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해야 할 한가지 일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0,11)
고린도 교회가 죄를 지은 한 교인을 출회토록 결정을 내리자 그 본인이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출교를 강행해야 한다는 쪽과 다시 교인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으로 용서해주라고 권했습니다.(6-8절)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너희가 그를 용서하면 나도 용서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도 그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럼 용서하지 않아서 사단에게 속게 되는 내용이 과연 무엇입니까? 성도들끼리 설령 앙금이 남았더라도 일단 힘을 합해 사단과 대적하라는 뜻입니까? 혹시 회개한 자가 거짓이었을 수 있기에 알고도 용서해주라는 것입니까? 그래서 교인 숫자부터 늘리라는 뜻입니까?
인간이 사단에게 최초로 속아 넘어간 후에 두렵고 부끄러워졌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져 그분으로부터 숨어버렸습니다. 또 각자가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졌고 상대에게 범죄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 또 이웃과 서로 분리되었습니다. 분리야말로 죄의 본질이자 결과입니다. 사단은 오직 인간을 하나님과 분리시킬 목적으로 속입니다. 그 다음은 자동적으로 인간 스스로 망가지며 또 사람 사이도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의 분리되었던 사이를 다시 연결시키는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땅에 사랑의 용서를 퍼트리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도 자신이 가장 먼저 하나님과 화해했고 그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그런 은혜에 들지 않는 이웃을 보면 불쌍해집니다. 특별히 사이가 벌어진 이웃을 용서하여 화해하거나, 최소한 그러고 싶은 소원이 생깁니다.
그럼 교회는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는 자들끼리 모여 서로 용서하는 일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혹시 누가 죄 가운데 있더라도 다른 교인들을 함께 썩게 만들지 않는 한에는 그가 하나님과 화해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회개의 진정성을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데 교회로서 이미 결정한 일을 취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 바로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없기에 더더욱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신자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서 아무 조건 없이 용서를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긍휼을 입고도 이웃을, 그것도 하나님께 회개했다고 교회에 용서를 비는 자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그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용서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고유 권한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할 신분이기에 그 권한을 인간끼리 행사하라고 특별히 위임 받은 것입니다. 용서는 신자의 권한이 아니라 소명일 뿐입니다.
신자의 용서는 세상 사람의 용서와 달라야 합니다. 교인 각자가 가장 먼저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성도가 잘못한 다른 성도를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선 여전히 인간적인 용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당사자가 하나님 앞에 먼저 용서를 구한 후에 각자가 공(共)히 그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상대가 믿음이 연약하여 그렇게 되지 못하면 믿음이 성숙한 쪽에서 하나님께 상대의 믿음이 자라 서로 용서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임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믿음이 좋으니까 선심 쓰듯 먼저 용서를 베풀겠다는 식은 안 됩니다.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용서를 신자가 자의적으로 행사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는 용서를 오직 소명으로 실천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길은 자신과 상대가 함께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 그 은혜를 입는 것, 즉 사단에게 속지 않는 것뿐입니다.
10/1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