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반석이란?

조회 수 1315 추천 수 21 2010.11.12 01:10:00
믿음의 반석이란?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柱礎)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눅6:47-49)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읽고 치웁니다. 일반 신자들이야 신학적 지식이 얕고 또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잘 몰라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들마저 수박겉핥기식이니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본문입니다.

반석과 흙(마태복음 7장에선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대개 어떻게 해석합니까? 견고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 어떤 환난이 와도 잘 견디고 승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세상에서 아무리 고달프고 힘든 일을 만나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표방하는 내용 자체는 틀린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의미하는 바와는 완전히 핀트가 어긋난 해석입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비유는 어디까지나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작 해석 적용해야할 주제가 포함된 구절은 따로 있습니다. 비유 안에서도 여러 영적 진리를 꺼낼 수는 있지만 본문과 정확하게 연관되는 것만 해석에 인용해야 합니다. 비유에서 임의로 분석해낸 아무 의미나 주 내용으로 삼아선 절대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초점은 바로 앞 절인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46절)에 모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당신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의 특성을 부연 설명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굳건한 믿음으로 환난을 이겨내라는 것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집을 대조한 이 비유는 반드시 순종과 연결 지어야 합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계명을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이며 불이행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다.”

역으로 말해 믿음으로 고난을 이긴다기보다는 순종이 고난을 이기는 셈입니다. 그러나 6장 전체의 문맥에서 살피면 이미 말씀드린 대로 고난을 이겨내는 것과도 일차적 연관이 없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나무와 열매의 비유(43,44절)와, 마음에 쌓인 선과 악의 말씀(45절)과 동일한 맥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란 나무에 온전한 가지로 붙어 있어서 그 마음에 선이 쌓여 있는 자는 아무리 큰물이 나서 탁류가 부딪혀도 계명을 준행하는 열매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마음에 쌓인 선 즉, 반석의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순종하려는 마음이며 바로 그것이 그가 가진 믿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 반대로 예수님 나무에 가지로 붙어 있지 않으면 그 마음에 악이 쌓여 있기에 탁류가 부딪히면 계명을 준행하지 않는 열매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쌓인 악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인 셈인데 무슨 일이 생겨도 반드시 순종하겠다는 마음은 처음부터 없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것이 그가 가진 믿음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집을 짖기는 하지만 즉, 예수님을 따르는 척 하지만 현실적 고난이 닥치면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세상 쾌락이 좋아서 마음은 세상에 있으면서도 발만 교회 안에 담아 놓는 것입니다. 주일 날 성전 마당만 밟다가 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비유가 부연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주님만 따르는 자는 어떤 현실적 환난과 사악한 유혹이 닥쳐도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환난을 이겨내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결과적 모습은, 그것도 일부만, 같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자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목적인 반면에, 후자는 환난을 이기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칫 자신의 문제 해결만을 위해 예수님을 따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환난을 이겨내는 근거가 된다고 해서 순종하면 하나님이 모든 환난에서 지켜 주신다는 뜻으로까지 가버리면 곤란합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도 큰 바람과 탁류는 계속 부딪힙니다. 하나님이 그런 외부 위험과 시험 자체를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자기 주위야 어떠하든 참 신자는 주님께만 붙어 있기에 그분 말씀대로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끝까지 남는 것은 그런 열매를 맺는 신자 자신, 더 정확히 말하면 순종하는 반석인 속사람입니다. 그 겉모습은 심하게 후패해졌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신자더러 어떤 일이 생겨도 지키라고 권하는 실제적 내용이 무엇입니까? 순종하여 준행해야 할 계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를 선대하는 자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도는 어떤 이웃이라도 참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비판치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마지막으로 후히 주라는 것입니다. 비판, 정죄, 용서는 모두 자기를 선대하지 않는 자에 해당됩니다. 또 원수까지 사랑하기 위해선 헤아리지 말고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 계명을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계명을 진정으로 준행할 수 있는 자야말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이자 예수님의 나무에 붙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두 집과 나무와 열매의 비유 등에는 일관되게 연결되는 예수님의 영적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 심성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는 그분만의 혜안에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정말로 우리를 지으신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를 완전히 벌거벗은 것같이 당신의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 앞에 드러내어 버립니다. 과연 어때서 그러합니까?

주님의 계명은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과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 즉,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둘과 용서하고 후히 주라는 둘로 나뉩니다. 그런데 비판, 정죄는 물론 용서까지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속으로는 상대를 비판 정죄하고 있어도 겉으로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속아 넘어갑니다. 용서해 준 걸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억울한 어려움을 당하고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으니 세상에선 의인으로 칭송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용서마저 속으로만 행할 수 있습니다. 구태여 찾아가서 지난 잘못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테니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자고 서로 화해하지 않고서도 마음속으로는 용서했다고 치부합니다. 예수님이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했으니 사랑은 앞으로 믿음이 점차 좋아지면 하기로 하고 용서부터 하겠다고 다짐은 합니다. 여전히 비판, 정죄의 쓴 뿌리는 남아 있으면서 용서하는 척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세 계명으로 그쳤다면 어지간한 신자들은 다 그분의 말씀을 지킨 셈입니다. 어쨌든 비판 정죄하지 않고 용서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후히 주라는 계명을 덧붙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반드시 용서한 표시를 겉으로 드러내라는 것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에 쌓인 선이 자동적으로 열매로 맺히는지 보시겠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마음에 한 치의 앙금 없이 원수까지 비판, 정죄하지 않고 용서했다면 헤아리지 말고 후히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가르침은 어지간한 위인이라면 할 수 있고 심지어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도 나오는 교훈입니다. 또 그 정도만 행해도, 심지어 그 속은 저주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아무런 적대적 행동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큰 의인으로 행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더러 원수까지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되, 반드시 되어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라고 합니다. 정말로 마음에 쌓인 대로 겉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진정으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도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분의 권세 있는 말씀 앞에선 그 영적 실체가 정말 벌거벗긴 것처럼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눈동자 같이 우리를 지키시는 그분이 우리를 환난에서만 지켜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진정한 중심까지 보고 계십니다. 심지어 예배드리고, 말씀을 묵상하며, 당신을 찬양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중에도 우리의 진정한 심중을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벌거벗기고 보니까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는 자들 아닙니까? 참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후히 주는 일은커녕 용서도, 정죄도, 아니 비판에서도 전혀 자유롭지 못하지 않습니까? 자유롭기는커녕 아직도 그런 일을 비일비재로 행하지 않습니까? 도무지 당신의 계명을 준행하지 못하니 계속해서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 회개만 하면 됩니까? 예수님은 언제까지 우리 모습 이대로 받아주실 수 있습니까?

너무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속해서 회개하고 회개하면 그분께 붙어 있는 참 가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분 말씀 앞에 엎드려 벌거벗긴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 제자입니다. 불신자들은 아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메시아로 인정도 하지 않지 않습니까? 성경 말씀에 눈과 귀를 아예 닫고 있지 않습니까? 반면에 우리는 그분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고 진정으로 눈물 흘리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참 회개를 보기 원하시고 그것만으로도 아주 기뻐하십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니 용서해달라는 매번 입에 달린 회개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적 실상이 도무지 앞에 말한 정도까지 밖에 되지 않는다는 처절한 깨어짐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속에는 쓴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도 겉으로 복수, 정죄, 비판하지 않는 것만으로 마치 용서를 아니, 원수를 사랑한 양 행세한 그 모습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로서 얼마나 가증스러웠는지부터 철저히 인정 자백하는 회개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분에 붙어 있는 가지이지만 이제 겨우 접붙임을 당한 자에, 사람마다 다르지만, 불과합니다. 그것도 당신께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뿌리에서부터 영양이 올라와서 접붙인 가지에 싹이 나고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무엇보다 활짝 폈던 꽃이 져야만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힙니다.

꽃이 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내어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 믿음”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완전히 꺾이는 것입니다. 환난도 이겨내고, 소원하는 것은 다 이루고, 얼마든지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의로워질 수 있다는 확신부터 부셔져야 합니다. 정말로 온갖 큰물과 탁류를 다 겪으면서 실패하고 넘어진 체험이 쌓이고 쌓여야 합니다. 그래서 내 영적 실체가 너무나 가난하다는 고백이 땅이 꺼지는 것 같은 깊은 탄식으로 저절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십자가 복음 앞뿐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 처음 믿고 나서 종교적으로 큰 실적을 올리고 영적으로 만개했던 것들마저도 우리의 영적 손익계산서에서 완전히 지워져야 합니다. 싹, 잎, 꽃, 열매는 누가 맺혀 줍니까? 전부 나무에 붙어 있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비판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며 후히 주면서까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일도 오직 주님이, 특별히 말씀으로 살아 역사해야만 가능합니다. 그것도 우리의 가장 깊은 중심 전부가 철저히 깨어지다 못해 더 이상 깨어질 것이 하나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 우리를 그렇게 빚어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환난이나 억울한 일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자 복입니까? 당신의 반석 위에 당신께서 우리의 집을 짓고 계시는 것입니다.

분문을 다시 보십시오.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48절) “잘 지은 연고”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지은 집이라 그렇습니다. “큰물과 탁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신나게 따라가는 추하고 더러운 일반적 조류와 세태입니다.

바꿔 말해 주님의 십자가 복음 위에 견고히 서있어야만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그 몸을 산제사로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말과 행동과 마음은 물론 그 심령이 너무나 추하고 더러우니 저를 불쌍히 여기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케 해달라고 엎드릴 수 있는 골고다 언덕에서부터 모든 신앙 행위가 출발되어져야 합니다. 주님 없이는 저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진정한 체험적 고백이 날마다 순간마다 나와야 합니다.

세상에서 예수 믿는 자만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신자에게 달렸다는 뜻입니다. 단 그 일은 내 심령이 너무나 가난함을 철두철미 깨달아진 후에 즉, 믿음의 화려한 꽃마저 다 진 후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원수의 심령도 내보다 더, 최소한 내 만큼 가난함을 발견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 사심 없이 비판하지 않을 수 있는 첫 단계마저 행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인 것입니다.

정말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다 보면 어느 샌가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단계로 넘어가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일들이 쌓이면 진정으로 용서하고 나아가 후히 줄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예수님 이끌어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이 아침에도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
  
10/1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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