출몰했다고 합니다. 강도가 노렸다면 피해자가 종교 권력으로 부를 축적한 자일 수도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그의 민족적 사회적 경제적 신분을 전혀 밝히지 않았습니다. 영생의 길 즉, 주님이 구원을 베푸심에는 그런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그를 도와준 이는 사마리아인이라고 강조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방족속과 혼혈인데다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유대인들이 상종도 않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이웃일 수 없으므로 지금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문고 있는 율법사가 사랑을 전혀 베풀지 않았던 자이기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반응 (31.32절)
강도가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고 말합니다. 길가에 버려진 시체나 방불합니다. 율법이 부정한 것을 접촉하지 말라고 명하기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더더욱 그래야합니다. 그 둘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하니까 언뜻 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도 당연히 레위 지파인데 구태여 둘을 구분한 이유도 둘일 것입니다. 제사장은 제사직무를 맡는 반차가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지내고 온 자를, 레위인은 반차가 아니라 쉬고 있는 제사장을 뜻할 수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제사장은 성소에 출입할 수 있는 자를, 레위인은 성소의 일반 봉사를 맡은 자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둘 다 율법에 능통하고 방금 성전 안팎에서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시체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반 죽은 것”이라고 즉, 아직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럼 만지지는 않더라도 가까이 가서 생사여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완전히 죽지 않았다면 만져도 괜찮을 뿐 아니라 마땅히 만지면서 응급조치를 취해주어야 합니다.
설령 완전히 죽었다 쳐도 최소한 신분을 확인하여서 가족이나 친척을 수소문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또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면 아무 연고가 없는 시체라도 유대인이기에 더더욱 다른 이들을 시켜서 정식으로 매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아예 가까이 가지도 않고 그냥 슬쩍 보고는 현장을 피해버렸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33.34절) 응급조치를 해주고 성심껏 도와주었습니다. 동일한 맥락의 비유이므로 이 두 사람은 “그를 보고 전혀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자신의 시간과 경비가 들어갈 것이 귀찮고 싫어서 아예 멀리 떨어져 피해 가버렸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피해자가 유대인, 그것도 혹시라도 제사장인데도 피해버렸다면 그들은 도무지 비할 데 없는 위선자들입니다. 율법에 능통하고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을 열심히 잘 한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 상황을 지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백성들에게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주님이 저주한 대로 회칠한 무덤 같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강도들이 근처에 숨어 있을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는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두려움을 느꼈을 사마리아인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미 주변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오직 귀찮고 자기가 희생하는 것이 싫다는 한 가지 이유로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큰 고난을 겪고 있는 동족을, 그것도 자기들이 반드시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여기는 자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장례는 치르도록 해주어야 함에도 인간으로써의 기본 도의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비유를 들은 율법사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바로 자기를 빗대어 말한다고 금방 감을 잡았을 것입니다. “네가 이웃 사랑에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는데 과연 그런지 잘 따져 보라?”는 주님의 음성이 가슴을 파고 들었을 것입니다. 율법사는 제사장과 레위 출신은 아니라도 율법을 잘 알고 그대로 가르치는 유대교 지도자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비유에서 율법사라고 지칭 안한 것만도 그의 얄팍한 자존심을 배려해준 셈입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눅6:32)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유대인들이 동족들만, 특별히 자기들 동료들끼리만 유별난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행할 참 사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정도의 사랑은 죄인 즉, 이방인들도 잘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당한 자에게 보인 반응은 동족조차, 그것도 같은 직분의 동료일 수도 있음에도, 전혀 사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뜻은 이웃을 같은 동족으로 한정 짓는 것도 틀렸으며, 자기들을 사랑해주는 동족과 동료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않지만 그 정도 사랑을 하고선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고 제발 착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야기할 사마리아 인이 행한 이웃 사랑과 잘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은? (4/완) - 사마리아인의 선행
불쌍히 여기다. (33절)
주님은 비유의 주역을 “어떤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합니다. 강도당한 자는 물론 제사장과 레위인의 신분과 대조시키려고 주님은 사랑을 베푼 자를 분명히 사마리아인이라고 지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동족인 유대인만 이웃으로 삼아서 사랑하는 잘못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또 율법사가 율법을 잘 알고 그대로 따르기에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얼마나 큰 교만이자 죄이기까지 한지 깨우쳐주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처럼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죄인으로 취급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그들은 사마리아 지역 근처를 여행할 때에 그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지름길일지라도 일부러 우회할 정도였습니다. 주님과 대화 하고 있는 율법사의 이웃 사랑에선 아예 제외된 사람들입니다.
율법사와 같은 신분과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실상 주님이 율법사를 지칭한 것임, 강도당한 유대인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자신들이 천국에 일등으로 입장한다고 큰소리 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들 생각에는 천국의 반대편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야 마땅한 사마리아인이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주님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를 멸시 천대 상종도 않는 그 유대인을 말입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 것과 정반대입니다. 그의 근본 심성이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봐도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던 것이 확실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를 향한 긍휼한 마음이 있었기에 잠시 멈춰 서서 주의 깊게 관찰했더니 죽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 종교인들은 아예 귀찮았거나, 시체라고 미리 단정 지은 것입니다. 첫째 이유라면 다른 이에 대한 긍휼한 심성은 물론 관심도 없었다는 뜻이며, 둘째 이유라면 장사 치러주어야 한다는 일말의 양심도 없이 오직 종교적 문자적 계명에만 묶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종교 계명을 형식적으로라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잘못된 구원관을 소지한 탓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이웃은 가장 사랑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가까이 가서 밤새 돌봐줌 (34절)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사마리아에선 비록 다른 성전에서 우상에 제사하긴 했어도 여전히 모세 오경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대로 실천하려 했습니다.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는 유대 제사장이나 율법사와 다를 바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가까이 간 것은 거반 죽었을 뿐이기 때문에, 아직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짐승에 태웠다”고 합니다. 시체는 짐승에 태울 수 없습니다. 시신을 짐승에 완전히 묶던지 다른 탈 것에 태워서 짐승이 끌어주어야 합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맸습니다.” 당시는 올리브유와 포도주가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자기 겉옷을 찢어 싸매어서 상처에서 더 이상 출혈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겉옷은 알다시피 아주 비싼 것입니다.
나귀나 말을 타고 여행하며 기름과 포도주를 상비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과 신분의 사람입니다. 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 천대를 받기에 아무래도 유대 지역 여행을 꺼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행 중이라는 것은 아주 위급하거나 중요한 용무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모든 것을 희생하며 자기 몸처럼 피해자를 돌보고 있습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이튿날에서야 볼일 보러 떠났습니다. 밤새도록 곁에서 돌보며 간호했다는 뜻입니다. 피해자가 거반 죽었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으니까 생명에는 완전히 지장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로 여행 중이었기에 만약 그가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지나쳤더라면 구태여 주막에 묵을 필요 없이 목적지로 바로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 시간과 경비를 아낌없이 희생하며 사랑한 것입니다.
비유의 초점은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유대인을 모든 것 희생하며 사랑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율법사에게 상황을 바꿔서 생각해보라는 뜻을 비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당해 거반 죽은 것처럼 길가에 버려져 있을 때에 과연 네도 비유의 사마리아인처럼 그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그런 식의 사랑을 해왔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전혀 아끼지 않음 (35절)
자기 시간과 돈을 써가며 밤새 강도당한 자를 돌본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이튿날”에도 동일한 모습으로 실현됩니다. 참 사랑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가감 수정 왜곡 포기가 없는 사랑입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럼 스스로 혹은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 가족이나 지인에게 연락하여서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도 칭찬 받아 마땅한 선행이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처음 여행하려 했던 목적지에 가서 그 업무를 다 마치고 다시 그 주막으로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주인더러 계속해서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말합니다. “데나리온 둘”을 그 비용으로 우선 지불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일 품삯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돌아온다면 비용의 두 배를 지불한 셈이고, 혹시 그날 안에 못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면 미리 2일치 품삯을 다 지불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약속합니다. 더 늦어질 수 있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은 걱정하지 말고 그 사람을 최선을 다해 정성껏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한 것입니다. 주막 주인도 사마리아인이 밤새 간호하는 모습이나, 이일분의 품삯을 미리 주는 것이나, 옷을 입은 모습과 짐승을 타고 여행하는 등등 모든 말투 행색에서 아주 신뢰가 가고 존경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돌아올 때까지 경비에 상관 말고 최대한으로 간호해주라는 것은 사마리아인이 끝까지 그 자를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사랑이란 다른 이를 단순히 궁핍에서 구해주고 위급한 상황에서 건져내주는 차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응급조치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행해야 합니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가축도 건지는데 같은 인간이 죽어 가는데 인간이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안식일이라도 반드시 살려주어야 합니다.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이라 안식일일 가능성도 다분합니다.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려는 항목 중에 하나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잘못이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것까지 감안하여 비유를 풀어가는 중입니다.
참 사랑이란 단순히 응급조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생명을 완전하게 살려내는 데까지 가야합니다. 최소한 이전과 동일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시간 경비 모든 것을 희생 수고하면서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자기는 죽고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 땅에서 행했던 사랑과 동일한 모습의 사랑을 하라고 합니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정확하게 그대로 행하고 있음을 봅니다. 당신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생생한 그림 언어로 보여주고 있는 중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이라고 해서 손쉬운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당시는 원수를 갚는 것이 최선의 정의였음에도 갚지 말라고 말합니다. 또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을 위해선 죽도록 사랑합니다.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어떤 희생과 수고도 감수합니다.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라고 율법은 명하고 있습니다. 자기 시간과 돈이 없어질 것 같으니 멀리서 피해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을 어긴 셈이고, 사마리아인은 율벌대로 그들과는 정반대의 사랑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새로운 정의(定意) (36, 37절)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도 사랑하라고 답했고,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물은 숨은 의도는 당연히 “예수와 그 제자를 그르게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는” 것입니다. 자기는 참 이웃인 유대인들을 사랑하지 죄인인 이방인과 율법을 어긴 자들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가 하는 사랑은 사랑축에도 들지 않고 누구나, 그중에는 이방인이나 세리도 일상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며(마5:46-48),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참 사랑이라고 산상수훈에서 이미 가르쳤습니다.(마5:44)
그리고 지금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유대인들의 이웃 개념이 얼마나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 큰 죄인지 생생하게 밝히는 중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웃은커녕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이, 자기들에게 원수가 되는 유대인을 끝까지 스스로 책임지고 살려주었습니다. 율법사에게 적용하면 자기의 원수인 자가 도리어 그의 원수인 자기를 사랑해준 셈입니다.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이 지금 율법사가 던졌던 질문의 형식을 완전히 반대로 바꾸어 그에게 던졌다는 점입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는데, 주님은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웃을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너를 좋아하는 자만 이웃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셋 중에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일 수밖에 없으며 나머지 둘은 아예 이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사랑의 섬김이 필요한 자는 강도당한 자인데 유대인들은 그를 피해갔으니 아예 사랑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은 것입니다. 감히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 앞에 사랑을 논할 자격조차 없는 자들입니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자를 멀리 했으니 역으로 따지면 죽음으로 몰아넣는 살인자요 피해자인 유대인에게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이 얼마나 정성껏 질적 양적으로 섬기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그것도 제사장 레위인 율법사 같은 영적지도자와의 극명한 대비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의 사랑을 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상대가 어떤 인종 나라 종교 문화 언어 등을 지녔든지 즉, 인간세상의 객관적인 기준에 전혀 구애 받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충분한 도움을 끝까지 주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웃 사랑일 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그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유대 지도자들은 오직 율법을 소지한 동족으로써 그것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자만 이웃이라고 여기고 그들만 사랑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또 그것이 진리이고 영생의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당한 유대인의 이웃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외모로 차별하는 것은 자기의 인간적 공로와 의를 내세워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뜻일 뿐 아니라 그에 못 미치는 자들을 멸시 비방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우열만 가린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 중에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인간이 인간을 정죄까지 했습니다. 그 중에는 안식일에 일하고 먹고 마시며 죄인과 교제하는 예수와 제자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악한 생각을 가진 자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밖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율법사의 악한 생각을 완전히 까뒤집어서, 선언하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서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의 그런 점을 인정하고 또 칭송했습니다.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눅20:21) 대제사장이 보낸 정탐꾼이 예수를 모함하려고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눅20:20) 찾아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한지 물었습니다.(22절)
사람을 외모로 취해선 안 된다는 것도 이미 율법에도 규정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신10:17) 먼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전제합니다. 그리고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16:19) 당신의 백성들도 그렇게 하되 특별히 재판관이나 지도자들이 그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재판관을 겸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관원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보고 차별 대우하며 뇌물을 받아 치부했습니다.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강도의 굴혈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율법에서 이미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잊고 눈이 어두워졌고 그들의 말도 굽어졌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으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신자들은 외모에 차별 없이 은혜로 불려 나온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 하노라.”(고후5:16) 신자들은 본문의 사마리아인처럼 외모에 차별하지 않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생을 얻는 길 (37절)
율법사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너무나 쉬운 예수님의 질문에 사마리아인이라고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권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종결됩니다.
그가 그 후에 어떻게 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완전히 쇼크 먹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믿거나 인정했을 리는 없습니다. 성경이 침묵한다는 것은 그도 침묵했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선 도무지 대꾸할 말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틀렸을 수 있다고 잠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도리어 주님에 대한 분노 적개심이 더 솟아올랐을 것입니다.
원죄로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은 자기는 의롭다는 믿음인지라 자신의 잘못을 정죄 받아서 고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로 타이르고 진리를 가르쳐서 사람이 변하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항복할 것이면, 주님이 구태여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완전한 대속 제물로 죽을 필요나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무 말씀 않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신 것 자체가 인간은 말로 알아먹을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과 이웃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본문에선 아예 그런 사랑을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전제했고 결론으로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영생의 길을 물어온 율법사에게 마지막에도 너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유에선 두 부류의 사람으로, 또 이웃의 종류와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까지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럼 단순히 이웃을 사랑한다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도 영생을 얻는 길과 그렇지 못한 길 둘로 나뉜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해야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최고 정성의 사랑이 아니라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원수까지 자기를 다 바쳐서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관건은 얼마나 희생적이냐를 떠나서 무엇보다 상대를 전혀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웃의 범위를 정해선 안 됩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무조건 섬기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랑을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즉, 여전히 행위구원도 옳을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 받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 하에 태어난 자연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사랑입니다. 불신 세상에선 원수를 갚는 것이 아주 고급한 정의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쳐서 나라의, 개인적이지 않는, 원수를 갚는 일이 최고의 선이 됩니다.
비유의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제가 다시 비유하자면 원수인 나라와 한창 전쟁 중에 상대 군사를 살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사이가 그랬습니다. 한국인이 곤경에 처한 일본인을 요즘 같은 평화 시기가 아닌 강점기에 엄청난 핍박을 받으면서 자기 모든 것을 희생하며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셈입니다. 안중근이 이또 히로부미를, 거꾸로 이또히로부미가 안중근을 자기 목숨까지 바치며 사랑한 셈인데 인간 세상에선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아가페 사랑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전 인류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대속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으로서 모든 이를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모두가 당신께서 지으신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당신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마저 저들이 자기가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인간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격할 수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정죄만 있지 구원이 가능한 것이 아님을 율법을 제정한 분으로써 너무나 잘 아시기에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는 은혜를 베풀어 구원을 주시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주님은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이미 전제해놓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원수까지 사랑하여 율법의 의를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그분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면 비로소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이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고 초대 교회 안에는 자유자와 노예, 남녀귀천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형제 자매였습니다.
결론과 첨언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추적해야 할 과제는 셋이라고 서두에서 밝혔습니다. “1) 이웃이 누구인지, 2) 진정한 이웃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3) 나아가 구원을 얻는 길은 무엇인지” 이제 그 답은 밝혀졌습니다.
1) 이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자들입니다. 특별히 어떤 객관적 조건에도 구애 받으면 안 됩니다. 2) 외모로 차별하지 않기에 원수까지 자기 전부를 바쳐서 끝까지 책임지며 섬겨서 내가 죽더라도 상대를 살리는 것이 신자가 행할 참 사랑입니다. 3) 구원을 얻는 길은 율법을 지켜서 이웃 사랑 같은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서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또 그런 자만이 비로소 참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소망을 갖게 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조금씩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읽는 모든 신자들은 단순히 최대한 이웃을 사랑해야지 다짐 실천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진지하고도 엄밀하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봐야 합니다. “나도 이웃을 내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정한 후에 내 방식으로만 사랑하고 있지는 않는지? 또 그러면서 어쨌든 성의껏 그 이웃을 섬기고 있으니 나도 믿음이 좋은 신자라고, 천국 가기 합당한 자라고 자랑 내지 자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심각하고도 철저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나아가 과연 주변의 이웃들, 아니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의 참된 이웃이 되어 있는지를 더 심각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자기 의를 앞세우거나, 신자라는 의무감으로 형식적으로 섬기지는 않는지, 대신에 모든 이를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정말로 순전한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나를 어느 때나 아무 부담 없이 주저하지 않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최소한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자가 되어 있는지를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위에서 잠간 언급했지만 동일한 비유를 두고 구원과 심판으로 나뉜다는 주님의 경고에 주목해야 합니다. 비유의 내용은 어려울 것 하나 없습니다. 율법사도 정확히 이해하고 주님의 질문에 정답을 댔습니다. 오늘날도 비유에서의 사건의 전개와 주님의 마지막 질문을 이해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는 행위구원을, 어떤 이는 은혜구원을 강조하는 비유라고 해석을 달리합니다. 참으로 오묘하지 않습니까? 이런 비유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지어낼 수 있는 비유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래서 비유를 듣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도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바꾸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자는 비유를 정확히 깨닫고 구원의 은혜 안으로, 그러지 못하고 대적하는 자는 반대의 결과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대적한다고 본문의 율법사처럼 시험하여 죽음에 넘길 꼬투리를 잡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 그분이 누구인지, 그분이 행하신 가르침과 사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내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러 온 구세주로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것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를 부인하고 지금도 인간이 취하여 행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따로 있으리라 생각해선 안 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 비유를 행위구원이나 선행을 강조하는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컨대 사마리아인의 비유만큼 예수가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을 믿어 십자가 대속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정확히 그림 언어로 가르쳐 주는 비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3/1/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