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동물제사보다 못한 신약 예배

조회 수 545 추천 수 1 2014.05.20 00: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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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동물제사보다 못한 신약 예배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내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시130:3-5)


구약의 제사는 반드시 동물을 죽여서 태워 바치는 절차가 필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 제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영단번(永單番 once for all)의 완전한 대속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폐지되었습니다. 율법은 복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원시적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구약의 성전제사는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신약 예배보다 차원이 낮았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었듯이 성전에 제사를 드리는 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이유와 목적을 밝힌 것입니다. 그 첫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죄를 사유(赦宥-용서)해주심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편은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1절)라고 시작합니다.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부르짖음이라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자신의 첫째가는 소망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 받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주일 예배드리러 오는 첫째 목적이 이런 신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러고도 오늘날의 예배가 영적으로 더 신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배의 형식과 신자의 겉모습만 현대화 된 것뿐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왔기에 더 이상 죄를 사유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섣불리 단정 지어선 안 됩니다. 본 시편도 십자가 복음을 너무나 잘 계시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이 시편을 비롯해 구약성경 곳곳에 복음에 대한 예표적인 언급이 보석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 구절들을 발견하여 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고 합니다. 우선 죄악을 감찰하시는 이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모든 죄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지은 죄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자백하여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감찰하신다면 도무지 감출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혼의 깊숙한 데 있는 죄까지 아시기에 정말로 영혼의 깊숙한 데서부터 자신의 전부를 꺼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혼의 깊숙한 죄까지 아신다면 어떤 인간도 그분 앞에 감히 설 수 없습니다.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과 그 지은 죄를 비추어볼 때에 너무나 부끄럽고 두렵다는 인식이 철저히 들어야 합니다. 죄의 추악함은 물론 자기 영혼의 가난함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온전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회개의 기도가 종교적 의식이나 의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성장이나 만족을 구하는 것과도 전혀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그분 앞에 자신의 전부를 단 하나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자발적으로 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일이 썩 내키지 않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으로 엄청나게 힘든 씨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름을 제대로 온전하게만 해내면 놀랍고도 풍성한 평강과 자유와 위로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오직 그분의 사유하시는 은혜만이 죄인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자격, 능력, 공로, 희생, 수고, 선행 등이 죄 사함의 근거나 조건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이 죄 사함의 필요 및 충분조건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그 용서에 털끝만치도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주권적이고 절대적 사랑만이 죄를 용서해주는 근거요, 이유요, 통로요, 능력일 뿐입니다.

거기다 주님의 사랑이 용서의 열매임도 간과해선 안 됩니다. 회개가 의무나 자기반성이 아니라고 말한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했으니 나 할 바를 다했고 또 앞으로는 그 동일한 죄에 대해 주의를 좀 더 하여서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여기고 그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 중에 주님의 사유하시는 긍휼 가운데 실제로 잠겨야 하며 진리의 말씀으로 영혼이 더욱 순결하게 되어서 회개 후에는 주님께 더욱 온전히 순종하는 동행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회개란 자신의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사랑의 품 안에 있음을 잠시 잊는 바람에 옆길로 빠졌지만 다시 그 품 안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본 기자가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바로 그런 절대적이고 온전한 사랑의 하나님이 사유해 주시기에 주를 경외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공로가 있어서 하나님이 그것을 감안하여 용서하셨다면 그 대가로 용서 받은 것이기에, 비록 0.001%밖에 작용하지 않았다 해도, 온전한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몫을 찾아내는 정당한 청구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100% 온전한 사랑이기에 신자도 그분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100% 온전한 경외를 바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자신에게 100% 온전한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는 심정이 대체로 어떠합니까? 솔직히 현실적 문제, 고난, 상처 등에서 해결, 구출, 위로 받기 위한 것 아닙니까? 오랜 기독 제목의 응답을 받거나 현재 갖고 있는 이런 저런 염려와 불안을 없애려는 목적입니다. 만약 현재 큰 문제가 없다면 기독교 신자로서 임무를 다하려는 정도입니다. 지난주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사유 받으려는 의식은 극히 드물지 않습니까? 고의로 아주 큰 죄를 짓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본 시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목적으로 현실의 형통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지 않습니까?

거기다 그 죄 사함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받기를 소원했습니다.(6절) 죄를 사했다고 확실하게 말씀해달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 비추어볼 때에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 죄가 되는지 세밀하게 깨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창조 이래로 인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과 계획을 다시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낸 이후에 출애굽, 광야의 방황, 가나안 정복 등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신 그 권능과 은혜를 회상하여서 그분의 크신 사랑 앞에 다시 완전히 무릎 꿇고서 항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유의 말씀을 기다리는 자세 또한 어떠합니까?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6절) 파숫군은 남들이 다 누워 잘 동안에 위급한 일이 없는지 살펴서 경종을 울리는 자입니다. 아무 문제없이 그 밤이 지나고 어서 빨리 아침이 와서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잘 마치도록 갈망합니다. 파숫군에게 아침은 목적지이자 종착지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오직 아침만 기다립니다. 유일한, 최대한 양보해도 첫째 목적입니다. 종착지인 아침이 밝아져야 비로소 온전한 안식도 맛볼 수 있습니다.    

신자가 말씀으로 온전한 죄 사함의 은혜를 받으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예배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죄악에서 구속해주시는 유일한 분이기에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죄 사함을 받으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바로 잡으려는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온전히 받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잡한 제사절차를 규정한 율법을 주신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레위기의 모든 제사는 속죄가 목적이었습니다. 화목제도 반드시 번제 즉, 속죄제와 함께 드리게 했습니다. 그분과 화해를 할 때에 비로소 그분의 인도와 간섭으로 거룩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제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 화목을 넘어 그분을 닮아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결론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7,8절) 여호와를 바라는 까닭은 당신의 인자하심에 바탕을 둔 풍성한 구속인데 그 구속은 모든 죄악을 사유하여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목적이 그분의 인자일 뿐입니다. 형통케 하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라는 전체 공동체의 모든 죄악에서의 구속이었습니다. 예배자 한 개인의 죄에서 구속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이런 예배의 목적을 알고 당신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길 바랐습니다. 또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을 닮아가며 거룩해질 때에 그 전체 공동체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더욱 확장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작금의 예배에선 교인들 마음에 상처를 줄까봐 죄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선포하면 근본주의라고 몰아붙입니다. 복음이 모든 죄를 깨끗케 했으니 더 이상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가르치는 이단마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 은혜가 신자가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앞으로 지을 죄에서 구원해주신 것은 분명 맞습니다. 그러나 그 죄로 받아야 할 지옥 영벌에서 제외시켰다는 뜻입니다. 그 신분이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에 영원히 붙들려 있을 그분의 자녀로 바뀐 것입니다. 그분의 자녀가 된 후에라도 잘못하면 심판 대신 징계를 받으며 그러지 않으면 친자식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제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즉, 영원한 심판에서 구속 받는 회개나 간구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알게 모르게 짓는 죄에 대한 회개는 죽을 때까지 계속 해서 하나님의 사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요컨대 신약교회 주일예배의 첫째 목적도 죄 사함을 받는 것으로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온전치 못한 교인은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해 영벌의 심판에서 구원 받게 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자는 하나님과 관계를 잠시 비뚤어지게 만든 구체적인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씨름을 평생토록 해야 합니다. 또 함께 힘을 합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교회 밖으로 확산되기 위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배 중의 하나님 말씀-설교는 오직 이 사역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신구약 공히 예배의 중심은 그리스도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5/6/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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