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2:31-34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

조회 수 568 추천 수 6 2013.01.04 23: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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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22:31-34)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졌는가?

신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사실 만으로도 세상 사람은 누리지도 알지도 못하는 엄청나게 큰 축복이며 권세인지 모른다. 기도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하며 빠른 문제의 해결책이다. 혹시라도 힘들고 고달픈 일이 많아 계속 기도했는데도 응답은커녕  자꾸만 덧나 그렇게까지 귀중한 권능이라고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예수님마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성부 하나님에게 거부당했다. 본문에서 분명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그랬다. 그것도 그러리라 경고를 받은 지 한 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말이다.  

지금 제자들은 스승이 곧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종식시키고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시킬 기대에 들떠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지 다투는 중이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사단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이 청구했다고 했다. 사단의 시험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제자들은 두고 특별히 베드로만 지명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당장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목숨을 걸고 충성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당연히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는 스승이 자기를 가장 사랑한다고 여기고 우쭐해졌다는 표식일 수 있다. 내심 다른 제자들이 아무리 설쳐도 결국 높은 자리는 자기 몫이라고 자신했을 수 있다. 스승을 세 번 부인하기 전에 이미 또 다시 사단에 넘어간 셈이 된다. 그럼 예수님의 특별히 지명해서 한 기도마저 사단에게 훼방을 받은 것인가?

독생자 예수의 기도를 성부 하나님이 거절할 리는 없다. 사단의 훼방을 받을 리는 더더욱 없다.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음에도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그 사건과 베드로의 실제 믿음과는 별개로 즉, 믿음이 떨어진  증거가 아니라고 간주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신자가 아주 사소한 잘못을 범해도, 현실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불안 초조해 하면, 심지어 어쩌다 교회 봉사나 모임에 한두 번 빠져도 믿음이 떨어졌다고 한다. 아니 정죄까지 한다. 정작 신자가 지녀야 할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왜 그런 믿음이 되어야 하는지, 또 그 믿음이 맺는 열매는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묵상이 따르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려 들면 오히려 믿음이 안 좋은 신자라고 비난하기 바쁘다.

뒤집어져야 할 세상은?

마지막 날 밤에 다른 제자들은 모두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갔다. 베드로 혼자 비록 멀리 떨어지긴 했어도 스승을 따라간 것은 상당히 용감했다는 증거다. 사람과 하녀들에게 예수의 제자임이 들킨 이유 또한 무엇이겠는가? 평소에 예수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며, 또 갈릴리  지역의 말투나 행색을 보고 짐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조롱하며 멸시하느라 난리였다. 그날 밤에는 유대 지도자들의 선동에 넘어가 예수를 정죄할 군중만 모였으니 말이다. 그 중에 유독 베드로 혼자 심각하고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가뜩이나 성질이 급하니까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져 나왔을 것 아닌가?  

베드로는 주님을 진정으로 많이 사랑했다. 스승에게 거는 기대와 믿음이 너무 크다보니까 실망도 비례해서 커진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욕도 하지 않는다. 부모가 말썽 부리는 자식에게 뭐라고 하는가? “원수가 따로 없어! 겨우 저런 놈을 낳으려고 열 달을 고생하고 미역국을 끓여 먹은 내가 바보지!” 여전히, 아니 전보다 더 자식을 사랑하고 안타까이 여기기 때문에 튀어나오는 욕이지 않는가?

지난 삼 년간 베드로는 부모와 생업을 완전히 팽개치고 예수를 따랐다. 그런데 그 보상과 결과가 겨우 이것이란 말인지 원통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한 번 뒤집어질 줄 크게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그가 기대했던 뒤집어져야 할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쉽게 로마 제국이라고 단정 지어선 안 된다. 물론 제자들과 베드로는 물론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로마가 망하고 이스라엘이 회복되기를 열렬히 소원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잡혀온 것이 어디인가? 바로 유대인 대제사장의 관정이다. 주님을 잡으려 겟세마네 동산에 로마 군인이 온 것이 아니다. 대제사장의 부하들이었다. 로마 당국은 정치적 움직임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예수님의 동향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예수님의 재판을 빌라도 총독에게 넘긴 것은 단지 유대 종교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빌라도 또한 예수님에게서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 놓아주려고 노력했다.

베드로는 로마보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출애굽과 포로귀환의 동일한 신앙 체험을 소유한 동포가 어찌 이럴 수 있는지 깊은 고뇌에 빠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 무식한 어부도 온전한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 꿈꿨던 것이다.

그러나 돈이 많고 유식하며 교양 있고 권력을 쥔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앞으로도 아무 변화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한 것이다. 하나님도 구제, 기도, 헌금, 금식 많이 하는 자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체념한 것이다. 자기에게도 하나님을 뜨겁게 섬길 열정과 소원은 있었지만 하루하루 연명하느라 도무지 짬이 없었던 것뿐인데도 말이다.

베드로가 저버린 것은?

바꿔 말해 베드로는 지난 삼 년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시절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했었던 것이다. 주님은 구약성경을 종교적 체계와 의식을 강화하는 의도를 가지고 풀어 가르치지 않았다. 율법 외에 장로들의 유전을 복잡하게 덧붙여서 일방적으로 강요하지도 않았다. 말로 가르치기만 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다른 랍비와 차원이 달랐다. 당신이 가르친 율법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고 당신의 삶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또 과부, 고아, 창녀, 세리, 죄인, 병자, 귀신 들린 자 같이 소외되고 가난한 자를 먼저 찾아가서 진심어린 사랑으로 섬기고 치유해주었다. 베드로에게는 자신을 갈릴리 출신의 어부로 멸시하지 않고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최초의 유대인 랍비였다. 정말 평생토록 이분을 따르면 이분이 갖고 있는 놀라운 신적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리라 기대되었고 믿음도 생겼다.  

그랬는데 저렇게 허무하게 당하기만 하면 도대체 우리의 한숨, 갈증, 분노, 슬픔은 과연 누가 해결해 준단 말인가 분통이 터진 것이다. 현실에서 가난하고 고달픈 것은 이미 수십 년씩 겪었던 차라 이력이 났기에 별 문제가 아니었다. 내 인생의 의미, 가치, 보람, 기쁨은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또 다시 이전처럼 허망한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베드로는 자신의 소망과 냉정한 현실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음을 느꼈다. 그 괴리를 도무지 매울 수 없어서 괴로웠던 것이다.    

대제사장의 관정에서 예수님의 제자임을 사람들에게 들키기 전까지의 그 짧았던 시간에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하박국 선지자가 제기했던 것과 동일한 질문으로 논쟁, 변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드렸던 어떤 기도보다 더 간절한 기도를 했을 것이다. “왜 죄 없는 의인이 이토록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말이다. 켐벨 모간이라는 신학자는 그래서 베드로가 그 밤에 버린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믿음도 아니었고, 자신이 갖고 있던 소망의 끈을 놓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기도는?

최근의 극심한 불경기와 갈수록 피폐해지는 인간관계로 인한 온갖 문제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제대로 해결 받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과 원망으로 마음이 가득 찰 수 있다. 힘에 넘치게 헌금하며 시간을 쪼개어 봉사하면서 화려하게 호강하게 해달라고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발등에 떨어진 불만 좀 꺼달라고 간구했는데, 꺼지기는커녕 더 번져나가 온 집안을 태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도, 아니 징조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님 대체 언제까지 저를 외면할 것이냐는 외침이 절로 나온다. 세 번이 아니라 열 번도 더 하나님을 부인하고 싶다.  

그럼 우리의 믿음이 떨어진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어쨌든, 말하자면 큰 기대를 갖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믿음이 있다는, 아니 아주 좋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한숨 섞이고 눈물어린 그 기도를 기쁘게 받으신다. 아니 그럴수록 더 귀를 기울이신다. 다윗의 시편을 보라. 성경이라 고상하고 경건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내용적으로 하나님께 대들고 따지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도 심령 깊숙이 담겨 있는 모든 한숨과 슬픔과 고통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과 원망을 다 터뜨려야 한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기도가 어떤 것이지 아는가? 그저 고상하고 경건하기만 한 기도다. 예컨대 장로님들의 종교적 미사여구로만 치장한 대표기도는 죄송하지만 선뜻 아멘이 나오지 않고 공중에 기도가 전부 흩어지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또 마음속에 하나님께 불편한 생각과 이웃을 미워하는 감정을 잔뜩 지녔음에도 마치 그렇지 않은 양 하는 기도도 그에 못지않게 싫어하신다. 거꾸로 말하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드러내는 기도다. 물론 무엇보다 우리 잘못과 죄악부터 들추어내면서 말이다. .

성경은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기도라는 차원에서만 따지면 응답만 받지 못하지 그리 나쁜 기도라고 할 수 없다. 어쨌든 속에 있는 그대로 구했으니 말이다. 또 우리 영적 실력이 무엇이 정욕인지 아닌지도 실은 잘 구분 못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기도마저 응답 받으려면 그 구하는 것의 동기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면 된다. 또 그러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인 줄 깨달아서 구하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응답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그 후로는 그 십자가 사랑 안에 들어온 신자는 언제 어디서든 있는 모습 그대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일상적인 편안한 모습으로 나오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도리어 아주 심각하고 두려운 말씀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숨길 생각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심령 깊숙이 혼자만 알도록 숨겨 놓은 것들 모두를 완전히 까뒤집어서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 앞에 엎드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이 온전히 베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의 전부, 존재와 삶과 일생을 완전히 당신을 위해서 다 바치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절망과 예수님의 소망

예수님은 제자들과 베드로가 사단의 밀 까부르듯 하는 시험에 넘어갈 것도 아셨다. 채에 곡식을 넣어서 흔들면 그 속에 있는 곡식은 체가 흔들리는 방향으로 마냥 쏠릴 수밖에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지간한 믿음으로 사단을 쉽게 이길 수 없다. 하루에도 여러 번 넘어간다. 그럼에도 신자의 믿음은 떨어진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전에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는 전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먼저 찾아가셨다. 이번에도 베드로만 따로 지명하여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거푸 물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정말로 몰라서 확인해 보려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님의 뜻을 베드로더러 알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 그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했어도 그것이 믿음, 사랑이 떨어진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익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베드로더러 알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 그 일로 인해서 죄책감이나 미안한 생각에 괴로워했던 것은 분명 선하고 의롭지만 다 용서했으니까 이제부턴 아무 염려 말라는 것이다. 아니 그전에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베드로를 향해 싫음, 미움은 물론 감정의 앙금도 전혀 없었음을 깨우쳐 주려는 뜻이었다.

거기다 그날 밤에 산산조각이 났던 베드로의 소망을 다시 세워주려는 뜻이었다. 네가 바라던 아름다운 세상을 이제부터 함께 이뤄가자는 초대였다. 베드로의 100%의 절망을 주님의 100%의 소망으로 바꾸는 작업을 주님이 하신 것이다.  

단 로마 제국의 현실적 정치적 권력이나,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유대의 형식적 가식적 종교 체계를 무너뜨리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말이다. 베드로의 마음에 새로운 법을 심으시겠다는 것이다. 당신의 십자가 진리로만 세상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죄에서 건져 깨끗케 하는 방식이 아니고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현실적 형통과 번창으로는 절대로 인생의 참 의미와 보람과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도 삼 년 간의 공사역을 주님과 함께 행함으로써, 결정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날 밤에 스승을 세 번 부인하면서 절실하게 느꼈던 그대로 말이다.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온전히 믿고, 온전히 소망하는 가운데서 인간이 참 인간다워진다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을 덧입혀 줄 테니 세상을 뒤집는 그 일을 함께 수행하자는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있을 로마 제국

로마 제국 같은 악한 세력과 유대교 같은 형식적 가식적 종교인들은 세상 마지막 날 까지 항상 있을 것이다. 갈수록 더 다양하고 심해진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현실적 고난도 사람이 사는 동안에 끊이지 않을 것이다. 신자라고 그 고난을 피해갈 수 없다. 신자에게 하박국 같은 질문과 원망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든 사실을 알고도 왜 죄악과 고통을 그대로 두시는가? 그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현실에 형통하고 안락하다고 결코 행복해거나 만족하거나 기뻐지지 않음을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세워나가지만 그 나라에 참여할  백성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남은 자들뿐이라는 것이다. 십자가 이후의 베드로처럼 머리 둘 곳이 변변히 없었지만 주님을 따라가면서 고아 과부 창녀 세리 죄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깨달은 자들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참 인간답게 살 수 없다. 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치 않는 자도 단 한 명도 없다. 주위를 정말 진지하게 주님의 눈으로 둘러보라. 모두가 너무나 불쌍하지 않는가? 당장 남편과 아내, 자녀들, 교회 안의 성도, 직장 동료 중에 안타깝지 않은 존재가 한 명이라도 있는가?

베드로는 참 생명과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자 비로소 인생의 참 소망을 발견했다. 십자가 처형 사건이 있던 날의 전후 2-3일 간은 그 소망이 완전한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소망을 다시 완벽하게 되살렸다. 당신의 부활이 완벽했듯이 말이다. 정말로 인간답게 살면서 세상을, 아니 내 가정만이라도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하게 바꾸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뿐이다. 예수님이 하늘의 소망으로 채워주셔야만 한다.  

기도는 그래서 예수님의 그 채워주심을 소망하는 것이다. 세상을 함께 한 번 바꿔 보자는 그분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작업이다. 내가 소망하는 일에 하늘의 예수님을 끌어내리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소망에 참여하려고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얼마나 힘든지 다 아신다. 당신께 원망과 불평을 가진 것조차 아신다. 당연히 우리의 기대와 소망을 하나 숨김없이 토설해야 한다. 기도에서 회개의 절차가 종교적 의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백지 상태로 순수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정말로 놀랍고도 엄청나고 신비한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소망으로 이끌어 가실 것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기도해야 한다. 모든 소원과 기대를 뜨겁게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내 기도 제목이 단순히 내 소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변변찮고 때로는 부끄러워 보이는 기독 제목이라도 그 안에 예수님의 거룩한 소망이 나타나길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내 삶과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 풍성하고도 세밀하게 미치길 진짜로 소원해야 한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은 신자는 당장에 결점 없이 깨끗한 성자가 되어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하나님 앞에 하나도 숨기지 않는 투명한 신자는 되어 있으라는 것이다. 사람 앞에선 현실적으로 별 볼일 없어서 부끄러워져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또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11/9/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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