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도 하나님이 만드셨다.

조회 수 540 추천 수 44 2009.11.11 22: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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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도 하나님이 만드셨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여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세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得罪)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치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창39:6-10)


두 종류의 인간

야곱의 늦둥이 아들 요셉이 아비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형들이 애굽에 노예로 팔아 왕의 시위대장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장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정직함이 뛰어나 주인 보디발의 무한한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집안의 청지기로 삼아 모든 소유를 완전히 위임하여 마음대로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보디발은 자기 식료(食料)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요셉이 매사에 주인 마음에 들도록 행했어도 무엇을 먹고 마실 지만큼은 본인이 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 외에는, 말하자면 재테크마저 요셉이 임의로 주관해서 시행하고는 결과만 보고토록 할 정도였습니다. 시쳇말로 떡 고물을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요셉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니 요셉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주인이 확신했으니까 모든 것을 맡겼을 것입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요셉이 용모마저 출중했던지라 주인의 처로부터 성적인 유혹을 당했습니다. 남편 덕에 아무 걱정 없이 호사스럽게 사는 아내로선 남편이 왕을 시중들기 위해 자주 집을 비우는 것만이 유일한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자연히 젊고 성실하며 잘 생긴 요셉에게 자꾸 마음이 끌렸을 것입니다. 참다못해 유혹의 손길을 뻗쳐 보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거절한 구실에는 언뜻 이상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무리 주인이 마음대로 행해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당신은 주인의 아내이기에 절대로 관계를 맺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당연히 “어찌 내가 이 큰 악을 행하여 ‘주인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했어야 순리가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고 “하나님께” 득죄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이어서 성경은 여인이 날마다 청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끈질기게 유혹받았음에도 그는 동침치 않았습니다. 집안의 실질적 대장인지라 얼마든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여주인과 비밀리에 즐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유혹조차 못하게 아예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주인 돈을 한 푼도 축내지 않았던 정직함은 그의 몸에 완전히 밴 습성이자 성격이었나 봅니다. 정말 신자가, 아니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귀감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이 기사를 보면서 요셉의 도덕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인을 배반치 않으려는 의리와 어떤 죄도 짓지 않으려는 깨끗한 성품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기사에서 신자가 배워야 할 내용은 ‘주인께’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고 말한 그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주인께 죄가 아니므로 죄송할 이유가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당신은 주인의 아내라고 하면서 주인의 신임을 배반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주인에게 죄를 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요셉으로선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자이기에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의미로만 말한 것도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고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신자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특별히 신자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이는 삼척동자라도 아는 상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득죄했다”는 말은 요셉이 인식하고 있는 죄의 본질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내용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죄란 판단의 오류, 말의 실수, 경솔하거나 무례한 태도, 상식과 관습과 법률의 위반, 양심을 거슬리는 행동,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 등등 그 어느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런 모든 것은 죄의 결과적 모습이고 그 이전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모든 죄를 인간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확하게는 그 이전에, 하나님에게 범죄한 것으로 해석하는 자와 단순히 인간끼리 잘못을 범했다고 해석하는 자입니다. 전자는 인간에게 보상과 용서는 물론 반드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반면에 후자는 남에게 잘못만 범하지 않으면 즉, 법대로 살기만 하면 도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잘못을 범해도 피해자를 찾아가 보상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어느 쪽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더 착하고 또 하나님께 회개까지 했으니 더 성결해졌다고 두둔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인간관계에서만 해석 적용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이 없다고 믿거나, 있어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와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 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종교인과 비종교인으로 나눌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구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피상적으로 따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면, 그래서 그분의 입장에서 인간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아예 없고 혹시 있더라도 나는 내 생각대로만 살겠다고 하는 자를 그분이 과연 어떻게 보겠는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악과의 비밀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지으시고 그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예비해 놓으신 에덴동산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동산의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하나만은 먹지 못하게 금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이를 기독교가 지어낸 사실 무근의 신화라고 간주해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이 없는 상태에선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진술로 여겨지기에 그들로선 타당한 반론일 것입니다. 창조되었는지 진화되었는지도 확실치 않는 판국에 창조 때에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도대체 누가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도 불신자 시절에 거품을 물고 그렇게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보디발의 처의 유혹을 거절하면서 댄 이유가 이 선악과 금령의 내용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주인이 자기에게 아무 것도 금하지 않고 오직 자기 아내만은 금했다고 했습니다. 모든 소유의 관리, 증식, 처분까지 마음대로 하도록 온전히 맡겼습니다. 혹시 그러다가 손해를 보아도 전혀 책임을 묻지 않고 용서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아내를 건드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아무리 관대한 주인이라도 용서해줄 리 없습니다. 실제로 요셉은 그 처를 강간하려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 않습니까?  

아내는 주인의 소유가 아니라 바로 주인의 분신입니다. 주인의 권위를 대신하는, 아니 바로 그 주인과 하나 다름없습니다. 요셉이 다른 모든 소유는 마음대로 해도 주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만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는 단지 주인을 대신해서 행하는 것이지 실제 주인처럼 행세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아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 남편뿐인데 요셉이 그런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요셉으로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주인을 자신의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어도 주인을 배제할 수는 결코 없었습니다. 또 평생을 가도 그렇게 될 수도 없었습니다. 주인이 죽으면서 모든 것을 요셉에게 소유권을 물려주지 않는 한에는, 쉽게 말해 주인이 없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한 뜻도 무엇입니까? 인간이 다른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지만 당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즉, 당신을 배제하고 인간 스스로 제 멋대로 사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분의 입장에선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선악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시적 형상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동산 중앙에 두어서 아담이 언제 어디서든 눈만 돌리면 보이도록 했습니다.  

본문의 보디발과 요셉 사건이야말로 선악과에 대한 너무나도 확실한 예증 아닙니까? 말하자면 인간 사회에서도 그런 관계는 다반사로 있는 일인데도 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만은 적용시키지 못하거나,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되 하나님을 비롯해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물론 불신자로선 끝까지 에덴동산의 선악과 기사를 설화 혹은 기독교만의 교리라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오직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시므로 그분 중심으로 사는 자와 하나님은 없으므로 자기중심으로만 사는 자, 둘 말입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이 둘의 구분은 누가 윤리적으로 선하게 사느냐를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 중에도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정직하고 성실하며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종종 손해만 당하는 자도 많습니다. 나아가 자기 시간과 여유가 닿는 대로 힘든 이웃을 돕고 섬기는 자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자기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이 땅이 전부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의 주인은 오직 자기일 뿐입니다. 자기는 얼마든지 자기가 뜻하는 대로 즉, 선하고 올곧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요? 소위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말이 진짜 액면 그대로 사실일까요? 그렇게 말하는 자일수록 뒤돌아서서 혼자만 있을 때에도 그 말에 온전히 100%의 자신을 걸 수 있을까요? 엄밀히 따져 그 말은 기껏 인간끼리는 즉, 남에게 큰 잘못을 범한 적은 없다는 정도의 뜻이지 않습니까? 진짜로 자신의 깊은 속내를 스스로 끄집어내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도 그런 말을 감히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우리 중에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나아가 그런 도덕적인 면은 둘째 치고 자기 인생을 자기 뜻대로만 살 수 있는 자가 과연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우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조차 자기 의사와는 전혀 무관했지 않습니까? 부모를, 나라를, 인종을, 피부색깔을, 남녀 성별을, 외모와 신장과 체격을, 천성과 재질을, 지역과 시대 등을 비교 판단 선택하여 태어난 자라곤 단 한 명도 없지 않습니까? 죽음 또한 마찬가지 아닙니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출생과 죽음 즉, 그 시작과 종말마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주인이라고 감히 큰 소리 칠 수 있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은 또 어떻습니까? 희로애락을 자기 일정표대로 조정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한 치의 차질 없이 인생을 살았다고 자신하는 자가 있습니까? 모두가 시행착오(trial and error)를 겪으면서 살지 않습니까?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다면 우리 가운데 대통령, 재벌회장, 장군, 교수, 예술가, 운동천재 등을 못할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가?

인간은 흔히 말하듯이 만물의 영장입니다. 분명 외적으로만 보면 이 땅의 주인입니다. 과학이 발달되어 정말 못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안락이 달성되었습니까? 갈수록 더 죄악이 들끓고 문제만 양산되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게 넓게 볼 것도 없이 자신의 인생에 완전한 만족을 얻는 자가 있습니까? 만물의 영장인 인간조차 마음먹은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보다 훨씬 더 큰 힘이 존재한다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학교교과서는 인류 문명의 발달을 불의 발명에서 시작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참으로 잘못된 진술입니다. 천둥 번개처럼 불은 이 땅이 창조된 이래로 죽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불을 발명한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이미 이 땅에 있는 불을 보고 불 피우는 방법만 알아챘을 뿐입니다. 교과서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최대한 양보해서 자연의 섭리마저 부인하는, 인간들의 교만이자 어리석음을 반영한 것일 뿐입니다.

오늘 저희가 설날 아침에 제사 대신에 예배로 모였습니다만, 마찬가지로 설날도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설날은 이 땅이 시작됨과 동시에 항상 있어 왔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와 달의 공전 주기가 한번 끝났다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곧 겨울이 끝나고 새롭게 봄이 시작되면 곡식을 심어서 여름의 성장기를 거쳐 가을에 추수할 계획을 미리부터 세워야 한다는 의미로 인간이 받아들인 것뿐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설날을 세는 데도 인간은 오직 두 종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에 사랑하는 가족끼리 모여서 정담을 나누며 화목하게 하루를 지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자입니다. 말하자면 설날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인간이 제정한 명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불을 인간이 발명했다고, 아니 지구의 자전과 공전도 인간이 고안해서 시행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새해를 시작할 때에 가장 먼저 하나님에게 경배부터 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선 지난 한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감사하고 이제 시작할 한 해도 그 분의 은혜 안에 살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운 새해 계획도 하나님께서 그 걸음을 인도하여 주시길 간절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혹시 자기 계획이 당신의 뜻에 맞지 않다면 깨우치게 해주거나 오히려 당신 뜻대로 이끌어 주시되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속에서만 살기 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지,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지 두 종류의 사람입니다. 제사란 죽은 귀신에 관한 문제를 떠나 결국은 인간에게 감사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예배도 함께 모인 가족이 다 같이 하나님 은혜 안에 들기를 소원하는 것이므로 인간에 대한 감사의 뜻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사는 단지 인간끼리만 감사하고 치우는 것인 반면에 예배는 그보다 하나님에게 먼저 감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불린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陰府)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나를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139:7-12)

한 마디로 인간이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권능에서 벗어날 수는 도무지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생살이가 자기 뜻대로만 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조차 인간이 마음대로 못하는 모든 인간은, 본인이 인정하고 싶든 아니든, 하나님 손 안에 붙잡혀 있습니다. 당연히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삶과 죽음, 빛과 어둠, 하늘과 음부의 유일한 주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피해 절대 도망갈 수 없다면 남은 문제는 하루라도 빨리 그분 앞에 항복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입니다. 솔직히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겸손히 되돌아가 당신의 인도대로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내가 특정 종교를 선택해서 그 신에게 의존하며 또 그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더 선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절대자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그분의 관점에서 자신의 진짜 실체를 비춰보고” 또 “과연 어떻게 살아야 그분이 바라는 올바른 인생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보라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크리스천 소설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이미 진행되고 있는 한 재앙이 있다. 인간의 마음이 비종교적이고 비영적으로(물질적으로) 격하된 불행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  만약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의 선언이 옳으려면, 인간은 죽지 않도록 태어났어야만 한다. 육신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땅에서의 삶이 반드시 좀 더 영적인 성격을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인간은 선한 존재이므로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면 이 땅에도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이 옳으려면, 출생과 죽음도 인간이 자기 계획대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가장 먼저 그 출생과 죽음을 관장하는 어떤 존재나 힘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절대 우연히 물질에서 진화되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라면 죽음과 절대자에 대한 인식이,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생길 리가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남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기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자신하는 자조차 한 없이 약해지는 것이 언제입니까? 다른 말로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어쩔 수 없이 고백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자기 힘으로는 죽음을 조절할 수 없다고 여길 때 아닙니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자기 뜻대로만 살 수 있었기에 한 없이 행복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는 아주 드뭅니다. 또 그보다는 그 때 가서도 평생을 두고 남에게 피해 한 번 주지 않았기에 떳떳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죽을 때에 자기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만으로 그 삶을 마감한다 해도 누가 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그것으로 끝입니다. 단 하나, 죽음 앞에는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단순하고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조차 - 누구나 자기 계획과 다르게 죽게 마련이라는 -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지 않습니까? 죽음 앞에 겸손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말입니다. 우선 죽을 때에 자기 인생을 반성하는 것조차 사실은 자기중심의 삶일 따름입니다. 자기가 자신에 대해 후회하는 것입니다. 또 내면적으로는 죽음 그 앞에 겸손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마지막 몸부림이거나 단순히 숙명인지라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수용한 것일 뿐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내가 음부에 내려갈찌라도 빛이 흑암으로 변해도 그 음부와 흑암의 주인도 하나님이기에 흑암에서도 빛이 낮같이 비취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마저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차원마저 주관하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평강 가운데 죽을 수 있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의 본보기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로 사는 자말입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다.

요셉은 도덕적으로 선하기 이전에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평생을 살았던 자였습니다. 도덕적으로만 따지면 인간은 아주 선한 의인도 없으며 아주 악한 죄인도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사실은 도토리 키 재기로 똑 같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죄수들이 감옥 밖의 일반인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성인 남녀라면 누구나 생각으로 간음을 많이 범하며, 말로도 이웃과 형제의 가슴에 못을 박아 그 영혼을 죽이기 일쑤입니다. 심지어 가장 사랑으로 섬겨야할 부부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수도 없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인간끼리 그런 죄들을 보상하고 사과한다고 해서 절대로 깨끗케 되지 않습니다. 현실적 손해와 인간적 의리는 어느 정도 보충이 되겠지만 그것으로 당사자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흔적마저 쉽게 씻어지지는 않습니다. 앙심을 품고 복수를 꿈꾼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 사이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양, 이전처럼 완전하게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당사자 간의 관계가 때로는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인간적 정분이 더 생겼을지라도 죄의 여파가 그것만으로 간단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되돌아볼 때에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더럽고 추한 존재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아가 까닭모를 부족함과 갈급함과 초조함과 때로는 공포감까지 생깁니다.

죄의 결과는 상대와의 보상과 화해와 상관없이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을 자연적으로 수반합니다. 어떤 도덕적 죄라도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배반한 죄의 본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도록 도덕적 성품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세대와 지역과 인종과 문화와 관습과 법률과 종교에 관계없이 범죄 후에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한 사람 예외 없이 알게 모르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요셉은 그 끈질긴 유혹을 이겨낼 정도로 도덕적으로 아주 선했다기보다는 모든 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만 해석했던 자였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아내와 마주치는 것조차 아예 피했다는 사실은 그 유혹에 어느 정도 흔들렸을 수도 있다는 암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절대 득죄하지 않겠다는 말도 순간적인 청년 혈기에 져서 아무도 모르게 간음한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께는 엄연히 범죄가 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는 죄의 본질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폐해의 심각성을 절대 경솔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 아니 그분을 멀리하는 것 자체가 죄의 본질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자기도 싫어했던 것입니다. 단순히 순간적 행동의 선하고 악함으로는 죄를 결정짓는 기준이 결코 될 수 없음을 확신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나 동행, 감사, 경배, 헌신하느냐 못하느냐 만으로 죄를 판단했습니다.  그에게 간음은 인간 세상에서 정한 법률을 위반했기에 주인에게 죄가 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그분이 정하신 선악간의 절대적 기준에 위배되기에 절대적 죄였던 것입니다.

죄가 절대적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이라면 죄를 아무리 듣기 좋은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도 죄는 죄일 따름입니다. 죄에 대해 아무리 심리적, 상황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인종적, 종교적, 온갖 변명과 핑계를 갖다 붙여 완곡하게 이해하고 분석하고 대책을 강구해도 일단 죄를 범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죄과(罪果) 자체도 축소, 변경, 망각, 취소, 포기 되지 않습니다.

죄를 절대적으로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이해 적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사회에서 인간끼리 행하는 일시 타협책일 뿐입니다. 절대적 하나님 앞에선 어떤 죄라도 절대적 죄로서 그 죄과 또한 하나님이 용서하기 전까지는 생생하게 영원토록 살아 있습니다. 바꿔 말해 죄를 변명할 구실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에게 변명할 구실이 전혀 없다면 필연적으로 그분이 베푸는 절대적 긍휼만이 죄의 해결책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아내 외는 모든 것을 허락한 요셉의 경우처럼, 선악과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되 하나님 당신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하나만 못하게 했는데 그 하나를 하면 그 만큼 큰 죄악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무슨 죄를 범해도, 예컨대 살인죄를 저질러도 용서해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경우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도덕적으로 따져 어느 누구도 의인이 없으며, 그보다 인간이 더 비참하기는 자신들의 죄과를 스스로는 절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해결책 뿐 아니라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기에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용서해주시기로 한 것입니다. 단 죄에 대한 책임은 당신께서 직접 죽으셔서 반드시 묻기로 한 것입니다. 즉 죄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만큼 철저히 저주한 반면에 죄인은 그 긍휼을 깨달아 당신의 부활에 동참하는 자에 한해 함께 살리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지 못해  구원 받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괘씸하게 여겨 최고 큰 벌을 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다가 죽은 후에도 그런 상태가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인간 입장에선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살겠다.”고 우기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선 그것만큼 인간에게 큰 비극이자 비참한 경우가 없다는 뜻입니다. 살인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낫지, 살인죄를 안 짓고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아도 십자가를 모르면 그것이 더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정말로 자기 인생을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심각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분명하게 정해 놓아야 이 땅에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명료해집니다. 잘 모르겠다든지 그런데 관심이 없다고 외면하면 정말로 한번 뿐이고 이 짧은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회피이자 그만큼 게으른 일도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더욱 따지고 들어서 최소한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아니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가부간 해답이라도 얻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설날을 제정한 분이 하나님인지 인간인지라도 심각하게 고려해 보라는 것입니다.  설날을 맞는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이미 들어온 자에게는 새해에도 변함없는 아니 더 풍성한 주님의 권능과 은혜 안에 머무르기를 소원하고 실천하기를 기원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단 한 번이라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인간이 조종할, 아니 단 일초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여부부터 진짜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1/26/2009 설날 아침 가족예배 설교문
(*) Alexander Solzhenitsyn, "A World Spirit Apart"  1978 Harvard University graduation 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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