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7:22-26) 믿으려하지 말고 기대하라.

조회 수 1189 추천 수 47 2007.04.12 19: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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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한 주일학교 교사가 신약성경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겉표지에 각자 이름을 적으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초청하라고 설교하고 또 아이들로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후에 이제 성경 표지의 이름 밑에 “나는 예수님을 영접(accept)합니다.”라고 적으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 한 아이가 그렇게 적는 대신에 “나는 예수님을 기대(expect)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여 온전히 믿게 되었기에 구태여 다시 영접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반면에 주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 모습이 이 아이와는 달리 매번 예수님을 영접 단계도 아니라 초청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간단한 예로 주일 대표기도 때에 대개 “예수님 함께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물론 전체 회중 위에 성령님이 더 충만히 임재해 달라는 뜻의 간구이겠지만 하나님은 항상 동일한 권능과 은총으로 신자들이 모인 곳에는 이미 임재해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주님더러 임재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쪽의 마음 문을 열고 그 임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말이 맞습니다.

나아가 신자들이 힘든 일만 생기면 또 기도 응답이 조금만 지체해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아닐지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매번 기도 때마다 주님 함께 해 주시옵소서 또는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소리 내어 외칩니다. 이미 함께 하신 하나님을 왜 자꾸 부릅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믿고 난 이후에 신자가 할 일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신 약속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자기의 삶과 인생 속에서 이뤄질 것을 기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 이어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이미 믿고 난 이후 아닙니까?

현실적 약속도 했을 때는 이미 그것을 온전히 믿은 후입니다. 친구와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기로 약속해놓고는 친구가 나올지 안 나올지 못 믿는다면 약속이 아닙니다. 아무 의심 없이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 나가서 친구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기대만 하는 법입니다.

더 쉬운 예로 아빠가 아이에게 생일날 장난감을 선물로 사줄게라고 약속하면 아이가 어떤 마음이 됩니까? 그저 기뻐서 손꼽아 기다리기만 합니다. 아빠가 약속을 지킬 능력과 의도가 있는지 혹시 취소하지는 않을지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할 생각조차 못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아빠보다 못한 존재는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바울은 로마로 행선하다가 큰 풍랑을 만나 배의 짐을 바다에 버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20절) 선원들도 절망에 빠져 죽음의 문턱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안심하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즉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뤄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100% 완전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럼 그의 신앙이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어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기대는커녕 믿음도 없어지고, 나아가 믿음은커녕 염려만 생기는 것입니까?

또 다시 믿음이 많고 적은 것으로 따질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있는데 우리에게는 없는 것부터 찾아보아야 합니다. 우선 바울에겐 이방의 왕들과 방백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겠다는 인생의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거기에 생명마저 걸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풍랑에서 자기 목숨만 구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그 소명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가이사 앞에서 서야 한다”고 응답해 주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배만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응답도 받았습니다. 다른 말로 바울은 복음 전파 소명 말고는 어떤 다른 것에도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재물, 명예, 권력 등 소명을 이루는데 방해가 된다면 다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바울도 풍랑을 만났을 처음에는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담대하게 살아날 것이라고 자신해 눈도 깜짝 하지 않을 정도의 강심장 내지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럴 정도의 믿음은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만날 정도였다면 불안해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어떤 힘든 일이 일어나도 감수하겠으니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같이 있는 모두에게 죽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하라고 하면서 뭐라고 덧붙였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풍랑이 끝났다고 계획된 일정대로 순탄한 항해가 보장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증거이지 않습니까?

이제 바울과 우리의 차이는 확연해졌습니다. 그에게는 생명을 걸 소명이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드러나도록 소원하기에 어떤 고난도 순순히 각오 아니 기꺼이 기대했습니다. 진정으로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닥친 고난이 무슨 심각한 문제가 되겠습니까? 또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염려하기보다 그 소명이 이뤄지기를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신앙은 믿고 난 이후의 신앙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당신께서 하신 약속을 이미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우리 믿음으로 억지로 이뤄지거나, 빠르게 혹은 늦게 이뤄지거나, 아니면 변경되거나 취소될 리는 절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더더구나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을 걸고 하신 약속 아닙니까?

믿고 난 이후의 믿음이란 오직 하나님의 크고 오묘하신 간섭과 인도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가슴 설레며 기쁨으로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비오지 말라고 기도했다면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기도해도 비가 올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는다는 응답 내지 약속을 확실히 붙들었다면 우산은 필요 없어집니다.

바울처럼 머리터럭 하나 다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면 음식을 나눠 먹으며 담대하게 기다려야 합니다.(33-36절) 그것도 풍랑이 그칠 기미라고는 전혀 없는 바로 그 때에 말입니다. 신자는 기도하여 약속을 받았다면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아서 사람들이 일기예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쳐다 볼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금만 지나면 우산 들고 나온 사람이 오히려 신자를 부러워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미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자꾸 초대하려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이루실 일을 기대하는 자에게는 말입니다.

아침마다 새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미 약속하신 새 날이 밝았으니 정말 오늘 하루 하나님이 나에게 또 어떤 오묘하고도 풍성한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실까 기대하셔야 합니다.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들을 열심히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이미 믿은지라 큰 설렘으로 단지 이뤄질 것만 기대하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주님이 나를 통해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 확신하기에 그 일을 목숨을 걸면서 실제로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는 왜 그 분께 생명을 걸지 못합니까?

4/13/2007

조인구

2007.04.13 02:12:24
*.91.152.26

허경조

2007.04.14 13:28:23
*.183.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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