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2:1-6 신자 대신에 복수해주시는 하나님

조회 수 218 추천 수 0 2019.10.12 09:29:54

(민22:1-6) 신자 대신에 복수해주시는 하나님 

구약성경 강해 (43) / 민수기 강해 (33)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방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그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22:1-6)

 

하나님 은혜를 최고로 많이 받은 사건

 

모압 왕 발락이 주술사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가 22-24장, 3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람이 또 모압과 미디안의 여자들로 이스라엘 남성을 유혹하여 음행하도록 해서 하나님께 염병의 벌을 받는 사건이 기록된 25장까지 보태면 4장이 발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성경의 실제 저자이신 하나님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이 기사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는데 곳곳에 난해한 구절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이방인 주술사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알며 또 하나님은 왜 그런 자에게 계시를 주면서 교통하시는지 의아합니다.

 

그 외에도 동물인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먼저 알아보고 또 여호와의 말을 대변할 수 있는지, 여호와는 발람에게 가지 말라고 했다가 하루 만에 번복하시는지, 특별히 분명히 가라고 명령해놓고(20절) 여호와의 사자가 나귀를 막아섰는지 등등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전체적인 흐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라기보다 뭔가 미개한 원시신앙의 냄새마저 배어나오니 더욱 분별하기 힘듭니다.

 

오늘날의 신자로선 이 기사 내용에서 참조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사항이 거의 없는 고대 설화처럼 여겨집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사항은 하나님이 발람더러 이스라엘에게 도리어 복을 빌어주게끔 이끄셨다는 점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보호해주신다는 원리는 구태여 이 사건으로 배우지 않아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민수기의 주제는 하나님이 완악하게 계속해서 배역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당신께서 믿음을 심어주고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그 극상품 포도를 약속의 증표로 맛을 보고도 가나안 전쟁을 포기한 가데스 바네야 사건이 최고의 거역일 것입니다.

 

반면에 이 발람 사건이 그런 이스라엘에게 올바른 믿음을 가르치면서 최고의 은혜를 베푸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추적해볼 내용이 많은데 오늘은 먼저 이 사건이 일어난 당시 배경과 관련 인물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미디안 장로와 의논하는 모압 왕

 

이 사건 전에 이스라엘은 에돔에게 통과만 시켜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형제나라인지라 전쟁을 치를 수 없어서 다시 광야 길로 우회해야 했습니다. 그 삭막한 길을 원망하다 하나님의 불 뱀 심판으로 죽게 되었으나 놋 뱀을 매단 장대를 쳐다봄으로써 치유 받았습니다. 다시 가나안으로 향하는 중에 아모리 왕 시혼에게도 동일하게 통과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패배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대적한 바산 왕 옥도 쳐서 멸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가데스에서 가나안으로 바로 북진하지 않고 그 땅을 북동쪽으로 둘러서 여리고 맞은편의 모압 평지에 다다른 것입니다.(1절) 한국 전쟁 때에 멕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한반도 중간을 수복하여서 남북을 단절시키려는 전략이었는데, 그처럼 이스라엘도 가나안 땅의 한복판으로 진입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압도 이스라엘의 친척 국가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할 때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 가족만 구출 받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었고 롯과 두 딸만 탈출했습니다. 산지로 피신한 그 가족에 기업을 이을 아들이 없어 두 딸이 모의하여 아비 롯에게 술을 먹인 후에 각기 관계를 가졌습니다. 롯의 큰 딸의 아들과 그 후손이 모압이고 둘째 딸의 아들과 후손은 암몬입니다.

 

지금 모압 왕 발락도 이스라엘을 배척한 에돔 왕처럼 선조들의 오랜 인연에 구애받을 자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스라엘이 아모리 두 왕들에게 행한 일을 보았으므로(2절) 자기들도 그렇게 철저히 진멸당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습니다. 가뜩이나 세계 최강 애굽을 무참히 패배시키고 탈출했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방황했어도 더 강건해진 민족입니다. 그 신의 힘은 자기들 신과는 비교가 안 되리라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번민했다고 합니다.(3절) 너무 걱정되어서 잠도 못 이룰 지경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4절) 즉, 속내를 털어놓고 의논했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모세의 처가로 유목 생활을 하면서도 당시 중근동을 약대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알다시피 형들이 요셉을 광야 구덩이에 밀어 넣어 죽이려다 마침 지나가는 미디안 장사치들에게 팔아버림으로써 이방 땅 에굽에서 천신만고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

 

따라서 미디안의 장로들은 중근동 지역의 정보통으로 당시 주변 모든 나라들의 종교 문화 군사에 능통했었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군대조직인 천부장 제도를 제의했었듯이(출18:21), 사위 모세의 족속 히브리인들이 믿는 신앙과 그 신 여호와의 큰 능력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전쟁을 각기 민족 신들의 능력 다툼으로 간주하는 사상을 지녔는데 아무리 견줘 봐도 히브리 신을 이길 만큼 자기들 신과 군대가 강하지 않다고 간주했습니다. 혹시 히브리신보다 더 강한 신은 없는지 있다면 당장 가서 경배하겠다는 뜻으로 미디안 장로에게 상담한 것입니다.

 

유다가 망해갈 무렵에 아하스 왕은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을 받자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메섹에 갔다가 당신 최강국인 그들 신을 섬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메섹 신전의 단을 그대로 베껴서 예루살렘 성전에 만들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기존의 것들은 멀리 치워버렸습니다.(왕하16장)

 

실제로 당시 중동 지역의 족속들은 여러 신들을 공통으로 섬기기도 했는데 그 대표가 바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바알, 앗세르, 황소 신이었습니다. 신들의 이름만 달랐지 그 속성과 능력이 중복되는 신들도 많았고, 그 제사 절차 또한 가능한 많은 희생 제물을 바치며 음주가무는 물론 신전에서의 난잡한 음행이 이어진다는 면에서 동일했습니다. 사탄이 뒤에서 그 모두를 조종하니까 우상 신들이 비슷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모압 왕은 자기들을 구원 형통시켜 준다면 어떤 신에게라도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따를 용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주는 현실 풍요만 목표인 돈을 숭배하는 신앙, 아니 신앙이랄 것도 없이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발람은 누구인가?

 

여러 나라의 종교에 대해 잘 아는 미디안 장로들이 객관적 중립적으로 권면해준 해결책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나라의 신은 하나도 거명하지 않고 한 개인 발람이라는 주술사만 추천해주었습니다.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우선 미디안 장로가 볼 때에는 당시 모든 나라의 신들이 히브리 신과 맞서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셈입니다. 그만큼 애굽의 열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권능은 물론 광야에서 베푼 이적들이 다른 신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엄청난 권능이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발람이라는 개인 주술사의 능력이 아주 크다는 뜻입니다.

 

발락이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5절) 했습니다. 강은 유프라테스이고 브돌은 그 강변 어귀의 번창하는 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리고 브돌과 지금 모압 평야 사이의 거리는 약 사백 마일이었습니다. 사백 마일이라면 당시 말을 타고 달려도 편도에 일주일은 걸릴 거리입니다. 사신을 두 번이나 보냈으니 발람을 데리고 오는데 약 한 달은 걸렸을 것입니다.

 

발람은 고대 바벨론 지역에서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주술사였기에 평소 여호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를 찾는 고객들의 요구에 맞추어 주술을 행하려면 당시의 여러 신들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여호와도 그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봐야합니다. 최소한 미디안 장로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들었을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발람이 모시는 신당은 아무런 형상이 없는 여호와만을 제외한 만신전이었고, 또 모세의 거룩한 율법을 제외한 각 신들에게 바치는 기도문과 제사절차 모두를 꿰뚫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발락이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6절)고 했습니다. 발락이 발람을 믿는다 혹은 기대 예상 소원한다고 하지 않고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전에 발람에게 그런 실적이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그렇다면 우연의 일치이므로, 많이 있었음을 발락도 익히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발람은 임의로 혹은 고객이 요구하는 신의 이름으로 축복이나 저주의 선포를 했고 또 그러면 큰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디안 장로가 추천하자 곧바로 발락은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렇게 멀리 떨어진 발람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17절) 즉, 백지수표까지 제시해가며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가만히 있었는가?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았는데 조금 이상한 면이 있지 않습니까? 발락이 발람을 불러오는데 한 달 정도는 족히 소요되었습니다. 그럼 그 사이에 이스라엘은 왜 자기들 진로를 막으려드는 모압에게 일절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까? 에돔 왕 때처럼 통과만 시켜 달라 그러면 물과 음식 값을 지불하겠다고 화친의 사절을 보내거나 아니면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거나 최소한 한두 번의 전투는 있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왜 성경은 이스라엘의 동태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순서만 다릅니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도 여러 일을 했습니다. 우선 가나안 정복 후에 땅을 분배하기 위해서 두 번째 인구조사를 행했습니다.(민26장) 모세는 새로운 세대를 대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율법에 대한 신앙교육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신명기) 나아가 그는 노쇠한데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가나안 진군에 함께 할 수 없어서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워주고 있었다고 민수기 32:12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모압과 전쟁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의 민21:26을 보면 아모리 왕 시혼이 차지하고 있던 땅이 원래는 모압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리고 시혼은 물론 바산 왕 옥을 쳐서 이김으로써 21:24 얍복과 암몬의 경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얍복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돌아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경계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본문 1절이 “곧 여리고 맞은편”이라고 설명하듯이 구태여 모압과 전투하지 않고도 가나안을 향해 서쪽으로 진군할 수 있는 위치에 다다른 것입니다.

 

거기다 모세는 에돔 왕과 일차 대면할 때에 형제나 친척 나라와는 전쟁을 치르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미 받았습니다. 신명기 2:9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고 이스라엘 후손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모압 왕도 이스라엘의 최종 목적지가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을 보자마자 대적하려 한 이유는 자기들을 정복하러 온 줄 알고 미리 겁을 먹었거나, 이전에 빼앗겼던 자기들 성읍을 이 기회에 다시 빼앗으려 했거나,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애굽의 금은보화가 탐이 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는 히브리 신이 다른 신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들처럼 이스라엘도 당연히 힘이 약한 나라는 먼저 침략 정복 학대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저주의 신탁을 통해 그 신과 백성의 힘을 빼놓고 승리해서 이전 성읍과 이스라엘의 보물을 탈취할 작정이었습니다. 참 하나님을 모르는 일반인들의 인생목표는 오직 현실의 형통이므로 그들로선 아주 합당하고 영악한 전략으로 최선의 수단을 강구한 것입니다.

 

그들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정말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것입니다. 발락과 발람의 사건은 이스라엘과 전혀 상관없이, 더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은밀히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자기들 일상적인 일만, 정확히는 모세의 지시에 따라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과 완전히 동떨어져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아주 큰일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은 사탄을 숭배하는 이방족속의 군대와 그 주술사와 혼자서 상대하며 당신의 백성에 퍼붓는 그들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압 왕이 꾸미는 흉계는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모압이 자기들 대적을 향한 저주의 신탁을 행할 참이라 더더욱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시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곧 닥칠 위험을 당신의 백성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백성들을 들어 사용하지도 않고, 전혀 영향도 미치지 않고, 심지어 눈치도 못 채는 사이에 당신께서 다 주도하여서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의 결론인 24:25을 보십시오. 발람도 발락도 이스라엘을 향해 저주의 신탁은 아예 해보지도 못하고 자기들 있던 곳을 아무 말 없이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그 때 까지도 몰랐을 수 있습니다.

 

신자가 누리는 가장 큰 은혜

 

이제 서두에서 이 사건이 이스라엘이 광야 방황 중에 누렸던 가장 큰 은혜라고 말씀드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전후좌우를 두르시고 보호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백성과 상관없이 당신께서 모든 대적들을 미리 다 물리쳐 주십니다.

 

성경에 그런 기록들이 종종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열왕기하 7장에는 아람 왕 벤하닷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중에 먹을 것이 떨어져 친아들까지 삶아 먹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밤중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굶어죽어 가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에 아람 군대에게 큰 병거와 군대의 소리를 들리게 해서 밤중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맨몸으로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루아침에 가만히 앉아서 희생자 한 명 없이 승리했고 식량까지 풍부하게 얻었듭니다.

 

또 열왕기하 19장에는 유다가 앗시리아 왕의 장수 랍사게에게 멸망을 당하기 직전에 여호와의 사자가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였습니다. 무엇보다 출애굽 때에 아홉 번까지의 재앙은 애굽의 지경 내에서만 일어났지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멀리 떨어진 고센 땅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지 않습니까?

 

공간적으로 아무리 떨어져도 하나님의 역사가 은밀하고도 완벽하게 이뤄진다면 시간적인 차이가 아무리 커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역사는 아무 방해 받지 않고 이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은혜가 신자나 그 공동체에 베풀어질 때는 그 훨씬 전부터 그보다 더 큰 권능으로 축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실들이 현재의 은혜이며, 또 그런 현재의 은혜들이 모여서 미래에는 더 큰 은혜로 반드시 드러납니다. 요컨대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에 베푸신 그 크신 권능과 은혜들이 바로 지금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믿으십니까? 아니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단순히 성경으로 배워서가 아니라 체험적 사실과 진리로 익히 알고 있고 그래서 항상 그 은혜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앞으로도 언제 어디에 있던, 시공간적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니므로,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실 것을 알고 믿습니까? 그래서 현실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어려워도 그분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까? 나아가 이웃들에게 그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를 선전하고 나눠줄 수 있습니까?

 

우상 숭배하는 이방 왕 발락마저 주술사 발람의 권능을 잘 알고 믿기에 감히 이스라엘과 그 신을 대적해서 저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그런 자보다 못하다면 너무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믿은 하나님에겐 큰 제사 큰 희생 뜨거운 열정 치성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당신과 원수와 죄인 되었을 때조차 당신의 전부와 맞바꾸어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서 새 생명을 풍성히 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저도 예수를 믿고 나니까 믿기 전까지 제게 일어났던 여러 어려움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해서 보호해주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 중에는 실제로 죽을 고비도 몇 번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또 전문 사역자가 되고 나니까 제 믿음, 열성, 공로와 전혀 무관하게 당신께서 저의 목회와 사역을 이끌 뿐만 아니라 방해 되는 여건 사건 사람들을 그분께서 막아주신다는 사실을 지금도 종종 깨닫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정황과 방식은 달라도 그 정신과 원리는 지금도 신자와 그 공동체에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이에 말입니다. 나아가 인류 공동체를, 쉽게 말해 한국과 미국의 제반 상황이 신자가 보기에 너무 혼란스러워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이끌고 있습니다. 신자는 그분의 거룩하심이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드러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면 됩니다.

 

수호천사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미리부터 멀리서 신자를 보호 인도한다고 해서 단순히 수호천사처럼 신자가 무슨 일을 해도 다 보호해준다고 섣불리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신자를 섬기도록 천사도 보내주십니다.(히1:14) 성령님도 신자 안에 내주해 계시기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신자의 일생 동안 함께 하십니다. 너무나 복잡하고 온갖 위험으로 하루가 편할 날이 없는 현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신자라면 매일 삶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컨대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나 자연 재앙에도 신자이니까 지켜주신다고 여기고 그렇게만 기도해선 안 됩니다. 그럼 신자만 편애하는 독선적 배타적 하나님이 되고 신자도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하고 다른 이는 죽어도 좋거나 별로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 됩니다. 테러나 자연재앙이 신자만 비켜가지 않습니다. 신자가 만약 총기 사건 현장에 우연히 있게 되면 자기는 총을 막고 죽더라도 어린이 부녀자 노인들을 막아서서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발람의 사건을 이스라엘은 가만 놓아두고도 그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역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리고 맞은편에서 이제 약속의 땅으로 진군하여 당신과 맺은 언약을 준행하려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방해받지 않게 하려고 당신의 백성을 지켜준 것입니다. 신자 혼자 편안하라고 지켜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일만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오히려 계속 고난에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더 엄격히 말하면 자기만 지켜달라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껏 민수기를 통해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자신들이 조금만 불편해도 원망 불평했고 매번 애굽의 노에로 돌아가겠다고 하나님께 맞서다 크게 벌 받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자들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일을 하려고 하지는 않고 자기 힘든 일에 하나님의 힘만 빌려서 편하게 살아보려는 기도만 합니다. 교회에서 남보다 조금 더 열심히 봉사 헌금하고 모임에 개근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신자와 시공간이 아무리 떨어져서도 신자가 모르게 하나님이 보호해주는 대표적인 케이스 하나만 들겠습니다. 신자가 억울하게 피해 핍박 모멸 당하는 경우로 신자가 보상과 복수를 요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만의 방식과 때에 즉, 시공간과 상관없이, 신원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즉, 하나님이 다 보수해주시니까 예수님이 잘못을 범한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몫이고 보수는 하나님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서서 복수하고 바로 잡겠다는 것은 아무리 내 쪽에 한 치의 잘못이 없다고 해도 내가 상대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교만입니다. 또 내가 심판자 즉 하나님의 자리에 앉겠다는 너무나 큰 불경죄입니다.

 

불완전하고 죄 많은 내가 바로잡겠다고 해서 바로잡아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으로 바꿔줍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단순히 신원해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 상대도 살려서 그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이 작동하게끔 당신께서 다 이끄십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신자가 모르는 장소 시간 방식으로 그분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라. 

 

손을 내려놓고 내가 복수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내 의나 믿음이 증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라도 내 믿음과 의를 증명하겠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개입되면 이미 그것이 잘못이자 죄입니다. 그런 일이 생긴 원인은 죄에 찌든 우리끼리, 신자인 나를 포함해서 서로 상처주고 받으며 시기 질투 분노하고 다툰 까닭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의 긍휼만이 이 뒤틀림 절망 죽음을 바로 잡고 참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그 역사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테러가 일어나도 내가 먼저 당해야 하고, 자연 재앙에도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성벽이 무너지는 곳을 찾아서 그곳에 막아서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에 되었을 때에 모르드개가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방식으로 그분이 구원하지만 에스더에게 네가 이 일에 관여하지 않으면 너와 네 집을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경고가 얼마나 엄청난 의미인지 아셔야 합니다.(에4:14)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네 가문을 다 죽인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 역사에 참여할 영광을 에스더 너에게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네가 몰라도 내가 이 일을 위해서 풍성한 은혜로 너와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네가 왕비가 된 것이 바로 이일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다 알아서 내가 역사해줄 것이니까 너는 아무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군대와 권력을 다 가졌어도 밤새 번민하는 이방의 모압 왕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은혜입니다.

 

예수님도 땅 끝까지 끝 날까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항상은 아닙니다. 모든 족속으로, 본문으로 치면 에돔 모압 아모리 가나안 이방 족속들까지 포함해서 제자로 삼아서 당신의 가르치신 것을 지켜 행하게 하고 그 제자들이 다시 그렇게 할 때라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신자가 그 일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의 권능이 떠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발휘되지 않을 뿐입니다. 성령이 내주하지만 충만하게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하지만 사실상 그 영광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홍해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잠잠히 있어라 그럼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막강한 전차군단이, 앞에는 바닷물이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사방 어디로 가도 죽음뿐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큰 두려움으로 허겁지겁 하나님이 내주신 그 길을 걸어서 목숨을 건졌으나 여전히 광야의 고난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을 걸어서 애굽을 물리친 일은 세상 어느 민족도 누리지 못한 이스라엘만의 영광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는 긍휼과 인내가 다함이 없도록 많으신 성품, 공명정대한 율법과 계명, 풍요를 비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비는 제사, 눈에 보이지 않아도 기도와 말씀을 통해 베푸시는 은혜 등등 모든 측면에서 다른 신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발람 사건만큼 그 진리를 보장해주는 사건도 성경에 드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런 하나님을 정말로 완전히 믿고 의탁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분께만 의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이 겹치는 길로 인도하실지라도 그분만 전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의 모세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만 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럼 시공간을 초월하여서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크게 역사하는 그분만의 은혜가 반드시 임합니다.

 

9/2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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