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4:1-7) 비전을 품지 말고 품어지게 하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8)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왕하4:1-7)

 

기복신앙적인 해석

 

한 불쌍한 과부가 병에 기름을 계속 부은 기적 이야기는 신자들이 설교로 자주 접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대체로 과부가 그릇을 더 많이 빌렸더라면 더 많은 기름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만 강조해 왔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헌신하면 그분의 복을 그만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가르침입니다. 

 

우선 신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매번 신자의 수고에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신자가 열심히 헌신하는 만큼 복을 받으면 신자는 하나님과 고용 계약한 일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베푼 복도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일 뿐입니다. 신자는 그분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가 일한 삯을 받은 셈인지라 사실상 진정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려는 데에 방해가 되어서 자신의 지병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으나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계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고, 즉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더 왕성해지더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신자의 순종을 통해서 이뤄지긴 하되 당신의 계획과 일정대로 당신께서 한 치의 차질 없이 온전히 수행하십니다. 그로 인해 신자에게 돌아오는 열매가 현실적 풍요가 될지 궁핍이 될지는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에 달렸습니다. 신자로선 당연히 그분의 일에 충성하되 그 결과는, 아니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그분의 인도와 처분에 맡겨야 합니다. 

 

본문에서 이처럼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가르침이 생기게 된 까닭은 아주 간단합니다. 엘리사가 빈 그릇을 많이 빌리라고 했고 또 그 그릇이 없어지니까 기름이 그쳤다는 두 구절에만 초점을 맞추어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단어, 문구, 문장 별로 따로 떼어서 해석해선 안 되며 반드시 앞뒤 문맥이 말하는 바에 비추어봐야 합니다. 

 

어쨌든 반은 맞으므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일부만 영향을 미친다고 가볍게 여겨선 안 됩니다. 신자가 바친 만큼 비례해서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은 기복주의 신앙으로, 심하면 행위 구원론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현실적 형편에 여유가 있고 본인의 의지력이 남보다 뛰어난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엄마가 확인했다.

 

물론 그릇이 더 있었다면 기름이 그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그릇을 빌리는 일에 게을렀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본문의 여인은 아합왕의 박해와 당시의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는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숨겨서 먹여 살린 궁내 대신 오바댜(왕상 18:3,4)의 아내라는 전승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본문 사건 이후에 43절에 보면 엘리사가 마침 백 명의 선지자를 먹여 살리는 기사가 나오므로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엘리사에게 자기 남편을 두 번이나 “당신의 종”이라고 표현했으므로(1절) 엘리사가 가르치던 제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 여인은 아합왕은 죽었으나 이어지는 이세벨의 폭정에 시달려서 그 형편이 극도로 어려웠던 것입니다. 모세 율법은 동족을 노예로 부리지 못하게 했는데(레25:39), 빚을 갚을 길이 없으면 채주의 종이 되어 섬기되 안식년이 되면 채무를 면제해 주라고(신15:12) 명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동안 빚을 내서 근근이 생활하다가 돈을 빌릴 저당물이 다 떨어져서 이제 두 아들을 종으로 내어줄 수밖에 없게 된 것 같습니다. 

 

두 아들이 종으로 팔려 갈 판국인데 세 모자가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동네에 있는 그릇은 최대한 빌리려 했을 것이며 그들의 딱한 사정을 아는 이웃도 최대한 협조했을 것입니다. 기름을 담으려면 병처럼 목이 좁은 그릇이어야 하는데 당시 열악한 경제 사정 때문에 그런 그릇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 동네의 인구도 적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아합왕에 충성하는 자에겐 부탁할 수 없으며 평소에 자기들 사정을 그나마 이해해 주는 믿을만한 이웃만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사정을 잘 아는 엘리사로선 비록 “조금 빌리지 말고”라고 당부하긴 했으나 끝없이 빌려올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본문을 잘 보면 그릇이 더 없느냐고 물은 자가 엘리사가 아니라 두 아들의 어미였습니다. 그것도 어미가 그릇에 기름을 채워나가다가 그릇이 더 이상 없는지 아들에게 확인했을 뿐입니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가 그릇이 더 없는지 따졌다고 기록했다면 적극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빌려온 그릇의 숫자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릇을 최대한 많이 빌렸는지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또 그것에 관심갖지 않았다면 당신이 베풀 축복의 양을 정하는 기준은 더더욱 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빌린 그릇이 남지 않아서 기름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7절)고만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쌓인 기름은 그녀의 채무를 완전히 갚고도 한참 남을 정도였습니다. 그녀가 엘리사 선지자를 처음 만났을 때 제발 두 아들이 종으로 팔리지만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는데 그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엘리사는 거기다 그녀가 바라지도 않았던 추가 생활비까지 넉넉히 채워주었습니다. 바꿔 말해서 세 모자가 빌려온 그릇의 숫자가 그들의 어려운 형편을 펴는 데에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녀에게 베풀려는 축복도 처음부터 넘치도록 준비해 놓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왜 더 많은 그릇을 빌리지 못해서 더 받을 수 있는 복을 받지 못했다고 가르치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목회자나 그 가르침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신자나 하나님께 현실 축복을 최대한 많이 얻어내는 데에만 믿음의 초점을 두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예표

 

그 엄마에게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마치 신념 같은 믿음이 부족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전혀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녀의 믿음은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아주 모범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이라고 본문은 말해줍니다.

 

그녀는 남편이 먼저 죽었으나 선지자의 아내라는 자신의 위치를 끝까지 잘 지켰습니다. 고대에는 과부는 생활고 때문에 재혼하든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비천한 직업을 감당해야 했고, 심지어 몸을 파는 자리에까지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서 손쉬운 일을 하지 않다 보니까 결국은 끼니도 잊지 못할 정도로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들들을 종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처지에 빠지게 되자 성경은 그녀가 엘리사를 찾아와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기 남편의 신앙이 얼마나 신실했는지 당신은 잘 알고 있으므로 제발 도와달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으로 신실하게 사느라 지금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소량의 기름뿐이었으나 그것이라도 팔면 며칠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까운 기름을 엘리사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서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엘리사의 권능을, 더 나아가 자신들을 절대로 버려두지 않을 그 배후의 하나님만 믿고서 가진 것 전부를 바쳤습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처분에 온전히 맡긴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그녀와 두 아들이 동네 사람의 그릇을 빌려서 오자 엘리사가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명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기적입니다. 틀림없이 처음에는 한 그릇뿐인 기름이 너무 아까워서 다른 그릇에 아주 조금씩 살살 부었을 텐데도 기름은 계속 콸콸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그녀가 갖고 있던 기름 그릇보다 더 큰 그릇도 있었을 텐데도 다 채우고도 원래 그릇의 기름은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갖고 있던 그 작은 기름 그릇이 하나님의 너무나 신기한 기름 공장 역할을 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나중에 선지자 생도들 백 명을 먹일 때도 동일한 양식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보리떡 이십과 자루에 담은 채소를 받자 엘리사는 무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사환은 어떻게 이것으로 백 명이 먹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지만, 그것을 그들 앞에 펼쳐서 놓았더니 무리가 다 먹고 남았습니다.(왕하4:42-44) 

 

엘리사의 이 두 기적이 뭔가 아주 익숙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한 소년이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어른만 따져서 5천 명이 넘는 무리가 배부르게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차도록 남게 만든 기적과 규모만 작을 뿐 방식은 똑같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도 제자들이 나눠줄수록 광주리에 떡과 물고기가 계속 생겼을 것입니다. 빵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숙성한 후에 불에 구워야 하고, 물고기는 잡아서 깨끗이 씻은 후에 간을 쳐서 말려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무에서 유로 생물을 만들어 내어선 조리 과정까지 다 거치게 한 후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엘리사가 본문의 과부에게 계속 생기게 한 기름이나, 백 명의 선지자 생도들에게 준 보리떡과 채소도 무에서 유로 창조되어 순간적으로 조리 과정까지 거친 식품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기적이었습니다. 성육신하기 전의 성자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이 엘리사의 기적 현장에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백 명의 선지자 생도들을 배 불리 먹인 기적을 엘리사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왕하4:44) 주님이 엘리사에게 성령으로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고 엘리사도 믿음으로 그 지시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결국 엘리사가 일으킨 이 두 기적은 약 900년 후에 예수님이 일으킬 오병이어의 기적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 준 예표(豫表)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아합과 이세벨 같은 사탄의 어두운 세력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들을 극렬히 핍박해도 주님이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남겨둔 그 백성들도 어떤 고난에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전부를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에게 의지 순종 헌신했었기에 누리게 된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은혜를 열두 제자들의 순종을 통해서 이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 차별 없이 베풀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라도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또 그렇게 구원한 당신의 백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지켜주신다는 의미였습니다. 

 

비전을 키우는 신앙

 

이 여인은 지금 의지적 적극적 믿음을 발휘할 만한 처지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암울한 시대에 여호와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받는 극렬한 핍박을 피해 숨어 살면서 겨우 목숨만 부지했던 것입니다. 그 믿음도 강하고 밝게 빛나기보다는 아주 가늘게 근근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마지막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여호와께 부르짖기만 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오히려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사실상 소극적으로 순응하는 모습이었을 뿐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와 권능이 함께 함을 온전히 믿기에 자기 믿음이 세상 죄악과 사탄의 거짓에 오염되지 않도록 지켜낸 것뿐입니다. 바꿔 말해서 그녀가 겪은 모든 일들이, 더 정확하게는 그녀의 인생 전부가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안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기적도 엘리사가 아닌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당신께서 수행하는 한 과정이었습니다. 

 

믿음은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단순히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여전히 생생히 남아 있는 탐욕과 교만으로 인해 그 일이 아주 힘들기에 자신을 계속 쳐서 그분께 전적으로 항복해 나가는 너무나 고달픈 씨름입니다. 우리 모두의 체질이 연약해서 수많은 실패를 겪어가면서도 평생에 걸쳐 다시 일어나서 그 일을 반복해 나가는 지루한 삶이 바로 믿음입니다. 

 

안타깝게도 작금 하나님의 자기 일생에 대한 계획과 뜻은 뒷전이고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믿음을 자신의 노력으로 키워서 하나님의 축복만 받아내려는 신자가 아주 많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비전을 스스로 최대한 크게 잡아서 적극적으로 실현해 나가면 하나님이 달성 시켜준다고 가르치는 교회도 꽤 있습니다. 한마디로 받아낼 축복을 신자 쪽에서 크게 정하고선 하나님 그분을 인간이 의지적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셈입니다. 이 또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입니다. 

 

틀린 것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자가 세운 비전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만 그분이 이뤄주십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전에 하나님이 심어주신 비전이어야만 온전하게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택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주실 때부터, 아니 태어날 때부터 그 일생에 대해 세우신 계획대로 이끄는 것이 그분의 비전입니다. 신자 자신이 자기 소원을 이루려는 비전은 아무리 크게 그것도 아주 의롭게 세워도 하나님과 무관합니다. 어쩌다 그대로 실현되어도 신념의 힘에 의존해 자기 노력으로 이뤄낸 결과일 뿐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고 분명하게 그런 진리를 밝혀 놓았습니다. 나아가 어떤 곳에 가서 일 년 동안 장사해 돈을 벌 수 있다고 절대 장담하지 말라고, 즉 스스로 비전을 크게 잡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대신에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약4:13-15)고 겸손히 주님의 인도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심어준 비전

 

아주 큰 비전을 세운 믿음의 선배들 몇 명의 인생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셨거나 그분의 뜻에 합당한 비전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복의 근원이 되어서 이름이 창대해지고 후손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고 그가 밟는 땅을 그와 그 후손에게 다 주시겠다는 큰 비전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갈 바 몰라도 주님의 지시대로 따랐으나, 그가 죽을 때 약속의 아들은 이삭 하나뿐이었고 차지한 땅도 무덤으로 쓸 막벨라 굴 하나였습니다. 그 이름이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 제법 유명해지긴 했으나 세상 왕들에 비하면 아직 미미했습니다. 그의 비전은 그의 생애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사백 년이나 지나서 그의 후손에 의해서 이뤄졌고, 그마저도 나중에 후손들이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는 바람에 산산조각나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의 비전을 실제로 성취해 준 모세는 또 어떠합니까? 출생할 때부터 바로의 폭정에서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져서 오히려 원수의 품인 바로의 궁정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사십 년간 살게 했습니다. 그로선 하나님이 동족의 구원자 내지는 도움을 주는 자로 사용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그런 기적을 베풀었다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관원을 죽이고서 그 비전을 실현해 보려 했으나, 바로 다음 날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서 또다시 미디안의 목자로 사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렸습니다. 하나님께 기도와 경배를 올려드리는 성전을 지을 비전을 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심어주신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그분이 택한 곳에 모든 백성이 함께 모여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 율법의 계명이었습니다.(신12:5) 그러나 다윗은 전쟁을 치르면서 손에 피를 많이 묻혔기에 성전을 짓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오히려 막으셨고 그 아들 솔로몬더러 그를 대신해 성전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성경에 이들만큼 하나님이 심어준 큰 비전은 없었고, 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종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전이 그들의 뜻과 계획대로 절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정과 방식대로만 성취되었으며, 그동안 그 종들의 인생은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시거나 그분의 뜻에 합한 비전도 이러한데, 신자 스스로 비전을 크게 세우고 적극적으로 헌신하면 하나님이 다 이뤄주신다고 가르치니까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큰 비전을 품어서 성공한 신앙의 대표로 요셉이 가장 자주 인용됩니다. 정작 요셉 본인은 어렸을 때 하나님이 꾸게 한 두 가지 꿈의 의미도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로선 이방 땅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총애만 믿고 철도 없이 형들에게 교만하게 굴다가 엄청난 고생길을 사서 걸어간 것입니다. 애굽에 사는 동안 꿈에도 잊지 못할 소망은 어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과 비록 자기를 노예로 팔았으나 배다른 형들과 친동생 베냐민을 다시 만나서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그는 하나님이 심어주었던 자기가 세웠던 인생에 큰 비전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하자면 어렸을 때 하나님이 꾸게 했던 그 꿈의 의미를 알게 된 것도 애굽 총리가 되어서 한참 후였습니다. 가나안도 심한 기근을 겪게 되자 형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려고 내려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잘못을 회개하는 형들의 마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요셉이 형들 앞에서 지난 삶을 회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깊은 뜻과 참 은혜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하나님이 요셉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택하여서 야곱 가문을 기근에서 구할 자로 계획한 후에 그로 그 신비한 꿈을 두 번 꾸게 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요셉이 자기 생각과 의지대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행동하도록 허락하시고도, 그가 40살쯤에 하나님이 당신의 그 계획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야곱 가문이 애굽에서 기근을 피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비록 사백 년간 노예로 고생했어도 그 후손이 아주 창성하게 되어서 결국은 가나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를 세우도록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실현하는 가운데 요셉에게도 아주 중요한 임무 하나를 맡긴 것입니다. 

 

순전한 믿음이란?

 

계속 강조하지만, 요셉도 자기 인생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스스로 세우고서 남들보다 더 굳건한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실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하나님 당신께서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는 단지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비전을 심어주고서 당신의 일정표와 방식대로 당신이 성취했습니다. 그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도 본문의 과부처럼 각각의 개별 상황에 맞게끔 그분께 순응했을 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과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도 많은 훼방을 받아서 너무 힘들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근근이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이끄심대로 이끌려온 믿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인류 역사를 이끄는 원대하고도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비전에 일부씩 참여한 것입니다. 자기 시대의 자기 상황에 합당한 조연 배우로서 감독이자 주역이신 그분의 연출대로 따라가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비록 자기들도 그 의롭고 큰 구원의 소망을 어렴풋이 가슴에 품었어도 태초에 삼위 하나님 간에 이미 계획해 놓았던 비전이었습니다. 심지어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명해도 도무지 자격이 되지 않기에 못 맡겠다고 몇 번이나 거절해서 하나님께 야단까지 맞았습니다. 

 

비록 비유이긴 해도 둘째 아들 탕자도 분명히 자기 나름대로 큰 계획을 이루려고 부모의 유산을 받아서 타국으로 간 것입니다. 처음부터 허랑방탕 쾌락과 죄악을 즐기며 재산을 탕진하려 한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 탕자의 인생도 자기 비전은 완전히 실패하고 결국은 원래 있어야 했던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아버지의 원대한 비전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결정 진행되었다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미리부터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소원하는 일을 과감히 크게 계획하여서 하나님께 이뤄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반은 맞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영광이 증진되는 모습이 포함되는지를 진지하게 따져봐야만 합니다. 미처 그러지 못하고 스스로 미리 계획을 세웠다가 추진하는 중이라도 계속 기도하면서 그분의 뜻을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실은 자신의 형통과 풍요만 바라면서 그 일을 속히 이뤄달라고 끝까지 떼쓰듯이 매달리는 것은 절대로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아니 적극적 능동적 믿음조차 안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간절히 바라고서 그런 통치의 수혜자로서 자신과 자기 일을 그 통치에 적극 참여시키라는 것이 그 일차적인 뜻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거룩하게 통치한다면 반드시 그분만의 거룩한 열매가 맺힐 것이므로 그것을 기대하며 설레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과 자기 주변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베풀어지는 그 일에 자기 정욕이나 교만이 방해되지 않게끔 매 순간 자신부터 거룩하게 가꿔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과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최선을 다하며 또 그렇게 되도록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일부러 고난을 주어서 고생시키지는 않습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기를 그분이 더 소원하십니다. 당신이 계획한 기쁘고 보람찬 일을 맡기려고 택한 당신의 종을 그 일에 맞게끔 시련과 연단도 거치게 하십니다. 그것은 신자더러 세상 즐거움에 현혹되지 말고 세상에 없는 하늘의 참된 기쁨과 의미를 깨달아서 기꺼이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이 이끌어가시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각자에게 가장 적절한 재능 장점 특기 등을 이미 맡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신자를 그 본인보다 더 잘 아시기에 각자에게 합당한 당신의 일을 계획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나 죽으나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죽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이 심어주신 비전을 예수님께서 이뤄나가시는 일에 항상 자기 전부를 전적으로 맡기며 순응해 나가는 것이 진짜로 적극적인 믿음이자 신자가 품어야 할 참 비전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바도 신자가 스스로 큰 비전을 품어선 안 되며 하나님이 참 신자에게 당신의 큰 비전을 품어지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12/1/2024)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왕하4:1-7) 비전을 품지 말고 품어지게 하라.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8) master 2024-12-01 142
23 엘리야가 범한 진짜 잘못은? (왕상19:9-14) [7] master 2019-11-19 2854
22 목사가 잘못하면 법원에 고소하라. (고전6:1-11) master 2018-08-17 2335
21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출17:1-7) [1] master 2016-04-19 2751
20 적극적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아니다. (막2:1-4) [3] 운영자 2014-12-25 4439
19 여호와를 믿지 않은 모세(?) (민20:10,11) [6] 운영자 2012-08-24 3710
18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롬10:9,10)-(2) [2] 운영자 2012-02-28 6593
17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롬10:9,10)-(1) [2] 운영자 2012-02-28 2765
16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마12:31-37) [5] 운영자 2012-02-07 7731
15 너무나 관대하신 토기장이(롬9:22-24) [3] 운영자 2011-05-31 4107
14 능치 못할 일이 많은 하나님 (막9:23,24) [3] 운영자 2011-04-13 11306
13 합력이 아니라 합심 기도다.(마18:19,20) [5] 운영자 2011-01-30 8964
12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지 환난이 아니다.(고전10:13) [5] 운영자 2009-06-22 14686
11 성전에 예배드리러 모인 것이 아니다.(행2:41-47) [3] 운영자 2008-12-09 5786
10 불 병거는 기도하여서 오지 않았다.(왕하6:14-17) [5] 운영자 2007-10-25 7703
9 욥은 처음부터 창대했다.(욥8:1-7) [3] 운영자 2007-09-28 8953
8 기드온은 큰 용사가 아니었다.(삿6:11-14) [2] 운영자 2007-08-03 6758
7 솔로몬이 고상한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다.(왕상 3:4-15) [6] 운영자 2007-06-04 4999
6 다윗은 자기 실력으로 골리앗을 이겼다.(삼상17:45-47) [12] 운영자 2007-01-09 13570
5 40년간의 광야 생활은 축복이었다.(신8:1-3) [4] 운영자 2006-12-16 763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