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의 비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7-9)
아주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시는데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거나 기도를 잘 못하거나 안 하는 핑계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도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니까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므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에 어떤 이유를 말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그 이유가 “하나님이 이미 신자에게 필요한 것을 알기 때문에”라면 그 뒤에는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어져야 자연스런 문맥의 흐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기도하라고 했기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받아야 할 앞에 있는 이유는 그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는데 그래야 자기들이 믿는 신이 무엇이 필요한지 알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하나님은 말을 많이 안 해도 잘 아니까 그렇게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즉 그들과는 다르게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이유는 기도의 정석(text)을 제시하기 보다는 신자들이 이방인과는 다르게 기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신자의 기도가 이방인과 달라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우선 말을 적게 하고 중언부언 하지 말아야 합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신자도 긴급한 사정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중언부언하게 됩니다. 같은 말의 중복이나 기도의 길이를 따지기 보다는 이방인들의 생각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신자마저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자기 사정을 알게 되거나 또 어떻게 하든 그 정성을 봐서라도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하나님에게 정성과 열심마저 바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가 바친 만큼 하나님이 비례해서 주실 것이라는 기대에서 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의 주권적 계획을 당신의 때와 방법에 따라 이루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신자가 최선을 다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헌신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신자가 바치는 모든 것이 그런 헌신의 결과이어야지 조건을 달아 그분과 흥정하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개입되어선 안 됩니다.
또 하나 이방인의 기도와 달라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신자의 필요는 제쳐두고 다른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을 한 후에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간구하라고 가르쳤지 않습니까? 이방인들의 기도에는 오직 자기의 필요와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간구뿐입니다. 절대자 쪽에서 인간을 통해 이뤄줄 일에 대해선 전혀 관심도 없고 또 그럴 수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방인과 신자의 기도는 가장 확연하게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뤄지게 해 달라는 간구란 무엇입니까? 신자가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빌어준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힘을 보탤 수 있거나 또는 제 삼의 대상에게 그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얼마나 소원하며 또 과연 그 일에 자신이 쓰임 받기를 원하는지 입술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또 주신 소명을 알기에 그 일을 붙들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수도 없이 기도에 힘쓰라고 강조하셨고 당신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든 구하고, 사단은 기도 외에는 쫓을 수 없고,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며,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주시며, 심지어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르침들의 앞뒤 문맥을 잘 살피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라고 합니다. 모든 기도는 주님과의 친밀한 대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가르침과 교정을 받아가면서 자신이 신령하고 거룩하게 자라고, 그 분의 뜻을 실현하고, 주위에 사랑을 베푸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어렸을 때에 네스빗의 "다섯 명의 아이들과 그것"이라는 책을 즐겨 봤습니다. 여름 방학에 다섯 남매가 소원을 하나씩 다 들어주는 오래된 모래 요정을 만나 일어나는 사건을 그린 동화책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하는 것을 다 얻었는데도 행복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문제가 더 발생한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구하는 것을 다 구했을 때에 일어날 결과에 대해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루이스가 죽기 직전에 "하나님이 내 생애에 구한 어리석은 기도를 모두 다 들어주셨다면 나는 과연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말했습니다. 감히 추측컨대 부정으로 감옥에 가 있거나,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타락하여 폐인이 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인간이 구하는 것들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가 구해야 될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에 침묵과 심지어 거절로 응답하시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 신자를 감옥에 보내거나 폐인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 말하자면 신자에게 필요한 것을 구해도 된다고 아니 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오직 하나님이 마련해 주셨다는 신앙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현재 하고 있는 생업은 자기 힘으로 이뤄냈지만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더 잘되기를 원할 때만 하나님이 개입하는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뿐 아니라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마저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신하여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일용할 양식 외에는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손해 보고 고생해야지 평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이 주신 생업에서 나올 뿐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할 때에는 일용할 양식은 반드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풍요로워질지 궁핍해질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신자로선 오직 그분의 일을 할 따름이여 그러면 일용할 양식에서 굶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최고 특권은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며 가장 큰 의무도 기도를 통해 알게 된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분의 일을 기쁨으로 자원하며 수행하는 것입니다. 역에 역으로 말해서 기도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신자 자신의 야망, 계획, 욕심에 따라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기에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공급받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우리를 완전히 내어 드리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 다 아시는데 꼭 기도를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기도를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나아가 주기도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 감춰둔 비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신자가 필요한 것을 아니까 더 기도해야 된다는 것 아닙니까? 또 그러니까 이미 알고 있는 것 말고 다른 것, 즉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도 분명해졌습니다. 사실 지금 자기가 기도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별로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미리 눈치 채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위급한 경우가 생겼고 또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일용할 양식을 넘어서 자기가 더 풍요롭고 안락하게 되는 일이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지금 당신이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혹시라도 다 알고 있는데 구태여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에게 꼭 기도하고 싶고 해야만 할 일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복입니다. 또 이미 응답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간구를 하나님이 꼭 들어 주어야 할 이유와 명분에 신자 스스로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6/9/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