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단 불을 꺼지 말아야 할 이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명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단 윗 석쇠 위에 아침까지 두고 단의 불로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레6:8,9)
레위기 6장 8-13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번제(燔祭, burnt offering)를 어떻게 드릴지 가르쳤습니다. 그 짧은 내용 가운데 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세 번이나 신신 당부했습니다(9,12,13절). 단순히 제물이 다 탈 동안만이 아닙니다. “단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라.”(12절)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라.”(13절) 제물이 없을 때도 하루 24시간 계속 피워두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일생 동안 당신의 뜻에 순종하며 전적으로 헌신하라는 것입니까? 물론 그러합니다. 번제를 드리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위해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민28:3)로 드리라고 요구한 까닭도 그것입니다.
그런데 단은 번제뿐 아니라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태우는 곳입니다. 예물로 곡식을 드리는 소제(素祭 cereal offering)도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야 했기에(레9:17, 레7:11-14) 단은 모든 제사에 다 사용됩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첫째 이유는 자신의 죄를 씻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단의 불을 꺼지지 않게 하려는 첫째 이유도 백성들의 죄를 씻는 성별의 절차를 결코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인간의 죄가 끝이 없기에 그 죄를 깨끗케 태울 불도 도무지 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곳은 성막, 솔로몬 이후로는 성전 한 곳뿐이었습니다. 성전 마당 한복판에도 번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끝없이 생겼을 것이며, 헌신과 화목의 제사도 자주 드렸을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상번제도 드려야 했습니다. 거기다 제물이 다 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현실적으로도 단의 불은 꺼질 새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성전에선 종일 제물 타는 연기가 하늘로 향해 올라갔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그 연기를 볼 수 있었고 냄새도 맡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허물과 죄 중에 있는지 실감했을 것입니다.
그 단의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죄가 끝없기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역으로 말하면 끝이 없기에 완전한 속죄는 영원히 이뤄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모든 죄를 희생 동물의 머리 위에 안수하면서 온전히 전가했고 그 제물을 다음날 아침까지 다 타도록 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럼 율법이, 특별히 제사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실제로 행한 역할이 무엇이었습니까? 끝없는 제사로 인해 자신들의 끝없는 죄의 본성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 죄를 씻을 방도가 자기에게 도무지 없다는 사실도 절감케 해주었던 것입니다.
성전 제사가 나중에는 진정한 회개는 수반되지 않은 채 형식적, 의무적 절차로만 전락해버린 첫째 이유는 물론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역설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많은 제사를 드렸지만 자신들의 영혼에 온전한 속죄가 임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깨끗이 용서하고 받아주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에 안식과 평강과 자유는 생기지 않고 도리어 앞으로 범죄하면 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번잡함만 염려됐을 것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形狀)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1-4)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비싼 제물을 바치며 번제를 드릴 현실적 방도는 없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제단이 수천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며 이스라엘 안에 가축은 금방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신에 백성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루 두 차례 상번제를 지내게 했고, 또 일 년에 일차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어린 양의 피로 용서를 간구하게끔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제사는 해마다 죄를 생각게 할 뿐이었으며, 완전한 속죄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드리는 일을 그칠 수 없었다고 성경은 확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상기 구절은 곧바로 시편 40:6-8절의 인용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5-7절)
동물 희생을 바치는, 그것도 “전체로” 드려지는 제사로는 속죄가 이뤄질 수 없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바쳐질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또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을 두루마리 즉, 구약성경 중에 모세오경에 예언해 놓았다고 합니다. 앞으로 올 메시야가 모세 같은 선지자일 뿐 아니라, 율법의 제사법도 바로 그분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항상 꺼지지 않는 불은 마지막 심판 날까지 인간은 죄에 찌들어 살 수 밖에 없는 위에,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단 한 가지 방법 외에는 말입니다. 번제단의 의미 그대로 죄인이 그 위에서 완전히 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제 당신께서 예비하신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위해서 대행할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번제단을 통해서 인간의 온전한 헌신을 끝없이 요구하기보다는 당신의 꺼지지 않는 긍휼을 당신 백성들로 알게 되기를 더 원했다는 것입니다. 구약백성들에게 끝없이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과도하게 요구하는 욕심쟁이가 아닙니다. 그 제물을 완전히 태워 바치지 않으면 죄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겠다는 심술쟁이는 더욱 아닙니다.
모든 인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인도하시겠다는 당신의 의지이자 열심의 표식이 번제단입니다. 죄인들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겸비함과 진정성을 갖고 서게 하는 것입니다. 천부여 저에게는 정말로 아무 의지 없으니 나를 박대하지 마시고 이 추하고 더러운 모습 그대로 받아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인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레10:1)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심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규정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진정과 열의 없이 건성으로 불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사장 직분을 받아 이스라엘 전 회중이 보는 앞에서 7일 동안의 엄숙한 위임예배(레8장)를 드린 직후입니다. 성막 안의 향단에 아침저녁으로 불을 붙이려면 반드시 번제단의 꺼지지 않는 불씨를 향로에 담아와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규정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불을 담아왔다면 번제단의 불이 꺼졌거나, 그 불이 너무 약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번제단 외의 다른 불을 가져왔다면 번제단 자체가 존재할 목적과 기능이 몽땅 부인되는 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속죄, 헌신, 화목, 친교 등이 이뤄질 방도가 전무(全無)하게 됩니다. 거기다 번제단의 불이 절대로 꺼지지 않아야 할 하나님의 의도도 완전히 실종됩니다. 인간 쪽에서의 끝없는 회개와 헌신으로도 진정한 구원은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만 이뤄질 수 있다는 그 의도 말입니다.
십자가가 부인되면 인류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모든 인간이 죄와 사탄과 사망의 노예로 묶여 있는 절망의 상태가 끝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제사절차를 어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죄라도 번제단의 꺼지지 않는 불,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는 방안이 없음을 실제로 예표한 것입니다. 바울이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9)라고 선포한 그대로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나 목회자가 유사 혹은 거짓 복음을 전하거나 복음 대신에 다른 가르침을 전한다면 바로 나답과 아비후와 같은 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꺼지지 않는 불은 죄악과 흑암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꺼지지 않는 영원한 저주를 상징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 이후로 그 불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꺼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도 함께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 사실은 처음부터 그랬지만 성령이 와서 그 완전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이후로 제사법은 물론 성전 자체도 다 폐기 되었지만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제사법을 수여하실 때 율법 안에 숨겨두신 주님의 십자가는 은혜는 태초부터 영원토록 단 한 치의 변개, 수정, 가감, 포기, 취소가 없는 것입니다.
성막이나 성전에서 매일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제물이 타는 연기를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와 죄 값에 대한 두려움은 분명 생겼을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언제든 저 번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치면 자기 죄가 용서된다는 안도감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금도 신자의 영혼의 내면에 구약의 번제단처럼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또 그 불은 절대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실패, 허물, 죄악을 바로 잡아주시는 이는 십자가의 예수님뿐임을, 스스로는 아무리 해도 불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엎드려야 합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참 빛이신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 무슨 형편이든 긍휼을 베풀려고 신자의 가슴 속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7/29/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