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난 야곱

조회 수 3864 추천 수 344 2005.06.07 01:18:40
마태복음 강해(33) 팔복강화(7)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군자(君子)란 어떤 사람인가?

공자가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람이 도덕적, 인격적으로 군자인지는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은 미쳐서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거나 감옥에 갈 각오하지 않는 한 남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나쁜 죄를 범하지는 않는다. 누구라도 남이 자기를 알아 주길 원하며 남에게서 싫은 소리 듣기 좋아하는 자는 없다. 자존심과 체면과 위신 때문에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들 앞에선 선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무 의미 없는 일에 그저 빈둥빈둥 소일하는 것은 둘째 치고 주위의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꽁꽁 앓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해서도 분노와 원망에 사로 잡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수 있다. 음란 포르노물에 중독 되어 있거나 심지어 사기칠 궁리에 몰두하고 있는 자도 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라도 자신의 모습을 진짜 솔직하게 꿰뚫어 보아 부끄럽지 않을 자는 없다.

그럼 예수 믿는 신자가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무엇을 보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아무 보는 사람이 없고 혼자 있을 때도 계속해서 성경 읽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있는 모습인가? 아니다. 수도원에서 정진하는 자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혼자 있을 때 모습으로 군자인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때가 도덕성이 가장 흔들리기 좋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성숙한가 아닌가를 알려면 믿음이 흔들릴 가능성이 가장 많을 때를 찾아 신자를 관찰해 보면 된다. 그럼 그런 때가 언제인가? 두말 할 것 없이 시련과 환난이 겹쳐서 힘들 때다. 믿음의 진위(眞僞) 여부는 슬픔과 고통이 밀려 올 때에 가려지게 마련이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애통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자가 믿음이 좋은 자다. 어려울 때에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혹시 기도 안 해도 믿음이 좋을 수 있다는 뜻으로는 오해 말기 바란다. 믿음이 좋은 자는 당연히 기도를 많이 하지만 기도를 많이 한다고 다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믿음이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누구나 기도를 많이 하게 된다. 문제는 기도를 많이 했던 적게 했던 실질적인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는가 이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기도 한 후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가 아닌데도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위로와 다르면 하나님의 위로다. 세상 사람은 애통하고 힘든 시련이 닥치면  세상의 위로를 찾지 하나님에게 위로를 달라고 구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몰라서인가? 아니면 못 믿어서인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안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 대부분이 절대적 권능을 가진 하나님(어떤 명칭으로 부르던 간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성이나 전지전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 사람들의 고통은 어떤 것들이며 또 그 고통들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자식을 일류 대학 못 보내 안달한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돈이 얼마가 들던 족집게 과외 선생을 부치는 것이다.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떼 돈을 못 벌어 괴로우면 유능한 투자 상담가를 만나면 된다. 신체가 약해 힘들면 요가나 헬스클럽에서 전문가의 조언으로 열심히 운동하면 된다. 상처 받고 억울하고 창피스런 일을 당했다면 권력이나 정 안되면 조직 폭력배를 동원해서라도 복수하면 된다. 하나님에게 기도해서 도와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세상 문제는 세상의 해결책이 훨씬 손 쉽고 빠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도 그들과 똑 같이 자식을 일류대학에 못 보내 안달이고, 주식으로 대박을 터트리기 원하고, 나에게 모욕을 준 사람을 혼 내주지 못해 끙끙 앓는 것으로 애통스럽다면 과연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도 없다. 고차원적인 신앙지식이 요구되는 문제도 아니다. 잠시만 생각해도 그 대답은 당연히 ‘노(No)’이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신자들마저 교회에 그런 문제들을 들고나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겠다고 덤비거나 기대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밖에 없다. 세상 사람보다 더 큰 대박을 그것도 단번에 이루려거나, 세상 사람보다 덜 부지런하기 때문이다. 좋게 봐줘서 현실의 삶에서 신자가 그들보다 소극적이고 덜 영악한 것 뿐이다. 그 말은 추구하는 내용은 똑 같은데 그 방법에서 덜 폭력적 덜 파괴적이라는 의미 말고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신자들 보고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이유가 뒷구멍에서 호박씨 까듯이 숨어서 나쁜 짓을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신자도 속으로는 자기들과 동일하게 세상에서의 출세를 바라며 돈을 벌 욕심에 가득 차 있으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하지 않고 비겁하게 공짜로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을 알지만 자기들이 추구하는 내용이 하나님 앞에 꺼내어 놓고 빌어서 그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더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들이 신자보다 훨씬 믿음이 좋은 셈이지 않는가?

스스로에 절망한 상담전문가

신자가 힘든 일 가운데 기도한다고 다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애통 거리를 들고 나아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애통은 따로 있다.

킬링 필드라는 영화로도 소개되었지만 1980년대에 캄보디아의 공산 폴포트 정권이 양민 학살을 자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부르스 탐슨이라는 정신과 의사이자 기독교 상담전문가가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 근처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미국 의사 두 명이 완전히 탈진한 모습으로 찾아 왔다. 캄보디아의 외딴 시골에서 의료 선교 사역을 하다가 억류된 동료 의사들을 구출하러 파송 된 사람들이었는데, 캄보디아 국경에서 총과 야포 사격 소리를 듣고는 공포에 질려 꼼짝 않고 숨어 있느라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것이다. 국경은 넘지도 못한 채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 온 것이다.

그 딱한 사정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탐슨의 마음 속에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네가 이 사람들을 대신해서 가라!”는 성령의 미세한 음성이 자꾸 들렸다. 도저히 그 부담을 떨칠 수 없어 “좋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순종하며 그 일을 대신 맡기로 자원했다. 그러나 자기 방으로 돌아 오는 순간 갑자기 너무나 큰 공포가 엄습해 와 초조와 불안으로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크메르루지에게 잡혀 총살 당해 죽는 것은 아닐까? 요행히 죽지는 않고 포로로 잡혀 가도 사랑하는 처자식을 평생 못 보게 될 텐데... 지금껏 쌓아 온 재산과 명성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는 데…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의술과 상담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계속할 수 있는데 괜히 이 일을 맡은 것이 아닐까?” 온갖 의심과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혔다. 숨 막히도록 몰려 오는 공포 때문에 정말 그의 영혼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 허우적대었고 가족 걱정에 닦을 새도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마음 속에서 끝없이 요동치는 온갖 모순과 갈등으로 도저히 어쩔 바 몰라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심령 깊은 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스스로 질책하는 음성이 끊임 없이 들려 왔다. 그 첫마디는 “네가 그러고도 신자인가?”였다. 완전히 망치로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겠다고 남들 앞에서 서원한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네 꼴이 뭐냐? 너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가? 너는 지금 누구를 의지하는가? 사람들과 너희 가족보다 정말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다른 사람들을 상담할 때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만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위로와 은혜를 주셔서 평강으로 지키신다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나아가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대신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참 생명을 얻는다고 당당하게 권유했던 네가 아니냐?” 라는 자신과의 다툼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는 중에도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이 편지가 바로 유언장이나 다름없다 싶으니까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글이 지워져 다시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기를 밤새 계속했다. 반면에 마음 한편 구석에선 “아까 했던 말을 지금 취소하면 안 될까?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취급할까? 그만 둘 적당한 핑계 거리가 없을까?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내가 출발하기 전에 억류되었던 선교사들이 풀려 나오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온갖 황당한 생각마저 오락가락했다. 정말 울다가 기도하고 또 후회했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 먹으면서 밤새 잠 한숨 못자고 지샜다.

그러면서 결국 자기 영혼 심층에 흐르는 절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엄연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라는 인간의 꼴이 겨우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정의감에 가득 차 그 일을 자원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서원까지 했던 자기와 그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지금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그 일에서 도망 갈 온갖 핑계를 궁리하고 있는 자기와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 자기인가? 이러고도 기독교 상담가로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기 영혼의 진짜 실체를 자기 두 눈으로 선명하게 보게 된 것이다. 의사와 기독교 상담가로서가 아닌 단순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금 탐슨이 애통해 하는 핵심이 돈, 건강, 인간 관계의 상처, 가족 간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곤경에 처한 자를 구하려는 정의롭고 선한 결심을 해놓고 자기 의지력이 모자라는 것을 두고 슬퍼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느냐 못하느냐 고민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로도 마음이 흔들려 애통해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일부분일 뿐이다. 그가 진짜 애통해 한 것의 본질은 심령 깊숙이 따로 있었고 그런 것들은 그 본질에서 파생된 조각 조각의 결과였을 뿐이다.

너무나도 연약하며 가난하면서 유한한 한 영혼이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밤새도록 대면해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란 존재 전체가 평생을 두고 쌓아온 경험, 지식, 명예, 교양, 도덕, 심지어 믿음조차 또 그 모든 것을 다 합하여도 아무 의미가 없고 단 한 치의 능력도 발휘 못함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정말 한 마리의 작은 버러지만도 못한 피조물로서 우주 전체를 섭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서게 된 것이다. 눈보라 치는 광야에 누더기 조각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불려 나와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하고 의지하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 단 한마디도 대답 못하고 망연자실한 채 엎드려 있는 것이다.

야곱이 밤새 씨름 한 것은?

믿음이 좋다는 것이 새벽 기도 개근하고 제자 훈련 전 코스 수료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은사가 드러난다는 것만으로는 절대 가름할 수 없다. 나는 이제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고 의지하기에 평생을 주님께 바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기분의 크기도 아니다. 어떤 시련과 환난이 닥쳐도 나는 믿음으로 이겨내야지 다짐하면서 “하나님이 힘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되 뇌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심지어 예를 든 톰슨 의사처럼 하나님과 내 생명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을 하고 강한 의지력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조차 아닐 수 있다. 물론 당연히 믿음이 있으니 자기 생명을 포기하며 주님의 길을 따르겠지만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 자체는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의 결과다. 말하자면 믿음이란 그런 결단, 선택, 실행 들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신자의 영혼 속에서 형성되는 어떤 상태라는 것이다.  

참 믿음은 자기 존재 근원의 맨 밑바닥까지 잠수하여 자신의 진정한 실체와 자아를 완전히 까발린 채 어떤 가감(加減)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말이다. 그래서 정작 자기 존재 전부를 걸어야 하는 문제가 닥치면 자신을 포함한 세상 어느 누구의 권유, 가르침, 도움도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함을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히 부셔지고 부셔져 산산조각 나고 사방은 고립무원으로 꽉 막혀 철저하게 고독해진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가 믿음이다. 그래서 “저는 심령이 너무나 가난하고 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를 위로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32장의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 한 사건을 잘 알고 있다. 야곱이 그 사자에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붙들고 늘어진 것이 돈, 건강, 명예, 권력의 복을 더 달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는 이미 수 많은 재산, 권속, 자녀들을 거느리고 일종의 금의환향을 하고 있는 중이라 그런 것들에 아쉬운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실제로 다음날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자기 소유의 절반을 먼저 보내어 형 에서에게 예물로 주었을 정도였다.

얍복강을 건너기 전날 밤 야곱이 겪은 심령의 갈등은 바로 캄보디아 국경을 건너기 전날 밤 톰슨이 밤새 괴로워 했던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캄보디아에 들어서는 순간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톰슨이나 얍복 나루만 건너면 시종을 사백 명이나 거느리고 기세등등하게 마주쳐 올 형 에서의 칼날 아래 자기 운명을 맡기게 된 야곱이나 그 처지는 동일했다.

“저는 두렵습니다. 불안과 염려를 도저히 주체할 수 없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난 21년간 겪었던 온갖 고생을 오직 고향 땅으로 돌아갈 일념으로 이겨내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너무 소원하여 형과 아버지도 속이며 차지한 장자권(長子權)이지 않습니까? 지난 세월 동안 어떤 환난과 시련이 닥쳐도 오직 그 약속만 바라보고 이겨내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지금껏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어떤 것도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종들, 무수한 가축 떼들, 아내와 자식들, 나의 지혜와 담력과 의지 심지어 여호와를 믿는 믿음조차 지금 나의 이 불안 염려를 없애주지 못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전 처음 알았습니다. 내가 내일 형님의 칼에 맞아 죽는 것도 두렵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서 그 기업을 잊지 못할 것이 더 괴롭습니다. 현재의 내 심령이 내가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평강을 얻지 못하는 저 자신이 너무나 처량합니다. 이 버러지도 못한 죄인을 하나님 위로해 주시옵소서. 솔직히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라고 감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랄 뿐입니다.”

탐슨은 자신이 과연 살아 돌아 올 것인가도 두려워했지만 영혼의 더 깊은 심층에선 자신이 일생동안 쌓아 온 것이 너무나 어이없이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내린 것으로 인해 더 애통해 하며 밤을 새웠다. 마찬가지로 야곱도 형 에서로부터 지켜 주어 가나안 땅에서 복을 누리게 해달라는 이유로만 여호와의 사자에게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눈 앞에 한 커다란 장애가 나타나자 하나님의 약속조차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이다. 둘 다 믿음 조차 아무 힘이 안 되는 연약한 영혼의 최후 막장에 다다른 것이다.

신자가 애통해 할 것은?

신자가 정작 애통해 할 것은 돈이 궁하거나, 건강이 안 좋거나,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것들이 아니다. 신자라고 그런 환난이 닥쳐도 괴롭지 않고  담대하게 이길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여전히 뼈를 깎는 아픔을 느낀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것들에서 구원해 주시고 또 그 동안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면서 힘들고 기도가 끝나도 여전히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환난과 시련이 닥칠 때에 자신이 갖고 있던 믿음조차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애통해야 한다. 환난을 통해 겪는 고통 자체로 괴로워 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올바르지 못함을 괴로워 하는 것이 신자의 애통이라는 말이다.

많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뀌어진 신분, 위치, 특권이 과연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그래서 그것들이 자신의 현실적인 삶과 인생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주위에 형성되고 있는 모든 여건과 만나는 사건과 사람들이 십자가에 바탕을 둔 하나님의 간섭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자신에게는 가장 큰 유익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 간혹 머리로는 알고 있는 사람도 체험을 하지 못하거나, 그런 체험을 많이 했던 자들도 수시로 눈 앞에 펼쳐진 어려움만 보고 그것을 잊거나 사단의 방해에 넘어가 자기도 모르게 또 다시 평강을 잃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래서 그 뜻 안에 들어 온 신자의 바뀌어진 상황은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는 그 양이나, 믿고 의존하는 신앙의 상태와도 상관 없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모습 어떤 처지에 있든지 심지어 죄악 중에 있어도 십자가 앞에 돌아와 엎드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사랑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신자를 모태에서부터 아니 창세전부터 택하여 사랑하셨고 사랑하고 있고 또 영원토록 그 사랑에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이 십자가다. 다른 어떤 심오한 계명이나 사상을 보탤 필요가 없다.

신자가 현재 겪고 있는 그 초조와 상처와 공포는 절대로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구태여 걱정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이미 다 감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힘든 일들이 궁극적인 영광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지 심판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사랑할 당신의 자녀를 끝가지 외면하실 리는 없다. 따라서 신자가 신앙 생활 가운데 절대로 유념하고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 사항은 오히려 그런  환난을 거치지 않으면 예비하신 은혜의 길로 나아갈 방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환난이 아주 힘들 수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울부짖어야 한다. 주위에 동료 성도들의 경우를 보아도 얼마나 힘든 사람이 많으며 그 힘든 사정을 직접 당하는 본인이 아니고는 누가 감히 이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은 단순히 신자의 고통을 경감해주고 그 상처를 싸매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네가 매번 새벽 기도마다 항상 똑 같은 문제만 들고 나와 울부짖지 않느냐? 단지 시간과 장소와 이름만 바뀌었다 뿐이지 여전히 그 속내를 가만히 따지고 보면 돈이 없고 몸이 약하고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는 문제만을 들고 애통해 하지 않느냐? 한 번이라도 너 심령의 그 가난하고 비참한 실체를 보고 애통해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들었다고 입술로 시인은 잘 하면서 실제로는 그 은혜를 알기는커녕 하나님조차 전혀 모르고 있지 않느냐? 어쩌다 돈이 5천불, 만불 생기면 마치 전 우주가 자기 손 아래 들어 온 것처럼 기뻐 날뛰다가 지난달 수입보다 단 돈 500불만 떨어져도 당장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올 것처럼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실망과 좌절로 애통해 하지 않느냐? 그래서 매번 그럴 때만 새벽에 나와 울부짖는 네 모습을 보는 내가 오히려 더 애통하다. 도대체 언제나 십자가가 너에게 참 생명이자 능력이 될 것이며 하나님 당신이 너 인생의 참 주인이 될 것이냐? 한 번이라도 너의 믿음 없음을 애통해 본적이 있으며 그래서 그 믿음 없음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적이 있느냐?”

대부분의 신자는 힘든 문제가 닥치면 기도하여 이겨내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믿음의 결과일 뿐이지 믿음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어떤 것도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매 순간마다 주님 앞에 애통해 하며 엎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탐슨과 야곱은 밤새도록 그 존재가 완전 누더기 조각이 되어 신자는커녕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부셔지고 거덜이 나버렸다. 바로 그것이 ‘애통’이자 믿음의 발단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생명을 살려 구해주겠다는 명시적인 확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절대로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손길을 다시 붙든 것이다. 또 바로 이것이 신자가 받는 ‘위로’이자 믿음의 전부다.

야곱이 축복하지 아니하면 보내지 않겠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달라는 것이지 당장 형 에서에 맞서 이길 수 있는 무기나 지혜를 구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사자는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을지 모른다. 그는 벧엘에서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며 그로부터 받은 약속이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 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1:51)고 약속하셨다.

야곱은 벧엘에서 뿐 아니라 얍복 강가에서도 십자가의 예수를 보았다. 십자가를 이신칭의의 구원 교리로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주님은 언제든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 언제든지는 당연히 시련과 환난 때도 포함하며 나아가 신자가 자기 믿음이 없거나 약함을 애통해 할 때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신자가 받을 위로는 오직 십자가 안에서 뿐이다.

신자든 불신자든 그 인생에 힘들고 슬픈 시련이 끊임 없이 이어진다. 아담의 원죄로 피조세계 전부가 부패되어 이미 그 자체로 모순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자는 힘든 일의 원인을 세상에서 밖에 찾지 못하고 그 대책도 세상에서 찾는다. 신자마저 동일하게 힘든 일로 동일한 해법을 찾으면 그야말로 불신자의 비난대로 얌체 짓이다. 불신자는 부끄러워서라도 그런 문제를 하나님에게 들고 나오지 못하는데 신자는 뻔뻔하게 하나님더러 자신의 괴로움과 불편함을 책임지라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리 신자의 형편과 상관 없이 하나님이 신자를 사랑한다는 계시의 절정이자 완성이라고 해서 신자더러 그런 식으로 뻔뻔해지라는 뜻은 아니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깨달아 더욱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정작 실질적인 위로는 현실에서 구하려 하면서 하나님은 언제든 내 편이니까 하나님의 수완만 빌려 쓰려 해선 안 된다. 십자가 사랑 안에서 전 존재와 전 인생을 바치는 것과 자기가 급할 때만 그 사랑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자가 애통해야 할 것은 불신자와는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 현실의 조그만 장애에도 순간적으로 내 믿음을 포함하여 가진 모든 것들이 아무 힘이 안 된다는 것을 애통해 해야 한다. 연약한 육체, 유한한 능력, 형편 없는 도덕성, 그러나 무엇보다도 탐슨과 야곱처럼 하나님의 일을 순종한다고 서원하고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난 너무나도 가난한 영혼을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애통해 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환난을 허락하는 이유가 신자를 인내로 단련시켜 도덕적 군자나 영적 종교적 성자로 만들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에 평생을 바치라는 것도 아니다. 단 한가지, 그 어떤 환난 가운데도 신자가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십자가 안으로 되돌아 오는 것 뿐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위로가 없으면 인간은 절대 행복해 질 수 없고 평강을 구할 수 없음을 확신하는 것, 바로 그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위로는 넘치기 시작한다. 기도한 급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위로 받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애통해 하며 어떤 위로를 구하고 있는가? 당신의 영혼이 십자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있는 것을 애통해 하는가?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만 위로를 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돈이 없고, 병들고, 상처 받아 애통해 하며 오직 그것만 해결하려 든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교회로 오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면 당장에 그 문제들을 해결해 줄 전문가나 기술은 새고 샜다.                    

김순희

2011.01.19 11:14:22
*.161.91.154

ㅋㅋ 불신자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세상의 형통을 신자는 부끄럽게도 그것만
구하려 새벽기도며 철야기도에 열심을 내고 있는 현실이네요. 불신자들이 신자를 얄밉다하겠어요.ㅋㅋ

애통이라는 것, 가시적으로 보이는 어떠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심령 저 깊은 밑바닥의 상태를 자신이
들여다 보며 경악을 하는 것, 그래서 세상의 어떠한 힘과 능력이 해결해 줄 수 없고 그간 배우고 갈고
닦아온 신앙의 실력이 해결해 줄 수 없고 자신이 이루어 놓은 종교적 업적이 해결해 줄 수 없음을 가슴을
치며 나뒹구는 그 모습이 바로 애통임을 이 시간 또 배웁니다.

오직 보혈의 강 속에 뛰어 들어가 그 보혈 속에서만 참 행복을, 부어주시는 참 기쁨을, 너무도 포근한 그
사랑에 감격하여 매일 목놓아 우는 우리 그예다 가족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임화평

2014.04.18 03:15:01
*.200.155.194

참 부끄러워 지네요
하나님께 책임져 달라 요구하고 하나님의 수완만 빌려 쓰려한
뻔뻔한 신자가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진정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되어 애통해 하는 성도되길 소망합니다
그럼에도 사랑해 주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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