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35가 행위구원을 가르치는가요?

 

[질문]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어떤 이가 이 말씀을 행위구원의 근거로 내세우던데 어떻게 대해야하나요?

 

[답변]

 

망치로 얻어맞은 니고데모

 

행위구원과 은혜구원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는 예수님이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밤중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구원의 길을 물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관원이었기에 틀림없이 율법을 잘 준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처형하고자 공회가 열렸을 때에도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요7:50)라고 반대 의견을 내었습니다. 아주 합리적이면서도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로선 행위에 가장 하자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행위로 구원을 줄 것 같으면 제일 먼저 천국에 입성해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뭔가 영적으로 갈급하고 허전해져서, 쉽게 말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와 신앙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표적을 보였기에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잘 알다시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성품에서 이런 저런 결점을 고치라거나, 사회적 선행의 질과 양을 늘리라거나, 종교적 의식과 관습에 더 신령하고 경건해지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영적갈증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려는 방안을 알고 싶었던 그로선 분명히 자기 부족을 보충하고 결점을 고치라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전혀 엉뚱하고 이해도 안 되는 대답에 머리에 꽝하고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다시 설명해주었습니다. 구원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므로 구원에서 인간이 관여할 측면은 전혀 없습니다. 성령님의 선도적, 주도적, 능동적, 절대적인 역사가 한 죄인의 영혼에 임해야만 합니다.

 

성자 하나님으로 구원을 베풀어주러 오신 예수님이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구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행위구원은 인간의 행위를 평가하여 합격점수에 든 자만 구원을 주는 것이므로 구원 후에도 그 점수에 미달하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은혜구원은 도무지 합격점수에 미치지 못하는 죄인을 은혜로 구원 주셨기에 구원은 당연히 취소되지 않으며 신자는 그 은혜에 보응하여 행위를 거룩하게 해야만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새삼 강조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구원이 내포하는 아주 간단한 의미 두 가지를 많은 신자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위구원과 은혜구원은 서로 조화 포용될 수 없으며 하나가 옳으면 다른 것은 틀립니다. 따라서 첫째로 예수님이 단정적으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면 행위구원을 지지하는 말씀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럼 또 언뜻 그런 의미인 것처럼 보이는 말씀은 신자더러 받은 은혜에 보응하여서 행위를 올바르게 하라는 권면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시민권의 특권과 의무

 

그런데도 계속해서 행위구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이 일부 있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준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탓입니다. 자신은 성품 인격 자질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 도덕적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합격점수에 들 수 있거나 최소한 평균 이상은 된다는 아무 근거 없는 자신감의 표출입니다.

 

이야말로 자신이 그럴 수 없이 교만하다는 증거이자 하나님 앞에서조차 감히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큰 죄입니다. 성전 중앙에서 하늘을 향해 자신의 선행에 대해 보상해달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바리새인과 같습니다.(눅18:11) 그런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되어서 예수님의 철저한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위구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니까 성경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듯한 말씀을 찾아내기에 혈안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교회에서도 행세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선언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짓이자,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을 부인하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엄청난 죄가 됩니다.

 

물론 신자가 다시 죄에 빠지지 않도록 독려하려는 선한 의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구원이 선행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더 강조하고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자기주장을 지지하는 구절을 찾는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뜻과 앞뒤 문맥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찾아낸 구절도 문자적으로만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한 입으로 은혜구원 행위구원 둘이 다 옳다고 말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따라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렇게 보이는 구절은 전부 영혼이 은혜로 구원을 입었으면 그에 보응하여 행위도 거룩해지라는 권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앞뒤 문맥을 함께 잘 살피면 당연히 그런 뜻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질문하신 구절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대응되는 누가복음 판 평지설교 중의 하나입니다. 전체문맥인 6:20-49 안에서 본문을 앞뒤와  잘 연결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마태복음이 팔복강화로 시작하듯이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한다고 선언했습니다.(20절) 영혼이 가난해져야만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자가 차지할 복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국적을 취득한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시민권을 취득하면 영주권자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추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투표할 수 있고 선거에 입후도도 할 수 있지만 대신에 전쟁이 나면 국방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어느 나라도 자기국민을 추방하는 법은 없습니다. 국민은 대신에 소정의 의무를 준수해야 합니다.

 

따라서 눅 6:20 이후부터 마지막 49절까지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나라 시민이 지켜야 할 계명에 관한 것입니다. 선행 혹은 은혜 구원이냐, 은혜구원도 취소 가능한지와는 전혀 다른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행위구원을 말할 리도 없지만 짧은 설교에서 여러 신학적인 주제를 다룰 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이를 자 아무도 없다(?).

 

그래서 32-34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닌 불신자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신자의 삶의 자세에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불신자는 자기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만 사랑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너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그렇게 하지 말고 상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던 선대하지 않던 사랑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그래서 원수를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사랑하고 선대하라는 계명이 이어지는 것입니다.(35절)

 

그리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합니다. 보상을 많이 받는다고 약속한 것이지 그래야만 구원을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도 상이 크다는 것을 표현만 바꿔 더욱 강조한 것입니다. 구태여 문자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머물지 않고 왕자의 위치에 이를 만큼 보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제자들더러 조건 없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독려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36절에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에 35절을 행위구원으로 해석한다면, 살펴본 대로 문자적으로도 그런 뜻이 아님에도, 이 36절도 동일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비에 도달할 수 없기에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 합니다. 그전에 아무 조건 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할 만큼 온전한 의인도 없습니다. 니고데모도 한참 모자랐고 스데반이 성령이 임재하여 거듭났고 또 충만하게 역사한 데 힘입어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을 뿐입니다.

 

질문하신 구절에 이어지는 내용도 그러한지 살펴봅시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6-38)

 

의미의 흐름 상 ‘그러므로’로 연결되므로 37절 38절은 36절에 의해 그 의미가 제한 받습니다. 아버지가 자비한 것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또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버지의 자비를 온전히 이룰 자는 없습니다. 첫째, 그분 나라의 백성이므로 최대한 그분을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아버지가 너희가 용서해준 그 자비를 생각한다면 남들에게도 비판과 정죄를 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남을 비판도 정죄도 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것도 헤아리지 않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비판 정죄하지 않고 구원해주었으며 헤아리지 않고 은혜를 주었는데도,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면 그분의 자비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긍휼과 사랑을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 고백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또 스스로의 의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이며 사실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안 된 것입니다.

 

구태여 37절과 38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길 고집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후입니다. 온전한 사랑을 하지 않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헤아리면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에 합당한 징계를 할 것이며 은혜도 하나님이 헤아려서 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앞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약속한 반대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상이 적고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의 위치에 까지는 못 간다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구절은 행위구원도, 은혜구원 후의 구원 취소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조건 없는 선행과 사랑을 하며 거룩하게 살라는 권면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정확히 깨달은 자는 하나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스데반이 순교한 자리까지 거룩해져서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뜻입니다.

 

5/2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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