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3:39-43) 십자가 강도의 구원은?

조회 수 142 추천 수 0 2021.09.25 04:46:50

(눅23:39-43) 십자가 강도의 구원은? 

 

[질문]

 

불신자들이나 교회에 잠깐 다녔다 발길을 끊어서 안 믿는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이전에 들었던 하나님 구원교리가 진짜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들 것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 부디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구원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때 옆에 있던 죄수와 같은 케이스로 볼 수 있나요?

 

성경을 읽지 않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분의 구원 원리도 정확히 모르지만 그 순간의 회개 기도는 '진심일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확신하지 못하기에 혹시라도 지옥이 있다면 심판받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물론 두려움에서 하는 기도라면 십자가상의 죄수와 같지 않을지 모르지만 죽기 직전 그런 기도를 하는 자들 중에 일부라도 구원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답변]

 

우선 지난 도덕적 잘못들을 스스로 반성 회개하며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하나님이 실존하고 그분께 내 영혼을 의탁한다고 기도해도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런 정도는 모든 종교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영원한 절대자에 대한 소망이 무의식적으로라도 있기에 누구나 종교 없이도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심판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실제로 맺어진 개인적인 관계가 사후에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죽은 후에 이 땅에서 선행을 행한 성적표에 따라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만 살아 있을 때부터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여져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런 자가 죽은 후에도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런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예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죽음이 가까이 왔어도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십니다. 모든 인간의 영이 한 명의 예외 없이 전적으로 타락되어서 스스로는 하나님을 절대로 온전히 알지도 믿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성부)이 택한 자에게 성령님이 간섭하여서 예수님(성자)의 십자가 대속죽음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해주십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완악했던 옛 자아가 완전히 깨트려지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전인격적인 뒤집음이 있어야만 구원 받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한 죄인에게 합동으로 은혜를 베풀어준 열매가 구원입니다.

 

십자가의 죄수도 도덕적 죄들을 회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구주로 받아들이면서 전인적인 회심을 한 것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임종직전이라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구원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제 삼자로선 누가 하나님께 택함 받았는지 또 언제 어떻게 성령이 간섭할지 모르니까 마지막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주면서 십자가 복음을 알기 쉽게 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대로 그런 상황에선 지옥 심판이 너무 두려워 진정한 회개가 아닐 가능성도 많습니다. 구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의 중심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 전에 구원을 주기로 택한 자에게는 반드시 마지막 순간에도 성령이 그 심령에 역사해서 예수 십자가 사랑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삼위 하나님이 구원을 전적으로 주관하신다고 해서 본인은 아무런 의식이 없는 와중에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기적을 일으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길 기뻐하며(고전1:21), 예수를 믿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롬10:14) 오직 십자가 구원 진리의 말씀으로 한 죄인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만 구원을 이루십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누구나 간절함과 진정함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개인적 관계가 맺어져야만 합니다.

 

최근에 올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가장 확실한 증거 (5)" 글에서 이 문제를 아래처럼 부분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 유사한 주제를 성경문답 사이트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아래에 링크했으니 함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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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 신앙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아무런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창1:1)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너희가 다 인정했고 또 너무나 당연하게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따로 논의하지 않고 대신에 앞으로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해서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상하게 왜곡 모순되어 있는 인간의 상태를 올바른 참 인간의 형상대로 회복시켜주려고 예수님이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사실상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했다면 가장 먼저 어떻게 해야 될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십시오. 평생 동안 그분을 부인하다가 마지막 죽을 때가 되어서야 회개하고 절대자에게 의탁한들 그분이 받아들여주겠습니까? 아버지가 있는 줄 알면서도 집을 나가선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찾아오지도 않고 아버지가 소망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기 멋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니까 아버지를 찾아오는 꼴입니다. 그럼 아버지가 그를 온전한 자식 취급해 줄 리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전에 하나님이 언제 생명을 앗아갈지 모르기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회마저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임종직전 영접기도로 구원받는지요?

 

 

[추가 질문]

 

상기답변을 읽고 추가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십자가 옆에 있던 죄수는 자신의 옛 자아가 깨지고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과정과 물리적인 시간이 없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를 받아들이고 죽기 전에 회심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죄를 회개 한 번 하지 않고 바로 구원에 이를 수 있었나요? 이 죄수 역시 아버지가 소망하는 일과 전혀 무관하게 자기 멋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니까 아버지를 찾아온 케이스 아닙니까?? 단순히 임종직전 운(?)이 좋아 예수님 옆에서 죽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걸로 보여집니다.

 

[추가 답변]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39-43)

 

성경은 관련 자료나 증거를 세밀하게 밝히는 과학논문이나 역사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의 말씀으로 특별히 예수님과 그분의 대속구원에 관해 계시한 책입니다. 모든 말씀이 예수님과 십자가 구원을 정확히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진술되었습니다. 그 진리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부차적인 내용에 대해선 생략이 많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인간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서 가르치기 위해서 비유, 상징, 묵시 등의 문학적 기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 해석은 예수님과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되 수사적 기법도 감안해야 합니다. 특별히 생략된 부분에 대해선 앞뒤 문맥의 흐름에 기초하여 행간(行間)의 의미를 개연성 있게 추론해야 합니다.

상기 말씀도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구원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첫째 목적이자 그 의미입니다. 그 강도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는지 가르쳐주려는 것은 일차 목적이 아니며 그에 관해선 설명 드린 대로 따로 추론을 해봐야 합니다. 그럼 이 말씀의 첫째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운명하기 직전까지도 구원하기로 한 자는 반드시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7-39)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실행한 것입니다.

 

한 불쌍한 여인을 구원하려고 유대인들은 그 땅도 밟지 않는 사마리아에 주님은 의도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대 랍비는 아예 대화도 나누지 않는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복음을 전하여서 구원해주셨던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요4장) 예수님은 십자가에 두 죄수가 달리실 것을 다 아시고 그 중 한 명을 당신께서 택하여 구원을 주기로 이미 작정해서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세 십자가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죄수 둘이 좌우로 나눠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어서 구원 얻는 자와 끝까지 그분을 배척하여 심판을 얻는 자 둘로만 나뉜다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온 천하에 생생한 그림 언어로 선포한 것입니다. 누차 강조한 대로 도덕적 죄들을 회개했느냐 아니냐로 구원과 심판으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판 받은 죄수는 주님을 향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했습니다.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우리를 구해주지 못하니까 그리스도일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종교적 과대망상에 걸려 사람들을 미혹시킨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조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 사역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러자 구원받은 죄수가 그를 두고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라고 꾸짖었습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어서 지금 심판 받는 주제에 함부로 다른 죄수를 정죄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기부터 그분께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회개해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고 남을 정죄하는 너야말로 더 큰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야단친 것입니다.

 

반면에 이어서 그가 말한 내용은 다른 죄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가 윤리적으로 너무 커서 이 땅의 실정법상으로도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겸손히 인정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 자체로 성경기록에는 없어도 그 동안 자신의 잘못에 대해 수도 없이 회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흉악범의 경우 대체로 그가 야단친 죄수처럼 도리어 잘못된 사회와 사람들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불평과 원망을 퍼붓기 바쁘지 자기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기는커녕 쉽게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간혹 인정해도 자기에게 재수가 없었거나 권력과 가문의 든든한 배경이 없어서 억울하다는 변명이 따릅니다. 이 죄수는 반대로 자기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과 같은 벌을 받을 죄수가 전혀 아닐 뿐 아니라 행하신 일 모두가 선하기에 아예 죄라곤 없다고 말합니다. 요컨대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분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죄수에게 너는 하나님께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야단 친 것도 하나님 내지 그분이 보내신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정죄했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주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나온 기도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형으로 처벌될 것은 오래 전에 확정되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을 때에 혹은 짓고 나서 곧바로 십자가 처형을 받을 죄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큰 두려움에 분명히 휩싸였겠지만 이미 십자가에 매달리고 못이 박힌지라 체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일에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의 말은 사회적 윤리적 책임에선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비유하자면 빚쟁이에게 잘못했다고 빌면서 손해배상까지 한 셈인데 그럼더 이상 부담감 없이 마음이 후련해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진지라 그 이후가 사실은 더 문제입니다.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 한 후에 후련한 마음으로 그치는 자는 이 땅만 전부로 삼아 살고 사후의 심판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야단맞은 죄수도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유대 땅에 모르는 자가 없을 텐데도 인간은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었기에 맘껏 주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죄수는 자기 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했어도 여전히 죄책감은 남아 있었고 특별히 자신이 너무 추하다는 인식을 지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한 채 죽는다는 것 때문에 더 괴로웠던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신21:22,23) 가르침을 받았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운 좋게(?) 소문에 듣던 예수와 십자가에 같이 달렸고 같이 죽음을 앞두었습니다. 그가 만약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 랍비라고 여겼다면 그런 부탁을 할 필요가 없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설명 드린 대로 나무에 달렸기에 지옥 간다는 유대교의 정답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서도 안 되고 인간을 숭배해선 더더욱 안 되는 유대교 환경에서 이런 요청은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성격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이적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이분이 유대교와 다른 정답을 줄 수 있는 하나님 내지 그리스도라고 이미 인정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내 지난 모든 죄들을 진심으로 회개하오니 용서하고 구원해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우선 “당신의 나라”라고 했으니 유대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으로는 자신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했습니다. 예수님도 나무에 달려서 죽기에 유대교 식으로 따지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셈인데 그 점에 대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유대교와 다른 진짜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데 예수님이 그곳을 주관하는 분으로 자기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합니다. 자기라는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전해들은 예수님의 천국에 관한 가르침은 누구든지 당신을 믿고 당신께로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진리와 길과 생명이므로 당신을 믿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가지 못하며 당신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죄수는 그 동안 윤리적 죄들에 대해 수도 없이 진정으로 회개해 봤지만 구원의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비록 십자가에 같이 매달렸어도 예수님 옆에 있으니까 이때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영혼의 온전한 평강을 생전 처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분이라면 나를 구원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더더욱 강력하게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구원하려고 택하여서 예비하신 일이라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인데도 성령이 그의 심령에 간섭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중요 계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부로 율법을 열심히 지켰지만 수시로 죄를 지어서 구원의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선배 사제가 진심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어려서부터 그때까지 지은 죄들을 샅샅이 회개하고 나니까 마음이 후련해지고 이만하면 구원 받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일어섰는데 그 순간 회개하지 않은 너무나 큰 죄가 불현듯 떠올라서 다시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그 경험으로 윤리적 종교적 죄를 회개한다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깨닫고 다시 영적 순례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도덕적 회개도 심령이 새롭게 변화되어서 새 사람을 변화되어야만 철저하고도 깊이 행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 달리 도덕적인 회개(悔改)를 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언제 어디서든 심지어 죄 중에 있는 모습이라도 그대로 그러나 발가벗고서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인격체적인 회개 즉, 회심(回心)을 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었던 죄로 인한 자기 오염과 죄책감은 물론 지옥 형벌에 대한 두려움마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다 감당하셨다는 은혜를 믿음으로써 구원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은 죄수는 정말로 말씀하신 대로 운이 좋았습니다. 인간적 시각으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바라보면 그런 해석이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그 너무나 큰 행운이 실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삼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로 이미 마련해놓은 구원 계획이 가시적으로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9/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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