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숙명론

조회 수 525 추천 수 32 2010.07.05 19:58:53
기독교와 숙명론


“무리와 말씀할 때에 그 사자가 이르니라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6:33-7:1)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는 큰 불만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왜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느냐는 것입니다. 경사든 흉사든 주님 뜻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명 자기가 잘못한 일마저 신에게 탓을 돌리므로 무능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이라기보다는 숙명론(宿命論)과 가깝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런 신앙양태를 보이는 교인들이 꽤 있습니다.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말을 이래도 주님 뜻, 저래도 주님 뜻이라고 손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인 양 착각합니다. 순종이라는 미명하에 사실은 매사를 체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불신자들의 오해를 살만도 합니다. (내려놓음에 대해선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만...)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바람에 아이들마저 잡아먹을 정도로 성안의 사정이 극도로 긴박해졌습니다. 엘리사 때문에 수차 곤욕을 치른 벤하닷이 사실은 이스라엘보다 그를 처벌하러 작심하고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사자를 보내어 엘리사에게 크게 야단쳤고 그에 대해 선지자가 반박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왕은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알고 따르는 왕이라면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입니다. 재앙을 여호와가 주었다면 그대로 묵묵히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순종의, 최소한 숙명론적 신앙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한 칸 더 나갔습니다. 여호와가 재앙을 주었으니 다시 거두실 리 없으니 벗어날 길을 다른데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람에게 항복하든지 그들 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의미가 따로 있습니다. 왕도 이 환난이 벤하닷의 엘리사에 대한 개인적 앙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열렬히 신봉하는 너 때문에 국가에 이런 큰 재앙이 닥쳤으니 네가 여호와 따르는 일을 당장 중지하고 아람 왕에게 사죄하러 가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벤하닷에게 넘겨주고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이 원인을 제공한 자가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사는 그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엄청난 예언을 했습니다. 자기 아이들마저 삶아 먹어야 했던 최악의 상황에서 하루 만에 최고급 식품들이 최고 염가로 팔릴 정도의 최상의 상태로 여호와가 바꿔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재앙이 닥치면 무조건 하나님 뜻이라고 감내하는 숙명론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고 참아내기만 하면 하나님이 언젠가는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단계로 그치지 않습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재앙을, 지금 한 개인으로 인해 국가 전체가 환난을 겪는 것처럼,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만, 의심, 불신에는 더더욱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절망의 심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소망만 심어주지 않고, 곧바로 당신께서 최상의 단계까지 실현하시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적의지란 단순히 자기 믿음의 의지적 결단을 최대한 끌어 올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마저 온전히 그분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엘리사도 지금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아람 왕 양쪽에서 어차피 죽임을 당할 처지에 이르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에게서 보통 사람이라면 바랄 수도 없는, 아니 상상조차 못하는 소망을 발견하여 전적으로 붙들었습니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최악의 절망을 최상의 소망으로 바꿀 수 있는 종교입니다. 완전히 엎질러진 물도 다시 병에 담을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 신앙의 대상이 우주만물을 섭리주관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 관념의 산물인데 반해 기독교만은 살아있는 하나님이 실제로 역사하는 참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단계에서 또 다른 신앙의 오류가 쉽게 발견됩니다. 능치 못할 하나님을 너무 과신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로 최악을 최상으로 단숨에 바꿔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결과적 현상만 소망하여서 자신도 그런 상태가 되기만 죽기 살기로 믿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도 바꿀 수 있다는 조금은 무리한 설명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自存)하시는 분입니다. 영원토록 일체 외부와 연관과 도움 없이 오직  자기 능력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그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이에 따라 자존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당신의 뜻이 영향 받지 않는다는 이차적 의미가 필연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은 자신의 뜻에만 따라 자신의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심지어 신자의 기도마저 그분의 뜻을 바꿀 수는, 비록 결과적으로는 그런 모습을 띠긴 해도, 없습니다. 당신의 역사는 당신께서만 주관하십니다. 절대자인지라 그 뜻도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기도대로 응답되는 경우는 그럼 무슨 뜻입니까? 당연히 신자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또 신자의 마음의 소망까지도 그분은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소망도 사실은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도가 깊어지면 하나님이 시킨 기도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소망을 심어주고 또 그렇게 기도를 시킨다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신자를 당신의 동역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과 결연히 맞서 싸우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군으로 부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일에 충성하되 사실은 그분께서 손잡고 이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일에 쓰임 받기를 열망하며 헌신되어 있을 때는 그분과 함께 엎질러진 물이 다시 담기는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의 한탄처럼 신장에게 재앙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호와께 더 이상 기대해선 안 됩니까? 여호와가 일으켰다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이도 여호와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는 절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더러 문제를 일으킨 이가 해결하라고 덤빈 이스라엘 왕의 생각은 분명히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사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여호와께 구원에 대해 매달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단순히 재앙에서 구원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일이 없는지 스스로 되돌아 봐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 믿음의 상태도 올바른지 재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재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당신의 일군에 합당하게 거룩하고 온전해져서 당신의 일을 다시 잘 수행하라는 뜻일 뿐입니다. 그런 자리로 완전히 되돌아올 때에 비로소 신자의 기도도 영글어지고 그 응답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악에서 최상으로 바꿔주는 것이 단순히 매직 쇼를 보여주려는 뜻은 아닐 것 아닙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에게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사용해 최악에서 최상으로 바꾸는 것은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합니다. 그분의 신자에 대한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가며 당신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 실천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왕의 잘못만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잘못된 숙명론에서 대박만 바라는 뜨겁고도 강한 믿음으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또 재앙에서 구원만 바랍니다. 아니 재앙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 부인하며 다른 길부터 찾을 때도 많습니다. 최악에서 최상으로 바꿔주실 것만 기대하지 그렇게 하시는 그분의 참 뜻에는 관심을 전혀 두지 않거나 한참동안 잊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 모두는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6/3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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