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참으로 두려운 기준
마태복음 강해(203)
http://youtu.be/G1P1eOMKD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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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었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마21:42-46)
비유보다 어려운 해석
예수님은 두 번째 비유에서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이 소출을 수거하려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마저 죽였다고 했다. 그 동안에 소출을 내지 않은 잘못은 물론, 종들을 죽인 죄도 묻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이 비유를 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주인이 오실 때에 그 농부들은 진멸당해 마땅하다고 대답했다. 농부들은 도무지 인간도 아니라고 분개한 셈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해석을 듣자 자기들이 바로 그 인간도 아닌 사람에 해당됨을 알았고(45절) 예수를 잡고자 즉, 죽이려 들었다. 어떤 것에 대한 부연설명을 들으면 그 뜻을 쉽게 깨달아야 하는데 본문의 해석이 지난주에 살펴본 비유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어떻게 비유의 농부들이 자기들인 줄 알았을까? 영적인 수준이 대단해서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43절)라고 이인칭 복수 대명사로 직접 그들을 지칭해서 알았는가?
그들은 구약성경의 전문가들이다. 지금 예수님과 눈에 보이지 않게 서로 주고받는 영적인 신경전이 치열하다. 정확히 말해 예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자기들의 잘못에 대한 견책을 받고 있다. 어쨌든 그 의미를 캐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신학적 수준이 대중들에 비해 월등한 것은 틀림없다.
예수님이 너희는 하나님 나라가 빼앗길 것이라고 말한 43절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한다. 그럼 42절이 그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와 근거라는 뜻이다. 42절은 시편 118편 22,23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 시편은 작자가 미상이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윗이 저작한 것으로 본다. 사울에 쫓겨서 온갖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하나님이 역사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하는 시다.
집을 짓는 건축자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긴 돌을 버렸다. 그런데 “주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이 간섭하여 모퉁이의 머릿돌로 바뀌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의 초반을 버려진 돌에 비유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버린 돌인 다윗
사울에 비해 인간적 조건으로 내세울 것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있었다.(삼상10:3) 머리 하나는 더 클 만큼 기골이 장대했다는 뜻이다. 사무엘 선지자도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삼상10:24)고 칭송할 정도였다. 실제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잘 수행했다. 다윗을 잡으러 쫓아다녔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 군사적 여유가 있었다는 반증이지 않는가?
반면에 다윗은 그와 정반대였다. 사울에게 실망했고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기로 한 것을 알게 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었을 때에 별로 흡족해 하지 않았다. 이새의 장남인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삼상16:6)고 찬탄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고 깨우쳐 주었다. 그가 왕이 될 자가 아니니 사울과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다윗은 외모와 신장에 내세울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이후로는 천신만고의 세월만 보냈다. 사울의 추격을 피해 가드 왕에게 피신하려하다가 여의치 않자 침을 흘리며 미친 척했다. 다윗을 추종하는 자들도 유대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부랑자 집단이었다.
건축자인 유대인들은 심지어 선지자인 사무엘마저 인간인지라 사울과 엘리압이 외모와 신장에서 월등하다고 여기고 다윗을 경시했다. 반면에 하나님은 소년 다윗을 택하여 지도자로 준비 훈련시켰다가 때가 되자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었다. 즉 이스라엘의 왕권을 사울에게서 빼앗아 다윗에게 주었다. 예수님이 비유를 해석한 42절의 뜻이다.
이어서 ‘그러므로’(43절)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하나님 나라도 빼앗긴다고 했다. 너희가 바로 사울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구약성경의 전문가가 그 뜻을 모를 리가 없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비유에서 하나님의 진멸을 받아 마땅한 농부들이 바로 자기들임을 안 것이다.
빼앗기는 하나님의 나라.
그런데 특이하게도 예수님은 그들더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고 “빼앗긴다”고 표현했다. 자기들이 성전의 권세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포도원의 농부 비유처럼 포도원이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주인 행세를 한 것이다.
집을 짓는 건축자는 크고 반듯하고 튼튼한 돌을 모퉁이 돌로 삼고 적고 울퉁불퉁하고 약한 돌은 버리게 마련이다. 인간이 고안한 문화, 관습, 제도, 철학, 윤리, 종교의 잣대로는 예수님은 분명히 열등했다. 갈릴리 변방 출신에 정식 랍비학교 졸업도 못했다. 거기다 유대 사회에서 정죄 받아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자들과만 교제했다. 아예 교제가 금지되어 있는 이방인들과도 어울렸다.
반면에 자기들은 인간적 기준으로는 갖출 것은 최고로 다 갖추었다. 구제, 기도, 금식, 십일조에 열심이어서 사람들로 칭송받았다.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미 소지했다고 즉, 천국 안에 들어와 있다고 전혀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해석을 들으니 자기들은 사울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빼앗긴다고 한다. 거기다 예수님은 다윗에 자신을 빗대었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인간 사회에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 나라를 차지한다고 했다. 거기다 그 모든 일이 주로 말미암아 될 것이라고 했다. 한 인간 랍비의 기대, 예상,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뜻과 계획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들이 불같이 화를 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사람을 무서워했는가?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했다”(46절)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조금 더 깊이 따져볼 여지가 있다. 그럼 구약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는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도 그들을 선지자로 여기지 않았거나 아니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아주 적은 무리만 그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 예수님의 경우는 그 사정이 판이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과 유다 남북 왕정 국가 시절에는 왕들부터 우상을 숭배했고 제사장들도 그들과 한통속으로 허수아비였다. 대중들도 모두 타락했었다. 하나님이 남겨둔 자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했던 사건에서 보듯이 극소수였고, 그것도 곳곳에 흩어져 숨어 있었다. 겉으로 진리를 외치고 따르는 자는 선지자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아무런 가책과 거리낌 없이 마음 놓고 죽였다. 예수님이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35절)고 설명한 대로다. 산 채로 몸을 톱으로 켜고, 말에 묶어 사지를 찢어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고난 주간의 초반인 화요일 경까지는 대다수가 예수를 선지자 아니 메시아로 열렬히 호응했다.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극소수로 몰릴 만큼 사태는 반전되었다. 대중들의 도덕성, 종교성, 영성이 지도자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사역을 눈으로 보고 그 권세 있는 가르침을 귀로 들으면, 기본적 이성과 상식만으로도 그분이 선지자라는 판단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들보다 더 똑똑하고 경건했던 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런 판단을 못했을 리도 없다. 우선 자기들 중에 메시아가 올 수 없음을 자기들보다 잘 아는 자가 없다. 메시아는 유다지파, 다윗 가문에서 나올 텐데 제사장들은 레위지파다.
동방박사가 헤롯 왕궁에 찾아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마2:4)고 물었다. 유대인이 아니었던 헤롯은 바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모아 메시아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봤다. 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베들레헴이라고 미가의 예언을 들어서 대답했다. 이때도 정답을 맞혔다. 바로 그저께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했는데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였다.
지금도 시편 118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다윗에게 자신을 빗대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이, 메시아가 당신이라고 은연중에 힌트를 주었다. 그런데 사울에게 자기들을 대입하여 적용할 만큼 다시 정답을 맞히고도 예수님에 대해서만은 끝까지 완악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요즘 식으로 예수님을 상대로 인사청문회를 하면서 신상명세만 따져 보아도 메시아인줄, 최소한 선지자인줄은 금방 쉽게 알 수 있을 텐데도 그랬다.
예수님을 거역한 한 가지 이유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지성, 도덕성, 영성이 떨어져서가 결코 아니다. 자기들이 포도원의 주인 행세를 하다 보니 하나님이 전혀 두렵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 양 살고 있었고 또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사람이 무서워지는 것이다.
대중들이 그들더러 왜 예수 믿지 않느냐고 따지고 반란을 일으켜 잡아 죽일까 무서워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편이 되면 자기들 편에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자기들 영향력이 쇠퇴하면 이 땅에서의 자기들에게 돌아올 재물과 권력과 명예가 줄어들까 무서워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예수님을 열렬히 추종하던 대중들도 2,3일 사이에 완전히 급변하여 대제사장과 장로들 편에 붙었다는 것이다. 영성이 갑자기 오염되어 타락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역할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를 물리쳐 이중으로 세금 내는 것을 중지시키고,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며, 다윗 왕국처럼 주변에서 최고 부강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을 뒤엎어 개혁할 기미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속수무책으로 끌려갔고 매를 맞고 온갖 멸시를 받아도 일언반구 대꾸하지 않았다. 시쳇말로 줄을 잘못 서다간 나중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핍박을 받고 유대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큰 불편을 겪겠다 싶었던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빨리 대제사장 편에 붙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산을 두들긴 것이다.
결국 유대 지도자나 대중 즉, 모든 인간이 가장 두려워한 대상이 무엇인가? 생활이 궁핍해지고 고난을 겪는 것이다. 물론 삶이 윤택해지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렇게 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도 싫어하시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가장 두려워하는 일부터 삶에서 최우선순위로 제거하려 들게 마련이다. 인생의 목적을 오직 현실의 안락과 형통에 두게 된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니까 사람이 두려워진다. 또 사람이 두려워지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실종되는데 바로 그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특별히 지도자들조차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하고 영원한 진리대로 살지 않았다. 자기들이 고안한 종교체계를 고수하기 바빴다. 아무리 겉으로는 경건하고 신실해 보여도 하나님과 무관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미 소유했고 그 안에 있는 양 착각했다. 순전히 가짜에 불과한 하나님 나라 안에서 더욱 형통하고 풍성해지려고 그 종교체계에 더욱 의존했다. 예수님은 오히려 바로 그런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믿음을 점검해보라.
지금 예수님은 심판과 구원의 기준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느냐, 사람을 무서워하느냐로 나누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스스로 자문해봐야 한다. 지금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 과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동격 내지 같은 차원인지를 말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자라면 너무나 당연하다. 심지어 불신자들마저도 그러니 따질 필요가 없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가? 예수 믿는 신자로서 세상 사람들 앞에 당당하고 온전하게 서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이 인용한 시편의 배경이 되는 하나님이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실제 삶에는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 단순히 현재 내 현실적 위치와 신분이 남들에게 뒤쳐져 있고 내 자질과 능력이 열등해도 하나님만 열심히 믿으면 반드시 나중에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어 복을 주신다고만 믿는 것은 아닌가? 말하자면 현실의 실패를 하나님이 복수 내지 보상해주어야 한다는 현실 도피적인 이해와 적용은 아닌지? 지금 잘 나가는 사람들 나중에 두고 보자는 식의 심보 말이다.
다윗 시편의 하나님이 세운 모퉁이 돌은 예수님을 예표한다. 예수님도 44절에서 당신이 그 돌이라고 직접 지칭했다. 집을 지을 때에 사방을 줄로 친 후에 한쪽 귀퉁이에 가장 튼튼하고 반듯한 돌로 기준을 삼는 것이 모퉁이 돌이다. 집을 지을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표준이요 중심이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다른 돌 몇 개는 빼내도 조금 흔들릴 수는 있어도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모퉁이 돌을 빼내면 집 전체가 폭싹 내려앉는다.
예수 믿는 신자에게는 세상 인간들이 귀중하다고 여기는 부와 권세와 명예와 건강이 무너져도, 심지어 생명을 잃어도 그 집이 흔들릴지언정 무너진 것이 아니다. 생명을 잃어도 하늘에 더 아름답고 풍성한 장막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 대신에 예수님이 없다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의미와 가치가 없으며 심지어 살아갈 이유도 없다. 육신은 살아도 자신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인간적으로 그런 황금 같은 기회는 없었고 언뜻 보면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이 예비한 기회 같았다. 그런데도 여호와의 기름 부은 종을 인간이 죽일 수 없다면서 두 번 다 살려주었다. 부하들이 이런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사울을 이길 수 없고 평생 쫓기거나 잡혀 죽을 텐데 너무 어리석은 짓이라고 불평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두려워한 것이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했던 것이다.
반면에 지금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다. 주머니가 가벼워질까만 걱정한다. 자기들 명예나 권세와 자존심에 상처 입을 일만 두려워했다. 사울이 왜 왕위를 빼앗겼는가? 사무엘이 정한 기한에 미처 오지 않는 것 같고 사람들은 자꾸 흩어지자 그 대신에 하나님께 망령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고 진리대로 행하지 않았다. 사울은 오직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데만 모든 신경을 쏟았다.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
하나님이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해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만 사랑하신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인간 세상에서 뛰어나고 모든 것을 갖춘 자라도 하나님 앞에 진멸당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또 그 진리를 절감하여 고백하는지, 나아가 그 고백한대로 실제로 살고 있는지를 보시겠다는 뜻이다.
단순히 영원한 구원을 주느냐 안 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 땅에서부터 자기가 스스로 지은 장막은 아무리 무너지더라도 그 인생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사느냐가 관건이다. 다윗이 인간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을 죽일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종교적 계명을 지키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이며 또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구약시대 인물인 다윗도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고, 또 그 믿는 바대로 예수에 힘입어 살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44절 초반부에서 당신의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고 했다.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하면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진멸 당해 마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분을 보배로 모시고 살기에 세상의 죄악과 사람과 사탄에게 당당히 승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항상 승리하지 못해도 최소한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그것들로 요동치지 않아야 구원 받은 증거라는 뜻이다. 만약 그런 고백과 삶이 없다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마16:16) 예수님은 그 고백을 바로 반석 즉, 돌이라고 지칭했다. 만약 그가 그 고백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고 갈릴리로 돌아가 어부로 생을 마감했다면 자기가 고백한 바로 그 돌 위에서 깨어졌을 것이다. 지금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자기들이 진멸 당해 마땅한 자라고 정답을 맞혀놓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한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 44절 후반부에선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가루가 된다고 했다. 처음 것과 같은 맥락이긴 하나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이 재림하여 심판하는 것을 뜻한다. 포도원의 주인이 오실 때에 누구를 심판하는가? 포도원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았던 자들이다. 도덕주의, 율법주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목표를 오직 자신의 안위에만 두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마저 동원하거나 아예 없애버린 자들이다.
이 44절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예수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없다. 교인들 중에 외모로는 종교적 경건과 신실이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그 중심에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실제로 모시고 있느냐 아니냐를 심판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물론 신자도 한두 번 연약한 본성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여 외모를 중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근본 방향과 가치관과 태도를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었는지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이다. 쓰러지고 넘어지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쪽으로 겸비하게 넘어졌는지 보신다. 아무리 강건하게 서있어도 세상 쪽으로 향해 있다면 돌 위에 깨어진다는 것이다.
본문 44절이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포도원의 소출을 전혀 내지 않았고 선지자들을 죽인 죄까지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과실을 맺지 못했고 예수님을 거역하며 그분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고 온전한 사랑으로, 즉 진짜로 두렵고도 무서운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여 바로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신 까닭도 지금껏 우리가 지은 모든 죄들이 바로 하나님보다 인간만을 두려워하여 지은 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환심과 인기와 동정을 사려고 나아가 다른 이들보다 내가 더 위에 서려고 하다가 지은 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당신께서 그 모든 죄를 용서했으니 앞으로는 절대로 동일한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고 말이다.
1/19/2014
다시오시어 심판하심이 두려운 이유가 아니고 이렇게 자주 자기에게 속기 잘하는 죄성, 자신이 참으로 중요하기에 말씀앞에 지적 받을 때는 인정되나 또 돌아서면 살며시 자기중심이 되어 버리고 마는 이런 죄성들, 죄들이 너무도 무서운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 모든 수치스럼, 추악함까지도 이미 다 받으시어 껴안으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사랑이 또 너무나도 귀한 은혜임을, 어떤 모양의 죄이든 고백하며 도우심을 구할 때 은혜를 주시려 매일 매일 손과 가슴을 다 벌리시며 오라시는 그 넓으신 품이 너무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