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3 성탄절에 받은 최고의 선물

조회 수 408 추천 수 11 2011.01.01 03: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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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에 받은 최고의 선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1-3)


주인이 뒤바뀐 생일잔치

한 미국 가정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다. 가족 친척들이 모여 성찬을 나눈 후에 준비한 선물을 주고받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꼬마 아들이 한쪽 구석에서 잔뜩 불만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빠가 가서 물었다. “왜 음식이 맛이 없니? 혹시 선물이 마음에 안 드니? 누가 너에게 잘못했니?” 아이는 그 모두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선 아빠에게 되물었다. “오늘은 예수님 생일이잖아. 그런데 왜 생일을 맞은 예수님께는 아무도 선물을 드리지 않고 우리끼리 선물을 주고받아요?” 순진하게도 교회주일학교에서 배운 대로 그 또래답게 생각한 것이다.

철없는 아이의 의심 내지 불만으로 그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야 그렇다 치지만 교회행사마저 정작 주인공인 예수님은 빠지고 우리끼리 잔치하기 바쁘다. 물론 연말에 그 동안 잊고 있던 분들끼리 오랜만에 함께 모여 식사교제하며 감사의 선물을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도 분명 흐뭇해하실 것이다.

그러나 한번 진지하게 되짚어봐야 할 질문이지 않는가? 우리라면 과연 예수님께 어떤 선물을 갖다 드리고 싶은가? 화려하고도 풍성하게 장식한 꽃다발인가? 천하에 하나뿐인 영롱한 보석인가? 물질이 그분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면 지난 한해 주님을 위해 봉사한 열매인가? 성가대나 구역장으로 성실하게 충성한 것인가? 불신자 몇 가정을 전도한 실적인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힘에 부치는 십일조를 드린 것인가? 아무도 모르게 불쌍한 불신자 이웃을 도와준 것인가?

이 또한 분명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분께 정말 뭔가 구체적인 선물을 드릴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우린 이 땅에 아기 예수가 오신 의미를 잊었거나 완전히 모른다는 뜻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뭔가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까지는 좋다. 또 진정한 마음으로 선물을 드리면 기뻐 받으신다. 그러나 선물이란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내 쪽에서 그분께 끄집어내놓을 만한 선한 것이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정성과 사랑이 담긴 작고 아름다운 물건이건, 또 지난 한해 충성 봉사한 열매이든, 나아가 가시적 실체가 없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도 그러하다.

우리가 그분께 꺼내놓을 것이라고는 딱 하나뿐이다. 벌거벗은 몸뚱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처지에서 무슨 일을 하던 “이 모습 이대로 받으십시오.”라는 고백 말고는 드릴 것이라곤 없다.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가난한 심령이다.

가난한 심령의 실체

예수님이 모인 무리를 보시고 입을 열어 가르치면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이다. 원어 “입을 열어”라는 표현은 단단히 작심하셨던 것을 지금부터 말하겠다는 뜻이다. 가장 먼저 가르치고 싶었기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또 “무리를 보시고 올라가 앉으신” 후에 그랬으니 모든 무리에게 가장 시급한, 꼭 알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었다. 나아가 여덟 복을 주시되 그 출발되는 복이었다. 이 복이 없으면 나머지 복이 성립되지 않으니 실질적으로는 가장 크고 중요한 복이었다.    

그 복이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복과는 거리가 멀다. 병이 낫거나 문제가 해결되고 형통 안락해진다고 하지 않았다. 첫 마디가 천국을 차지하라고 한다. 이미 천국이 너희 중에 임해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통치를 받으라는 것이다. 또 그러려면 성가대, 전도부, 구역장 등으로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남들을 도우라는 말도 아니었다. 반드시 가난한 심령이 되라고 한다.

헬라어로 가난하다는 형용사에는 두 가지 표현이 있다. 우선 페네스의 가난이다. 일용직, 육체노동자, 기술로 먹고 사는 자, 요즘으로 치면 Blue Color 계층을 말한다. 이는 가난하긴 해도 그래도 끼니는 이을 수 있다. 굶어 죽지는 않고 자급자족은 한다. 남과 비교해서 자기가 더 가난하다고 느껴지는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이와 달리 프토코스의 가난이 있는데, 고아, 중풍병자, 문둥병자, 봉사 같이 남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바로 굶어죽는 계층이다. 자기 스스로는 도무지 생계를 이어갈 수단도 능력도 없다. 도무지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에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절대적 빈곤이다. 놀랍게도 본문의 가난한 심령은 바로 이 프토코스로 묘사된 가난이다.

말하자면 신자니까 남들보다 경제적으로 근검절약하면서 살아야지, 이웃을 위해 양보하며 희생하며 섬긴다든지, 도덕적으로 자신을 더욱 절제하면서 남들 앞에서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처신한다든지, 가능한 죄를 안 짓고 의롭게 살아야지 하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의 타락한 심령의 그 피폐함과 부패함에는 도무지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너무나 갈급하고 궁핍하며 공허한데다 썩을 대로 썩어서 회생할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작금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교리가 너무 흔하게, 그것도 아주 값싸게 팔리고 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니까 단순히 종교적 결심 한 번 단단히 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야말로 십자가 복음이 큰 무리를 향해 바겐세일 되고 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 때까지 따르던 제자들이 너무 어렵다고 여기고 많이 물러갔다. 거기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죽이는 것이며 아버지가 오게 하여 주지 않으면 당신께로 올 수 없다고 말하자 아예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했다.(요6장) 예수님은 싸구려 복음으로 무리를 모으러 다니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의 절대적으로 가난한 심령을 지닌 자만 찾으셨다.

당신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신자로서 교회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달리셨던 그 골고다의 투박한 나무 위에 바로 내가 달렸어야 했고, 당신께서 덮어쓴 가시면류관을 내가 써야만 했었다고 진심으로 자백하는 것이다.

위대한 믿음의 사도 바울은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실토했다. 그러나 이런 표현조차 엄밀히 따지면 틀린 것이다. 아무리 지구상에서 최고로 나쁜 죄인이라는 뜻이긴 해도, 또 인간의 언어로는 사실상 그것 이상 더 좋게 표현할 방법이 없어도, 최고로 나쁜 죄인이란 여전히 상대적 빈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더하거나 덜한 죄인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지 않는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선 우리 모두가 단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죽어 마땅한 죄인일 뿐이다.  

“저는 주님이 천번만번 죽이셔도 쌉니다. 제가 지은 죄는 천번만번에 천번만번 곱한 것보다 더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을 배역하고 제 멋대로 살려고 한 것은 도무지 용서 받지 못할 죄였습니다. 주님의 처분만 기다립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보상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과 자비만 소원할 뿐입니다.”  

너무나 매정한(?) 하나님

우리도 “이 모습 이대로 받으십시오.”라는 고백을 자주 한다. 지난주도 진실로 신자답게 살지 못했다는 처참하고도 비통한 고백인 것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정말 지난주만 그랬다면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참회다. 문제는 매주 그렇다는 것이다. 기도하러 앉으면 습관적 자동적 의무적으로 나온다. 앞으로 지을 죄도 다 용서한다고 하니까 일단 꼭 이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한 일종의 영문 통과증이다.  

혹은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조금만 노력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선해질 자신이 있다는 교만은 아닌지 두렵다. 심지어 현재 내가 처해있는 내 현실적 형편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자조 섞인 푸념은 아닐까? 마치 자신은 열심히 믿고 분에 넘치게 봉사했는데 하나님이 사정을 잘 봐주지 않아서 그런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선물을 주는 나는 이 고백 하나로 신자로서의 모든 하자가 제거되었으니 이제 선물 받을 상대인 예수님의 책임이 더 크다는 투다. 자신은 이미 십자가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와 있다는 확신이 별로 없다. 예수 믿는 것이 전혀 신나지 않다. 복음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여전히 뭔가 부족한 것 같이 여기는 신앙이다.

아무리 간절한 어투로 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해도 여전히 헤네스의 상대적 가난일 뿐이다. 자기 가난을 가장한 자기 부요요, 종교적 겸손으로 포장한 영적 교만이요, 주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자기 자랑일 수 있다.  

하나님에겐 이상한 특성이 하나 있다. 아주 심술궂은 할아버지 같은 특성이다. 우리 인생들을 롤러코스터 타듯이 제 멋대로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완전 고집쟁이 할아버지다. 특정한 규칙을 정해놓고 예외라곤 없는 그런 할아버지 말이다. 신자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셔지고, 낮아져서 더 이상 깨어질 것, 부셔질 것, 낮아질 것이라곤 단 하나도 남지 않는 상태까지 되기를 너무나 냉혹하고도 비정하게 기다리신다.  

여러분도 자주 실감하는 좋은 실례(實例)가 있지 않는가? 기도 응답이 언제 제일 잘 되는가? 눈물 콧물 흘리면서 울부짖어야 하는가? 40일 작정기도 내지 기도원에서 일주일 금식 기도를 한 후인가? 그보다는 정말 완전히 앞뒤 손발을 다 들었을 때다. “이제 정말 항복합니다. 주님이 죽이시면 죽겠습니다. 완전히 처분대로 하십시오. 솔직히 기도할 힘도 없어서 기도도 못하겠습니다. 주님 뜻대로만 하십시오. 저는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이처럼 완전 막다른 궁지에 내물린 듯한 고백을 뱉어냈을 때에 너무나 신기하게도 모든 문제가 너무나 쉽고도 풍성한 방식으로 이미 해결되어 있음을 발견한 적이 없는가?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완전히 막힌 고립무원의 벽 속에 가두신다. 우릴 꼭 고생시켜서 정신 차리게 만들려고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온전한 축복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려는 뜻이다. 우리가 완전한 절망의 바닥까지 떨어져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시기, 질투, 분노, 음란, 저주, 거짓. 궤휼, 음란, 살인 같은 악하고 추한 것들뿐이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 심령이 바로 프토코스의 절대적 가난으로 바뀔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분이 그 때까지 아예 등을 지고 우리를 외면하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통분하시며 우셨듯이 우리가 힘들고 갈급하며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더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신다. 하나님은 당장에라도 일으켜 세우고 싶지만, 그래선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되지 않기에 우리보다 더 쓰라린 마음으로 참고 계시는 것이다. 그 증거는 이것이다. 아무리 사방으로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어도 한군데, 위를 향한 방향은 열어놓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고 항복 선언 하라고 말이다.

우리 모두가 암에 걸렸으면....

신자가 100% 절망에 빠질 때에 하나님의 소망이 100% 살아난다. 예수님에게 우리가 드릴 선물이라곤 딱 하나 말고는 없다. 정말 저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당신뿐이라는, 그분의 기도 응답이 아님,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 말이다.

선물은 우리가 그분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선, 신자도 예외는 아님, 덜 선한 정도가 아니라 악한 것만 나올 뿐이다. 선물은 그분이 우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신다.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도 이 모습 이대로 받으옵소서라는 진정한 고백이 수반될 때에 한해서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완전한 항복을 기다리시는 이유도 하나다.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다. 당신의 성품에 참예시키려는 것이다. 하늘 보좌에 앉히어 세세토록 왕 노릇 하게 하려고 지금 준비 훈련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같이 우리도 그렇게 거룩해지라는 것이다. 그분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더러 단순히 교회 생활 열심히 하라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분명히 확약하셨다. 지금 너희 가운데 천국이 임해 있으니 마음껏 천국을 누리라는 것이다. 세상 앞에 천국 시민답게 살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당신께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의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들 좋은 것으로 주지 않을 것인가? 또 오해는 말라.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선한 것을, 아니 그분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완벽하게 선한 것임, 주신다. 또 그 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의 평생에 우리 전후좌우를 두르고 계신다. 그럼 대체 무엇이 두렵고 염려될 것인가?  

목사로서 저는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한다. 죽지만 않는다면 모든 신자들이 한 번씩 암에 걸려봤으면 싶다는 생각이다. 물론 암에 걸려 있을 때는 나을지 확신이 없지만 하나님이 결국은 살려주는 모습으로 말이다. 저는 암에 걸려 12시간에 걸친 제거 수술을 받았고 성도들의 기도로 덤의 생명을 얻었기에 감히 이런 말을 드릴 수 있다.  

말하자면 누구나 한번 실제 육신적인 죽음의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되살아나는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 영적으로 최고로 낮아지는 체험을 이미 했다. 절대적 가난한 심령이 되어보았다. 그러나 육신적, 현실적으로도 최고 밑바닥에까지 떨어지는 것은 그 심령이 완전히 생생한 체험으로 내 몸에 붙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신에까지 채워지기에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너무나 고귀한 은혜다.

이는 실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권하는 바다. 사도 바울이 사슬에 매여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 받을 때에 이렇게 말했지 않는가?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 실제 죄수는 아니라도 십자가 복음에 철두철미 항복하여 더 이상 내려갈 데 없는 가장 낮은 데로 내려가 주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라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되살아나면 나라는 존재와 현실의 삶과 일생동안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보는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관념상으로 배우고 믿고 따르려 했던 헌신이 진짜 실체로 변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된다. 오직 주님 한분만으로 족하다는 고백이 절로 나온다. 정말로 무슨 일을 하던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름 없는 도구로 쓰임 받고 싶어진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거나 저의 모습이야 어떻게 되든 오직 주님 뜻대로 하시라는 온전한 비워드림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오늘 우리가 성도의 사랑으로 김유상 집사를 위로하려 모였다. 비록 비교적 간단한 갑상선 암이었지만, 암에 경미한 것이란 사실은 없음, 하나님은 두 번이나 수술하여 치료해주셨다. 틀림없이 저보다 갑절의 신령한 영성을 심어주셨으리라 믿는다. 절대적 가난의 심령으로 낮추어 주셔서 팔복 중의 가장 중요한 첫째 복을 이미 주셨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여태껏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을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주님께 받은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주님이 쓰실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틀림없이 주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드러내게 될 것이다.  

아내 되시는 카렌 집사도 올해 여러모로 너무나 힘든 일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분명히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실 것이다. 함께 모인 우리들도 유난히 금년에는 많은 고난을 거쳤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주님의 놀라운 긍휼의 은혜가, 우리보다 더한 안타까움을 갖고서 함께 하셨고 반드시 평강으로 인도하시라 믿는다.

아주 냉혹해 보이는 하나님이 진짜로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나 있다. 신자가 그 자리에 쓰러지거나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아무리 지치고 고달프고 실망하고, 때로는 주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고, 심지어 죄 가운데 빠져 있어도 그분은 우리를 깎으시고 낮추시어서 당신의 영광 가운데로 이끄신다. 주님이 우리 대신 죽으신 대가다.

그래서 정말로 절대적 가난한 심령이 되어있다면 신자에겐 어제보다 못하거나 심지어 같은 오늘도 절대 있을 수 없다. 또 오직 예수님만 나의 보배로 모시고 산다면 오늘보다 못하거나 같은 내일도 절대 없다. 올 한해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지라도 바울처럼 이미 지난 일은 전부 잊어버리고 앞에서 주님이 기다리시는 푯대를 향해 정말로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한걸음씩 희망찬 새해를 내디디시기 바란다. 아멘!

12/2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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