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질문을 한 가지 제목에 압축하려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본문은 요한복음 18:12-17 입니다.

 

예수님께서 끌려가시고 그 유명한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장면이 나옵니다.

 

 

1. 흔히들 교회 좀 다녔다하면 베드로의 예수님 3번 부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어린시절과 신앙 초보시절, 이러한 베드로의 3번 부인을 알고 그 안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예측하고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격을 얻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부분일수도 있는데, 문득 오늘 말씀 본문으로는 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이를 위해서 다시 교차검증을 하려고 마태복음 26장 부분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다른게 느껴졌습니다.

 

뭐냐면, 마태의 경우 예수님이 잡혀간 뒤에 예수님이 어떻게될까 궁금해서 쫓아간 제자로 오직 '베드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3번 부인의 마지막에서 '저주하며 까지 부인하다가'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한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큐티 본문의 요한복음 18장에서는 그저 세 번 부인한 내용만 있고 베드로가 저주하면서 부정했다는 부분과 통곡한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곰곰히 묵상해서 떠오른 생각은, '이 시점의 베드로에 대해서 일반적인 성도의 비난은 부당하다' 라는 점입니다. 두 가지 복음서를 교차하면서 묵상하고 구글링으로 조사해보면, 마태는 본인의 경험이 아니라 전해 들은 것을 '마태복음'으로 기록한 것인데 반해 요한은 본인이 직접 체험하고 옆에서 베드로의 부인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같이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섰는데,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에 대해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지만 사도 요한의 집안이 사제출신이라는 점과 아버지가 배를 소유한 부유층이라는 점 등이 조사 결과로 나왔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자신의 요한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본인을 절대 언급하지 않고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등으로 익명으로 자주 쓴 것을 봤을 때, 여기서의 '또 다른 제자 한 사람' 역시 사도 요한으로 보입니다.

 

 즉, 사도 요한은 자기가 직접 옆에서 보고 들은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그대로 기술하였는데, 저주하여 맹세하였다느니, 통곡하였다느니 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제가 이 나이 먹고 이 닳고 닳은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어쩌면...베드로가 처음에 부인하고 두 번, 세 번 부인한 것은 감정적으로 예수님과 아는 사이로 몰릴까봐 벌컥 화를 내면서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전략적이고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베드로와 요한(요한이라 하겠습니다. 이 또 다른 제자를...)은 예수님이 잡혀가시고 나서 그 동정을 보려고 어찌보면 '잠입'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인데 예수님과 같이 있는거 아니냐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는 것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습니다. 예전에 목사님께서 다루신 '하얀 거짓말' 같은 부분에서 필연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바로 옆에서 경험한 사도 요한 역시 이러한 베드로의 선택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은 것이죠. 그것이, 세 번을 부인할 때 까지 이어진 것이고 사도 요한도 베드로의 이러한 행위를 긍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베드로가 이 부분에서 일반적인 성도에게 부당하게 '예수님 세 번 부인하고 저주 맹세한 한심한 놈'으로 취급되기에는 너무 부당한 비난 많이 받는걸로 보입니다.

 

또 다른 근거로는, 사도 요한은 위에 기술하다시피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 였습니다. 사제집안 출신이니까요. 그래서 당연히 여러 번 대제사장의 집에 들락날락 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종과 종들은 사도 요한에게 '너도 예수와 있지 않았냐' 라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를 보고 "너도 예수와 있었는데?" 라고 베드로를 보고 뭐라한 종들은 분명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장면을 봤기 때문에 그 측근인 베드로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사도 요한의 얼굴도 옆에서 봤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의 집에 들락날락 하는 사이이기에, 여종을 비롯해서 그 곳의 종들이 아무도 사도 요한의 '신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도 않고 모든 질문이 옆에 있는 베드로에게 집중된 것입니다.  이것 연유도 부당하게 베드로에게만 비난의 화살이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 이유 입니다. 

 

그래서, 뒤집어서 다시 돌아가면 마태복음 26장은 담담하게 기술된 것 같지만, 실상은 바로 옆에서 경험한 사도 요한조차 베드로에 대한 비난이 최소화로 가게 하기 위해서 통곡했다느니 저주하면서 맹세했다느니하는 부분이 없는데 옆에도 없던 마태가, 굳이, 베드로를 까내리려고 하듯이 기술한 부분에서 의구심이 생기면서 마치 베드로를 깎아내리려고 없던 내용을 덧붙인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옆에서 직접 보고 들은 사람인데 그 내용이 없는데, 옆에 있지도 않은 마태가 적은 마태복음에는 그 내용이 '첨가' 되어 있으니까요. 베드로의 세 번부인이 성도들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요한복음 18장에서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 조용히 부정한 기록이 아니라 마태복음 26장에서 '저주하며 맹세하되 아니라// 닭이 울자 예수의 그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하니라' 라는 극적인 서사 때문에 성도들에게 더 기억이 남고 닳고 닳은 장면이 된 것입니다. 곧, 요한복음 18장 만의 기록이었다면 성도들에게 아무런 임팩트가 없는 기록인데 마태복음에서 마태가 마치 자기가 경험한 양 생생하고도 자극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은 신약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가 된 것이죠. 마태는 왜 굳이 이렇게 기술했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실제로 있던 내용인데 사도 요한은 베드로를 감싸주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베드로의 치부를 적지 않았는데 마태는 베드로와 갈등이 있다보니 굳이 안적어도 되는 허물을 기술하고 굉장히 자극적으로 극적인 묘사를 하여 욕먹이려고 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오늘은 묵상을 하고 깊게 생각하면서 은혜는 단 하나도 들지 않았고 의구심과 함께 베드로에 대한 인간적 연민만 생겼습니다. 제가 적은 부분에 대해서 목사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비난 이런 게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합니다)

 

추가 질문)아 그리고 이전 질문에 '성경은 인간의 그런 죄악까지 낱낱이 기록해놓은 죄인들의 양상을 모은 글'이라는 내용은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마태의 이런 '기술하는 태도' 역시 죄인의 마음과 질투적 마음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보이게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기록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말씀을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2. 오늘처럼 말씀 내용을 읽어도, 곱씹어 읽어도 은혜는 되지 않고 의구심과 학구열만 솟을 때가, 가뭄에 콩나듯이 있습니다. 아무리 큐티 본문을 읽어봐도 은혜가 안되고, 옆에 해설도 나온 부분도 적어도 '저에게는' 와닿지않은 갖다붙이기식 어거지 교훈같다는 느낌입니다.

 

  그 날 큐티 말씀을 읽고 이렇게 은혜가 없고 의구심과 함께 성경 저술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배경지식을 찾는 것에 더 시간을 보냈는데요. 

이런 날의 이런 큐티 본문을 읽게 된 소감은 의미가 없는 건가요?


master

2023.08.22 05:31:38
*.115.238.98

억울한사람님 이전부터 닉네임이 그리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붙이든지 자유이지만, 상기 글을 읽으니 그렇게 붙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성경을 아주 깊이 묵상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멀리 간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섰고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책이라는 점을 잊고 있습니다. 나아가 성경해석의 원칙에 벗어나고 또 기록에 없는 행간의 의미를 추측하는 데도 개연성 타당성이 조금 부족합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해석학과 조직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강조한 것입니다. 

 

상기 글에서 가장 큰 문제는 마치 마태가 악의를 갖고 사실을 왜곡해서 기록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요한에 대해서 상세히 알아본 것은 좋으나, 그런 정도는 어느 정도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신자는 익히 알고 있음, 새로 발견한 사실에 흥분하여서(?) 요한의 입장에만 서서 그만 두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평하게 마태의 입장도 객관적으로 추적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님도 마태의 상황을 생각해봤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성경에 거짓을 기록해 놓은 천하의 이단, 즉 사탄의 종으로까지 몰아붙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상기 글에 대한 제 의견을 알기 쉽게 순차적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당신의 절대적 영적 진리를 정확히 알게 해주어야 할 성경에, 거짓된 사실을 기록하도록 성경 저자에게 영감시킬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 네 복음서가 기록 보관 전해졌다는 것은 상호 비교 보완 종합해서 판단하라는 뜻입니다. 각 저자가 잊고 빠트리는 부분이 있고 서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는 더 자세한 기록을 간단한 기록보다 우선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요한보다 마태가 더 자세합니다. 의사라서 가장 이성적이고 정확히 기록했던 누가도 마태와 동일한 내용으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눅22:54-62) 그럼 누가도 거짓말쟁이가 됩니까? 

 

- 요한이 직접 목격한 자로서 왜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인데,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세 제자입니다. 거의 모든 사역에 함께 했고 그래서 베드로와 특별히 더 친했을 것인데 아마도 베드로의 허물을 가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세 번 부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것만 기록해도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케 할 때에 요한의 그 선한 마음은 그대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말씀하신 대로 마태가 그런 잘못된 동기로 성경을 기록하려 할 때에, 성령이 그대로 두셨을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전에 성경 저자로 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무오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입니다. 이 사실이 부인되면 모든 믿음도 처음부터 부인되어야 합니다. 굳이 믿을 이유도 없습니다. 

 

- 마태도 세리였으므로 로마 군병 및 공회의 관원들과 그 하속들과 친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현장에 없었어도 충분히 기록할 자료 수집이 가능했고, 베드로가 통곡까지 하며 회개했기에 그대로 실토했을 것이며, 그 사실대로 이미 예루살렘에 다 퍼져나간 유명한 이야기였을 수 있습니다. 

 

- 결정적으로는 요한은 복음서를 훨씬 뒤에 기록했기에 이미 마태가 자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굳이 베드로의 허물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 하녀에게 화내면서(저주하면서) 주님을 부인한 것은 평소의 베드로의 급한 성격과(성경의 다른 기록들) 일치하므로 개연성과 타당성의 차원에서 사실을 기록했다고 봐야 합니다. 

 

- 누가는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나가서 통곡했다고 합니다.(눅22:61) 원어로는 주님이 그를 지긋이 쳐다 봤다는 뜻입니다. 그 눈빛에 베드로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과 감정을 담아서 은근히 쳐다보니까 스승의 의미를 깨달았고 나아가 성령이 역사하여 나가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무엇보다도 마태가 베드로에게 부정적 감정을 가졌다는 설명이 성립될 어떤 성경적 근거도 없습니다. 순전히 형제님의 일방적 추측(거의 상상 수준)일 뿐입니다. 

 

제가 베드로 부인 사건은 여러 번 다뤘고 또 누가의 이 기록에 대해서도 글을 써서 올렸습니다. 그 요점은 한마디로 제가 당시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베드로보다 훨씬 더 못했을 것이라고, 아니 주님의 제자로 뽑히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우선 아침에 생각나는 대로 제 의견을 적어봤습니다. 다시 잘 따져보시고 성경해석학을 꼭 독학으로도 공부해 보십시오. 

 

질문 2. 당연히 지금처럼 배경지식을 찾고 깊이 묵상하셔야 합니다. 은혜가 안 될 때도 그만큼 파고들었고 더 많이 알게 된 것은 분명한 성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게 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지식들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까지 들어 쓰시는 그분의 광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섭리에 대입하셔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이 절대적 진리이고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확신과 그 말씀대로 겸허히 자기 삶에 실천하겠다는 자세가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종교적 지식으로만 머물 뿐입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지금 말씀하고 계신다는 겸손한 확신이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자신의 존재 삶 인생에 풍성히 실현됩니다. 이와 비슷한 질문을 이전에 언젠가 주셨고 그 때도 제가 동일한 뜻으로 답변했던 것 같네요. (질문들이 많아서 제가 깜박합니다만...) 

  

성경탐닉자

2023.08.22 06:56:11
*.23.152.191

이 닉네임은 원래 다른 닉을 쓰다가, 너무 억울하다는 억하심정이 들어서 닉을 바꾸었었습니다.

다시 신앙이 좀 회복되고 나서는 저도 이 닉네임을 유지해야하나 회의감이 들었는데 닉네임을 또 바꾸면 목사님께서 혼동이 있으실까봐 놔두었는데 목사님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니 다시 이렇게 닉네임을 바꾸어야겠습니다.

 

닉네임을 이렇게 한 이유는, 제 스스로에 대해 오랜 고민끝에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이 '지식에 대한 탐닉'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인생이 타락하고 암흑일 때는 음란물과 게임, 말초적인 것에 일반적인 사람보다 훨씬 더 중독적으로 탐닉하였고, 공부를 할 때도, 무언가를 좋아할 때도 남들보다 훨씬 더 탐닉적으로 파고들고 파고들고 파고드는 사람이더라고요. 지식에 대해서는 특히요.

 

언제나 저는 굶주렸습니다. 철학, 문학, 역사, 수학, 과학, 그리고 성경까지...이 지식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저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2년 전에 6월, 목사님의 이 사이트를 알게된 것은 제게 있어서 엄청난 유레카였습니다. 물론, 저의 이런 성향때문에 2년 동안 목사님도 애를 많이 먹으신 것 같고 죄송한 마음이 들 때도 많습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MBTI로 저는 ENTP인데,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죽어도 납득을 해야겠다는 성격이고, 논리적으로 납득만 된다면 방금전까지 피튀기면서 논쟁하고 싸우던 상대와 순식간에 타협하고 의견의 일치를 하고 어깨동무하는 타입입니다.  저와 대등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이렇지만, 하나님의 경우 '인간보다 상위의 절대자'이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그나마'  이해가 되지 않아도 나보다 하나님이 고등존재니까, 하등존재인 내가 100%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라고 많이 관대하게 (?) 넘어가는 편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이런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탐닉, 그리고 납득이 되지 않으면 최대한 납득이 될 떄까지 끈질기게 추구하는 성격 때문에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정론 관련 질문도 그런 경향이 많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도요.

 

 

다만 올바르게 성경을 탐닉해야하는데, 말씀하신대로 '조직신학' 성경해석학'을 공부를 하고 싶은데 지난 번 댓글에서처럼, 오늘까지도 '매일 성경 묵상하는 것만 해도 시간 쪼개서 하는데...'라는 생각이 있긴 했는데 지난 번에 이어서 이번에도 목사님께서 권면하시니, 저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책을 사서 읽으려고 하면 반드시 그 책은 처음 한 두 챕터만 보고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안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시대에 유튜브에서 영상으로 공부하려고 '조직신학'만 유튜브에 쳤는데...허허 과거와 다른 요즘의 문제는 '정보의 홍수'라고 하지요. 여러 목사님들이 나름의 조직신학 유튜브 강좌를 올리셨네요.

 

킹제임스 흠정역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님

합동신학 대학원 대학교에서 출강하신다는 김병훈 교수님

뉴욕 핸더스 신학대학원 이드보라 교수님

카비넌트 교회 유재혁 목사님

벌코프 조직신학.

백우인 목사(여)와 백충현 교수 (장신대) ....

 

일단 적혀있는 정보를 '조직신학'만 유튜브 검색해서 봤는데요.

혹시 목사님께서 이 중에서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고만고만하다면 '이곳은 지양해라' 라고 피하라고 조언하실 쪽도 있는지요?

 

master

2023.08.22 07:28:41
*.115.238.98

벌코프 조직신학을 읽어보시길 권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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