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9;20-24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죽는다.

조회 수 269 추천 수 0 2019.09.13 11:29:22

(민19;20-24)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죽는다.

구약성경강해 (38) / 민수기강해 (28)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18:20-24)

 

십일조를 제정한 첫째 목적

 

하나님은 아론의 지휘권에 대든 고라 일당의 반역을 심판하신 후에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간직해 이스라엘의 후손에게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징표가 되게 했습니다. 그와 연장되는 맥락에서 여호와는 18, 19장에 걸쳐서 제사장의 직무에 대해서 다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본문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십일조 계명을 계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22절에서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고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는 말씀을 합니다. 십일조를 제대로 바치지 않으면 성소에 가까이 한 것으로 간주하고 죽음의 벌을 내린다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성소에 가까이 하면” 죽는다고 했지 “십일조 바치지 않으면” 심판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죄를 ‘범하여’라고 하지 않고 ‘당하여’라고 했습니다. 악의에 차서 의도적으로 범한 죄는 아니고 결과적으로 죄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 바치지 않는다고 죽음의 심판을 내릴 리 없고 성경에 그런 기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십일조에 대한 최초의 계명에 성소 출입 금지를 다시 강조한 것은 뭔가 그 둘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뜻이므로 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작금 십일조에 대해 설왕설래가 아주 많은데 그럴수록 단순하게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이해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성막 봉사에만 전임해야 할 레위 지파는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해 먹고 살 생업이 없습니다. 그럼 당연히 기업을 분배 받은 다른 지파의 백성들이 그 생계를 책임져주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언뜻 조금 많아 보이는 소산의 10%를 바쳐야 하는 이유도 아주 간단합니다. 단순 수치로 간략히 계산하면 열두 지파가 십일조를 바치면 그 총계는 12/10이 됩니다. 레위 지파가 빠지면 십일조 바치는 지파가 열 하나여야 하지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육신적 선조인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따로 불러 축복해주었습니다.(창48:13,14) 그 둘이 누락된 레위를 대신 했기에 레위 지파를 빼고도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 받은 것입니다.

 

그럼 레위 지파가 얻는 수입은 12/10가 되고 다른 지파들은 9/10가 되어서 레위가 3이 더 많아집니다. 제사장 지파라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통째로 혹은 일부가 완전히 태워져 바쳐지는 제물도 많았습니다. 성막과 그 기구들을 유지 관리하고 제사용 땔감을 조달하는 등에 따로 경비가 드니까 그만한 여유는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십일조는 평생 성막만 섬기는 자들의 생계와 성막과 그 제사를 관리하는데 소용되는 비용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성막제도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만큼만 바치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십일조는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이 아니라 사실상 최소한의 금액입니다.

 

레위 지파 각 개인의 삶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평균적인 수준으로 유지 시키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실 때에 적은 듯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으며 넘치게 거둔 만나는 썩게 만들었습니다.(출16장) 제사장더러 자기들이 섬기는 백성과 같은 위치에 낮추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부족하지 않게 공급해주었으므로 더욱더 자족하고 감사하는 삶의 본을 백성들에게 보이라는 뜻입니다.

 

현대 교회와 십일조

 

구약의 율법이 폐지되었으니 당연히 십일조 제도도 폐지되었기에 십일조를 가르치고 권면하는 교회는 잘못되었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모든 신앙상의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율법을 재해석해서 정확히 가르쳐주었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도 동일한 해석원리에 따라 가르친 내용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24)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열심히 양념과 채소의 십일조까지 바치면서도 정작 유대 사회에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실현하지 않는다고 크게 꾸짖었습니다. 십일조라는 계명을 문자적 의무적으로 준행하는 것보다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모든 율법에 해당됩니다.

 

예수님 당시는 아직 성전 제사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비록 주님이 성전의 제물 장사치와 환전상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뀌었다고 야단치며 쫓아내었지만 성전제도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전 예배와 제사장 제도가 폐지된 오늘날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해서 주님의 그 말씀이 오늘날에 적용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건물과 제도가 없어졌으니까 더더욱 십일조라는 형식보다 그 정신을 실현해야 합니다.

 

우선 본문의 최초 십일조 계명 정신대로 하자면 교인들이 다른 생업이 없는 전임 목회자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처음 교회를 개척 설립할 때는 교인들에게 무리한 부담을 지우면 안 되니까 바울처럼 목사도 세속 직업이나 외부의 개인적인 후원자를 통해서 생활비를 조달해야 합니다. 그러다 교회가 성장이 되어 재정에 여유가 생기면 교인들이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평균 수준으로는 지불해주어야 합니다. 영적지도자이므로 편하게 놀고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늘어난 성도들 때문에 사역할 일이 많아졌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십일조 규정에 나중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목적도 추가되었습니다. 셋째 해를 구제년으로 지정해서 그 해에는 다 합치면 약 30%까지 내어야 했습니다.(신26:12) 현대 교회에서도 교회운영을 하는 기본경비 외에 여유가 생기면 구제 같은 지역사회 봉사에 사용해야 합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꼭 수입의 10%나 내어야만 하는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등을 궁금해 합니다. 본문의 십일조 제정의 근본 뜻은 살펴본 대로 성막제도를 운영하는데 꼭 필요한 그것도 최소한의 금액을 부담하라는 것입니다. 관건은 성막제도 즉, 교회조직체를 건전하고도 거룩하게 유지할 것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지 헌금의 액수가 아닙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소명을 대체로 예배, 선교, 교육, 봉사, 교제 다섯으로 나눕니다. 이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교회가 정당하고 투병한 방법으로 헌금을 받고 운용하고 공개하면 됩니다. 꼭 10%까지 내어야 하는지 여부는 각자의 믿음과 개별교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수치에 집착하면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계명의 문자적 형식에 묶이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이 남아도는 데도 그 본연의 소명은 실현하지 않고 다른 곳에 사용하면서 그것도 투명하지 않게 밀실에서 운용한다면 아예 헌금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창기나 도둑의 더러운 돈도 받지 않으시지만, 피땀 흘린 성도들의 귀한 헌금을 더러운 곳에 사용한다면 당장 그 교회에서 떠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인들은 교회더러 공정하게 재정을 집행하라고 요구하고 시정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가 정말로 그 헌금을 꼭 써야할 곳에 정당하고 투명하게 사용하며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것이 실제로 보이면 성도들은 수입의 몇 십 퍼센트도 헌금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인도 성소에 가까이 가면 죽는다.

 

그런데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으로선 성소에 가까이 할 수 없는 것도 아쉬움이 큰데 십일조까지 레위 지파를 위해서 바쳐야 할 판입니다. 레위 지파에 비하면 억울하게도 이중으로 차별당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도 십일조가 목사들 배를 채워주는 용도라고 의심하는 신자들이 많듯이 말입니다.

 

지난주에 신앙상의 의문이 생기면 자신의 입장에 비추어보라고 했는데 지금은 성막도 제사장이 없으니 그럴 수 없습니다.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팁이 있는데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서 역추적해보면 됩니다.

 

간단하게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따져보면 됩니다. 제사장들도 받은 십일조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했지만(26절) 생업의 직접적인 열매에서 바친 것이 아닙니다. 일반지파가 생업에서 나온 수입에서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자기들을 제사장 위치에 두는 것이 되므로 여전히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레위 지파 생계를 위하는 것은 십일조의 현실적 이유입니다. 영적으로는 자신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로 받은 선물이라는 믿음의 표식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사는 필요 없다는 것으로 앞에서 설명한 대로 성소 제도를 유지하고픈 마음도 전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도 하지 않은 것 위에 제사장직에 대한 욕심까지 버리지 못한 것이라 이중으로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십일조로 백성들이 이중으로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내지 않은 자들을 두 배로 벌해야 함에도 그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표현이 이상하지만 더 억울한 것입니다.

 

실제로 여호와의 성소에 가까이 하는 자는 레위인들도 반드시 죽음의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단에는 가까이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레위 지파)과 너희(나머지 열두 지파)가 죽을까 하노라.”(민18:3)

 

레위 지파도 성소의 등대에 불을 지피고 분향을 하며 거룩한 떡을 진설하고 짐승 제물의 피를 들고 가서 직접 제사 드리는 일은 아론의 가문이 맡았습니다.(18:1) 특별히 증거궤를 모셔 놓은 지성소 안에는 대제사장만 그것도 일 년에 대속죄일 하루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라당 사건에서 살펴봤듯이 일반 레위인은 성소의 기구와 성막 자체를 관리 운반 설치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일반 지파와 아론 가문이 아닌 일반 레위인이 성소에 가까이 가선 안 되고 죽음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편애한 것도, 다른 지파를 차별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피의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이유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과 성소 출입 금지를 연결시킨 의미가 이제 거의 다 밝혀졌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피의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피의 제사를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 그 제사를 직간접으로 감당하는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합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로 온전한 피의 제사를 드리는 공동체를 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피의 제사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너희의 살고 죽음은 오직 피의 제사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이 보통 수준 이상이 되거나, 종교적 의식으로 신령하게 되어야만 만나주겠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 평생을 성전 봉사의 거룩한 일을 맡아야 하는 레위 인들마저 속죄 제물 없이 성소에 나와선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대제사장도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속죄제를 지낸 후에 성소에 가까이 가야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자신이 인간 사회에서 아무리 의롭고 경건하고 신령하다고 칭찬을 받아도 도무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을 만큼 추하고 사악하다는 점을 뼛속 깊이까지 겸허하게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철두철미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추악함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인간을 만나주시겠다고 먼저 당신을 열어주시고 낮추어주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을 인간더러 먼저 갖추라는 요구가 바로 오늘의 십일조 제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마15:17) 선언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한 명의 예외 없이 죄인이기에 죄를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짓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로만 가득 찬 것이 인간 존재 자체라는 것입니다. 노와 홍수로 심판하실 때도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창 6:5 & 8:21)고 한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는 그날 밤에 죽음의 사자가 애굽 전역에서 모든 태어난 것의 장자를 죽일 때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양의 피를 문에 가로 세로로 바르고 문을 완전히 닫고 집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문밖에 나갔으면 마찬가지로 심판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 중에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았고, 애굽과 히브리인이라는 인종의 구별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어린 양의 대속의 피 흘림만으로 죄인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피의 제사란 그래서 인간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랄뿐이라는 간구와 믿음의 표시입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무한하신 죄 사함의 은혜에만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긍휼이 없으면 자기는 절망과 죽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피 뿌림의 제사를 거친 인간만 하나님이 만나주신다는 것은 당연히 그 후의 보호 인도 교제 동행이 전제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분은 신자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해서만 신자에게 일어나는 범사를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은 죄뿐인 죄인임을 겸허히 인정하는 자는 그 존재 자체를 당신께서 새롭게 바꿔주십니다. 그를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한 후에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자녀와 자녀가 아닌 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 관계가 평생토록 절대 끊어지지 않고 자녀가 어떤 잘못을 해도 부모는 용서하며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선물을 주시고 오직 자녀가 잘 되도록 당신을 희생하며 모든 것을 쏟아 부어주시는 것이 부모입니다. 부모가 아니면 그런 사랑은 베풀지 않으며 그래야 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신자가 날마다 자기를 죽여서 자기 십자가를 질 때만이 주님과 동행이 가능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선함과 능력으로 자기 뜻과 계획대로 해나갈 수 있다고 여기면 구태여 주님이 함께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전에 아무리 경건한 신자라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고 연약합니다. 스스로는 아주 선해 보이는 계획과 그것을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능력에도 교만 탐욕 죄가 개입되어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피 뿌림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는 즉, 예수 십자가에 드러난 긍휼에 힙을 입지 않고는 단 한 시도 제대로 살 수 없음을 시인하고 그 후로는 평생토록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때로 고달프고 외로운 길로 몰아넣는 것 같아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이 초라하고 완악한 나와 동행해준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요 권능입니까? 본문이 성소 접근 금지 즉, 피의 제사를 다시 강조하며 십일조를 바치라고 요구한 이유입니다.

 

피의 제사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

 

성소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뜻은 또 피의 제사를 통과한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에 더 큰 은혜로 임하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창조한 목적 자체가 서로 도우며 살라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지 않으면 그분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구약에선 성막 중심의 피 제사 공동체를 세우셨고 신약에는 십자가 예수가 머리가 되는 믿음의 공동체를 만드신 뜻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인을 구원하러 온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믿음 위에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게 해준다는 것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참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 제사를 지성소에 뿌릴 때에 그 바쳐진 희생양의 모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 전에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모습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죽여 마땅하나 긍휼로 살려주시는 십자가의 주님으로 함께 계셨습니다. 출애굽 당일에 죽음의 사자로 뛰어넘게 해서 구원해주신 어린 양의 피로,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바칠 때에 미리 준비된 제물 어린 양의 모습으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지금 광야를 다시 사십년간 방황하는 벌을 받은 이스라엘에게도 반석의 생수로 하늘의 만나의 모습으로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떠난 적이 한 시도 없습니다. 백성들이 만나를 “이것이 무엇이냐”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도대체 세상에는 없고 생전 처음으로 보고 겪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매주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선포하여 그 듣는 자들로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은혜인가”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이 신자가 가는 곳마다 생명과 죽음의 냄새 둘만 나야 한다는 것이 전도의 소명을 재확인 하면서 십자가 복음만 전하라는 강조된 표현만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신자는 그 은혜로운 피의 냄새가 납니다. 참 신자는 참 신자의 냄새가 나서 서로 알아봅니다. 구태여 가까워지려는 인위적 노력 없이도 생각과 마음이 통합니다. 거듭난 영혼들은 오직 예수만이 주인이 되고 그분의 종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시민권을 소지했고 그 특징은 영과 영끼리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자들이 모이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예수라는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나며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서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섬기고 밤이 새도록 성경의 진리를 서로 나눠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시간이 모자랄 판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서로 위로 격려할 때에 세상 어떤 공동체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자생적 적극적으로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꺼이 그분께 찬양 감사 경배하게 됩니다. 역사상 최대의 찬양 감사 예배는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넌 후였습니다.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남녀노소 구분 없이 춤추며 찬양했습니다. .

 

한국이 일제 강점기 36년에서 해방된 기쁨을 광복절 노래는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이 춤을 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작사가 정인보는 크리스천이 아님에도 인간의 성정은 동일한지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 같은 해방의 벅찬 감동을 동일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홍해의 마른 땅을 건너면서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너무나 감격하고 신기해서 그 땅을 만져보았을 것이며 정말로 바닷물이 춤을 추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온전한 제사 공동체

 

주목해야 할 사항은 십일조는 율법으로 규정하기 약 500년 전에 아브라함이 이미 실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여러 부족들 간의 전쟁에서 소돔에 거주하던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양성하던 사병 318명만 데리고 야간 기습해서 조카를 구출하고 큰 승리를 이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를 먼저 찾아와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었고 아브라함은 그에 상응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창14:18-20) 조카 롯을 대적에서 구해내게끔 해주신 즉, 주님이 주신 승리에 대한 감사로 탈취물의 십분의 일을 되돌려 준 것입니다.

 

창세기는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고 히브리서도(7장) 족보도 없고 시작과 끝이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자이신 예수님을 예표한 자라고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은 생면부지의 자기와 개인적 현실적 관계가 전무한 멜기세덱이 대제사장이라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영적 의미로는 예수님께 십일조를 바친 셈입니다.

 

주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십일조의 형식과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더 중요한 정신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현하라고 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유다 종교의 지도자들로서 성전 제사로 자기들 배를 채우기 바빴지 실제 백성들의 공의를 굽게 하고 긍휼을 실현하지 않았음을 꾸짖는 의미였습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정의와 긍휼로 다스릴 영원한 제사장임을 온 천하에 드러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믿는 자는 온전한 십일조도 바칠 것이며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정의와 긍휼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닮아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으로 섬기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십일조라는 뜻입니다.

 

참된 예배 공동체에선 누가 권유 강요하지 않아도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 기도 찬양 예배할 뿐 아니라 운영 경비가 필요하면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해 제공합니다. 단순히 교회를 유지하는 비용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깨끗케 하고 한 사람의 잃어버려 미혹되고 죄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영혼들에 예수 십자가 보혈의 은총과 권능만큼 절실한 것이 없음을 자기들부터 스스로 철저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어서 빨리 예수를 만나게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운영하고 목사의 사례비를 주는 것은 십일조의 표면적 이유일 뿐입니다. 세상 속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돈이 필요하기에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위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닮자.

 

초대교회 때는 그러했습니다. 큰 기근을 당해 가난해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마게도니아의 갓 세워진 개척교회들이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에도 오히려 힘에 넘치도록 연보를 모아서 바울에게 전해주었습니다.(고후8:2)

 

그 전에 예루살렘 교회에선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 요셉이 밭을 판 돈 전부를 사도들에게 헌금했습니다. 십일조 규정에 따른 의무적 헌금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도들의 사역에 물질이 부족하지 않아서 부족한 사역이 되지 않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땅을 팔고선 일부를 감추고 헌금하다 그 사악한 중심을 보신 하나님이 베드로의 입을 빌어 심판을 선고케 하고 즉사시켰습니다.

 

그들 부부는 자기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교회 안에 자기 세력으로 파당을 만들려는 뜻입니다. 또 그 대가로 교회나 주님으로부터 현실적 축복을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부로 여호와의 성소에 가까이 나가거나,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 피의 공동체를 부인하는 죄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은 죄뿐인 죄인임을 전혀 시인하지 않고 형식적 의무적인 교회 봉사로 자기 이름만 높이려 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장로나 안수집사 등 교회 내에 중직을 맡은 자들이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습들이 그들과 똑같지 않습니까?

 

본문을 현대교회에 적용하여 쉬운 말로 바꿔 쓰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죄의 노예에서 풀림을 받은 자들이라면 함께 모여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런 해방을 체험한 자들만 모이는 곳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의 공동체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매주일의 예배도 피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 그 일을 현대의 레위 지파인 목사가 인도해야 하고 교인들은 그런 목사를 존경하고 생계를 보장해주라. 그럼 십일조 아니라 십의 이나 삼도 아끼지 않고 그 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꿀 것이다. 의무적으로 헌금을 얼마만큼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느냐에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은 기름과 고기에 배가 부르니 더 이상 갖고 오지 말라고 했다. 혹시라도 죄에서 해방을 맛보지 않는 자가 교회에 나오면 목사를 필두로 모든 교인들이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에 의탁하여 모든 수고와 희생으로 섬겨야 한다. 오직 교회가 행해야 할 이런 일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드려야 하고 또 그 일들에 십일조를 사용해야 한다.”

 

작금 기독교인들이 십일조를 바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탁상 논쟁하기 바쁩니다. 거기다 서로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그렇게 사소한 일들로 싸우기만 하니까 가뜩이나 외부에 기독교가 개독교로 비취게 하는 일에 힘을 보태는 꼴이 됩니다. 

 

정말로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들은 그런 십일조에 대한 논의 자체가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교회가 행해야 할 일들이 그 정도 차원을 넘어서 너무나 엄청나고 고귀한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은 십자가 복음만이 참 생명임을 증거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야 합니다. 정말로 십자가 복음만이 모든 인생의 살고 죽음을 가름하는 절대적인 기준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십일조 계명과 여호와 성소 출입금지를 연결시킨 본문의 뜻을 한 마디로 줄이면 오직 예수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참 생명으로 못 이길 죄악과 흑암의 세력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십지가 복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파고 들어가 찔러서 죄로 찌든 검은 피를 다 흘리고 대신에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수혈되게 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주홍 같은 죄를 양털 같이 희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배달하는 자, 대언하는 자, 실현하는 자, 그것만으로 자신의 인생을 충만하게 하고, 기쁨과 평안을 얻는 일에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 성령으로 거듭나서 십자가를 실제로 통과한 자는 저절로 그렇게 되고 십일조라는 액수와 계명에 구애받지 않고 피의 공동체를 최선을 다해 섬기게 된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바입니다.

 

8/1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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