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34) 팔복강해(8)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불신자의 비난
신자가 불신자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으로 인해 자주 듣는 힐난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왜 그리 사람의 의지가 약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기면 되지 꼭 주일날 교회에서 울고불고 매달려야 하나?” 미국 최고 갑부중의 한 사람이자 여배우 제인 폰다의 남편이었던 CNN의 회장 테드 터드는 심지어 “기독교는 패배주의자들의 종교”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마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보았지만 현실의 삶은 여전히 궁상 맞다 못해 남들보다 훨씬 뒤쳐진 듯하면 마음 한 구석으로는 솔직히 그런 비난이 타당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복 주실 것이야. 주일 한 번 빠지지 않았고 열심히 성경 공부하고 힘에 부치게 헌금도 했는데 나를 이대로 버려 두실 리가 없어. 이땅에서라도 안되면 죽은 후라도 나는 천국 가서 복 받지만 저런 못된 죄인들은 지옥 불로 심판하실 거야”라는 다짐도 한다. 본문 말씀대로 본인이 온유한 자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를 얻어 가면서 말이다.
이런 불신자의 비난과 그에 대한 신자의 반응은 잘못된 것이다. 둘 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 동기와 목적을 근본적으로 현실에서 복을 받느냐 마느냐에 두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불신자가 비난하는 초점이나 신자가 그 비난을 이해하는 각도가 본문에서 말하는 신자가 ‘온유’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자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얌전하고 조용하며 힘을 동원하지 않고 무엇이든 양보하며 손해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닥쳐도 스스로 잘 헤쳐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자에게라도 의지해야 하는 기질과 품성, 말하자면 적극적, 능동적, 외향적인과는 반대인 소극적, 수동적, 내향적인 것을 두고 ‘온유’라는 것이다.
기질과 성품은 후천적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준 일종의 은사(恩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적극적으로 또 어떤 사람은 소극적으로 창조하셨다. 만약 온유가 그런 성격의 문제라면 알기 쉽게 말해 본문은 “소극적인자는 복이 있나니”의 뜻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은 적극적인 사람에게는 복을 안 주신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에 이른다. 나아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들어 놓고 세상에선 그 반대로 만들어 놓은 사람에게 손해와 희생을 당해라 그러면 나중에 내가 복을 줄 것이다가 된다. 심하게 말해 하나님은 한 연약한 인간을 두고 병 주고 약 주는 꼴로 처음부터 갖고 논 셈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당신의 뜻대로 모든 인간을 심히 보기 좋은 완성된 전 인격체로 만드시고 그 만드신 대로 고유의 의미와 목적과 계획이 다 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억울하게 상처 받고 손해 입은 것을 반드시 신원해 주고 힘이 없고 약할 때에 보호해 주신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성과 기질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온유’ 뿐 아니라 팔복 전체에 해당된다. 팔복이 인격적으로 어떤 품성이 고매해지고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을 하지 않고 종교적인 죄를 짓지 않으면 복을 주신다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팔복 강화를 권선징악(勸善徵惡) 적인 윤리 지침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주제는 ‘천국’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는 것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들의 생명력이 넘치는 참되고 복된 삶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에 신자더러 그런 축복을 누리라는 것이다.
온유가 지면에 승한 사람
성경에서 어떤 인물을 두고 가장 온유하다고 그것도 하나님이 직접 칭찬한 적이 있다. 누구겠는가? 언뜻 생각하면 다윗일 것 같다. 자기를 죽이려는 대적 사울 왕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오히려 두 번씩이나 살려 주었고, 자식이 반역하자 피난을 가면서도 원망은 않고 끝까지 손해를 감수했다. 시편의 고백을 보면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고 골수의 진액이 마를 정도로 어려움을 수도 없이 겪었지만 그 모든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했다. 어찌 그만한 온유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을 지목하고 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우리 생각에 모세는 온유와 거리가 너무 먼 사람이 아닌가? 그는 애굽 관원이 동족을 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추었다.(출2:12) 신 광야에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죽겠다고 원망하자 하나님이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는데도 지팡이로 두 번씩이나 쳤다.(민20:11) 그는 이 사건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당신의 영광을 가린 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았고 입경 직전 느보 산에서 그 땅을 멀리 내려다 보면서 쓸쓸히 운명했다.
그가 하나님께 소명 받을 때에 여러 번 사양했던 이야기(출애굽기 3장)를 잘 알고 있다. 그가 가장 중요한 변명으로 내세운 것은 “말이 능치 못하고 입이 뻣뻣하여 둔한 자”(출4:10)라는 것이었다. 말에 조리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할 말의 내용을 잘 모르면 조리가 없어지지만 모세 오경을 기록했고 바로의 궁전에서 왕자로 교육 받은 그가 지성적으로 모자랐을 리는 없다. 또 고대 왕들의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웅변과 수사학이다. 말을 잘해야 부하들을 잘 설득하고 통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입이 뻣뻣하다는 것은 말을 더듬었을 가능성이 많았다는 뜻인데 보통 성격이 급한 사람일수록 말을 더듬기 쉽다. 어느 모로 따져 보아도 모세는 그 기질과 성격이 불 같이 괄괄했던 자였지 온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본문에서 ‘온유’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프라에이스)는 처음부터 힘이 없어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기와 활력이 넘치도록 강하지만 그 힘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절제할 수 있는 경우를 뜻한다. 감기 몸살로 펄펄 끓던 열이 뚝 떨어져 상쾌하게 단잠에 빠진 상태, 폭풍우가 몰아치던 바다가 혹독한 비바람이 그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햇빛이 내려 쪼이며 너무나도 잔잔해진 상태, 길길이 날뛰던 야생마가 주인의 조련으로 온순해진 상태를 말한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항상 조용하고 침착하고 부드러웠던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그 속에는 열정과 힘이 흘러 넘치고 심지어 분노가 끓어 오르지만 유효 적절하게 통제하는 자다.
그러나 무조건 꾹꾹 눌러 참고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는 것은 온유는 아니다. 말하자면 포커 페이스(Poker Face: 포커 노름을 할 때 상대가 무슨 패를 쥐고 있는지 짐작도 못할 정도로 겉으로 감정 표시를 드러내지 않은 것) 나 ‘크레믈린’(소련의 궁전 이름으로 철의 장막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속으로는 항상 다른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지만 겉으로 태도는 항상 친절하고 예의 발라 남들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는 것은 온유가 아니라 교만의 절정이다.
온유란 불신자들이 신자를 비난한 것처럼 나약하고 비겁하고 게을러서 아무 것도 못하거나 안 해 아예 충돌 자체가 안 생기는 것도 아니요, 시기와 분노를 속에 감추고 겉으로만 싹싹하고 아양을 떠는 비굴도 아니요, 자기는 백로이기에 감히 까마귀 노는 골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서도 항상 겸손한 척 사양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서로 사랑으로 섬겨라고 해서 신자가 누구 앞에서나 웃음을 잃지 않으려 기를 쓰고 노력하다 나중에는 턱뼈가 아파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라
온유의 참 모습은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고 친절해야 할 때 친절하고 섬겨야 할 때 섬기고 웃어야 할 때 웃는 것이 온유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를 내지 말아야 할 때는 절대 화를 내지 않고 정작 화를 내야 할 때는 반드시 화를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항상 유약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성전 마당에 가득 찬 환전상과 장사치들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다고 호통을 치며 내 쫓으셨다.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율법의 문자적 계명에 치중하면서도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며 마치 천국을 독차지한 양 하는 바리새인들더러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를 퍼 부었다.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는 차라리 소돔과 고모라의 때가 지금보다 나았다고 애통해 하셨다.
반면에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는 죄와 죽음과 사단의 권세 아래 묶여 있는 인간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통분해서 우셨다. 율법대로 하자면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임을 당해야 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한 여인더러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이제 더 이상 죄를 짖지 말라고 용서해 주셨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어떤 젊은 남자와 살고 있는 수가 성의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생수를 주노니 세상에 주는 물과 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녀가 그때까지 묶여 있었던 죄책감, 굴욕감, 수치감의 멍에를 벗기고 구원을 베풀었다.
예수님은 꼭 화를 내어야 할 때는 정말 그 화를 폭발 시켰고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는 한량 없이 베푸셨다. 감정이 극도에 치달은 모습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분노는 분노답게 사랑은 사랑답게 드러냈다는 것이다. 신자가 예수님에게 배울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 괄괄했던 모세를 성경은 왜 온유하다고 그것도 이 세상 사람 중에 최고로 그러하다고 표현했는가? 그가 온유해진 계기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도록 질문을 바꾸어 보자. 신자가 어느 때에 가장 온유해지는가? 차분하게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곳은 두말 할 것 없이 교회다. 교회 나와서 얼굴을 붉히며 화내는 법은 교회가 갈라져 서로 싸울 때 빼고는 없다. 왜 그런가? 그것도 간단한 이치다. 제사 지낼 때에 웃고 떠드는 사람 보았는가? 진위 여부는 둘째 치고 조상 귀신이 와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그 앞에서 제 멋대로 설쳐댈 수는 없다.
교회에서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치면 어떻게 야단치는가? “하나님이 계신 곳인데 왠 소란이냐?” 교인들이 교회 나오면 일단은 자기 성질을 죽이고 성경을 가슴 가까이 모셔 들고 서로 만면에 웃음을 짓기 바쁘다. 아무리 그 속에 위선과 가식이 어느 정도 있다 치더라도 어쨌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임재해 있는 곳,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있는데라는 기본 인식은 있다. 또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혹시라도 부부 사이에 다투는 일이 생겨도 “내가 방금 하나님을 만나고 왔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라고 마음을 고쳐 먹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신자의 가정, 직장, 학교, 가는 곳 마다 항상 동행하신다. 부부싸움 할 때도 당연히 그 싸움을 보고 듣고 계신다. 하나님이 신자 부부끼리 방금 주일 예배 드리고 와선 싸우는 모습이 민망해서 잠시 피해주시는 법은 없다. 순간적으로 방금 예배 드리고 왔는데라는 죄책감이 드는 것도 함께 하신 성령님이 탄식으로 신자에게 깨우쳐 주신 것이다. 즉 신자는 하나님이 보고 있다는 생각이 확실 할 때에, 지금 자기 앞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자기가 서 있다는 의식이 있을 때에 가장 온유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핑계 삼아 평소 때의 불만을 터뜨리며 너만 선지자냐 우리도 선지자라고 비방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는 온유한 자인데 함부로 비방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온유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122:6-8)
모세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임재해 있고 자기도 하나님의 목전(目前)에 있음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고 그 확신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했다. 그가 범죄한 것은 반석을 두 번 친 사건에서 보듯이 오히려 그 뜻을 지나치게 실행했기 때문이었다. 모세처럼 하나님 뜻대로 하는 바로 이것이 온유의 비결이자 실체다.
그렇다면 모세의 평생 중에 가장 온유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 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새긴 것이더라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출32:15-20)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로 흐르자 80이 넘은 노인이 돌 판을 던져 깨뜨리고 우상의 불탄 가루를 물에 타 마시게 하고 또 그 우상 앞에서 마시고 춤추던 자 3천 명을 사형시켰다. 분노를 터트릴 때로 터트렸지만 이는 온유의 절정이었다. 역설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모세는 이 일이 있기 직전까지 40일 간이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있었다. 그분의 의로우시고 선하심을 직접 체험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복 주시려 율법을 세밀하게 예비해 놓으신 그 의도와 목적을 완전하게 체득했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모든 심령, 생각, 말, 행동을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생명이 전적으로 주장하도록 했고 그의 성격과 기질도 들어 사용하도록 내어 드린 것이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목적과 결과도 하나님 당신의 뜻과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었지 모세가 분노를 터뜨리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죽는 것도 아니었다.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가진 모든 것으로 순종할 때에 비로소 온유가 온전해진다. 반드시 분노를 터트려야 할 때인데도 무조건 참는 것은 온유가 아니라 비겁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짓밟히는데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모세가 추구한 것은?
모세가 출애굽의 소명을 받기 전까지 80평생을 두고 고민하고 갈등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는 과연 어떤 일을 추구하고 소망했겠는가? 틀림없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런 고통 속에 신음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였을 것이다. “나를 이스라엘 사람이면서도 기적적으로 애굽의 왕자가 되도록 하였다면 그 지위와 능력으로 동족을 구원하라는 뜻이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구하려고 시도한 첫 사건부터 왜 하나님은 나를 외면하시고 40년간이나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일에만 허송세월 하도록 버려 두시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 내 백성을 구원해 내라고 하자 모세가 감히 불경하게도 온갖 핑계를 대며 주저한 배경에는, “지금껏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양치는 일밖에 못하는 늙은이더러 세계 최강국을 상대로 그런 큰 일을 하라고 합니까?”라는 섭섭함, 당혹감, 의아심 모두가 합쳐진 것이다. 그로선 80년을 혼자 괴로워했으니 하나님께 무려 네 번씩이나 주저하고 따질 수 밖에는… “내가 누구관대 이런 일을 맡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 하나님이라면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를 당신이 보내셨다는 것을 못 믿으면 어떡합니까?”, “나는 입이 뻣뻣한 줄 잘 알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한결 같은 대답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였다. 특별히 모세가 가졌던 지팡이로 이적의 시범을 보이고 그 지팡이를 들고 가라고 하셨다. 온갖 손 때가 묻은 낡고 허름한 지팡이를 말이다. 무슨 뜻인가? 지난 40년간 네가 목자 생활을 할 동안 하나님은 단 한번도 모세를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네가 항상 오른 손으로 들고 다녔고 누어 잘 때도 바로 곁에 두었던 그 지팡이가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 지팡이는 모세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 되었다.
오래 동안 고민한 의문일수록 해답을 얻게 되면 그 확신의 강도는 커지고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80년 간을 혼자 갈등했던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은 붙어도 타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 앞에 신발을 벗고 엎드렸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그 음성을 들었다. 성경은 그를 두고 천국에서나 볼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본 자라고 했고,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오면 얼굴에 반사된 그분의 광채를 일반인들은 감히 눈이 부셔 보지도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떨기나무 사건 이후로 그는 단 한번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심을 해 본적이 없고 실제로 그는 하나님과 맞대면하여 분명한 말씀으로 구체적으로 인도 받았다. 그래서 그분의 뜻과 계획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그 인생의 마지막 40년은 오직 하나님의 면전에서 먹고 마시고 자고 행동했다. 그의 온유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첫째 복에서 셋째 복까지
팔복 강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가장 먼저 심령이 가난하라고 했다. 하나님을 떠난 내 영혼이 얼마나 갈급하고 비참한지 철저히 자각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시련과 환난을 두고 애통해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심령의 가난함, 말하자면 하나님을 떠나서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은 갈증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실패와 좌절 뿐임을 절감했기에 신자가 된 후라도 자기 심령이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멀어진 것을 애통해 하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이 어떠한 분인가를 알게 해주셔서 치유의 위로를 주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시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되고 그분의 임재를 재확인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온유해질 수 밖에 더 있는가?
하나님의 임재 아래 있고 그분의 의롭고 강한 오른 손이 자신을 꽉 붙들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 신자는 당당해진다. 자신감이 넘치고 어떤 곤란한 경우를 당해도 비굴해지지 않는다. 시련과 환난이 겹쳐도 슬픔과 염려와 불안 대신에 평강과 자유함이 생긴다. 거대한 폭풍우가 닥쳐 모든 것을 다 휩쓸고 지나가 하나 남는 것 없다 할지라도 그 심령은 고요하다.
더 이상 야생마처럼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며 발길이 허공만 치는 실패와 좌절을 겪지 않는다. 비록 이전의 기질과 성격은 여전히 여전이 펄펄 살아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 가기에 그분의 뜻대로 절제가 가능하다. 이제는 자존심, 체면, 시험, 유혹, 정욕, 죄악 들이 내 심령에 스며들지라도 그것들이 자신을 제 멋대로 짓이겨대는 것을 결코 방임해 두지 않는다. 예수님의 쉽고도 가벼운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고 있기에 주님처럼 온유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 신자더러 세상에서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많을 테니까 내가 원수를 갚아주고 그 손해를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또 성격과 기질을 온순하게 바꾸고 항상 부드럽게 사람을 대하라 그러면 복을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너희가 신자라면 항상 주님의 면전에 있다는 분명한 자각과 그에 버금가는 행동이 따르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왜 신자가 아무리 기도해도 온유해지지 않는가? 예배를 드려도 기쁘지 않고 찬양을 해도 승리가 따르지 않고 말씀을 배워도 변하지 않는가? 왜 세상과 사람 앞에 주눅이 들며 죄악과 사단의 시험과 유혹에 그리 쉽게 넘어가는가? 신자가 신자 된 본질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신자가 되었다고 우리의 성격이 착하고 온유해지거나 갑자기 담력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항상 선한 일을 해야 하고 무조건 배포가 크지는 것이 아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한숨을 듣고, 눈물을 보고, 의로움을 입고,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을 기뻐하고 슬퍼하는 일을 슬퍼해야 한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과 항상 동행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언제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가져선 충분하지 않다. 바로 내 자신의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서 내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고 있으므로 어떤 일이 닥쳐도 요동치 않아야 한다. 그분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입이 뻣뻣하다고 우기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2)고 약속하셨지 않는가?
모세가 애굽 관원을 쳐 죽일 때에 성경은 “좌우로 살펴 사람 없음을 보고”(2:12)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 때까지는 모세는 온유한 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성격이 불 같아서가 아니다. 아직 사람과 세상의 눈치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없이 단지 정의감으로 자기 분노를 절제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직 그를 주장하지 않는 단계다.
반면에 두 돌 판을 깨고 삼천 명을 사형 시켰을 때는 자기의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애통과 분노에 완전히 사로잡혔던 것이다. 개인적인 염려 불안 초조가 그를 흔들 틈이라고는 없었다. 바로 이것이 온유의 참 모습이다.
하나님은 눈동자 같이 신자를 지키시고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오늘도 교통 사고나 심장마비 안 나게 해 주신다는 정도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처럼 한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듯이 우리 모두도 모세의 지팡이를 갖고 있다. 성령님이 내주하는 성령의 전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맞대면 하셔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 있다. 문제는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다. 하나님의 분노와 슬픔과 애통에는 참여할 마음이 없고 오직 기쁨에만 그것도 공짜로 편승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더럽고 악한 세력 앞에 당당히 맞서 하나님의 분노를 그분 대신 터트리고 반면에 그것에 눌려 있는 불쌍한 영혼을 바라보는 그분의 애통함에 함께 동참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때 성령님을 통한 당신의 임재가 신자에게 참 능력과 위로가 되며 신자는 진정으로 온유해질 수 있는 것이다.
착하고 양처럼 순하고 그저 미소 머금고 이웃을 대하는 것을 온유로 배워왔었습니다.
너무도 잘못 가르쳐졌고 너무도 잘못 배워왔기에 거룩을 겨우 외적 모습으로만 보고 판단하고..
비느하스의 의분, 모세의 의분.
바로 하나님의 맘을 알아서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최고의 온유임을
그리할 때 자신의 초라함, 자신의 우유부단함등은 뛰어넘을 수 있는 것임을 배웁니다.
잘 길들여진 야생마의 모습, 철저히 주인의 말에만 순종하는 그 야생마의 모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