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롬10:9,10)-(1)

조회 수 2765 추천 수 38 2012.02.28 20:18:12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1)
(유대인의 경계지표를 허문 예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이스라엘이 예수를 끝까지 거부하는 이유

초대 교회의 이방인들이 갖는 큰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이 동일한 내용으로 자주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거나 더디 믿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어 다른 민족은 도무지 알 수도 없는 너무나 큰 권능으로 보호와 인도를 받았고,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았으며, 무엇보다 메시아가 와서 구원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도 소유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유대인 가운데 구주가 왔음에도 믿지 않는 것은 이상하며, 자기 민족도 잘 믿지 않는 구주를 자꾸 이방인더러 믿으라면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그분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이방인을 먼저 믿게 하는 것이 당신의 인류 구속사에서의 순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그 순서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도 일본이나 일부 회교 국가들에는 이스라엘보다 크리스천 숫자가 더 적을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얼마나 많이 구원하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계획에 달린 것입니다.

성경이 정작 말하는 바는 그분의 구원에서 이방인이라고 순서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베푸는 당신의 사랑과 권능이 유대인들에게보다 적거나 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구원은 어디까지나 한 죄인과 하나님의 일대일 개인적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한 민족 전체를 다 구원하고 심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 전체적으로 봤을 때에 유대인들이 늦게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배척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모세오경(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다섯 권의 별칭)을 너무 금과옥조로 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교제를 하는 것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계속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과 일상적으로 만나 식사도 하고 복음도 전했으므로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찾아가 사역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죄수라고 말한 것은 율법을 어긴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오경 뿐 아니라 그 오경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도록 만든 장로들의 유전을 어긴 자는 죄인으로 취급 했고 또 유대 사회의 교제에서 제외시켰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회활동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 것을 넘어서, 종교적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에 더 이상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라는 심각한 뜻을 지녔습니다.  

예컨대 장로의 유전에 따르면 안식일에 오리는 여행해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규정들을 위반한 죄인들과 교제를 했을 뿐 아니라,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라고 가르쳤습니다.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지 말고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로선 그 출신도 분명하지 않은 한 젊은 랍비가 안식일 규정을 위반해도 된다고 부추기고 있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자기들이 만든 것이라 치지만, 특별히 오경의 규정 하나가 끝내 그들의 발목을 잡아매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당신께서 주신 거룩한 율법을 어기며 나무에 달려 죽을 수는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스스로 자가당착을 범했거나, 일구이언(一口二言)한 것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들로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죄인들과 교제하며 장로의 유전을 예사로 어기며(?)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는 나사렛 출신에다 그 아비 요셉을 아는 유대인들로선 예수를 결코 메시아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생애 중에 그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자는 출교(黜敎)시키기로 결의 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에는 저주 받은 죽음을 받은 자가 메시아가 될 수가 없다고 믿고 끝까지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고전1:23)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정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유대인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벧전2:8)이 되었다고 시편118:22를 풀어서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믿는 자에게는 보배인 줄은 그들로선 도무지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모세오경에도 이미 십자가는 있었다.

유대인들의 오류는 율법의 문자적 적용에만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몰랐던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 자체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첫 네 계명은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뜻합니다. 그럼 십자가 형식이 바로 세로와 가로가 교차하는 십자가이지 않습니까?

그 의미는 하나님의 거룩한 택한 백성이라면 당연히 그 두 관계에서 다 완벽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온전히 지킨 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두 차원의 계명을 문자적으로도 온전히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어긴 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직접 수여하지 않고 인간 장로들이 고안해낸 유전이지 모세오경 자체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상징하는 십계명을 문자적으로나 그 내용으로나 완성시킨 유일한 인자이신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달릴 온전한 대속 제물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유월절 사건 때도 십자가는 등장합니다.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12:6,7)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장자(長子)를 다 죽이는 열 번째 재앙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문을 닫고 집안에 머물면서 문에다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살아났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지나쳤기(유월, 踰越, passover)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를 바른 설주는 문을 지탱하는 세로 기둥이며, 인방은 가로 기둥입니다. 비록 십자가 모양은 아니라도 분명히 피를 가로와 세로에 발랐습니다. 십자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상징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여호와와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며 불평을 터뜨리자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어 백성들이 물려 죽는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그 죄를 회개하자 하나님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고 불 뱀에 물렸어도 그 놋 뱀을 보는 자는 살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은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라고 장대위의 놋 뱀에 자신을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하나님과 원수 된 죄를 용서해줄 메시아가 나무에 달릴 것이라고 이 사건에서도 예표(豫表)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아비 이삭을 속여 장자권을 차지한 후에 형의 분노를 피해 단신으로 피난길에 나섭니다. 조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서 복의 근원이 되어 하나님의 기업을 물러 받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언제 가나안으로 돌아와 그 축복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 아니 안전하게 돌아오기라도 할지 염려되어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 잇는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언약을 다시 확인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니엘을 제자로 부르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1:51)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죄인들로 하늘로 올라가게 만드는 사닥다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될 믿음의 자녀들을 불러내어 구원해주시겠다는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킬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메시아가 나무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하늘로 가는 사다리가 될 것이라고 모세오경에서만 네 번이나 상징적으로 말씀해 놓았던 것입니다.  

자가 당착에 빠진 유대인

물론 문자적으로만 오경을 이해 적용하는 유대인들더러 구약성경에 숨겨진 메시아에 대한 상징, 예표, 묵시까지 정확히 해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의 유대인들이 범하는 더 결정적인 오류는 너무나 엄연한 하나의 진실을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자기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총독이 봐도 죽일 죄라곤 없었는데도 하나님 모욕죄와 로마제국 반란죄로 몰아서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선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죽음을 당한 자가 메시아일 리 없다니 도대체 앞뒤가 안 맞습니다. 자가당착을 범한 것은 하나님과 메시아가 아니라 도리어 그들입니다.

쉽게 비유해보겠습니다. 미국시민권자인 한국인 교포가 한국을 방문하고 다시 LA 공항에 입국했습니다. 미국시민전용 입국심사대에 가서 독수리 문양이 그려진 미국여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입국심사관이 아무리 봐도 한국인인데다 영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인상이 나쁘다고 그 자리에서 한국여권을 억지로 만들어 쥐어주고는 한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곤 미국여권도 없으면서 미국인 행세해서 쫓아내었다고 강변하는 꼴입니다.  

유대인들로선 아무리 판단해도 메시아가 아닌데도 메시아 행세를 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기에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앞뒤가 전혀 안 맞습니다. 우선 최고로 중한 하나님을 모독한 죄는 스데반의 예에서 보듯이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면 됩니다. 복음서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려고 수차 시도했지만 유대 일반 대중들이 그를 메시아 혹은 신적 권능을 지닌 선지자로 여기니까 눈치를 보느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 처형은 로마가 제국을 반역한 죄인에게, 로마로선 최고의 죄이므로, 내리는 극형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을 나무에 매다 죽이는 사형제도란 아예 없습니다. 유대인들끼리는 노예도 삼지 말고 빌려준 돈에 이자도 받지 말라고 율법은 명합니다. 하나님께 저주받는 십자가형을 동족에게 부과했다간 스스로 율법을 어기게 되므로 차마 예수에게도 적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어떤 꾀를 내었습니까? 로마법을 빌려서라도 기필코 예수님을 하나님께 저주 받은 형태의 죽음으로 몰아가겠다고 덤볐습니다. 단순히 자기들에게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어서 로마 총독의 재판정에 넘겼다고 여겨선 부족합니다. 로마는 제국에 항거하지 않는 한 각 식민지의 고유종교를 인정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는 로마 황제숭배가 시작되기 전이라 더더욱 그랬습니다. 스데반의 예에서 보듯 한 명 정도 유대 특유의 종교적 이유로 죽였다고 제국이 별반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자기들이 저주 받을 죽음으로 몰고 갈 각본을 짜서 그렇게 시행하고선 그것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단순히 예수를 아무리 판단해도 도무지 메시아가 아니라 믿지 않았고 또 하나님을 모욕하기에 돌로 쳐 죽였다고 하면 논리적으로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한 젊은 랍비를 종교적으로 박해하고 전혀 무고한데도 살인하려는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 하면서 스스로 손에 피를 안 묻히려는 너무나 교묘하고 음흉한 계교였습니다.

나아가 예수를 죽인 후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대중들의 소요나 더 열렬한 추종을 막기 위한  너무나 귀가 막힌 예방조치였습니다. 나무에 달려 저주 받은 자가 어찌 메시아일 수 있는가라고 떠벌리면 가뜩이나 율법의 멍에에 눌려 있던 유대 대중들이 예수 믿을 엄두가 나겠습니까?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수십조의 이득을 노린 것입니다.            

핑퐁게임을 하는 사단의 수하들

예수님이 십자가 사형에까지 처해지는 당시의 과정은 물론 마지막 날의 상황만 잘 살펴봐도 그가 메시아였음이 확증됩니다. 유대를 다스리는 세 권력 기관들끼리 골치 아픈 문제를 상대 코트에 던져 넣으려는 핑퐁게임하기 바빴습니다. 그 세 기관은 평소에는 서로 싫어하면서도 기득권을 향유하려고 긴장된 권력 균형을 이루던 유대공회와 로마총독과 헤롯왕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셋 다 예수를 안 죽이려 서로 발뺌했습니다.  

그 중에 빌라도와 헤롯은 실제로 예수님을 죽일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들도 예수에게서 신적 권능을 발견했든지, 최소한 죽일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알았습니다. 그들도 예수가 인간이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수많은 이적을 일으켰고,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권세 있는 가르침을 베풀었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이야기를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예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그들로선 그를 죽였다간 혹시라도 천벌을 받을지도 염려되었을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로 이뤄진 유대 공회는 달랐습니다. 유대 공회 안에서도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과, 주로 율법사 서기관 랍비에 종사하는 바리새인은 평소에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성전제사(사두개인)와 율법(바리새인)을 구실로 유대 대중들을 자기들  권력 아래에 묶어두어야만 했습니다. 그날 밤만은 공통의 이익을 위해 의기투합했고 설명 드린 대로 너무나 교묘하게 나무에 매다는 처형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헤롯의 경우, 유대의 실질적 왕이긴 해도 검사 측에 해당되는 유대공회가 제기한 죄목과는 무관했습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 모독이라는 종교적 죄는 유대공회가, 로마제국 반란은 총독이 다룰 문제였습니다. 공회로선 빌라도가 반란죄를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상황을 전개해야만 했습니다. 대중들을 선동할 필요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평소 예수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고 아내마저 전날 밤 꿈자리가 사납다고 죽이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또 로마를 반역했던 일은 커녕 그런 의도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로마군인도 아닌 유대관원의 수하들에게 아무 저항 없이 순순히 잡혀올 리 없다는 것입니다. 총독에까지 오를 정도로 정치적 계산이 빠른 그가 이 사태의 배경에 유대공회의 종교적 음모가 있음을 눈치 못 챘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 공회의 음모가 얼마나 교묘했는지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로마를 반역하려고 시도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한다고 몰아붙였습니다. 유대 왕은 제국이 임명하고 또 지금 헤롯이 왕으로 엄연히 있기에 그 주장만으로 로마에 항거한 셈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선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유대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뜻일 뿐이었습니다. 실제로도 정치적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얼마나 그런 말씀을 선포했는지 모르지만, 구약에 능통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뜻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유대 대중들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추종하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는 감춘 채 자기들의 귀책사유가 되지 않을 정치적 올가미를 덮어씌운 것입니다.  

거기다 무신론자이자 우상숭배자인 빌라도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로마 황제를 더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유대관원들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정치적 술수는 정치 구단인 빌라도를 오히려 능가했습니다. 유대 대중들을 선동해 십자가에 죽이지 않으면 민란이 일어날 것처럼 상황을 이끌었습니다. 대중들로 십자가에 죽이라고 그 처형방법마저 미리 지정해주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라는 죽음의 방식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데 거리낌을 갖는다고 합니다. 인간 죄악의 추악함과 치사함과 완악함의 절정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날 밤만 따지면 세상 권력 셋 중에 헤롯이 제일 의롭고, 의롭다는 표현이 부적합하므로 가장 덜 악하고, 그 다음이 빌라도이고, 마지막이 유대 공회입니다. 앞의 둘은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권력만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대 관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율법을 열심히 준수하는 자들입니다. 종교적 열성이 부귀와 명예에 맛들이면 얼마나 사악해지는지, 세상권력과도 비교 안 될 정도로, 생생히 보여주는 실례이기도 합니다.      

그날 저녁에는 모두가 영적으로 미쳐 돌아갔습니다.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행하는 이는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마저 인류 역사 내내 회자될만한 수치스런 짓을 범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 예수를 모르는 모든 자연인이 참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재물과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현실적 안일과 형통에 눈이 먼 인간들을, 그것도 지도층들의 영혼부터 완전히 미혹시켰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려는 유대관원들의 술수가 성공하도록 사단은 빌라도, 헤롯, 로마군병과 유대무리들을 공중 권세로 완전히 휘어잡았던 것입니다. 역사상 최대의 핑퐁게임 대회에 모두를 선수로 나서게 만든 꼴입니다. 물론 그중에 우승자는 유대공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지혜를 실제 적용하는 방식)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단에 놀아난 유대 공회는 저주 받은 죽음인 십자가를 통해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부인하여 대중들로 믿지 못하게 만들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십자가라야만 메시아가 됨을 구약에서부터  예표한 후에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어 직접 실증(實證)케 했지 않습니까?

간혹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물론 그분의 역사적 실존성마저 완강히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성경의 진술만 해도 도무지 인간이 지어낼 만한 성격이 아닙니다. 설령 그랬다 쳐도 그날 밤의 당사자들인 헤롯, 빌라도, 베드로는 물론 유대 대중이 혹은 그 후손이 그 기록을 보고 전혀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사실대로 정미하게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십자가의 궁극적인 배후에는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계획이 있었고, 예수님은 정말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였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의 경계지표를 허문 예수님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리게 된 것은 역사상 최고로 정교하고도 사악한 유대관원들의 계략 때문이었습니다. 정작 궁금한 것은 주님께 그렇게 열광했던 대중이 왜 십자가 사건이 끝나고 그 부활을 알고도 계속 거부했는지 이유입니다. 마지막 날 밤에는 흑암의 세력에 휘말려 군중 심리에 쫓겨 갔다 쳐도, 주님으로부터 온갖 이적과 치유의 섬김을 받았고 권세 있는 복음의 가르침을 들었지 않습니까? 저주스럽게 나무에 매달렸다는 것과 나사렛 출신의 목수 아들이었음을 알았다는 것 외에 주님을 배척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세오경을 끔찍이 여긴 이유는 나름대로 타당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까닭이 모세오경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정확히 파악하여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세부적인 규정까지 덧붙여서 율법준수에 모든 심혈을 쏟은 것입니다. 또 그 율법 준수야말로 바벨론처럼 우상숭배 하는 이방인들과 거룩한 창조주 참 하나님을 따르는 자기들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 믿었습니다.

특별히 할례와 안식일과 십일조, 셋은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야말로 유대인을 가장 유대인답게 만드는 푯대였습니다. 이 셋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한 유대인과 구원 밖에 있는 이방인을 나누는 경계지표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던 주제가 이 셋에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들 눈에는 예수는 이방인과 방불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종교적 토론에서도 밀리고 대중들의 인기가 그에게 쏠리자 죽일 음모를 꾸몄고 급기야 그를 따르는 자들도 동일하게 출교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만에 하나 황제의 눈에 벗어날까 두려워했다면, 유대 대중들은 유대사회를 실제로 이끄는 산헤드린의 심기를 건드릴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는 제국의, 공회는 유대의 최고 권력기관입니다. 거기다 유대는 종교 중심의 사회라 더더욱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김정일이 죽자 인민들이 속으로는 전혀 슬프지 않고 심지어 쾌재를 불렀어도 혹시 충성심이 모자란다고 간주되어 그 사회에서 매장될까 거짓 눈물을 흘리며 곡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그대로 사람은 자기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이 땅에 보물을 쌓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재물 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 지도층들은 물론 대중들도 비록 할례, 안식일, 십일조 등 경건한 종교적 의식으로 이방인과 경계지표를 삼고 있었지만 진짜로 모시고 있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성격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견지에선 너무나 위선적이고 당신의 나라 확장에 전혀 무익한 모든 경계지표들을 무너트리는 일이었습니다. 절기 따라 성전에 경배하러 온 순례객을 상대로 환전과 희생제물 장사로 이익을 챙기기 급급한 자들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야단치며 쫓아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율법에 예표된 메시아인 당신을 알아보기는커녕 도리어 죽이려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마귀의 자식이라고 선포했습니다.(요8:39-47) 그들은 안식일에 할례는 열심히 주면서 당신께서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비방하는 잘못을 예리하게 통박했습니다.(요7:23)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그들의 가식과 위선을 벗겨냈습니다.(마23:23)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의 경계지표가 잘못되었으니 무너뜨리라고 아무리 가르치고 또 몸소 실천해 보여도 완전히 소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결국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15:1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유대 대중들을 향해선 어서 빨리 그 잘못된 경계지표를 버리고 참 하나님 앞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초청했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세상 모든 죄를 지고 죽을 어린 양임을 믿고 당신이 가는 길대로 따르면 부활 생명을 얻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유대인들이 지는 짐과 수고가 현실의 고난이 아니고 장로들이 정한 종교적 유전입니다.

지금도 유대대중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근본이유는 하나입니다. 자기들의 경계지표를 허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측면에선 자기들만이 하나님이 택한 거룩한 백성으로서 율법대로 살기에 모든 면에서 의롭다는 교만입니다. 그 내면에는 경계지표로 둘러싸인 자기들 사회에서 출교 당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자기들을 솔로몬 때의 영광으로 되돌려 줄 헛된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기에 실은 이 땅에서의 형통만 바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재물을 주인으로 삼으려니까 예수가 방해되기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의롭다고 자부하는 그들로선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지적이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비추어 성경 말씀을 잘 분석하면 이런 결론 밖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더디 믿는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원인들은 지엽적인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다른 모든 자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원죄 하에 태어난 영적 소경으로 죄에 찌들어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 To be continued

(*) 경계지표- 존 오트버그 저작, "평범 이상의 삶"(국제제자훈련원 번역발간)의 44,45 page "경계표시 신앙"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참조하였습니다.


운영자

2012.02.28 20: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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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과 이어지는 글이나 조금 길고
또 실제로도 두 가지 큰 주제로 나뉘기에
읽기 쉽게 둘로 나누고 각기 부제를 달았습니다.

중요한 내용이기에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함께 연결해서 읽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

사라의 웃음

2012.08.31 23:48:45
*.109.8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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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진짜 선민다웠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것이 아니고 그냥 돌로 쳐 죽이면 되는 것을, 이런 저런 계산된 사악한 생각들로 십자가에 매달도록 로마총독을 충동질 한 것, 또 그리 이용 당하면서도 혹여 경계지표에서 제외될세라 종교지도자들의 눈치를 보고있는 백성들...

인간의 내면엔 도무지 딱히 잘라 설명할 수 없는 너무도 많은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기에 그 연유로 십자가 처형을 받으셔야만 했던 예수님이심을 배웁니다. 결국 높다랗게 서 있는 십자가를 볼 때, 그래야만했고 꼭 그래야만 할 수 밖엔 없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군중들 속에 바로 내가 스며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비밀의 경륜은 그것까지도 다 아울러서 끌어안으시고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없으신 사랑이, 그 다함없으신 사랑만이 우리 인간의 실체와 더불어 오롯이 십자가로 서 있기에 정말 아뭇소리도 낼 수 없는 죄인이며 이런 죄인을 사랑하심 앞에 또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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