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5:8,9)
아무리 믿음이 연약한 신자라도 영혼은커녕 생명도 없는 돌, 철, 나무 같은 조각상이 우주만물과 인생만사를 주관한다고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그럼 이 둘째 계명은 시효가 초과되어 현대인에겐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 모든 신자에게 영원한 진리가 됩니다. 본문은 오늘날 오히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아마도 고대인들도 깎아 만든 우상 자체가 신이라고 여길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신들을 인간 스스로 만들어 각기 의미와 능력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또 그렇게 고안해낸 신들의 특성을 적절히 상징, 전시, 대체할 수 있는 형상(image)을 만든 것입니다. 허공에다 대고 절하려니 어색하고 경건하지 않은 것 같아 가시적 형체를 만들고서 그에 적합한 온갖 예배 절차를 제정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상숭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고안해낸 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둘째 계명이 단순히 형상을 만들어 절하지 말라는 종교 형식적 차원이 아닙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상을 만든 인간의 의도가 큰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기 만족을 자기 방식대로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하나님과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당신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의식하든 못하든 동일한 잘못을 수없이 범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 안전, 만족, 행복 등을 보장해주는 대상을 한분 하나님 외에서 추구하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돈, 권력, 명예, 외모, 건강, 학벌, 심지어 자식의 성공 등이 삶의 유일한 목표 내지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으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라는(골3:5) 말씀의 뜻도 그런 것들이 인생사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탐하여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서 그것들을 받았어도 자신의 중심이 여전히 자기 유익만 위한다면 탐심인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오히려 하나님마저 우상 숭배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한데도 미처 모르고 지나칩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발안한 칼 마르크스는 독일계 유대인이었습니다. 경건하고도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 배경에서 자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루터교인이 많은 도시로 이사하자 부자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순전히 사업적 유익을 도모하고자 루터파 개신교로 개종해버렸습니다. 한참 감수성이 강하고 종교적 관심이 많던 시기였던지라 아들 마르크스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결국 그는 영국으로 이주하여서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라고 비꼬면서 ‘공산당선언’을 집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대교와 루터교가 여호와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은 동일하게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선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에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말하자면 다른 신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계명을 순전하게 해석 적용하면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오직 “자기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다른 신을 스스로 만들어 믿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그분을 우상숭배한 셈입니다. 마침 본문 말씀대로 그 아들이 부모의 본을 받은 결과 똑 같은 죄를 범하였고 당연히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뿐이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아버지 같은 신자가 과연 한둘에 불과할까요? 예컨대 한국에선 전혀 믿음이 없다가 이민 와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는 중요 이유가 바로 사업상 정보와 유익을 얻기 위한 것 아닙니까? 천지만물의 주관자이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 죽이셔서 죄에서 구원해준 하나님을 오직 자기 편의만을 위하여 자기 방식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그나마 기독교에 관해 아직 잘 몰랐기에 충분히 이해해줄 소지가 있습니다. 또 그런 경위로도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한국 있었으면 전혀 예수 믿지 않았을 사람인데도 외롭고 고달프며 스트레스 많은 이국땅에서 기댈 곳이란 하나님뿐임을 절감케 되어서 진정으로 겸비해집니다. 또 주일설교와 성경공부 같은 교회 활동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면 거듭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정작 문제는 오래된 신자들입니다. 분명 성령으로 거듭났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현실적으로 힘들면, 세상과 교회에서 상처 받아 자존심 상하면, 자식이 자기 뜻대로 자라주지 않으면, 배우자가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으면, 등등의 핑계로 오직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분은 반드시 내가 기대하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고안해 낸 신을 믿습니다. 그 중심은 분명 하나님을 믿으나 결과적으로 그분을 우상으로 격하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26:8-10)
여호와의 이름을 사모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어떤 크고 위엄이 넘치는 형상이든, 아무리 경건하고 엄숙하며 감동적인 형식과 절차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영혼으로 그 이름 즉,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나를 지금 어떻게 대하시는지 철저히 깨달아서 그에 온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에서 구원 받은 바탕 위에서 그분과 거룩한 교제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당신만 섬기라는 첫 계명을 주시기 전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6절)고 했습니다. 당신을 당신 본래의 성품과 권능대로 온전히 알면 자연히 경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 외에 다른 대상을 찾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고안해내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악인은 은총을 입지만 의를 배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즉 심판의 길에서 그분을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을 오직 자기를 위하여 찾는다는 것입니다. 또 전혀 찾지 않고 오직 세상의 유익만 추구해도 하나님은 당장 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의를 결코 입을 수 없기에 가만 두어도 궁극적 심판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의인은 어떠합니까? 비록 세상에선 은총을 입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의를 배우고 그분의 위엄을 높여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나를 위하여 그분을 내 방식대로 디자인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의를 위하여서 내가 어떤 모습이 되던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입니다. 요컨대 하나님마저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잘못을 온전히 제거해 내는 것이 참되고 성숙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4/15/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