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의 공평성에 관한 몇몇 의문
의문 [구원의 공평성에 대한 근본적 의심]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ex 옛날 우리 조상들, 아메리카 원주민 등)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이 들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바울의 회심에 비추면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이고 택함인 것은 이해가 됩니다. 로마서 1장 18-32의 말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스스로 외면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알겠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하나님의 큰 권능을 맛보고도 배반했으니 옛날 동아시아나 아메리카에 복음이 전해졌어도 구원받는 자는 소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예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반발심이 생깁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모두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하셨지만 조상들이나 원주민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왜 그들을 태어나게 했고 그들을 과연 사랑하시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에 따르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캐치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외면했다고 해석해야 하나요?
만약 내가 운이 안 좋아서 수백 년 전 조선이나 고려에 태어났으면 아마도 지금쯤 지옥에 있을 텐데 이런 생각도 들고 아마도 내가 택함 받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생깁니다.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신자만의 하나님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의 배경인 로마와 이스라엘 쪽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동시대의 아시아나 아메리카는 하나님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변증 [시대 장소 구분 없이 공평한 구원]
인간의 영적 실상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영적 상태는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까지 똑같습니다. 모두가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그분과 원수 상태에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죄로만 따지면 하나님이 지금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예수 믿는 신자를 포함해, 지옥 심판을 내려도 인간은 한마디 항의는커녕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노아 홍수 심판 후부터 지금껏 인간을, 신자와 불신자 구분 없이, 일일이 그 지은 죄로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또 그래서 신자의 신앙부터 이 진리를 자신에게 비추어 체험적으로 절감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객관적인 교리로 그쳐선 안 되며 신자가 되어서도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영적 실체를 분명히 그렇게 자각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은 신자라면 실제로 매 순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심령이 너무나 가난하고 부패해 있음을 잘 알기에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낮아져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인간사회에 통용되는 윤리 차원에서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아가 하나님 즉, 그 명칭이나 알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도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자의 실재(實在)를 믿으며 그분께 기도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일생을 오직 자신을 높이려는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자기를 더 앞세우며 절대자로부터는 자기를 높일 수 있는 큰 능력만 빌리려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절대적인 참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기에 그분의 내 인생에 대한 거룩한 뜻과 계획을 깨달아서 거룩하게 살아갈, 아니 그 뜻과 계획을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단 한 명도 구원의 합격점에 들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모든 선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며 그분만이 선의 절대적 기준이자 선 자체라는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대신에 자신에게서 선이 나오고 자신이 선의 절대적 기준이자 선 자체라고 완악하게 고집하는 것이 불신자입니다. 신자 또한 여전히, 심지어 죽을 때까지도 불신자와 비슷한 죄들을 지으나 인간의 영적인 실상을 정확히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겸손해졌다는 것만 다릅니다. 그것도 스스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성령의 깨우침에 의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불신자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아니 용서받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죄인이라면 신자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영적 시체라면?
불신자는 자기가 최고로 우월하다고, 도덕적 종교적 심지어 영적으로도, 끝까지 고집합니다. 자기가 최고이므로 스스로 회개하고서 하나님만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 그분 뜻대로 순종 충성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대로 두면 모두에게 기다리는 것은 지옥 심판입니다. 인간의 상태가 태초부터 마지막 날까지 모두 영적 시체입니다.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모든 인간이 영적 시체 상태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안의 절대적인 전제가 됩니다. 가장 먼저 인간의 공적, 선행, 치성, 자격, 능력, 조건, 신분, 등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 그것들이 부정적으로도 작용하지 않는데 이미 모두가 영적 시체가 되어 있어서 인간 쪽에서 구원에 영향을 미칠 요소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쪽에서 구원이 전혀 불가능하다면 하나님 쪽에서 구원해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전에 천국 구원과 지옥 심판으로 나누는 일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주관할 수 있습니다. 인간 전부가 똑같은 죄인이므로 전부를 다 구원해주는 방안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굳이 죄로 타락해버린 비참한 상태를 겪게 하지 말고 처음부터 아예 죄를 짓지 않을 상태로 만들어주는 편이 낫습니다.
또 그러려면 두 가지 방안밖에 없습니다. 첫째 인간 내면에 죄를 인식할 수 있는 도덕성이 전혀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본능에만 따르는 짐승이나 아예 아무 의식이 전혀 없는 기계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둘째로 어떤 경우에도 죄를 짓지 않는 하나님 당신과 방불한 신적 존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경륜 안에서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분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창조하길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한 후에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한 것은 인간이 창조의 목적인 셈입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인간과 온전히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교제를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계속 짓고 있어도 당신께서 지으신 당신의 가장 귀한 피조물이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타락 이후 지금도 또 앞으로도 가능한 많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창조 때에 계획한 그런 진정한 교제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다시 또 가능한 많은 이가 아니라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을 전부 구원해주어야 한다고 반발하는 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갑니다. 아담의 타락도 허락하지 말아야 하고 인간을 신적 존재나 짐승 둘 중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창조 자체를 할 필요가 없다는 순환논리에 갇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당신을 따르게 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여서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마련해 놓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로마서 1:18-31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을 인간의 모습으로 창조하셔서 지금과 같은 지구의 환경에 살게 하신 것 자체는 하나님만의 온전한 계획이므로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 주제에 절대로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고 따져서도 안 되는 문제입니다.
예정 구원의 의미
그런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정반대로 인간은 스스로 고의적 능동적 선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였습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그분과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설명해드린 대로 하나님은 단번에 전부를 구원해줄 수 없기에 일부를 먼저 구원해서 그 구원받은 자로 당신에 대해서 온전히 알게 한 후에 그들을 통해서 다른 이에게도 계속 구원이 일어나게 하는 방안을 정했습니다. 전부를 일시에 구원할 수 없다면 그 길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예정은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절대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이 구원해주신다는 것이 그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이는 편애하고 어떤 이는 미워해서 당신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구원해줄 자를 정하고 심판할 자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어폐가 있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는 그분만의 고육지책입니다. 인류 전 역사에 걸쳐서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심판 아래 있기에 당신의 구원에 동역할 자를 택하여 그들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확대해 나가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선악과를 먹을 줄 알고도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그런 창조 자체에 대해선 피조물인 인간은 반론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이미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의 상태에서 당신께서 택한 자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다른 이들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도 아무도 불만을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1) 바울은 하나님을 자기 의사에 따라서 그릇의 종류를 정할 수 있는 토기장이에 비유했습니다.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나눴다고 해서 인간의 능력이나 자격에 도덕적 영적 우열이 있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루미와 여우의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접시와 목이 긴 병처럼 그 역할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맥상의 의미는 유대인의 구원이 이방인보다 더디고 숫자가 적은 현상에 대해 바울이 그렇게 된 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변증하는 내용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11:25) 쉽게 말해 이방인이 먼저 많이 구원받고 유대인들은 나중에 하나님이 정하신 충만한 숫자만큼 구원받게 되는 것이 토기장이인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겐 이방인들로 먼저 많이 믿게 만드는 그릇의 역할을, 이방 족속들에겐 그럼으로써 유대인들로 시기 나게 하는 그릇의 역할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선택에 의한 구원은 인간의 영적 실태에선 최선이자, 또다시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에게도 다른 구원 방안이 없습니다. 죄에 찌들었어도 당신의 피조물이므로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선 다른 방안은 태초부터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아무 제한 조건 없이 당신을 믿는 자는 누구라도 구원해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
택한 자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면 어쨌든 세상 모든 족속 중에 한 민족을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이천 년 후에 예수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게끔 모든 여건 상황 조건을 조성해 나가려고 그를 히브리 족속의 선조로 세우고 가나안 땅을 그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기존의 족속 중에서 택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족을 형성해서 당신의 예정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려는 뜻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유다 지파가 나오고 유다 지파의 다윗 가문에서 예수님이 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편애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가장 완벽하게 계시하고 실현할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을 연출하려고 태초부터 즉,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완벽하게 마련해 놓은 인류 구원계획대로 실행한 것입니다.(창3:15, 요1:1-14 참조) 인류 역사는 죄 중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His story, & Redemption History)이며 이스라엘 족속은 그 구속을 실현할 수 있는 첫째 통로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최초로 선택된 자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점점 구원을 늘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태초부터 인류 구속을 위한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택한 받은 자들은 현실적 형통과 안락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평생토록 세상으로부터 핍박 멸시를 받아야 하며 때로는 자기들 생명까지 걸어야 했는데 지금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여러 고난을 겪었고 심지어 외아들까지 바치는 믿음의 시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가 여호와 안에서 자기 인생이 미리부터 그런 고난의 연속인 줄 알았다면 하나님을 쉽게 따라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으면 현실적으로 형통하고 출세할 것처럼 착각 내지 오해해선 절대로 안 됩니다.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면서 십자가 복음을 실현하면 빛보다 흑암을 더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박해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런 박해가 없이 편하다면 신자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사의 동역자로 들어 쓰시려고 죄로 타락한 세상에서 불러내어서 십자가 진리로 무장시켜서 다시 세상으로 내보낸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 일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현실적 풍요든 궁핍이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우상숭배의 땅에서 하나님이 있음을 알고도 그분을 거역한 자리에 있었으나 하나님이 먼저 오셔서 성령으로 역사해서 거듭나게 한 것입니다. 그 후로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일일이 간섭하시고 양육 성장시켜주었습니다. 인간은 그냥 두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만한 수준이 도저히 안 되므로 하나님이 준비 양육해서 구원을 주십니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바꿔 말해 기독교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믿고 그분만을 따르는 자에게 주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도 요한복음 3:16에서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를 구원해주신다고 선언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시대와 또 중근동과 그 이외 지역에서도, 그 어떤 차별 없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을 순전히 믿어야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따르는 자만 구원해준다는 원리를 하나님께서 실현한 첫째 인물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 선택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은 극소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출애굽 때의 일 세대가 모세 여호수아 갈렙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 심판으로 죽었지 않습니까?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편애하셔서 구원의 특혜를 준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먼저 온전히 믿어서 자신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이방 족속들에게 증명하도록, 바울의 말을 빌리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다른 이를 구원으로 초대하도록, 택함을 받았으나 그 일을 하지 않았고 그전에 그런 소명 의식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과 그렇게 하기로 피의 언약 의식을, 그 소명을 실현하지 않으면 심판받아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 치르고도(출19장) 고의적으로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구약의 이스라엘을 포함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 그분만 온전히 믿고 따르면, 로마서 1:18-32 말씀대로 따르면 구원받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 전의 아벨, 에녹, 노아, 그리고 그 전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칭함을 받은(창6장) 자들은 히브리 민족이 생기기 전에 즉, 이스라엘이 택함을 받기 전에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후손인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순전히 믿지 못해서 오히려 구원에서 멀어졌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십자가 복음과는 무관하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데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0-33)
신약시대도 구약시대와 똑같다.
언뜻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의 택함은 하나님 구원계획의 실패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하나님에게 실패는 일절 없습니다. 그렇게 택하여서 온갖 기적으로 은혜를 베풀어도 온전히 믿지 않을 것을 그분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의 그런 실패 중에도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실현할 소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 구원의 진리가 죄로 찌든 인간들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고 또 절대적 진리로 더 명확하게 계시하려는 그분만의 방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롬11:11,12) 구원할 종족과 숫자를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며, 그 계획은 더 많은 이(족속)를 구원하기 위한 당신만의 최선의 방안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계 모든 족속은 영원토록 믿음이 아니고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은 노아의 세 아들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었고 현존하는 모든 족속의 조상이 되게 하신 이유입니다. 쉽게 말해서 구약시대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일차 맛보기로 실현해 보인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꼭 오셔야 할 필요성과 이유를 모든 인간으로 실감하게 만드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인간이 그분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특별히 십자가 죽음으로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감당하게 한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는 진리를 더 명확하게(이전에도 이미 자연 안에 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계시하고 있었으나) 온 천하에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시대와 장소의 구분 없이 똑같다면 구원의 방안도 시대와 장소별로 바뀔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구원 방안이 시대와 장소별로 바뀌면 하나님의 공평성 차원에 하자가 생깁니다. 인류 역사의 특정 시대와 특정 장소에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방안은 다르지 않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는 또 다른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주신 질문의 답변을 얻기 위해서 시대와 장소를 둘로 나눠서 접근해봅시다. 말씀하신 대로 고대 이스라엘과 현대의 한국은 기독교 구원을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시대와 장소입니다. 그 반대로 고대 한국과 현대 아프리카는 기독교 구원을 쉽게 접근하기 힘든 시대와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 넷을 아무리 조합해봐도 하나님의 구원 방안은 전혀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아프리카 일부 오지에는 기독교 선교사가 한 명도 오지 않아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듣지 못한 채 죽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현대의 그런 아프리카는 구약시대의 한국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만 구원이 불공평했다고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구약시대의 한국이나 현대의 아프리카나 동일하게 로마서 1장이 적용됩니다. 구약 이스라엘도 예수님과 십자가 복음을 모르긴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들에게도 로마서 1장이 구원원리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이 로마서 2-3장이 말하는 바입니다. 모든 인간은 구약 이스라엘을 포함해 자기만 높이려는 탐욕에 젖었기에 구원 얻은 자는 하나님이 남겨 둔 극소수였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로마 족속들이 하나님께 구원의 특혜나 편애를 받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시대나 위치적으로는 가까이 있었지만, 영적 시체가 보여야 할 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한국 민족을 택하고 그 후손 중에 예수님을 보내었어도 결과는 성경의 기록과 하나 다름없이 똑같아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이 한 명의 예외 없이 영적 시체라고 절감하는 것이 기독교 구원과 신앙의 출발이자 핵심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대의 한국이나 현대의 아프리카가 구원에서 불공평한 차별대우를 받은 것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의 가정대로 여호와나 예수님과 거리가 너무 먼 구약시대 한국에 태어났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장 말씀대로 하나님 대신에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지역 시대 구분 없이 심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도 세상에서 핍박받아 순교까지 감당할 당신의 동역자로 세우기 위해서 먼저 구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신약 신자더러도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고 명했습니다.
상기에 설명해드린 하나님의 구원원리를 기초로 해서 주신 세 가지 질문에 대해 간단히 답변드리겠습니다.
[예정 관련 세 질문과 답변]
질문1.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도 본인들이 하나님을 외면했다고 해석해야 하나요?
답변 1.
그것이 바로 로마서 1장이 말하는 바이고 상기에 설명한 내용입니다. 자연의 엄청난 위용을 곰곰이 따져보면 절대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창조주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생존에 필요한 공기 물 식물 같은 요소들은 전부 공짜로 무한대로 제공해주시니까 사랑의 하나님인 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자신은 너무나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함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 수치심은 물론 벌을 받을 것 같은 공포심도 생깁니다. 그럼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평소에 그분께 감사 경배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세대의 인간들은 그러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자기들을 위로하고 자기들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신을 스스로 만들어내어 음란하게 숭배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지도자 모세가 참 하나님 여호와를 만나러 간 그사이에도 무료한 광야 생활을 참지 못했습니다.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고 쾌락이라고는 즐길 수 없는 메마른 광야가 너무 싫어서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마시고 춤추며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순전히 믿고 따를 마음은 전혀 없고 이 땅이 전부이므로 오로지 현실적 쾌락과 풍요만 제공하는 신들을 찾는 것이 인간입니다.
질문 2.
하나님은 옛날 우리 조상들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을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은 신자만 사랑하시는가?
답변 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4,5)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의 근본 마음은 구약시대뿐 아니라 지금도 모든 족속을 사랑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때부터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고 약속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을 사랑하신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불행하게도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완악하게 거역 대적한 것입니다.
지금 세대는 하나님의 실재마저 완전히 부인하고서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무도 죄인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감정, 생각, 행동을 제약하는 모든 것이 죄악이라고 합니다. 쉬운 예로 청소년 자녀가 난잡한 이성 관계를 갖든 성전환수술을 하든 그들의 자유이자 권리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말리며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려는 부모야말로 제거되어야 할 사회적인 악이 되었습니다. 완전히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상태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복음을 가장 활발히 전하고 있는 미국 땅에서부터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십자가 복음을 먼저 깨닫게 된 것이 절대로 구원에서 편애나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구원에 그런 것들은 눈곱만큼도 개입될 여지는 아예 없습니다. 복음이 가장 활발히 전해지는 이 세대가 가장 타락했고 앞으로도 그 타락이 더 심해진다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구약의 한국을 비교해 구원의 불공평성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이 많이 가까이서 전해진다고 해서 구원이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변함없이 똑같은 죄악상 때문에 아무리 복음이 넘치도록 전해져도 결과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인간의 배역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줄 자는 당신의 은혜로 반드시 구원해주시나, 심판은 인간이 스스로 능동적 적극적으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질문 3.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답변 3.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드러난 조건 없는 긍휼로 아무 소망 없는 죄인을 죄에서 구원해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창조 때부터 마지막 날까지 전혀 변함없습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당신을 기뻐하고 순종하는 신자와 참사랑의 교제를 나누려는 것이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더 안타깝게 여기지만 인간 쪽에서 그 사랑을 배반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비유하는 대로 가장 말썽 피우는 자식을 부모가 더 사랑하고 안타깝게 여기나 부모의 일방적 사랑에 그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말썽 피우는 자식은 다른 부모처럼 호강시켜 준 것 하나 없다고 불평 원망하며 끝까지 거역해도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녀이므로 끝까지 사랑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9-12)
아브라함처럼 택함을 받아 구원 얻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절감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또 그들로 그 받은 사랑을 주변에 나누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나머지 사람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해서 사랑의 언약을 맺고 구원해준 것입니다. 신약에선 열두 제자를 택하여 그들로부터 복음이 누룩처럼 번져나가게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여서 제물로 받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들에게는 온전히 실현됩니다. 그 사랑을 온전히 믿는 자만이 그 사랑을 제대로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직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자도 사랑해주시기에 신자를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모든 상황을 미리 구비해서 신자 앞에 길을 잃은 불쌍한 양들을 맡겨주십니다. 지금도 신자가 제대로 실천하든 못하든, 심지어 온전한 소명 의식을 온전히 붙들지 않아도 그분은 시대 장소 인종을 포함해 어떤 조건으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예수 십자가가 더 많이 증거되도록 당신만의 방식으로 당신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요컨대 인류 역사를 당신의 구속사로 주도하고 계시는 것이 그분의 사랑입니다.
(3/10/2023)
추가 질문
질문 4.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 지구의 자연이나 그 이외의 것으로 절대자 혹은 창조주로 인식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인식이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이지 않을까요? 성경, 복음, 또는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이란 생각이 듭니다.
답변 4.
예 그렇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특별히 이스라엘 전에는 더더욱 성경이나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당신에 대한 개념이나 인식을 신학적으로 체계적으로 갖지 못했다고 해서 심판할 수 없고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18-23)
말씀하신 대로 자연을 보면 창조주가 있고 인간은 연약한 피조물인 줄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분의 창조나 통치에 대한 구체적인 뜻과 계획은 몰라도 어쨌든 그분께만 감사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 중에 가장 지혜로운데도 인간은 같이 죄로 찌든 인간이나 새와 짐승과 심지어 기어 다니는 벌레를 하나님이나 신으로 믿고, 혹은 스스로 욕심과 쾌락을 채우려고 신으로 간주하고서, 음란하게 숭배했습니다. (고대 우상 신전에는 창녀 남창은 물론 동녀 동남까지 있어서 많은 이가 한꺼번에 난잡한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제사의 중요한 절차였습니다.)
예컨대 애굽의 바로는 살아있는 가장 강력한 신이었고, 출애굽 때 여호와가 그들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은 그들의 토속 우상 신들을 심판하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워서, 피라밋을 지을 정도로, 세계 최고 강국이 되어 있는 애굽인들이 심지어 개구리, 파리, 나일강 등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마지막 바로의 장자의 죽음은 인간은 절대 신이나 세상 통치자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아는 백성 이스라엘마저 그곳에서 사백 년 간 노예살이를 하면서 그 음란한 우상숭배에 맛이 들어 시내 산 밑에서 금으로 황소 신상을 만들어서 그 신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주었다고 감사하며 음란하게 경배했습니다.(출32:4)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또 하나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창조주가 있음을 알았으면 그분만 경배해야 합니다. 최소한 다른 짐승이나 인간을 경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족속이 그러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임, 아니 정반대로 사악하게 행동했습니다. 지금 당장 온 지구를 멸망시켜도 인간은 한마디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경배를 중지하는 순간 아담과 이브처럼 저절로, 말하자면 도덕 교육과 훈련을 받기 이전에, 태생적인 수치심과 공포심이 생깁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는 자기만 높이려는 타락된 본성에 묶여서 윤리적인 죄들을 짓게 됩니다. 이처럼 창조주만 경배하면서 의롭게 살아야 하나 모든 인간이 고의적으로 완악하게 죄악을 즐기면서 전혀 돌이키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핑계를 댈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모세 율법은 그래서 조각하지 않는 돌로 제단을 쌓고(온 천하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굳이 화려하고 장엄한 신전을 지으려 하지 말고), 짐승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짐승 같은 다른 피조물을 신으로 경배하지 말고), 피의 제사를(자신이야말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고백의 뜻으로) 드리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구원의 은혜를 예표하는 뜻으로 말입니다.
질문 5.
4번 질문을 드리다가 생긴 의문입니다. 아담과 이브 그 이외에 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창조주, 절대자, 절대 선 이 정도일 것 같습니다.
답변 5.
상기 4번의 답변이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답변도 되었네요. 간단히 두 가지만 첨가하자면;
첫째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직접 짐승 대속 제사를 집행하는(그들이 입고 있던 무화과 나뭇잎 옷을 벗기고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줌)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창3:21) 그래서 그들은 자기 두 아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교육 시켰으나 가인은 오히려 친동생을 살인했습니다.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었고 부모는 다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그런 경건한 사람의 계열에 에녹과 노아가 나왔는데, 결국은 경건한 자들마저 사악한 자들에 물들어 모두가 노아 홍수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창6:1-8)
둘째는 고대에는 성경은 있을 수 없었고 인간 사회에 도덕과 종교의 체계도 훨씬 뒤에 생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은 당신의 인류 구속사의 일꾼으로 택한 남은 자에게는 당신과 당신의 뜻에 대해서 성령의 음성으로 직통으로 계시해주었습니다.
질문 6.
상기 3번 답변에서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시시비비를 따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예정론이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이 죄일까요? 그리고 만약 예정론에 대한 의문이나 다른 의문들이 계속 해소되지 않는다면,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 받아드리고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까요?
답변 6.
제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지 말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신자 쪽에서 판단 주장 반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미 완료된 창조와 또 당신만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으로 구원으로 예정하는 것 둘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대신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성품이나 역사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그와는 다른 차원이고 신자는 의심을 많이 할수록 더 깊이 그분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5,16) 베드로 사도는 오히려 그렇게 하라고 권하며 지금 이런 문답을 주고받는 것이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면 맹신, 광신, 미신의 이단으로 빠질 소지가 많아집니다.
그러나 사도의 권면대로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선하신 유일한 존재라는 진리는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 절대적 진리 안에서 여러 의심을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 풀어나가다 보면,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공의와 사랑에 비추어 보면 그분의 뜻과 계획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외부에서 하나님이나 성경에 대해 가해지는 불합리한 비방에 대해서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었다는 점을 깨우쳐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3/1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