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술쟁이 하나님? - 선악과에 대한 첫째 의문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어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일을 맡겼다. 그리고 그 동산 안의 모든 나무 실과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되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엄하게 금했다. 이 금령(禁令)은 인류가 지금 이런 상태로 있게 된 시발점이었다.
성경은 최초 인간이 그 명령을 어김으로써 현재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지금은 그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벌을 받은 이후다. 만약 그가 명령을 어기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어느 모로나 훨씬 좋은 상황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들마저 이 선악과 금령에 대해 크게 세 가지의 의문을 가진다. 1) 하나님은 아담이 명령을 어길 줄 미리 알았으면서도 왜 그런 명령을 하셨는가?, 2) 선악을 알게 하는 즉, 좋은 분별력이 생기게 하는 열매를 먹었는데도 왜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도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벌을 말이다, 3) 만약 아담이 그 명령을 어기지 않고 지켰다면 인류는 육체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었을까? 세부적으로는 더 많은 의심들이 생길 수 있겠지만 가장 많이 제기되는 질문이므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그래도 잘못은 개구쟁이들에게 있다.
우선 첫째 질문은 자칫 신학적으로 복잡한 논쟁을 야기 시킬 수 있다. 예지(豫知)와 예정(豫定) 중에 어떤 것이 옳은가, 아니면 둘 다 동일하게 적용되되 어느 쪽에 더 무게 중심이 실리는지 등등이다. 지금은 그것을 일일이 논할 계제가 안 될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첫 질문의 초점은 그 쪽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이 명령을 어길 줄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이 아담이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채 도박하듯이 그 금령을 제정하셨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정작 지금 궁금한 것은 미리 알고도 그런 금령을 주었던 이유다.
제기된 질문 그대로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할 줄 알고도 금령을 제정했다. 그렇다면 일차적 답변은 간단히 얻을 수 있다. 아담이 타락하리라는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그렇게 했으니 당연히 타락하더라도 타락 전보다 더 좋거나, 최소한 같거나, 아니면 뭔가 회복될 만한 후속 조치가 있기에 그렇게 하셨다는 뜻이 된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최초 인간에게 아무 사후대책 없이 무조건 망할 수밖에 없는 명령을 내렸을 리는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 질문 안에 이미 그 답변이 내포된 셈이다. 다른 말로 질문 자체가 질문다운 질문으로 성립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질문인지는 이 질문을 하게 된 저변에 어떤 생각이 깔려 있는지 따져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질문의 근본적인 뜻은 지키지 못할 명령이라면 차라리 내리지 말았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비난이다. 또 그랬더라면 아담은 당신의 벌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인류도 영생복락을 누리거나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이었을 것 아니냐는 불만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인류의 고난을 야기한 아담의 범죄의 궁극적 원인은 오히려 하나님 쪽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잘못된, 아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그들의 생각을 비유하자면, 아래에 들 다른 예들과 함께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와 같다. 부자 집의 큰 감나무가 담장을 넘어 골목길에까지 뻗쳤는데 잘 익은 홍시가 주렁주렁 달렸다. 동네 꼬마들이 목말을 타거나 장대를 이용해 따먹을 수 있었다. 마당쇠 영감이 틀림없이 아이들이 감을 따먹을 줄 미리 알고선 담벼락 밑에 가만히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범행을 저지른 아이를 현장에서 잡아 혼쭐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심술궂은 영감 같지 않느냐는 것이다.
선악과가 이와 비슷한 상황인 것은 맞다. 그렇다 해도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단연코 남의 집 감을 따먹은 동네 악동들이다. 야단을 친 마당쇠는 자기 할 바를 다했다. 비록 숨어서 기다린 것이 좀 치사해 보이긴 해도 그 자체를 두고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쨌든 잘못은 남의 감을 따먹은 아이들에게 귀속되지 감나무를 심은 집주인과 하인에게는 없다.
마당쇠 영감으로선 도적이 오리라 예측하고 잡으려 미리 대비한 것뿐이다. 선악과와 비슷한 느낌을 줄려고 감나무를 예로 들었지만 만약 집안 금고의 보석이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괴도 루팡을 잡으려고 경찰이 매복하고 있는데 경찰과 루팡 중에 누가 잘못한 것인가 말이다.
이런 식의 의문과 반발을 갖는다는 자체가 사실 인간의 도덕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왜곡, 파괴 되어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자신의 단점, 허물, 잘못, 죄에 대해선 완전히 시야가 가려져 있다. 백일하에 들어났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도 많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은 어김없이 지적해내는 것이 모든 인간이 가진 가장 보편적 특성이다.
그런 성향을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적용한다. 지금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보다 그것을 심은 하나님에게 탓을 돌리지 않는가? 다른 모든 과실은 다 따먹도록 허락한 은혜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사실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타락하자 무엇이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성향이 생겼다. 자기만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기에 자신을 나무라거나 강요하는 자는, 하나님이라 해도, 크게 잘못한 것이다.
신자가 되어서도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조금만 현실이 잘못 풀리면 자신의 태만, 부주의, 판단착오, 오류 등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 탓만 한다. 그것도 자신의 정성과 열심으로 이룬 종교적 실적에 걸맞은 보상을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고 떼를 쓰면서 말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었던 원죄의 본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선악과 금령의 가장 본질적인 뜻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벌 줄 것이라는 문자적 진술에만 매달린다. 초점은 하나님이 벌준다는 데에만 가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가학성(加虐性)에 빠지거나 즐길 분이 절대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아담더러 제발, 나아가 절대 따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히브리 어법상 “먹지 말라”는 절대 부정문으로서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그분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또 “정녕” 죽는다고 말함으로써 한 번 더 그 의지를 강조했다. 요컨대 진짜로 죽으니까 절대 먹지 말라는 것이다.
냉장고의 Hot 소스 병을 보이며 어린 자녀에게 “절대 먹으면 안 된다. 먹으면 진짜 큰 일 난다.”라고 누차 강조할 때에, 그것을 어기기만 하면 부모 말 안 들었으니 곧장 크게 야단쳐야지 하고 야무지게 다짐하는 부모는 단 한 명도 없지 않는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제발 먹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방금 창조되어 에덴동산 사정에 전혀 낯선 아담에게 하나님이 과연 어떤 마음을 가졌을지 조금만 헤아려 보아도 그런 질문은 아예 발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미국 목사님이 선악과 금령을 쇼핑몰에 간 엄마와 아이로 비유했다. 이제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손목에 줄을 묶어서 엄마가 조정하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 줄은 아이가 가는대로 자동으로 풀리게 되어 있다. 엄마는 아이가 제 멋대로 가도록 버려두다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려 하면 곧바로 줄을 당겨서 막아준다.
그 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엄마의 무한하고도 진정한 사랑이다. 아이가 위험한 상황을 빼고는 제 마음대로 놀 수 있게 해주기에 무한한 사랑이다. 또 줄을 당겨 위험한 상황을 막아 준다는 데서 진정한 사랑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둘 중 하나만 있다면 결코 온전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반드시 둘이 합쳐져야만 그렇게 된다.
바로 그런 사랑을 아이에게 말로는 어떻게 표현하는가? “줄을 절대 스스로 풀지 말라. 풀면 진짜 큰 위험에 빠진다.” 이것 외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다. 또 아무리 잘 설명해주어야 제대로 이해도 못한다. 그 아이 수준에선 엄마가 왜 줄을 묶어가면서 엄하게 금했는지 온전히 깨달으려면 줄을 풀어버리고 혼자 다니다 위험에 빠진 후라야 가능하다.
갓난아이가 볼 때는 쇼핑몰 안에는 너무나 재미있고 신나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라 어떤 것이 위험하지 전혀 모른다. 다양한 색깔의 캔디를 담은 온갖 신기한 모양의 유리병도 있다. 아이 눈에는 여전히 영롱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로만 비취지, 잘못 만져 병이 깨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전혀 모른다.
이 정도로만 비유해 봐도 아담이 위반할 줄 알고도 선악과 금령을 주신 이유의 반(半)은 풀렸다. 무엇보다 부모 같은 사랑에 바탕을 둔 계명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아담이 절대로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엄마가 갓난아이와 항상 줄로 서로 묶여 있길 바란 것과 똑 같은 심정이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엄마가 당기는 것이 싫고 귀찮아서 스스로 줄을 벗는 일이 생기더라도, 또 엄마를 어떻게 오해하든 간에 엄마로선 반드시 줄로 묶었어야만 했다. 아이 입장에선 조금 귀찮다고 줄을 풀었다간 순식간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지경에 빠지지 않는가?
범할 줄 알고도 명하신 까닭은?
이제 쇼핑 몰에서 아이를 줄로 묶은 엄마의 뜻은 십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진한 부분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엄마 쪽에서 쇼핑몰에 아예 가지 말든지, 혹은 유리병 가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는 반발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고급 자동차를 열 대나 갖고 있는 엄청난 갑부가 있었다. 그가 여행을 떠나면서 갓 운전면허를 딴 틴에이저 아들에게 자동차 열쇠 열 개 전부를 맡겼다. 그리고 다른 모든 차는 마음대로 운전해도 되는데 아빠가 가장 아끼는, 예컨대 벤즈 600만은 타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난 경우와 같다.
만약 차고 문을 다 잠그고 열 개의 열쇠를 아예 주지도 않았다면 아들의 운전 솜씨를 전혀 믿지 못한 것이다. 또 아들이 임의로 행할 수 있는 자유도 완전히 막은 것이다. 아예 위험한 쇼핑몰 근처에 데리고 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럼 아이는 평생 쇼핑몰은 구경도 못하게 된다.
반면에 열쇠도 다 주고 차도 다 타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아빠가 눈에 안 보이는지라. 아빠가 있다는 인식이 점점 무디어질 것이다. 벤즈 600도 마음껏 탈 수 있으니 차츰 아빠가 가장 아끼는 차라고 미처 생각지 못한다. 나중에는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이었던 양 여길 것이다. 결국은 그 집 주인은 바로 그 아들이 될 것이다. 친구들을 불러다 놀면서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벤즈 600의 차고만 잠그고 그 열쇠를 아버지가 갖고 나머지는 다 주고 여행 갔다면 어떠한가? 아예 처음부터 벤즈 600은 없었던 양 치부할 것이다. 그 주인 아빠도 잊어버릴 것이다. 열쇠를 주고 가도 타지 말라고 말만하면 얼마든지 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데라고 순진하고도(?) 시건방진 생각을 할 것이다. 당연히 자기를 믿지 못해 열쇠를 주지 않았다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 경우, 아버지는 독재자요 아들은 그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부자간에 진정한 사랑과 신뢰는 실종되었다. 아들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벤즈를 타볼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 봉쇄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아들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아빠가 주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선악과 금령은 다시 말하지만 쇼핑몰의 엄마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인간더러 제발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그분의 울타리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함께 그분께 자발적으로 순종할 때에만 세상을 살아갈 참 된 능력과 은혜가 그분으로부터 인간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또 자동차 열쇠 전부를 맡기고 여행하는 것처럼 그분과 온전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아빠가 여행을 떠나면서 열쇠를 다 주고 가면 철없는 틴에이저 아들이 틀림없이 벤즈 600도 타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열쇠를 다 안 주면 아이는 당장에 자기를 못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반발할 것이 빤하다. 그렇다고 아이가 탈 수 있는 차의 열쇠만 주면 아이더러 임의로 집안을 관리하라는 의미가 전혀 없어진다. 아이가 어떤 짓을 해도 사고가 안 나게끔 미연에 다 방지해 놓은 셈이다. 아이는 그저 아빠 명령만 따르면 되는 로봇이 되어버린다.
아들의 성숙을 바라고 또 그렇게 키우려는 아빠라면 벤즈를 타리라 빤히 알지만 열쇠를 다 주고 떠나야만 한다. 혹시 운전미숙이나 사고로 벤즈가 고장 나고 부셔져도 아빠로선 문제 삼을 것 하나 없다. 돌아와서 일단은 엄하게 야단쳐도 진정한 사랑으로 용서해줄 것이니까 말이다. 또 갑부인지라 그 수리 비용쯤은 아무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을 용서하고 차 수리비를 감당할 능력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는 아빠라면, 나아가 아들을 온전히 사랑하여 스스로 성숙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아빠가 아니라면, 도저히 벤즈 열쇠까지 주지는 못한다. 선악과를 따먹든지 안 먹든지 아담의 임의에 맡긴, 그것도 따먹을 줄 알고서도 그렇게 한 하나님의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명령의 특성
신자마저 이 금령을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라기보다는 단순히 인간에게 명한 종교적 계명이라고 여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성경에 드러난 계명의 특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글에서도 이미 몇 번 든 예를 다시 들어보자.
시청에서 “일요일 OO 공원으로 오전 열시까지 오면 Free Hotdog를 주겠다.”는 광고를 했다 치자. 그럼 공짜로 핫도그를 먹게 되는 근거는 오직 공원에 열시까지 간 것 때문이다. 열시 넘어서 도착하면 자격 미달로 절대 먹을 수 없다.
반면에 회사에서 일요일에 야유회를 가면서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광고를 했다 치자. 이 경우에는 공짜로 핫도그를 먹을 수 있는 근거는 공원에 열시까지 도착한 것 때문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 회사의 직원이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 직원이라면 아무리 일찍 공원에 가도 먹지 못한다. 반면에 직원이라면 혹시 열시 넘어서 도착해도 남아있는 핫도그를 먹을 수 있다.
어쨌든 두 경우 다 열시까지 공원에 가기는 가야 먹을 수 있다. 그 표현은 동일하지만 내용은 이처럼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의 광고는 반드시 광고대로 따라야 하는 행위가 상을 받는 전제 조건이 된다. 후자는 직원이라는 이미 확보된 신분을 전제하고 공짜 핫도그를 먹고 못 먹고는 순전히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겨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계명도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군대처럼 상관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으로 해석하면 자연히 어기면 벌 받는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반면에 인간의 유익을 위한 권면으로 받아들인 자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하기만 하면 그 예비 된 복을 찾아 누릴 수 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이 방금 창조하여 심히 좋았던 당신의 첫 자녀에게 명한 것이다. 이미 그분의 백성이 된 신분을 전제하고 주신 권면이다. 지키고 안 지키고는 순전히 아담의 자유의지에 맡겨졌다. 그러나 그가 지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장중에 붙잡혀 있게 되는 반면에 어기면 그 은혜에서 벗어나게 된다.
계명의 성격상 분명 아담이 지켜야 했고 하나님도 지키길 간절히 원했다. 그럼에도 최종 결정권은 아담에게 있었다. 회사 직원으로 야유회는 가야 했지만 정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단지 공짜 핫도그를 먹을 수는 결코 없다. 벤즈 600을 탈지 말지 여부도 아들의 재량에 달렸다. 그러나 타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진정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변함없이 이어질 수 있다. 반면에 타면 그 관계에 일단 금이 가고 부자간에 해결 할 일는 용서와 치유와 회복과 회복 후의 성숙이 남을 뿐이다.
성경의 계명은 당연히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다. 그러나 “안 되면 되게 하라”면서 무조건 굴종을 요구하는 군대식 명령이 절대 아니다. 이미 당신의 백성이 되었음을 전제로 한 사랑의 권면이다. 불신자에겐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그들로선 하나님의 실존도 믿지 않는데 그분의 계명을 지킬 이유는 더더욱 없다.
반면에 신자라면 그분의 계명을 당연히 전부 지켜야 한다. 그러나 따라오는 상벌을 기대하거나 두려워서 그래선 안 된다. 아무리 포현 방식이 명령형이라 해도 하나님이 진정 바라는 바가 아니다. 신자는 이미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에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듯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순종 혹은 불순종했다는 그 행위를 보고 상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럼 더 많이 순종하면 더 많은 상을 주어야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미 순종하는 마음을 먹을 때부터 신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신다. 말하자면 계명을 실천으로 옮기기도 전에 그분과 영적 관계만 바로 되어 있어도 세상의 것으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너무나 큰 기쁨과 충만함이 넘치게 된다.
또 순종하여서 실천하면 자연히 따라오는 축복이 벌써부터 예비 되어 있다. 순종 후에 그 실적을 심사해서 상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벌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순종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상이다. 반대로 불순종 즉, 그 관계가 굽어지고 끊기는 것 자체가 벌이라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상벌에 대한 원칙은 선악과 계명에서 더 확고하게 드러난다.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으로 자유의지를 주신 바탕에서 하신 명령이다. 순종 여부는 전적으로 아담에게 달렸다. 다른 모든 과실을 먹게 했다. 또 선악과 금령을 순종하는 것 자체와 그 따라오는 결과는 엄청난 축복이었다. 하나님으로선 인간에게 해 줄 바는 전부 다하셨다. 그분에게 인간 타락의 책임은 정녕 전혀 없다.
그럼에도 신자들마저 군대식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만 이 금령을 이해하니까, 지키지 못할 명령을 한 상관이 잘못되었다고 반발하는 것이다. 지킬 수 없는 명령을 주었다면 분명히 상관의 잘못이다. 그러나 선악과 계명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명령이었다. 틴에이저 아들이 벤즈를 얼마든지 안 탈 수도 있듯이 말이다.
이처럼 성경의 모든 계명은, 첫 계명이 자유의지를 전제했기에, 절대적 명령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권면이자 호소다. 그럼에도 지키거나 안 지킨 결과는 영생과 죽음처럼 극과 극의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로 나눠진다.
하나님과 인간의 너무나 큰 격차
마지막으로 앞에서 열거할 예들이 다 완벽하지는 않다고 말한 이유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경우는 아무리 참 사랑과 진정한 신뢰를 앞세워서 자식을 줄로 묶거나 또 자동차 열쇠를 다 주어도 때로는 부모로서의 개인적인 욕심이 앞설 수 있다. 자식과 동일한 죄인 된 처지에서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고 신뢰하려 해도 불순물이 조금은 개입될 수 있다. 나아가 부모가 자녀에게 베풀 수 있는 보호와 인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갑부라도 아들이 모든 차를 다 고장 내놓으면 화부터 낼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나님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분은 인간 갑부와는 도무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분이다. 단순히 전지전능하여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인간만사를 섭리한다고 이해해선 안 된다. 모든 진실 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은 그분으로부터만 나온다. 그분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 신뢰에는 어떤 불순물도 개입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 용서와 치유의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며 원수 된 자가, 그것도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있어도 용서해 주실 수 있다.
또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어길 줄을 미리 알았어도 처음부터 그를 얕보거나, 무시하거나, 야단쳐서 고쳐야지라는 마음이 앞선 것이 절대 아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이 금령을 제정했다. 당신의 품을 벗어나선 절대 인간답게 살 수 없으니 제발 내 품에서 벗어나지만 말라는 오직 한 가지 소원뿐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사랑의 뜻은 모르고 지키지 못할 명령을 했다고 그저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인간과 그분의 격차는 너무나 커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악과 금령을 인간이 제대로 이해하든 못하든 그 명령 그대로 하나님을 배역한 인간은 진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한 치의 하자 없이 너무나 명료한 진리라는 것이다.
아들이 틀림없이 벤즈를 타리라 예상하고도 열쇠를 준 아빠가 여행에서 돌아왔다고 치자. 아들을 다시 만나면서 어떤 기대를 품었을까? 틀림없이 스스로 회개하여 이실직고 하며 용서를 구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들은 어떻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가? 그 집의 하인과 놀러온 친구들이 자꾸만 벤즈를 타보라고 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탔다고 다른 이의 탓으로 돌렸다. 또 아버지가 열쇠를 주고 가지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심지어 아빠에게서 궁극적 원인을 찾았다. 아빠로선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겠는가?
아담은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하나님이 이브만 제게 붙여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항변이다. 바로 “아담이 거역할 줄 미리 알고도 선악과 금령을 준 하나님이 나쁘지 않느냐? 차라리 그런 금령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것 아닌가?”라는 지금 논의하고 있는 첫째 질문과 그 내용이 똑 같지 않는가?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인지라 같은 내용의 의심과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이브도 하나님의 같은 추궁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핑계를 대었다. 친구들이 놀러 와서 자꾸 벤즈 600을 몰아보라고 꾀므로 어쩔 수 없이 탔으니 친구가 잘못이지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는 철없는 아들 모습 그대로다. 아버지는 이웃집 아이들에겐 관심이 없다. 문제는 자기 아들이 정말 아들다운 모습으로 성숙하기만 바랄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기껏 그런 정도의 핑계밖에 못 댄다는 사실조차도 미리 아셨다 또 그러니까 더더욱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이다. 금령의 뜻을 풀어서 말해보자. “제발 나의 품에서 벗어나지 말라. 나와 온전한 영적 교제를 이어가지 못하면 매사에 겨우 이런 정도의 수준 즉, 왜 거역할 줄 미리 알고도 선악과 금령을 주었는지 따지고 반발하는 수준 밖에 안 된다. 그러니 정말 참 인간답게 살려면 나의 말을 순종해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탈만 썼지 전혀 인간답지 못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죽음이지 않느냐?”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결코 인간을 우습게보고 경멸한 것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나며 천사보다 약간 못한 존재인 인간이, 그래서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릴 자로 삼은 인간조차도 죄악의 너무나 큰 힘 앞에는 맥을 못 쓸 수 있다는 것을 그분께서 진정 염려한 것이다. “제발 내 품을 벗어나지 말라. 그러면 곧 바로 사단의 장막으로 넘어간다. 그 중간 회색 지대는 결코 없다. 그러니 절대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
또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타락을 손을 놓고서 마냥 두고 보지 않으셨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타락할 줄 미리 알았다는 것은 그 대비책이 다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당신의 독생자를 매달 십자가가 이미 골고다 언덕에 예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당신의 뜻 가운데 있었기에 자유의지도 허락하고 선악과 금령도 주신 것이다.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꿀 만큼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또 선악과 금령이야말로 그분의 지고(至高)의 사랑과 긍휼에서 나온 것이지 않는가?
4/19/2010
다시 말씀을 새겨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오늘 하루도 생명을 허락 받고 살고 있음을 새로이 깨닫습니다
이런 사랑을 해주시는데도 마음대로 살고 있는 저로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표현 조차 황송하기만 합니다
그런 인간이어서 또 골고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의지합니다
주님 오실 그날까지, 주님 뵈올 그날까지...
평안하세요,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