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팔아버리는 예수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찌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출30:15,16)
교회에 내는 헌금은 오직 믿음 안에서 자의(自意)로 내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도더러 얼마를 언제까지 내라고 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성전 건축 같은 특정 목적을 위한 반 강제성(?) 작정 헌금이라도 본인의 결단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이 반드시 언제, 얼마를, 누가 내어야 한다고 지정해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가 성도들에게 헌금 명세를 정해주고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한 셈입니다.
모세 당시에는 백성의 수효를 조사 할 때에 20세 이상의 모든 자가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 후로는 전 유대인들이 매년 한 번씩 아달월(양력2-3월) 15일 경에 성전 수리와 유지를 위하여 바쳤습니다. 생명의 속전이란 죽을 생명에서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또 매년 바치는 이유는 성전에 들어가는 고정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지난 해에 지은 죄에 대한 사함을 구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성전세는 성도가 죄에서 구원 받은 은혜에 감사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금액의 차별을 두지 않고 동일하게 반 세겔씩 내게 했습니다. 죄에 경중(輕重)을 따질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 앞에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그 죽을 생명에서 구원 받은 은혜의 크기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는 결코 없습니다. 물론 사람 쪽에서 구원 받은 감격은 다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 쪽에선 누구나 다 똑 같이 자신이 지으신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그야말로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 없다는 심경으로 모든 인류를 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기준은 오직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모두가 똑 같은 인간입니다. 그분에게는 건강, 외모, 가문, 학벌, 재물, 권세, 인격 등 그 어떤 것도 인간을 차별 지을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분에게는 오직 사단에 속한 생명이냐 자신에게 속한 생명이냐 구분 지을 뿐입니다. 사단에 속한 생명은 육신의 생명은 살았으되 영혼은 죽은 자이며 당신에게 속해야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살아나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 쉽게 말해 성전세를 받는 원칙은 지금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에게 참 생명을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 매주 성도들의 죄를 예수님의 복음으로 씻어주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생명의 속전을 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하나님처럼 교인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을 보는 기준은 오직 생명이 붙어 있느냐 없느냐로만 따져야 합니다. 한 마디로 살아만 있으면 아무리 가진 것 내세울 것 하나 없어도 참으로 고귀한 한 인간(생명)으로 대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선 절대로 인간적, 세상적, 현실적 비교 기준이 적용되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사람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도 하나님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했느냐 아니냐 뿐이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를 제대로 모르는 자들에겐 예수만 전해야 하며 중생한 신자에게는 예수를 더 깊이 알고 함께 동행하도록 해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특별히 헌금 액수가 교회 사역의 어떤 부분에도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쳐선 안 됩니다.
한 기독교 포탈 사이트에 어떤 분이 쓴 칼럼에서 교회 분란의 가장 큰 원인은 중직 임명 때에 돈이 기준이 되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맞는 말인 것같습니다. 헌금이 생명의 속전이 아니라 교회 직분의 판매 대금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부패한 집단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교회 안에 버젓이 그것도 하나님을 위하고 그분의 일을 한다는 거룩한(?) 명목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여 받은 반 세겔을 회막의 봉사에 쓰라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치면 성전을 짓고 보수 유지하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한국 교회들에선 건축 헌금 액수에 따라 교회 안의 서열마저 달라집니다. 최선을 다해 말씀대로 따르려고 해도 모자랄 텐데 대놓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처럼 가르치면서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말고 세상적 처세술이나 가르치는 것이 서로간에 훨씬 유용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가 어떤 모습과 처지에 있던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자는 그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아직도 예수 밖에 있는 자는 그 사랑을 알지 못해 받지 못한다는 차이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그 사랑의 원리에 동참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생명이 있는 사람을 모두 사랑했기에 우리 또한 호흡이 있을 동안은 그 분을 송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호흡을 계속해서 허락하시는 것은 당신을 기뻐하고 찬양하라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는 사실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천국에서 자연적으로 온전한 신령과 진정으로 찬송하게 됩니다.
나아가 성도가 다른 사람을 바라 볼 때에도 똑 같이 해야 합니다. 성도 자신이 호흡이 있는 한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 상대도 호흡만 있고 세상의 것 단 하나도 갖추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사랑하셨으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바로 내가 호흡이 있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나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미 참 생명을 얻은 자들로부터 그 속전을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받는 곳입니다. 성도는 참 생명을 얻은 기쁨을 세상과 사람을 향해 그 삶 속에서 자랑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돈 많은 사람에게 생명이 더 많은 것, 아니 흑암에서 갇혔던 죽음이 더 많은 것도 아닌데도 더 대우 해주겠다는 달콤한 사탕을 앞세워 더 받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 돈을 생명을 살리는 일 보다 다른 목적으로 유용하려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명 외는 인간이 관계되는 세상의 무슨 일이라도 반드시 차이가 있으니 그것에 맞추려면 당연히 헌금도 차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죽음과 생명, 즉 죄책(罪責)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죽고 의인으로 사는 그 생명과 죽음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성도가 십자가 대신 돈으로 그 생명을 팔려 들어서는 오히려 예수님이 그들을 세상에 팔아버리고 당신의 생명책에서 제거하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1/30/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