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7:8-13) 구원 받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구약성경강해 (37) / 민수기강해 (27)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취하여 내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취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민17:8-13)

 

이스라엘 후손의 불평의 실상

 

족장들의 이름을 쓴 열두 지팡이 중에 하나님은 아론의 것에만 싹과 열매가 맺히게 한 후에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계속 간직하게 했습니다. 패역한 자의 표징이 되게 하여 다시는 당신께 원망하지 못하게끔 해서 죽음의 벌을 받지 않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하자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게 되었다고 다섯 번이나 탄식했습니다.(12,13절) 방금 원망하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고라 일당의 반역 사건에서 세 번이나 끔찍한 벌을 준 것은 그만큼 그 벌을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완악함은 아주 끈질겼지만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한없이 어리석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패역하지 않고 순종만하면 죽지 않는데도 자기들 마음에 도저히 차지 않는 조치라고 항변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풍성한 인생을 보장한다고 약속했는데도 하나님께 거역했던 모습에서 조금도 진전된 점이라곤 없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들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막에 가까이 가는 자들이 다 죽게 되었다고 불평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성막에 가까이 가지만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점을 시인한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성막 중에도 지성소의 증거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지성소 안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죽지 않고 평소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섯 번이나 원망한 것은 성소에 가까이가지 못해 못내 아쉽다는 뜻입니다. 레위 지파만 성소의 직분을 맡은 것에 대해 불만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자기들도 성소를 섬기는 직분을 맡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목사가 못 되어서 안달복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목사를 그저 시켜준다고 해도 손사래 치며 사양할 텐데 참으로 의아합니다.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은 짐승 제물을 죽이는 피의 제사를 주관하고 성막 도구나 집기의 설치 운반을 지휘 감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이 얼마나 성가시고 번잡한지 그 다섯 번의 불평에 바로 이어서 다시 18,19장에서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어이 그 일을 자청해서 하려는 뜻은 간단합니다. 앞으로도 여호와에 대한 신탁이나 기도는 모세와 아론이 주관할 것이며 여호와도 이미 내린 광야 방황의 벌을 취소할 리는 없습니다.

 

지금 단계에선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당장에 거역하여 행동으로 옮기려는 의도까지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 이후로 언약궤를 잘못 다룬 적은 있어도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직접적인 반역은 없었습니다. 다섯 번이나 죽게 되었다고 탄식한 그대로 자기들 인생에 허망한 죽음 말고 남은 일이라곤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서 아무 재미도 의미도 가치도 없이 죽는 것이 너무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잘못

 

그들이 다섯 번이나 그런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순전하고도 완전한 항복과 헌신을 하는데 다섯 번이나 불평할 정도로 계속해서 장애가 되는 것이 그들 속에 하나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또 바로 그것 때문에 광야를 사십 년간 방황하는 형벌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하나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나 신앙상의 의문이 생기면 우리 자신에게 비추어보면 쉽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할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현재 내가 처한 상황과 사건에서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 헌신하는 데에 방해되는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그 장애가 여럿이면 그 중에서도 “하나님 이것 하나만은 마지막까지 포기 할 수 없으니까 제발 제 사정 좀 봐주시면 안 됩니까?”라고 여겨지는 것 하나로 줄여보십시오. 그럼 무엇이 남습니까? 단 현재 살펴보고 있는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야에서 거역하여 광야 방황의 벌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어른 신자의 경우 하나님께 충성하는 데에 끝까지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지 추정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 답은 쉽게 하나로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바로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도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연약한 부모들인지라 자식들 때문에 계속 이러는 것입니다. 성경도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음을 이미 배웠습니다. 그들은 가데스 바네야에서 불순종함으로써 광야 방황의 형벌을 받게 되었었습니다. 그 반역의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를 그들 스스로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3)고 밝혔습니다.

 

물이 없고 고기가 없다고 계속 불평한 것도 실은 그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애굽에서 나올 때에 많은 가축 떼를 몰고 나왔습니다. 가축들도 굶어 죽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보다는 오래 견딥니다. 정말로 급하면 가축의 젖을 마시고 마지막에는 짐승을 죽여서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며칠 전 한국 TV에서 한 여성 북한 탈북자가 몽골 사막을 걸어서 통과할 수밖에 없었는데 물이 완전히 떨어지자 나중에는 자기 오줌을 받아 마셨다고 증언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식이 죽어가는 데에 가만히 손 놓고 있을 부모는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최악의 경우에는 부모들이 자기들은 죽더라도 자기들 소변으로 아이들에게 마시게 해야 합니다. 지금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삭막한 광야를 계속해서 사십 년간 방황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은 선한 일로 하나님이 그 때문에 벌 내리거나 야단치는 법은 없습니다. 그들의 사정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가 그런 극한상황일수록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보호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홍해를 가른 분이 광야로 이끌어 들였다면 뭔가 대책이 다 있을 것이라는 아주 간단한 이성적 판단 추측 기대도, 최소한 그런 소망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생은 때로 광야 길을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만 붙잡아야 함에도 이스라엘은 정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보호해주셨던 지난 체험조차 까마득하게 잊었습니다. 먹고 마실 것이 전혀 없어도 반석에서 생수를 내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며 경작하는 땅이 아니라 하늘과 바위에서 먹고 마실 것을 주신 것은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해 들일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임을 극상품 포도를 통해 그들에게 확인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처자들이 사로잡힐 것만 걱정하며 노골적으로 불순종하자 광야의 형벌을 내리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라고 했습니다.(민14:31) 너희가 염려하는 아이들은 반드시 내가 보호하여서 그 극상품 포도를 맛보게 해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난 참 뜻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자리에서 진멸하지 않고 광야 방황의 벌을 내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이방 족속들 앞에 당신의 영광을 세우라고 간곡히 기도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부모들이 다 죽으면 그야말로 자식들을 돌볼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자식들을 더 염려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너희들 목숨을 사십년 간 연장시켜 줄 테니까 그 기간에라도 자식들에게 신앙 교육만이라도 제대로 시키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처럼 조금만 힘들고 불편하면 당신에게 원망하는 잘못만은 절대 범하지 못하게 하여 너희 자식들이라도 죽음의 형벌을 면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그런 뜻이 아주 생생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고 증거궤 앞에 두라고 하면서 어떻게 경고하셨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민17:5)하고, 또 패역한 자의 표징이 되게 하여 원망을 그치게 하라(민17:10)고 했습니다.

 

후손이나 표징 둘 다 자식의 신앙교육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두 경고 다 바로 자식 신앙을 바로 세워주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아론의 지휘권을 계속 걸고 넘어갔지만 사실은 자식들 걱정에 사로잡혀 모든 판단이 흐려졌고 이 간단한 경고마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자식이 자기들의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종교적 제의에 관한 율법을 어긴 죄 때문에 벌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도덕적 종교적으로만 접근 해석 적용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비추어보며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고 심지어 사악한 존재인지를 정확이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 가난함을 철저하게 애통해가며 인식해야 합니다.

 

그 영혼의 가난함이 악한 행동을 자주 저지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나 본문의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고 싶지만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 첫째이자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해도 제대로 해결 못한 숙제라는 뜻입니다. 지금보다 더 풍부해지거나 최소한 편안해지면 하나님께 충성 헌신하겠다고 매번 다짐하는 것으로만 그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너희들이 여유가 많아지면 오히려 당신을 외면 거역하거나 최소한 나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인간 최초의 타락이 부족한 것 하나도 없는 낙원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모든 사건과 상황에서 이 두 상반된 생각이 계속해서 부딪히는 씨름이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전혀 변함없을 것입니다. 성경전체가 말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조에게 약속하셨던 언약 그대로 실현해 나갔습니다. 당신의 때에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할 것을 보장하는 증거들을 이스라엘의 구세대들에게 전혀 부족하지 않게 다 보여주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시켜서 말씀으로도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당장의 풍요와 평안만을 위하고, 더 중요하게는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자식들의 안위에 눈이 가려서 하나님의 깊은 뜻은 묵상해보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들 생각과 판단대로만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역사 가운데에서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또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것입니다.

 

약속의 외아들까지 바쳐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일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는 목표이자 가치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다른 모든 계명은 다 순종하겠지만 만약 자식의 평안과 하나님의 계명이 충돌할 때는 하나님도 내 뜻을 꺾지 못한다는 끈질긴 고집입니다. 출애굽 이후의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더러 그 마지막 하나까지 완전히 내려놓게끔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때로 자식도 완전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을 때가 간혹 있습니다. 일부러 괴롭게 하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식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상황을 몰아넣기 전에 자식의 안위를 그분께 온전히 맡겼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자녀의 현실적 인생도 절대로 부모가 책임지지 못하고 하나님만의 몫입니다. 이런 영적 진리를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실현하지 못합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자녀에 대한 육신적 보호 양육은 부모가 맡아야 합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하게 가꾸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기를 부모가 소원한다면 당신께 자녀의 전부를 온전히 맡기라는 것입니다.

 

때로 자녀가 고난 중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우리의 심정이 찢어집니다. 그러나 그러는 것이 오히려 자녀의 성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 배경에 너무나 오묘하고도 엄청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은혜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여러분의 자녀를 통해서 그분만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의 이런 뜻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뿐 아니라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 이삭마저 아낌없이 당신께 바치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선물로 받은 아들이므로 그분은 그 동일한 믿음으로 당신께 돌려달라고 시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기에 하실 수 있는 요구이며 그분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그를 통해서 믿음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지 믿음의 후손인 우리에게 표징이 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최고 좋은 것마저 당신께 바치라는 요구에 종교적 의미는 한 치도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자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이 주신 선물이며 가장 소중한 것은 더더욱 당신의 가장 큰 사랑으로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마저 내놓으라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니 아예 비교가 불가능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을 실현해보이라는 뜻일 뿐입니다.

 

아론의 지팡이에 맺힌 살구 열매 

 

하나님이 왜 구태여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리는 모습으로 구별했을까요?(8절) 만약에 그들로 다시는 원망하지 않게 하려면 아론 지팡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불에 타서 재가 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다시는 다섯 번은커녕 한 번도 불평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단 하루 만에 열매까지 맺었습니다. 지팡이는 이미 죽은 무생물에다 기름칠까지 했을 것입니다. 뿌리와 전혀 접붙일 수 없고 씨앗도 없어서 생명이 움틀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 나무 막대기에 열매까지 맺혔습니다. 생명을 주시며 과실을 수확할 때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임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또 그 지팡이로 자식들의 신앙교육을 하면서 당신의 당신 되심의 증거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레위 지파가 드리는 구별된 성소의 속죄 제사를 통해서만 당신의 백성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단 하루 만에 그랬으니까 당신의 말씀에 순종 헌신하고 당신만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곧바로 풍성한 참 생명의 열매를 맞볼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실감나게 말하면 가데스 바네야에서 거역하지 않고 묵묵히 진군만 했더라면 극상품 포도는 물론 살구 열매도 지금쯤은 배터지게 먹고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면서 첫 기적을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일으켰습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말씀 한마디로, 본문을 치면 단 하루 만에, 맹물을 극상품 포도주로 만든 것입니다. 물은 알다시피 수소 두 개에 산소 하나의 비율로 합성된 무생물입니다. 거기에 생명인 포도가 산출하는 온갖 요소들이 오랜 시간을 걸쳐서 합성 변화 숙성되어야 포두주가 됩니다. 맛과 색깔도 당연히 첨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바로 창조주이심을 밝혀 보인 것입니다.

 

그것도 인생사에서 가장 기쁜 혼인잔치에서 그랬습니다. 인간이 만든 어떤 포도주와도 비교가 안 되는 맛이었습니다. 그것도 율례에 사용하려고 따로 예비해 놓은 물로 만들었습니다. 잔치에 손님들이 오면 하인들이 그 손과 발을 씻기는 용도입니다. 그것은 인간 장로들이 만든 율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씻고는 버려버리고 인간을 치장하는 데만 사용하는 율법으로 죽어있는 물로써 주님과의 천국 혼인 잔치를 상징하는 모임에서 참된 인간관계의 기쁨을 더해주는 살아있는 생명의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께서 새로운 시대를 이 땅에 강력하게 도래시키겠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으려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율법의 노예들에게 복음 안에서의 참 생명과 자유와 안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도덕 사상 철학 특별히 종교에 얽매여서 참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던 죄인들에게 구원의 새 생명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시려는 뜻입니다. 너희의 눈물과 한숨과 탄식을 당신께서 다 짊어지실 테니까 너희들은 새 힘을 얻고 희락과 기쁨과 의미가 넘치는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고집이 아니라 양보다.

 

이스라엘은 살구 열매는 끝까지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론의 지팡이만 택했다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지금 당장에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입니다. 끝까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하나에 집착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작 보여주고 싶은 것은 볼 수 없었습니다.

 

지난주에 하나님의 고집은 인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끈질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고집이 도무지 꺾을 수 없는 강한 고집으로써 끝까지 남아 있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죽은 지팡이가 살구 열매로 율례의 물이 생명의 새 포도주로 결실되듯이 엄청나고 오묘한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고집은 오직 당신의 백성에게 새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기 위한 방향으로만 역사합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 방황의 벌을 준 것도, 아론 직분의 재확인 절차를 번거롭게 행한 것도, 레위 지파에 대한 계명을 다짐하고 또 다짐한 것도, 모두 동일한 은혜였습니다. 아니 인간을 위해 고집마저 버리시겠다는 당신만의 고집으로 실은 양보였습니다.

 

그런 은혜로운 양보의 결국은 당신께 가장 귀한 독생자까지 죄에 찌들어 타락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기까지 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정확히 말해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 가난함을 겸손히 시인하는 죄인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버렸고 앞으로도 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를 사랑함에 당신께 장애 되는 요소는 단 하나도 남지 않게끔 다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사랑으로 품어주시겠다는 당신만의 유별난 고집입니다.

 

간혹 내가 구원 받았는지 확신이 안 든다고 고민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점검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의 살구 열매가 돋은 지팡이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났느냐 여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벌을 받는 것은 진리임에 틀림없으나 충성과 거역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에 따라 받을 복이 비례한다고 여기면 아직은 율법에 묶여 있거나 죄송하지만 인간 목사의 종이라는 반증입니다.

 

때로 죄를 지어도 진심으로 자백 회개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것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도덕적 율법적 실패로 죄책감에 묶여 있는 것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이 땅에서부터 신자의 삶과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시려는 것입니다. 신자의 성품과 삶의 목적을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 분과 손을 잡고 교제 동행하는 것만이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좋고 기쁘고 의미와 가치가 된다면 구원 받은 것이 확실합니다.

 

나아가 믿음이 성숙된 증거도 간단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종교적 행위 관습의 능숙함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그분께 순종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없앴느냐에 달렸습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주님을 위해서 다 버렸다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마지막 하나가 주로 자식이므로 자식이 돈 벌고 출세하고 명예가 높아지는 것이 좋은지 정말로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는 것이 좋은지 잘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유산으로 자식에게 가능한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지 온전한 신앙의 본을 남겨주고 싶은지 생각해보십시오.

 

8/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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