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것

조회 수 82 추천 수 0 2018.10.06 12:17:27

(레16:15-22)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것

구약성경강해(4) / 레위기강해(4)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의 집안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 것이며 그는 여호와 앞 제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하게 할 것이요 그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염소를 드리되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16:15-22)

 

대속죄일 제사의 네 중요 특성

 

마침 지난주 수요일 9월 19일은 유대인들이 가장 엄숙하게 지키는 절기인 얌키푸르였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대속죄일입니다. 레위기 16:29에서 7월 10일로 규정되어 있는데 유대력은 음력에 기초했기에 양력으로 치면 9월-10월 중입니다.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일반 속죄제사와는 많이 다릅니다. 유대 민간달력은 7월1일이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따라서 지난해에 전백성이 지은 모든 죄를 일 년에 한 번씩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제사입니다. 당연히 절차가 복잡하고 그 절차마다 신학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꼭 알아야만 할 중요한 사항 네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전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만이 집전합니다. 다른 모든 제사들은 일반 제사장들이 순번을 정해서 교대로 봉사하기에 전 백성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전 백성을 대표하기에 대제사장 본인도 당연히 포함해서 이스라엘 전백성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죄 사함의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또 모든 죄가 하나님께 지은 죄이므로 하나님께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용서가 가능합니다.

 

둘째로 일반 제사는 제물의 피를 성소의 분향단에 뿌리거나 성소 밖의 번제단에 부으면 되었습니다. 대속죄일에는 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을 걷고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언약궤 위에 뿌려야 합니다. 언약궤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 판과 만나가 든 항아리와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셋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실의 삶은 물로 영혼까지 거룩하게 통치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고 있다는 상징입니다.

 

그곳에 피를 뿌리는 것은 백성들 전부가 죽음으로 자기들 죄 값을 여호와께 직접 지불하오니 오직 당신의 긍휼만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로 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냈을 때부터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으로 삼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의 책임을 갖고 있기에 전 인류의 죄까지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표(豫表)는 나중에 언젠가는 반드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 원래 의도했던 목적을 완수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셋째로 제물을 처리하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나이, 모양, 크기, 색깔까지 똑같은 두 마리 숫염소를 택해 대제사장이 각 염소의 머리에 전 백성의 죄를 옮기는 안수 기도를 합니다. 그 중에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죽여서 그 피를 이미 말씀드린 대로 언약궤 위에 일곱 번을 뿌립니다. 칠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듯이 백성들의 죄가 차고도 넘쳐서 죽음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고백입니다.

 

다른 한 마리 염소는 이사셀을 위한 것으로 머리에 안수만 하고 산 채로 광야 멀리 떠나보냅니다. 아사셀의 뜻에 대해선 먼저 염소나 악령이라는 뜻, 또 죄를 ‘덮는다’, ‘없앤다’는 동사의 발음이 아사셀이라는 것, 혹은 광야의 어떤 곳의 지명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광야는 사탄이 거주하는 장소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죄악의 뿌리이자 원흉인 사탄에게 돌려보낸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나아가 새해에는 더 이상 죄의 지배와 영향력 아래 묶이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기도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대제사장의 옷에 이날만은 방울을 달아서 움직이면 소리가 나게 합니다. 지성소 안으로 대제사장 혼자서만 들어가는데 그 피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이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시면 대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면 방울 소리가 끊기므로 성막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사장들이 그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대표일 뿐 아니라 그들과 동격(同格)화 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과 함께 살고 죽어야 합니다. 대제사장, 요즈음으로 치면 목사는 양떼가 죽으면 같이 죽어야 하고 반대로 목사가 살아나면 양떼도 살아납니다. 그래야만 참 목자입니다.

 

양심상 완전하지 않는 제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목적은 시내 산에서 당신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막은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필수적이며 첫째 방안입니다. 그리고 대속죄일 제사는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가장 중요한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전 백성이 참여합니다.

 

그렇다면 성막은 이날 하루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심지어 율법을 수여한 목적도 그러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속죄 제사가 만약 나답과 아비후의 예처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전 백성이 심판을 받아 죽는 셈입니다. 그럼 율법을 지킬 수도 없고 율법이 존속할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지 않고는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죄 사함을 먼저 받아서 그분과의 관계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과 교제와 동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히브리서 9장이 말하듯이 동물로 대속 제물을 바쳐선 완전한 구원과 참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동물 제사는 매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합니다. 또 지성소 안의 언약궤는 여호와가 임재 한다는 상징일 뿐 정작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좌정해 계십니다.

 

결정적으로 제물로 바쳐진 짐승은 아무 죄가 없고 어떤 면에선 오히려 억울할 뿐입니다. 자발적으로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 값을 갚겠다는 의사는 추호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종교의식에 따라 죽게 됩니다. 아무리 염소에 죄를 전가하는 안수 기도를 했어도 짐승으로는 인간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원죄로 타락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원죄의 굴레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부수고 그 굴레를 벗겨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 때가 차매 죄는 물론 어떤 허물도 없으신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죄악의 시험과 유혹을 똑같이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단 한치도 더러워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 모든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영원하고도 완전한 속죄가 단번에 이뤄졌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를 위한 피를 언약궤에 뿌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또 주님은 실제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서 신자들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중보 기도의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죄에 빠진 성도는 그분께 의지하여 깨끗케 될 수 있습니다. 죄의 뿌리인 사탄에게 아사셀 염소를 되돌려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강도의 굴혈로 바뀐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멸망될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주님 돌아가신 얼마 후에 로마에 의해 실제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동물 제사 드릴 곳마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반드시 십자가에 매달아 율법 상 하나님께 저주 받는 죽음을 당하게 해서 이단의 괴수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유대인들로 더 이상 주님을 추종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사실은 하나님의 완벽한 주권과 섭리로 인해 오히려 주님은 거꾸로 완전한 대속죄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었고 부활하시어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들도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는데 사탄이 씌운 그 굴레를 주님이 완전히 벗겨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대속죄일을 성실히 지키고 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회당에서 대제사장 대신에 회당장 랍비가 숫염소 대신에 남자에겐 수탉을 여자에겐 암탉을 머리 위에 세 번 돌리며 흔들고 죄 사함을 선포합니다. 그 닭을 죽여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우선 자신의 죽음으로 죄 값을 갚는 피 뿌림의 제사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이 집전하지도 않고 통계에 의하면 국민의 반 정도가 참여하니까 전 백성을 위한 대속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속죄일을 제정하신 의미는 하나도 실현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유대인들의 종교 의식이고 전통과 관습에 따른 절기로 형식적으로 지켜질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대속죄제를 아무리 율법의 규정대로 철저히 지킨다 해도 짐승이 종교적 의식에 따라 바쳐졌기에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히9:9)고 선언합니다. 제사를 드렸어도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밤중에 예수님에게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온 까닭은?

 

니고데모는 알다시피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국회의원이자 기독교 교단의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자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온유하고 합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평소에 기도 십일조 금식 구제를 열심히 했을 것이며 틀림없이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가 볼까봐 야밤에 살짝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는 나사렛 출신의 이름도 없는 랍비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정통 주류 교단 출신의 목사가 아닙니다. 거기다 여호와의 율법을 제대로 준행하지 않고 심지어 성전 제사를 부인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에서 이미 이단으로 판정 받았습니다.

 

나아가 예수는 자기들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위협하는, 쉽게 말해 자기들 수입이 떨어지게 만드는 대적으로 치부하여 죽이려 모의 중인 자였습니다. 같은 유대 공회 소속원으로서 공개적으로는 도무지 만날 수 없었고 만나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럼 자기 신분과 위치와 특권을 전부 잃고 유대사회에서 매장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밤중에 찾아왔다면 그만큼 본인에게 절실한 문제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대속죄제를 매년 드리고 개인적으로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속죄제를 드렸고 모세오경을 줄줄 외우다시피 해도 도무지 마음에 평강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었고 그분의 온전한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바울이 고백한 대로 선을 행하길 간절히 원하나 도리어 원치 않는 악만 행하고 죄의 법의 아래로 사로잡혀 오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것입니다.(롬7:18-23) 자기를 발견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자기 속의 자기가 악만 행하는 것을 보고는 너무 싫어진 것입니다. 스스로도 자기를 부인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남들은 자기를 경건하고 의롭다고 칭찬을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수록 자기는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더 괴로워졌을 것입니다. 얼마나 그들 앞에 위선적인 사람으로 서있는지 자기는 압니다. 어쩔 수 없이 유대 종교를 성실히 준행해보지만 형식과 관습에 불과하며 심령의 진정한 평강은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미 유대공회에서 이단 종파라고 정죄한 예수와 그 제자들을 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온갖 이적을 일으키고 그들의 모임에는 기쁨, 자유, 평강, 활력이 넘친다는 소문이 계속 들렸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요 구원 밖의 죄인으로 취급해서 교제는커녕 상종도 않는 세리, 이방인, 불치병자, 불구자, 심지어 귀신 들린 자와 창녀와도 식사 교제를 했고 그들의 집에 가서 숙식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온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의 가르침과 치유를 통해 심지어 기도만 받아도 생전 처음으로 참된 안식을 누렸다고 간증했습니다.

 

니고데모로선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자기는 평생을 수양하고 구약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했음에도 오히려 허무하고 공허했습니다. 그에 반해 저들이 누리는 평강은 대체 무엇인지, 과연 진짜인지,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자기도 누릴 수 있는지 물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정작 몰랐던 것은?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 없다는 엉뚱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로선 사람이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도 없고 성령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니까 실망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로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고 승천하리라는 것을 듣지 못했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교리에 대해선 전혀 지식이 없었고 아직 성경도 저작되기 전입니다. 성령의 거듭남에 대해선 그로선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정작 몰랐던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사실은 구약성경의 대속죄 제사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것입니다.

 

대속죄일을 유대력 7월 10일에 정한 것이 성경에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음란하게 섬긴 죄를 범한 후에 모세가 세 번이나 중보 기도로 하나님께 사하심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의 최종적 응답을 받고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재확인하는 의미로 십계명 돌 판을 두 번째로 받아서 내러온 날로 정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큰 죄도 용서해주셨던 은혜를 입었음을 기념하라는 뜻입니다.

 

더 주목해야 할 사항은 모세 이후 예수님 당대까지 약 1500번의 대속죄일을 계속 드렸어도 대제사장이 죽어서 나왔다는 것이 성경 기록 어디에도 전승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대속죄일을 제정하신 뜻이 죄를 심판하는데 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 순전히 엎드리는 자를 용서해주신다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속죄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율법에 예표 된 대속죄제사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완성시킬 것이기에 언제든 진심으로 회개만 하면 어떤 극악한 죄인이라도 용서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2백만 명이 지난 한 해 동안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주는 날입니다.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선 바늘 도둑과 소도둑의 형벌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대속죄일에 그런 구별 없이 그 수많은 백성 전부를 단 번에 용서해주셨습니다. 죄를 범한 행동에 따라 차별하여 벌하거나 용서하지 않고 죄인 된 모든 백성을 다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그 모든 사람이, 바늘도둑이든 소도둑이든 당신께서 지으신 당신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16:29에선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 즉, 이방인도 당신의 자녀로서 그 제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규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들도 어쨌든 이 대속죄일에는 참여해도 된다고 명시했고 그래서 ‘큰 안식일’(개역본), 또는 ‘안식일 중의 안식일’(개정개역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니고데모가 깨달은 진리는?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를 몰라 실망하며 돌아갔던 니고데모는 그 후에 예수의 행적을 유심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쁜 일이라곤 단 하나도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도와주는 선한 일만 했습니다. 로마에 반역도 하지 않았고 성전을 헐라 그러면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한 것만으로 하나님께 저주받는 것으로 간주된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단 한 마디 꾸중은커녕 항변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바로 그 시간에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언약궤에 염소의 피를 뿌리러 들어가기 위해 걷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자동적으로 찢어졌습니다. 말 두 필이 양쪽에서 끌어도 꼼짝 않는 그 튼튼한 장막이 저절로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찢으신 것입니다.

 

그 때에 니고데모는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대속죄 제사는 필요 없고 짐승의 피 뿌림도 효력을 다했다고 그 일로 분명히 계시해주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침례 요한이 말한 대로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신 메시아가 확실하다는 것도 인정했을 것입니다.

 

생전에 예수가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성전이 바로 당신의 몸을 뜻한다는 것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그 예언도 성취되었고 나아가 영원한 하늘 처소에 성전을 세우셨다는 것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시어 우리 대신에 우리의 모든 죄 값을 감당하는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대속죄일 율법 규정도 완성되었음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도덕적 종교적 양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인격체를 드리며 완전히 항복하며 엎드렸을 것입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당신의 백성들에게 아니 전 인류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입니다. 의신칭의의 구원 교리를 몰라도 됩니다. 아주 쉽고도 간단한 내용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자녀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발 알라는 것 하나입니다.

 

부모는 자기 몸으로 낳은 자식이 어떤 잘못을 범해도 사랑합니다. 잘못하는 자녀일수록 오히려 더 안타깝고 정이 많이 갑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하나 아프지 않는 손가락 없다는 한국 속담대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이후로 지금껏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그 사랑에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인 애굽과 로마를 직접 정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써 그 역할을 맡아야만 합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그들을 십자가 복음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예수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고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전도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서 믿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여러 의식을 준행하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그분이 당신을 지으셨고 당신은 그분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제발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실만 깨닫고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아담 때부터 아브라함을 거쳐 애굽에서 구원해 내고 모세와 다윗과 예레미야와 언약을 맺은 내용들도 오직 그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선지자들의 메시지도 똑같습니다. 다른 죄는 다 용서해도 하나님 당신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하는 죄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죽인 원수 대적이나 그들과 동조한 죄인들의 잘못을 단 하나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부모가 형만 사랑하고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자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반항만 하다가 가출하여 갱들과 어울려 나쁜 짓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에게 나쁜 짓 하지 말라고 야단쳐봐야 더 어긋날 뿐입니다. 근본원인이 부모의 사랑을 의심했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부모가 사랑한다는 것을 자식이 깨닫도록 해줘야만 합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 당신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아무 말씀 없이 죽으신 것은 당신의 사랑을 최후로, 유일하게,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절정의 모습으로 계시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마저 거부하면 하나님에게도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탁인데 제발 이 사랑만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고 잘못을 범한 자를 따로 벌하지 않습니다. 때로 악인의 형통을 방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세상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아무리 악하고 추한 것이라도 당신의 사랑으로 바꾸지 못할 것이 하나 없습니다. 사랑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깨끗케 하고 완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와 고난과 죄악은 인간끼리 참 사랑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가장 절실하게 아쉬운 것도 사랑 그것도 완전하고 변함없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뜻은 사람들을 외모로 절대 차별하지 않고 죄를 범한 행동으로도 벌주지 않고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진심으로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전과 후의 변화는?

 

니고데모가 예수 믿기 전에도 당시로는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세상에서 최고 의인이었습니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실존하고 세상을 통치하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죄의 용서를 구하는 제사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자기가 철두철미 죄인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딱하나 그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그분 앞에 진심으로 무릎 꿇으면 언제 어디서든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주신다는 사실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심지어 남을 위한 선한 일을 해도 갈급하고 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로선 당신의 자녀가 행한 선하고 악한 행동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도 변화되는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이기에 언제 어디서든 사랑하신다는 그 참사랑을 개인적으로 자기 전인격을 걸고 체험적으로 알게 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마다 천지신명에게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 소원을 간구합니다. 무병장수와 자녀들이 출세 형통하고 무엇보다 재앙만은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누구에게 하고 있고, 그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왜 빌어야 하는지, 어떻게 응답을 해주는지 전혀 모른 채 그저 빌기만 합니다.

 

지성이 감천이라고 많이 빌수록 신을 더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쩌다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이 우연의 일치인 줄도 모릅니다. 오직 자신과 자식들의 출세 형통이나 최소한 무사 안일만 빕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그분이 자기를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분의 자녀라는 인식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그분을 닮아 거룩해지는 것에는 아예 생각도 미치지 않고 오로지 편하고 풍부하게 살게 해달라고만 빕니다.

 

지금 불신자들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주일에 지난주의 죄만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면 불신자와 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속죄제만 지낸 것뿐입니다. 죄만 용서해 달라는 것은 혹시라도 그 죄로 인해서 벌만 내리지 말아달라는 즉, 나쁜 일만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불신자의 기도와 같습니다.

 

속죄제는 반드시 화목제를 함께 지내는 것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신자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서 그분과 함께 먹고 즐겨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확인하고 그 사랑을 풍성히 누려야 예배가 완성됩니다. 예배에 기쁨과 승리가 따라야만 합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현실의 고난을 겪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평생토록 고난 위에 고난이 겹치는 것이 누구나의 인생입니다. 불신자는 고난이 끝나야 비로소 안식과 기쁨을 얻습니다. 신자는 그와 달라야 합니다. 고난을 받고 있는 중에도 기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그분과 원수 되어 죄 중에 있을 때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 죄를 범하지 않고 원인도 모르는 고난을 겪고 있는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니고데모는 유다 사회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평생에 풀지 못한 하나의 숙제를 예수님을 만나서 풀려했고 결국에는 그 답을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림으로써 모든 허망함과 갈급함을 완전히 해소시켰습니다.

 

이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가장 먼저 정말로 하나님이 나보다 더 나를 더 잘 알고 있고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씨름해서 체험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또 그 사랑에 자기 전부를 바치며 온전히 반응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신자로써 아니 한 인간으로써도 너무나 비겁한 짓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대속죄일 제사가 말하는 바입니다.

 

9/23/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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