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유업을 받고 있는가?

조회 수 463 추천 수 29 2010.04.16 04: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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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유업을 받고 있는가?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1-7)


일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은?

여러분이 지금껏 살아온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정말로 제일 신나고 기뻤던 일말이다. 대학입학, 결혼, 취직, 첫 아이 출생, 미국 이민, 드디어 영주권을 손에 쥔 일인가? 교회 오래 다닌 분들은 목사가 이런 식으로 물었을 때는 정답이 보기 가운데 없고 엉뚱한 것이라고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게 눈치로 때리는 답이나 교과서에 나올 법한 정답 말고 그 질문을 듣자마자 곧바로 저절로 떠오른 답이 무엇인가?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대답이야말로 평소에 생각하든바 그대로이지 않겠는가?

제 경우는 예수를 처음 믿었던 일이다. 만약에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하다. 천안함이 침몰하기 사흘 전에 승선취소가 된 장병이 심정이 “침통하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오늘 아침 인터넷에서 언뜻 보았다. 바로 그런 경우와 같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 인생이 침몰할 일밖에 없으므로 너무나 안타깝다. 대신에 내가 그 침몰할 배에 탈 뻔 했으니 얼마나 아찔한가?

목사로서 지금 설교하기 위해서 과장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정말로 진심이다. 그렇다고 예수 믿은 후에 현실적으로 형통한 것은 전혀 없다. 제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예수를 믿고 이전과 달라진 사항들을 기록해보았다. 이는 예수 믿는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변화만 기록했던 것이다.

약 30가지 정도가 넘었었는데 그 메모는 없어져버렸다.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는, 이전 같으면 전혀 거들떠보지 않던 이웃을 위해 새벽기도에 눈물 흘리며 기도한 것이다. 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기는커녕 아예 시답잖게 여겼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잘났다고 그 교만이 꼭지에 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제가 억만 장자가 되어 세상 재미를 다 누렸던, 크게 출세하여 온갖 권력을 휘둘러보았던들 남을 위해 기도도 한 번 못하고 죽었다면 그만큼 헛되고 실패한 인생이 따로 있겠는가?

오늘의 성경 본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는 율법에 묶인 종의 신세였지만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바뀐다고 한다. 종이 아들로 바뀌는 것은 엄청난 변화다. 특별히 고대 사회에선 그 둘의 신분과 특권은 비교조차 안 된다.

예수를 믿은 인생은 기껏 아주 나빴는데 조금 덜 나빠지거나, 덜 좋았는데 조금 더 좋아지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극과 극의 정반대의 위치로 바뀌는 것이다. 수치로 비유하자면 마이너스 무한대에서 플러스의 무한대로 옮겨지는 것이다. 지금 예배 보러 나온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놀랍고도 무한한 사랑과 권능을 현재 받고 있다. 그분의 은혜의 장중에 완전히 붙잡혀 있기에 현실의 삶에서도 넉넉하게 승리할 수 있다.

두 가지 Free Hotdog 광고
  
별로 실감을 못하는 분들도 꽤 있는 것 같다. “하나님 제가 새벽기도는 물론 교회 행사 빠진 적이라곤 없고 열심히 봉사했는데, 불경기로 수입이 반으로 줄어들었어도 십일조 주일헌금 무리하게 꼬박꼬박 드렸는데, 다른 것도 아니라 그저 먹고 살게만 해달라는 이 간단한 기도조차 왜 이리 안 들어주십니까?”라는 심정이 든다.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만 되어가니 대체 어떤 연유인지 의심과 불만이 끊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의심과 불만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예수를 믿기는 믿었으되 아직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한 분 예수님뿐이다. 하나님에겐 손자도 없다. 그럼에도 예수를 믿는 자는 당신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당신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했다. 신자는 명목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이 없는 이유는 예수님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대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정말 문자적으로 예수님을 그저 열심히 믿기만 한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적 진리다. 전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진술이 뜻하는 내용과 핵심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해를 돕기 위해 쉬운 비유를 들어보겠다. 이곳 시청에서 “일요일 OO 공원으로 오전 열시까지 오면 Free Hotdog를 주겠다.”는 광고를 했다 치자. 그럼 공짜로 핫도그를 먹게 되는 근거는 오직 공원에 열시까지 간 것 때문이다. 열시 넘어서 도착하면 자격 미달로 절대 먹을 수 없다.  

반면에 여러분이 다니는 회사에서 일요일에 야유회를 가면서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광고를 했다 치자. 이 경우에는 공짜로 핫도그를 먹을 수 있는 근거는 공원에 열시까지 도착한 것 때문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 회사의 직원이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 직원이라면 아무리 일찍 공원에 가도 먹지 못한다. 반면에 직원은 혹시 열시 넘어서 도착해도 남아있는 핫도그를 먹을 수 있다.

어쨌든 두 경우 다 열시까지 공원에 가기는 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표현은 동일하지만 그 내용은 두 가지로 나뉜다. 내가 구원교리의 설명을 듣고 납득이 되어서 믿기로 결심했고 또 교회 출석하여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라 했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 대면이 없어서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확신이 없다면 첫 번째 경우에 해당된다.

말하자면 그렇게 믿은 믿음은 사실은 행위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사항이 하나 있다. 마음 속 생각으로만 믿기로 결단했으니까 행위가 아니라고 간주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없었을 뿐이다. 사고 활동이라고 표현하듯이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결심하고 믿었기에 비록 행동(行動)은 아니라도 여전히 행위(行爲)다.

나아가 나는 도덕적으로 더 선하고 영적으로도 조금 깨어 있었기에 복음을 잘 이해했다고 여길 수도 있다. 뒤집으면 남들은 도덕적으로 악하고 영적으로도 무지해서 못 알아먹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공적과 자랑과 교만에 불과해진다.

종과 아들의 차이

구원은 절대 그런 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마누라 등쌀에 떠밀려 이 자리에 나와 앉아있던, 집이 곧 은행차압에 넘어갈 것 같아서 교회에 나오면 무슨 뾰족한 수가 있나 싶어서 왔던, 골치 썩이는 아들 문제 때문에 마음에 안정이라도 얻을 양 출석했든 간에, 여러분 스스로 오게 된 것이 절대 아니다.

물론 스스로 결심해서 제 발로 걸어 나온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공원에 가야만 공짜 핫도그를 먹을 수 있듯이 여러분이 믿기는 믿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끌지 아니하면 이 예배의 자리에까지 나올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여러 분이 한국에 있었다면 아직도 교회에 제 발로 걸어가지 않았을 자가 태반이다. 미국에 와서 온갖 고생을 겪다보니까,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라도 코가 꿰여야만 교회에 나올 수 있음을 아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억지로 코를 꿴 이유는 무엇인가? 사업 형통의 복을 주려는 것인가? 건강 회복과 정서적 치유를 주려는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다.

그것도 아직도 죄 가운데 있어서 예수를 믿을 생각이 전혀 없는 자를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택해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했다.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그냥 두면 지옥행 비행기를 타서 추락 몰사할 것이기에 천국행 비행기로 갈아 태워준 것이다.

본문이 속한 전체 문맥의 주제는 바울이 복음을 변증한 것이다. 당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구원에는 십자가 은혜만으로는 부족하고 할례 같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은 이미 아브라함의 후손 즉, 아들이 되어 있고 거룩한 율법을 받았으니 그 율법이 자랑이 되고 또 그대로 따라야만 구원 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에 대해 바울은 다시 할례를 받으면 바로 행위구원인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다른 복음이 된다고 반박했다. 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율법은 인간을 종의 신세로 묶지만 복음만이 아들로 바뀔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시의 관습을 비유로 들어 설명했다.

로마의 귀족과 부자들은 공식 부인 외에 첩을 여러 명 두다보니 아들이 수십 명도 더 되었다. 그러다보니 아들이라고 해서 전부 호적에 올리고 재산을 분배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를 붙여서 교육과 훈련을 받게 했다.(2절) 그 중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물러 받아도 망하지 않고 성공시킬 똑똑한 아들만 골라 호적에 올리고 유산도 물려주었다. 그러지 못한 아들은 집안에서 종이 되거나 심지어 노예로 팔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비유의 초점이 인간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데에 있지 않다. 아들들끼리도 그 사정을 알아서 열심히 노력하기에 사실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아버지가 정한 때에 일방적으로 택해서 유업을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아들의 명분을 얻었다는(5절) 표현도 여러 아들 중에서 법적으로 입적이 되어 진짜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들인고로(6절), 종이 아니기에(7절), 아버지의 유업을 받는 것이다. 아버지의 인정이 없으면 아들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Free Hotdog의 비유처럼 예수를 믿기는 믿어야 하지만 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이 선행되어 그분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이다.(6절)  

너무나 더럽고 추한 인간

그럼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구원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딱 하나다. 다른 이유는 절대 없다. 우리 모두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점수로 치면 빵점, 아니 마이너스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고 하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15:19)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절대로 선하지 않다. 정말로 더럽고 추한 존재다.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로 증명할 수 있다. 사촌이 논을 사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야 하는데도 왜 배부터 살살 아픈가 말이다.

또 다른 증거를 쉽게 들 수 있다. 앞에서 로마 귀족이 자기 아들조차 호적에 올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노예로 팔았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에 인간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라는 당혹감이 분명 들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당혹감이 우리 모두가 전혀 의롭지 않다는 반증이 된다.  

홍길동을 생각해보라. 첩의 자식이라고 평생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했다. 족보에는 아예 오르지도 못했다. 결국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비록 가난한 자를 돕는 의적이었지만 따져보면 양반에게 복수하는 강도였지 않는가? 반면에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유대인 노예 신분인 주인공 벤허를 로마 사령관이 양자로 삼아 입적은 물론 유산도 주고 심지어 자기 인장반지를 빼서 끼워주었다. 자신의 직분과 권력까지 그대로 승계시킨 것이다.

그럼 우상을 섬겼던 음란한 로마 귀족과 삼강오륜을 철저히 지켰던 점잖은 한국 양반 중에 누가 더 의로운가? 로마 귀족인가? 아니다. 둘 다 똑 같다. 예수님이 그들 속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오직 지옥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로마 귀족이나 한국 양반이 첩에서 난 자식을 왜 멸시 했는가? 첩을 두는 이유는 순전히 하루 저녁 재미를 위한 것뿐이다. 그런 찰나의 재미에서 생긴 아들이니까 아들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종 같은 소유물로 취급한 것이다. 재미로 생긴 것이니까 재미로 처분해도 아무런 죄의식을 못 느낀 것이다.  

혹시라도 옛날 사람은 무식해서 그랬고 현대인인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가? 이 또한 전혀 틀린 생각이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주에 의료보험개혁 법안을 통과시키는 아주 선한 일을 해냈다. 저부터 가장 먼저 큰 박수를 쳤다. 저처럼 암을 앓은 적이 있는 자는 생명보험이나 의료보험에서 잘 받아주지 않는다. 간혹 받아줘도 아주 비싼 보험료를 요구하는데 새 법안에서 그런 차별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판까지 법안 통과가 힘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낙태에 연방 예산 지원을 금지한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옛날 사람은 비록 노예로 팔긴 했어도 자기 자식은 낳아서 길렀다. 심지어 벤허처럼 다른 종족의 노예 출신이라도 똑똑하면 아들로 삼아 유업을 주었다. 고대에도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꼬챙이로 찌르거나 독극물을 마셔 유산을 시킬 수 있었음에도 그랬다.

지금은 자기 아들을 하나님이 그 앞날을 얼마나 아름답고도 고귀하게 예비해 놓으셨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아예 관심도 없으면서 유산한다. 그것도 오직  부모가 키우기에 귀찮고 먹고 살기에 방해가 된다는 한 가지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그 일에 국민의 세금을 보태줘야 한다고 한다. 또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인권과 자유를 신장시키는 아주 선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런 입법을 만든 자들도 교회를 나간다. 정말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다른 복음을 믿은 것이다.

감옥 안과 밖

감옥 안에 있는 죄수들은 감옥 밖에 있는 자들보다 자기들이 더 죄가 많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들은 단지 돈과 권력이 없어서 즉, 무전유죄(無錢有罪)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은 반대로 유전무죄(有錢無罪)라는 것이다.

그럼 또 어떻게 되는가? 죄수들은 최소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일반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오히려 자기들이 죄수들보다 더 의롭다고 믿는다. 어느 쪽이 영적으로 더 깨어 있으며 또 구원에 가까운 것 같은가? 죄수들인가? 결코 아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예수를 일대일로 만나지 못했다면 영원한 심판을 받기는 똑 같다.

십자가상의 구원 받은 한쪽 강도가 구원을 얻은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죽기 직전에라도 빨리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아야지 하면서 스스로 결단하고 예수를 믿은 것인가? 절대 아니다. 당시는 그런 교리가 아직 형성되지도 않았다. 예수님도 혹시 소문을 들었을지는 몰라도 직접 만나기는 골고다 언덕이 생전 처음이었다.

그는 자기가 죽음으로도 죄 값을 갚지 못하는 철두철미한 죄인임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십자가 형벌이 너무나도 지당한 자기 같은 죄인도 과연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절규한 것이다. 예수님께 이런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통곡하며 매달린 것이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성령을 그의 마음에 불어넣어 준 것이다. 이 설명이 사실인지 아닌지 성경을(눅23:39-43) 다시 자세히 읽어보라.    

성경은, 다른 말로 하나님은 엄숙히 선포하고 있다. 만물 가운데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이다. 만물 중에 가장 더럽고 추한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싸이코패스처럼 날마다 강간 살인할 것을 모의하고 실행하며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제가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마음으로 간음을 수천 번도 더 했음을 깨달았다. 마음으로 살인마저 수천 번도 더 했는데 제가 죽인 자들 가운데는 제 아내도 있었다. 아내야 남이라 그렇다 치지만 부모님과 심지어 내 몸에서 난 자식들도 있었다. 솔직히 목사가 된 지금도 그 빈도수는 훨씬 떨어지긴 했어도 때때로 마음으로 간음하고 살인하고 있다.  

로마 귀족이나 홍길동의 아버지를 두고 인간의 탈을 쓰고도 그럴 수 있는가 입에 거품을 물면서 욕을 하면서도 막상 자기 아들은 눈도 깜박 안하고 죽이는 자가 바로 우리다. 어찌 가장 부패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진짜로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이라도 의로웠다면 예수님은 절대 이 땅에 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면. 혹은 내가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는 전혀 없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는 절대 의로워질 수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그분이 대신 죽으셨지 않는가?

예수 모르는 자연인은 그냥 두면 평생을 두고도 남을 위해 눈물 흘리며, 간혹 감정에 겨워 흘릴 수는 있겠지만 그 때뿐임,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끝까지 기도할 줄은 절대 모른다. 아니 자기 아내, 부모, 자식조차 정말 진정으로 사랑할 줄조차 모른다. 목사인 저를 필두로 모두가 수시로 마음에서 간음 살인하기에 그분이 오셔서 이런 우리의 연약함 체휼하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비와 은혜의 차이

신자들이 흔히들, 특별히 고난주간에는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그러나 이는 반쯤만 맞는 말이다. 나를 위해 죽었다고 하니까 나를 너무 사랑하셨다는 측면만 강조된다. 마치 우리가 당할 수치와 고통을 미리 막아주신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낭만적 감상적 기분으로 눈물 흘리며 십자가를 바라보기 십상이다. 물론 십자가에는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의, 사실은 더 중요한 측면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한 것보다는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이천년 전 고난 주일에 우리가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다면 바로 우리가 빌라도 총독이요, 대제사장이요, 바리새인이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유대 군중이었다. 정작 십자가에 달려 죽을 자는 저를 필두로 오늘 예배에 오신 우리 모두였다.

베드로가 수제자이면서도 자기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고 신자들마저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다른 제자들은 전부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도망갔다. 그나마 형장에까지 따라간 제자는 그가 유일했다. 과연 우리가 다른 제자 축에 속했겠는지 베드로정도라도 되었겠는지 각자 자신을 돌아보면 알 것이다. 어느 쪽이 되어도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전혀 의롭지 않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그래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구원은 반드시 두 차원을 거쳐야 이뤄진다는 뜻이다. 먼저 죽어 마땅한 죄인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신 것이다. 꼭 받아야만 하는 벌을 면제해 주었다. 신학적 용어로 ‘자비’ 혹은 ‘긍휼’(mercy)이다. 예수님이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고 말씀하신 대로다.  

다른 하나는 도저히 자격이 없는데도 너무나 큰 상을 보너스로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약속하신 대로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는 ‘은혜’(grace)라고 한다. 우리를 구원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것이다. 그분의 아들로서 받을 유업이 이미 천국에 예비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를 믿기만 하여서 영생의 은혜를 받으려 하면 자비의 단계를 생략한 셈이 된다. 자비 즉, 자신이 십자가에 실제로 달려 죽었다 깨어나는 체험 없이는 구원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또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다.  

“주여 내 속을 내가 봐도 너무나 추하고 더럽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정말 주님 말씀대로 간음과 살인뿐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봐도 스스로 부인하고 외면하고 싶을 뿐 아니라 저주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남들 앞에선 가진 돈과 지위와 교양과 지성으로 그 더러운 것을 감추어 왔습니다. 주님만이 이런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보혈로 깨끗케 해주시옵소서.” 십자가상의 구원 받은 강도와 같은 절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주님께선 내가 당해야 할 수치, 멸시, 핍박, 고통, 마지막으로 죽음까지 대신 짊어져 주셨습니다. 주님의 공로의 의존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령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모자라오니 그저 이렇게 엎드릴 뿐입니다.” 눈물어린 감격의 통곡이 터져 나와야 한다.

구원 얻어 예수를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다. 수시로 간음과 살인 쪽으로 흐르는 심히 부패한 마음을 주님의 의로 덧입혀져야 한다. 심령 깊숙한 곳 구석구석 하나 남기지 않고 끄집어내어 완전히 까뒤집어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발가벗고 엎드려 그분의 깨끗케 하심을 입어야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직 주님뿐입니다. 저의 영혼을 소성시켜 주시옵소서.”라고 날마다 그분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 믿은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정말 주는 것 없이 예수가 싫고 미웠다. 신자들은 진짜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인가 자기도 모르게 예수가 아무 이유 없이, 말하자면 현실적 형통을 받지 않았음에도, 그저 좋아진다.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심히 부패했던 우리의 영에 예수님의 영이 좌정해 주셨고 계속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마이너스 무한대에 있던 우리를 플러스 무한대로 옮겨주셨다. 그분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빛으로,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꿔주신 것이다. 우리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당연히 아무 근거 없이 싫었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분이 좋아진 것이다.    

믿음의 본질

여러분이 정말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빠듯한 형편에 무리하게 헌금하고 정말 뜨겁게 새벽마다 기도했는데도 왜 이 모양 이 꼴인가라는 의문을 이제는 해소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정말로 진지하게 점검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우선 하나님 쪽에 잘못이 있겠는가? 절대 아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의 이런 어려운 형편을 모르시겠는가? 그분의 손이 짧아서 구원을 못하시겠는가? 이 또한 아니다. 그분이 아신다면 직접 고난을 주시진 않았어도 최소한 허용 또는 묵인한 셈이다. 그럼 언제까지고 그 고난 가운데 우리를 버려두시지는 않을 것 아닌가? 당연히 피할 길도 그분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는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 그렇다면 그 의심과 불만의 원인은 순전히 우리 쪽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니까 정말로 내 노력으로 믿기만 한 것이다. 믿은 것 자체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공적이 되어서 그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만큼 열심히 믿고 성실히 봉사하고 때로는 손해와 희생도 불사했는데 하나님이 내게 해주신 것은 뭣이 있느냐고 따지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내가 믿은 만큼의 대가가 나타날 줄 기대하고  뜨겁게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십자가에 자신이 죽었다 살아난 체험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만 구했지 그 자비를 받은 적이 없다. 진짜로 완전히 죽을 자를 살려준 은인이라고 확신한다면 지금 우리가 갖는 식의 불만을 과연 갖다 들이댈 수 있겠는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벤허처럼 유대 노예였던 자가 로마 사령관의 반지를 이미 받아서 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매일 아침 아버지에게 문안 인사를 열심히 드려야 유업을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또 만약 그런 인사를 매일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고 기분이 더 좋아지는 아버지라면 아버지로서 자격이 모자라지 않는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아침마다 자발적으로 기꺼이 문안인사를 드릴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의 일을 염려하면서 말이다.

좋은 믿음이란 무엇인가? 아니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 행사 성실히 참석하고 헌금 많이 하고 대표기도 잘하는 것인가? 물론 그 모두가 귀하다. 그러나 좋은 믿음의 결과이지 그 본질은 아니다.

믿음이란 내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절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하고 의롭더라도, 종교적으로 크고 위대한 업적을 쌓아도, 심지어 영적으로 경건하고 심오한 결심과 실천을 해도 그분은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만 만사를 움직이신다는 원리를 온전히 붙드는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내 쪽에서 그분께 꺼내어 놓을 것이라고는 사실상 단 하나도 없음을 온전히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그분의 긍휼과 은혜만을 소원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은 후에 변화되었던 저의 모습을 기록했던 메모가 없어졌던 것이 처음에는 참 아쉬웠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런 일들을 기억하고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하나님 앞에 자랑과 교만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믿음을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고 그분의 유업을 다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는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실패와 환난을 겪더라도 이미 얻은 영생에는 아무 지장이 없으며 하나님의 유업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아빠라고 불러도 좋다고 허락하셨는데 다른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는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어지는 일이 생겼다면 예수 믿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어지는 일이 절대 안 생기는가? 아니다. 여전히 그럴 수 있고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이것이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그 원인이 자기 잘못이 아니면 재수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로 넘어지고 굴러도 심지어 코뼈 정도가 아니라 목뼈가 부러져도 그 넘어진 바로 앞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 하나다.

고난 주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마지막으로 다시 우리 각자에게 물어보자. 정말 예수 믿은 일이 내게 일생일대의 가장 크고 기뻤던 사건이었다고 확신하는지 말이다. 단순히 감상적으로 종교적으로 대답할 주제가 아니다. 그 진술이 뜻하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대답해야 한다.

일생에서 제일 신나고 좋았던 일이기에 앞으로 어떤 기쁜 일이 생겨도, 예컨대 슈퍼로또에 걸려도 그만큼은 좋지 않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좋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라 수십 배 나쁘다고 여겨야 한다. 왜 갑자기 아멘 소리가 약해지는가?

이 질문은 바꿔 말하면 새벽기도에 나오는 의미가 다음 둘 중에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다. 지금 돈이 없고 온갖 위급한 일들이 생겨서 금방 숨이 넘어갈듯이 울부짖어 빨리 해결받기 위해서 새벽기도에 나오는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은 그 사랑이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라기에, 하나님 말씀의 권능이 너무 풍성해서,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져 오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되었다는 것이 너무 귀해서, 새벽에 교회 와서 무릎만 꿇어도 감격의 눈물이 흐르기에 나오는가?

그 질문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예수 믿은 것이 일생에서 가장 좋았던 일이라면 앞으로 어떤 나쁜 일이 생겨도, 심지어 사업이 망해 집이 숏 세일에 넘어가도, 이전에 예수 안 믿었던 것에 비하면 전혀 나쁘지 않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나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불신자로 있는 것보다 수십 배나 더 좋아야 한다.  

다른 말로 단지 먹고 살게만 해달라고 지금껏 그렇게 끈질기고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왜 들어주지 않는지 불만과 의심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영적인 침체가 오다보면 자연발생적으로 그런 의심과 불만이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새벽기도마다 그렇다면 진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내가 예수를 만난 적이 있는지 재점검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로 예수님이 호산나 찬양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했으나 일주일 만에 모두가 등을 돌리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 죽음으로 마쳤던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많은 신자들이 금식하며, 특별 새벽기도하며, 어려운 자들을 찾아가 봉사하는 등 나름대로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며 또 그 고난에 동참하는 행사들을 하며 보낸다. 다 귀한 일이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그러나 어떤 행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딱 하나 있다. 인간이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난과는 절대 비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아니 비교하려 마음먹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다. 일회성 종교 행사를 하고는 그분의 고난에 동참했다고 여긴다면 그만한 교만과 가식이 없다.  

의미 있는 행사도 좋지만 정작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근본 이유와 뜻을 깊이 묵상하며 보내야 한다. 단순히 우리 죄를 사하여 구원하시려 했다고 여기면 자칫 교리적으로 납득 동의만 한 것으로 그칠 수 있다. 정말로 뼈저리게 나를 대신해 그분이 죽으셨다는, 아니 내가 바로 그 십자가에 달렸어야할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철두철미 깨달아야 한다. 지금도 날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는 그 죄의 본성이 시도 때도 없이 되살아남을 절감하기에 오직 예수님의 긍휼만 구해야 한다.  

이미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중생의 체험을 한 자는 첫 사랑의 기쁨을 회복하는 한 주간이 되고, 혹시라도 아직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면 성령의 간섭을 간구하며 정말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고저 소원하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한주간이 끝나면 양쪽 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물어도 내 일생일대에 최고로 신나고 기뻤던 사건은 예수를 만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된 일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 3/28/2010 종려주일에 LA Rowland Heights 소재 아름다운교회(담임 고승희 목사)에서 주일 설교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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