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자의 영은 어떤 상태인가요?
[질문]
오늘 교회에서 거듭난 자의 영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하고 거룩한 상태로 변화 되었는가의 문제로 긴 시간 토론이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사람의 거듭남은 존재론적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심에 근거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지요?
[답변]
답변부터 말씀드리면 질문자님의 의견이 옳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라곤 단 하나 없었을 뿐 아니라 죽음으로도 못 다 갚을 죄 값을 담당하신 예수님의 의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신 것뿐입니다. 구원 받았다고 그 영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하고 거룩한 상태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반대가 옳다면 신자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실상(實狀)인데 그 원인이 애매해집니다. 영은 온전한데 순전히 세상과 사단의 훼방에 넘어가 죄를 짓는 것입니까? 또는 그 거듭난 영과 별도로 아담의 원죄로 타락한 영이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신자 속에 두 가지 다른 영이 공존하는 셈이지 않습니까? 성령까지 합치면 셋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듭난 자의 영이 완전해졌다면 구태여 성령님이 임재 내주하실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좀 더 정확한 답변을 드리려면 거듭난 영이 완전한 상태로 변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근거와 이유도 함께 참조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사정이 못되기에 원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최초 인간 아담의 영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와, 타락한 후 원죄 하의 인간의 영의 상태와,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난 자의 영의 상태를 각기 비교해서 그 답을 얻어 보자는 뜻입니다.
타락 전 아담의 영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하나님은 인간만 모든 피조물과 다르게 직접 지으시고 또 당신의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직분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겐 다른 피조물과, 특별히 여느 동물과도 달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이 있습니다. 동물도 지정의는 갖고 있지만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에만 충실할 수 있는 초보적 수준일 따름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당신 대신에 다스려야 하고 또 영으로 당신과 교통한 내용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고급한 지정의를 부여 받은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 빼고 동산의 모든 열매는 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고급한 지정의를 갖고 있어도 세상만사를 주도할 절대적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동산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분 뜻대로 동산을 다스리기만 한다면 나머지 모든 일은 인간 임의로 치리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대로 이 땅을 다스려야 했고 죄악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 뜻에 맞게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의 이름을 지었습니다.(19절) 나아가 돕는 배필로 준 이브와도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그야말로 일심동체가 되었기에 서로 감출 것 하나 없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2:25)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순종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작동되었습니다. 그 영이 죄로 물들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 세상의 절대적 주권자로 모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 전 인간 영의 상태는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으로 대변됩니다. 당연히 윤리적으로도 선만 행하고 악은 몰랐습니다.
타락 후 원죄 하의 영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6-10)
아담과 이브는 사단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을 고의로 거역했습니다. 선악과 명령을 깨트린 것이 단순히 계명 하나를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고의로 동산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배척하고 그분께 순종하던 청지기직을 내던져버린 것입니다. 이제부터 인간이 주인이 되어 세상을 제 멋대로 다스리겠다는 작정이었습니다. 자유의지를 사용해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단을 따른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 또 사람들 사이에 부끄러움이 생겼습니다. 벌거벗었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진정한 사랑을 하던 부부사이마저 이제 서로 감추며 잘못을 상대에게 돌리며 비방하기 바빴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기가 두려워져 고의로 피해 다녔습니다. 아니 아예 하나님이 싫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끼리는 수치심이, 하나님에 대해선 죄책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의 영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런 상태로 생명나무 실과마저 먹으면 영영 타락한 상태에서 구원의 길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산 동편의 생명나무를 천사들과 화염으로 지키게 하고 아담과 이브는 동산에서 쫓아내었습니다.(3:22-24) 그렇다고 인간을 타락된 상태로 영영 방치하시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고 때가 차면 독생자를 성육신하여 유대 땅으로 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담 이후의 인간은 모두 그 영이 타락된 즉, 사단의 권세에 묶인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인류 구속계획에 쓰임 받은 일부 하나님의 종들을 제외하고선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 종들도 사실은 원죄 하에 태어났지만 하나님이 성령으로 간섭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고 순종케 만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인간은 우주만물의 창조자요 운행자인 하나님을 고의로 거부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인생을 살았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롬1:23).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까닭에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었습니다. 참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을 버리자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을 알지 못하고, 또 진선미의 원천이신 그분을 버리자 더러움과 추함만이 세상을 지배해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인간의 발은 피 흘리는데 바빠졌습니다.(롬3:9-18)
물론 인간이 항상 죄만 짓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흔적이 양심의 상태로 일부 남아 있어서 때로는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창8:21))하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렘17:9)이 되었습니다. 비록 때로 겉으로 의로운 모습이 보여도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는 정도입니다. 내면의 영혼은 평생을 두고 일관되게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이 주인 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타락 후 영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일관되게 고의로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그분을 찾아서 그분 뜻대로 따르겠다는 방향으로는 자유의지가 아예 작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타락된 상태로 동산에서 쫓겨난 필연적 결과입니다. 인간의 영에 하나님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간혹 돌리더라도 그분의 영광의 빛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사단의 족쇄가 채워진 것입니다. 윤리적인 죄도 하나님과 단절된 데서 자연히 발생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온갖 죄를 짓는 모습 자체가 타락한 영의 본질이 아니고, 타락된 영으로 인해 인간의 지정의는 죄 쪽으로만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의 죄를 아무 연관 없는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연좌제 같은 식으로 원죄를 이해해선 안 됩니다. 철학적, 종교적으로 너무 심각하게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영적 실상을 정확히 묘사한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믿기 전의 상태를 따져보면 쉽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믿었기에 세상의 것들로만 풍족하고 안락하게 살려고 했지 않습니까? 좋은 것을 서로 많이 먼저 차지하려는 싸움만 일삼는 삶이자, 자기 욕심과 기분을 거슬리는 모든 자는 무조건 미워하는 인생이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바로 그런 상태가 원죄이자 타락한 영의 모습인 것입니다.
거듭난 영의 상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5,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듭난다는 것은 당신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도 오직 성령으로만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믿음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를 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당신 형상대로 만드시어 영을 주신 이유는 당신의 뜻대로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타락한 영이었다면 이제 성령으로 거듭나는 영은 당연히 그 목적으로 회복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못하며 오직 세상의 것들에 묶여 있던 마음이 이제는 기꺼이 그분을 알아서 그분 뜻대로 인생을 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나 실체가 아님을 알며 하늘의 영원한 것을 소망하며 신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하고 거룩한 상태로 변화”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영이 인간에게 하는 핵심 역할은 지정의, 특별히 자유의지가 작동하는 방향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자신(다른 말로 세상과 사단) 둘 중에 어느 쪽으로 그 삶과 인생을 이끌고 갈 것인지가 영의 주된 과제였습니다. 타락 전에는 아담으로 하나님을 향해 서게 했던 영이, 타락 후에는 사단 쪽으로 보게 했고, 이제 예수님 은혜로 성령으로 거듭난 영은 다시 하나님을 향해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영은 사단에 묶여있던 타성에 젖어서 때로는 하나님 대신에 자기를 따르던 이전의 습관이 발동됩니다. 구원 이후에도 죄를 짓게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5)
자기 지체 속에 두 가지 법이 있다고 해서 영이 둘이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속 사람, 마음(의 법), 내 자신 등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섬긴다고 합니다. 영은 이미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방향 전환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악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악은 바로 육신인데 인간의 신체(body)가 아닙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려는 오래된 습성입니다. 그 습성 때문에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제는 더 이상 예수를 모르고 세상과 사단에 묶여 헛되게 살던 삶으로는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영생을 소유했으며 하나님 사랑 가운데 끊어질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분 뜻대로 순종하며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픈 소망이 솟아납니다. 비록 그렇게 헌신 실천하는 모습이 더디고, 넘어지고, 심지어 죄에 빠져 실패하는 경우가 있어도 말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그 영이 바라보는 방향은 여전히 하나님 쪽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분 쪽으로 넘어진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영의 역할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합니다. 영이란 지정의처럼 확연히 인지할 수 있는 내면의 실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정의의 배경에서 지정의를 작동하게 즉, 하나님과 세상 중에서 한쪽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힘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순간순간 느끼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전부 항상 품고 있던 마음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그 마음을 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마음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정확하게는 정반대가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했던 상태가 이제는 만물 중에 최고로 깨끗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을 소망하게 된 것뿐입니다. 그 실제적인 모습은 인생관 역사관 가치관 인간관, 무엇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이 이전과 정반대가 된 것입니다. 이 땅의 안락과 풍요 대신에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것입니다. 물질이 자기를 행복케 해 줄 목적이었다가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수단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게 되니까 자연히 윤리적 의와 선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 자체가 죄를 전혀 지을 수 없는 상태로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영이 하나의 굳어진 형체 내지 힘이 되어버립니다. 인간을, 아무리 선하고 긍정적 모습이긴 해도, 일종의 로봇으로 전락시키는 셈입니다. 자유의지는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타락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 거듭난 영의 모습입니다.
영이란 자유의지의 작동에 따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따라서 바울처럼 자유의지가 아직도 지체 속에 남아 있는 악에게 져서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되면 영이 곤고한 상태가 됩니다. 신자가 어쩌다 죄를 지으면 영이 눌립니다. 말씀과 기도로 다시 회개하면 영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게끔 소생되지만, 회개가 더디고 부지불식간에 죄를 지으면 함께 내주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대신해 줍니다. 때로는 강권적으로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로 이끕니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은 진리로 책망하는 영이신 성령을 신자에게 내주케 하시고 일생 동안 신자를 떠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2-1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대표적인 두 구절만 인용했지만 성경은 거듭난 신자더러 성화를 이루라고 수없이 강조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도우심으로 십자가 진리를 회상하며 죄와는 평생 동안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신자의 삶의 순간순간은 영적 전투입니다. 자유의지를 사용해 주님을 따를지 자기를 따를지 선택, 결단, 실천하는 싸움입니다. 그 영이 하나님을 항상 소망해야 하며 또 바로 그러기 위해 자유의지를 동원해 그분과의 관계에 다른 방해물이 개입되지 않도록, 특별히 자기만 위하는 옛 습성이 도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에 전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이 잠시 곁눈질 하거나 뒤돌아보지 않게, 근본 방향은 안 바뀜, 말입니다.
실질적 영의 변화는 있다.
어떤 논쟁이든 제대로 진행이 되어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려면 논쟁의 주제와 용어의 정의에 대한 상호 합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논쟁이 다루고자 하는 범주의 한계를 정해서 곁길로 빠지지 않게 하려는 뜻입니다. 만약 이런 범주가 정해지지 않으면 중구난방식의 이론만 무성해지면 무엇이 옳은지 잘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토론 참가자 모두가 일견 타당하고 좋은 의견들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제는 “거듭난 자의 영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하고 거룩한 상태로 변화 되었는가?”라고 아주 명확하게 진술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신자도 분명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럼 이 주제는 “신자는 죄를 짓더라도 신자의 영은 완전한 모습으로 바뀌었는가?”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럼 또 반드시 신자의 “영”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 명확한 상호합의를 먼저 이뤄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앞에서 영을 지정의를 작동시키는 마음의 힘이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통로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인간 내면에 하나의 영만 있지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한 것입니다.
만약 거듭난 자의 영이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하고 거룩한 상태로 변화되었다면, 죄를 짓게 만드는 또 다른 실체가 인간내면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정의이든, 바울이 말한 대로 죄의 법이 되었든지 간에 심각한 신학적 오류가, 단순한 논리적 착오가 아니라 실상과도 전혀 다른, 발생합니다. 신자가 죄 짓는 것은 영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 됩니다. 그럼 잠시나마 영이 하는 역할이 전혀 없다는 즉, 가사(假死) 상태로 바뀐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몇 가지 다른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영과 관계없이 자유의지가 수시로 선(하나님의 법)과 악(죄의 법)을 선택하여 따른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영이 없거나 작동하지 않으면 인간은 아예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당장에 하나님의 법을 선택해 따를 방도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영이 없이 지정의만 가지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이 아니라 고급한 짐승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니면 서두에도 말씀드린 대로 사단의 악한 영이 아직 남아 있어서 인간이 때로는 성령을 따르고 다른 때는 악령을 따른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 내면에 두 가지 영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인데 사단의 영과 함께 거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인간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이 너무 심하게 파괴되었기에 거듭나도 완전 원상복구가 안 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사단이 아닌 여전히 인간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은혜를 베풀어 줄 대상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주하여 신자로 그리스도를 닮게 변화시키며 하늘을 향한 소망을 키우도록 항상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거듭난 영은 궁극적으로 거룩한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되어 있기에 거룩하다고 말하면 옳습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평생을 함께 하므로 그 영도 거룩해졌다고 진술하면, 신자는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데도 그분께 불려나왔으니 성도라고 불리는 것처럼, 틀린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영은, 어떤 순간적 행위로는 몰라도, 다시는 자기 존재를 걸고는 하나님을 배역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과 자유의지가 각기 별도로 작동된다는 의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설명은 틀린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거듭남은 존재론적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심에 근거한다.”는 말도 조금 보충해 살펴볼 여지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심은 구원을 죄의 심판이라는 법률적 측면에서만 설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결과적 의미를 살핀 것이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영의 상태를 묘사하기는 조금 미흡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서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그분의 심판의 법정에서 무조건 사면 받는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의입니다. 자기 대신 예수님이 모든 죄 값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의 의를 죄인에게 전가하신 것입니다. 전혀 의롭지 않지만 의롭다고 여겨준 것입니다. 거룩하게 변한 것 하나 없이 심지어 예수를 믿으려는 의도도 하지 않았는데 성령의 간섭으로 그분의 빛과 생명 가운데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법률적 선고와는 별도로 인간 쪽에서도 반드시 그에 상응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는 생생한 체험을 해야 합니다. 물론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의 간섭은 인간이 명료하게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난 후에는 자신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었다는 확신은 생깁니다. 그리고 그 바뀜의 과정이 스스로 분석, 판단, 결정, 시행,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분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도 주는 것 없이 싫던 예수가 불현듯 아무 까닭도 없이 너무나 좋아집니다. 삶도 현실적 안락과 풍요를 목표로 하던 데서 그분을 따라 가며 그분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것으로 바뀝니다. 정말 주님께만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말하자면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어 구원 받았기에 신자의 영의 실질적 변화는 전혀 없다고 여기면 이 또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성령이 함께 해주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대로 자유의지에 묶였던 사단의 족쇄가 풀렸기에 이제는 기꺼이 자신의 영이 주님만 갈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지정의를 주님의 뜻에 맞추어 그분께 순종하려고 영이 작동하는 방향만은 분명히 전환된 것입니다.
3/14/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