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처럼 예수 믿는 신자들
마태복음강해 (211)



http://youtu.be/4wLv1_udDO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며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1-45)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걸었던 말의 올무

예수님께 말의 올무를 걸려던 바리새인들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나름대로 최고의 비책이었던 로마 황제에게 납세하는 문제나, 자기들이 가장 자신 있는 율법에 관한 토론에서 대꾸 한마디 못했다. 예수님에게서 말과 행동에서 불일치하는 면이 있거나, 구약성경을 근거로 한 가르치심에 어떤 하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거기다 거꾸로 예수님에게 자기들 잘못을 지적받고 꾸중 듣는 결과만 낳았다. 바리새인들로선 더 이상 예수님과 시비할 거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모였을 때에 역으로 질문했다.(41절) 그들이 다시 모여 예수님을 음해할 모의를 꾸몄던 것은 아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곁에서 함께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마땅히 반발할 말이 없자 예수님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따라서 이 질문은 그간의 모든 토론을 종결하여 결론을 내리고 또 당신의 가르침의 핵심적 의미를 그들의 답변에서 찾아 제시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기사에서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영성가인 바리새인들 모두가 머리를 모아 100% 확실한 모범 답안이 예상되는 질문을 주님께 던졌다. 주님은 그들이 상상도 못하는 답변으로 그 모든 올무를 너무나 쉽게 벗어버렸다.

그런데 본문에선 예수님이 그런 과정을 그대로 그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뉘 자손이냐”고 한 가지 대답 밖에 없는 질문을 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예상했던 그대로 답변했고 주님은 그 답에 기초해서 진리를 설파했다.(43-45절) 그러자 그들은 한 말도 능히 대답을 못했을 뿐 아니라 그날부터 감히 묻는 자마저 없어져버렸다.(46절)

지난주에 예수님께 참 짓궂은 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말의 올무를 거는데 100% 성공한 셈이지 않는가? 인간 바리새인들의 올무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살인하려는 흉계가 숨겨져 있었다. 반면에 하나님이신 주님의 올무는 당신만의 무한하신 긍휼로 자기를 살인하려는 인간들까지 구원으로 인도하려는 초대였다.

바리새인의 대답은 정답이었다.

그렇다고 바리새인의 대답이 오답은 아니었다. 정답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과 언약을 맺었다.(삼하7:10-16) 그 때 하나님은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12절)고 약속하셨다. 또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6절)고 덧붙였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본 복음서를 저작한 마태도 그래서 1장에서 다윗 왕가의 족보부터 열거하고 있다.  

문제는 다윗 후대의 왕 중에 다윗만큼 이스라엘을 강성케 한 왕이 없었다는 것이다. 솔로몬도 자기가 부강케 한 것이 아니다. 다윗이 다 이룬 바탕 위에서 다윗의 유언에 따라 왕국의 통치체계를 완비한 것뿐이다. 말년에는 영적으로 우상숭배에도 빠져 메시아일 리는 없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아주 지혜롭고 능력이 출중한 왕이 나타나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사방의 대적을 다 무찔러서 제2의 번영을 이뤄주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예수님 당대에도 반드시 로마의 지배를 종식시켜 주어야만 메시아로 간주하겠다고 여겼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그런 생각이 틀렸고 그 이유는 성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인데,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당사자 다윗이 스스로 말한 시편110:1을 본문 44절에 인용하여 무엇이 잘못인지 깨우쳐주셨다.

예수님의 초점은 다윗이 메시아를 자신의 주(主)라고 표현 했다는 데에 두었다. 세상에서 최고 높은 지위인 왕에 오른 다윗에게 주가 될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다. 이 시편의 저작 시기가 불명(不明)이라 사울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사울이 메시아일 리는 없고 유대인들도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다.    

특별히 다윗은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44절)라고 했다. 주가 두 분이다. 한분만을 대상으로 저작했다면 스스로 독백한 셈인데, 네가 내 우편에 앉으라는 말이 도무지 성립될 수 없다. 분명히 두 분이다. 따라서 앞의 “주”는 성부 하나님, 뒤의 “내 주”는 성자 하나님이다. 우리말로는 똑같이 주라고 번역되었지만 구약성경은 전자는 야훼로, 후자는 아도니아로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44절의 뜻은 간단하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메시아로 보낸다는 것이다. 또 성자의 원수를, 사탄을 지칭함, 성자의 발 아래에 완전히 패배케 한 후에 성자를 다시 당신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십자가 복음의 내용 그대로다.

하나님의 언약과 다윗 시편이 상충되는가?

그리고 45절은 예수님이 그 시편을 주석한 내용이다. 너희가 다윗 언약을 해석한 대로 만약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 즉, 육신적 후손으로 와야 한다면 할아버지가 아주 먼 손자의 손자뻘에게 주라고 호칭한 꼴이라는 것이다. 동양적 사고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인간관계의 첫 계명인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한다. 율법도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패역한 자녀들은 성읍의 장로들이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했다.(신21:18-21) 요셉의 형들이 그의 꿈 이야기에 극도로 요셉을 미워한 까닭이 하나 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창37:9) 열한 별은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이다. 그럼 해와 달은 부모를 칭하는 것이 분명한데 부모가 자식 요셉에게 절할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언제 올지 모르는 손자 중의 손자(grand-grand son)에게 하나님에게만 적용하는 “큐리오스”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 그의 시편은 메시아가 자기 육신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오신다고 말한 것이 된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약 천 년 전에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었고, 다윗도 거의 같은 시기에 이 시편을 저작했다. 그럼 그 의미가 서로 상충되는 것인가?

인간 다윗으로선 약 천년 후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실 상황과 모습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에 감동하여”(43절) 저작했다고 설명한 것이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 중에 한 분이다. 다윗더러 이 시편을 저작케 한 성령 하나님과, 나단을 통해 그와 언약을 맺은 성부 하나님과 서로 다를 수는 절대 없다. 이 시편과 그 언약의 내용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사7:14)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과 본 시편을 연결하면, 다윗 가문의 후손인 요셉과 그와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는 모습으로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메시아로 오신다는 것도 세상 왕처럼 현실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윗의 시편에 이미 그런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간의 갈등의 본질

예수님이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성경 퀴즈를 낸 것이 아니다. 당신의 정체성을 밝힌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갈등을 빚은 핵심 원인이 안식일이나, 이방인 교제나,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 같은 율법과 그 세부적 시행규정인 장로의 유전을 위반 여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로마에 납세하는 것 같은 현실 정치적 문제도 아니었다.

주님이 가르쳤던 모든 말씀의 궁극적 주제는 바로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였다.  요한복음은 전체가 그 내용이다. 본 마태복음에만 해도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그 반대로 당신을 부인하면 성부 하나님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라고 했다.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또 당신께서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으며 당신을 위해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별히 “너희(예수님의 제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절)고 선포했다. 우선 하나님이 당신을 메시아로 보내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당신을 “하나님과 동격”에 두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3계명을 혹시라도 위반할까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아도니아로 바꿔 불렀다. 성경을 필사할 때도 미리 목욕재계한 후에 야훼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붓을 다시 빨아서 적었다. 그럴 정도의 유대인들에게 인간이 하나님 혹은 그분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신성모독에 해당되었다.

한국에서도 부모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면 불경하다고 여겨서 한 자씩 떼어 함자만 따로 말하지 않는가? 또 약속을 안 지키면 네 자식이 될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자기 부모를 팔거나 모독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을 만큼 그 약속은 꼭 지키겠다는 뜻이다. 인간 부모에게도 이럴진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겐 극악무도한 죄였다.

예수님 사역 초기에 바리새인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부추김 없이도 대중들부터 예수님을 스스로 돌로 치려했던 까닭이다. 예수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적 권위에 꼼짝 못하고 눌렸을 뿐이다. 그러다 대중들은 주님의 사역과 이적과 가르침을 보고 들으면서 차츰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바리새인 같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끝까지 완악하게 주님을 거부했지만 대중들의 눈치를 보느라 손을 대지 못했던 것뿐이다.    

예수님이 내린 토론의 결론

다윗이 이 시편을 저작하기 위해 메시아에 대한 신학적 체계를 연구한 것이 아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건국의 초기였고 국운이 왕성하여 주변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기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도 없었고 사실상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다윗은 단지 성령의 감동으로 그 시를 저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성부와 성자를 차례대로 언급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시를 적었으니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사용하지 않았지 바로 그 교리를 확립한 것이다.  

쉽게 말해 메시아로 시간을 초월하는 성자 하나님이 직접 오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의 보좌 곁에 계셨고 때가 차매 동정녀에게 탄생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당신을 거부하여 타락한 직후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깨트리고 죄 중에 있는 아담의 후손들을 구원하리라 약속했던 것(창3:15)을 다윗을 통해 다시 천명한 것이다.  

바리새인과의 이 토론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에서 가르칠 권세를 가지고 예수님께 문제 삼은 것이 발단되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전반에는 세 비유를 통해 천국 구원의 진리를 가르쳤고, 후반에는 그들의 세 가지 말의 올무를 무산시켰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을 그 모든 토론의 결론으로 제시했다. 무슨 뜻인가?

지금껏 나는 인간 랍비의 자격으로 너희와 신학적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모든 비유와 답변과 가르침들은 주께서 보내신 다윗의 주 성자 하나님 메시아로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선포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너희 눈앞에 서있는 내가 바로 성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신성을 모독한다고 여길지 몰라도, 비록 무식하지만 순진한 대중들은 내가 행한 사역과 가르침을 보고 들은 바 그대로 정직하게 판단했지 않느냐? 반면에 너희들은 모든  머리를 다 짜내서 나에게 올무를 걸었지만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한 적이 있느냐? 내 답변에 주저함, 애매함, 모순이 단 한 치라도 있었느냐? 유대 사회 전체에 너희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지 않느냐? 가장 영적으로 깨어난 너희의 올무를 그렇게 쉽게 벗어나는 자가 유대인 중에 과연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나를 메시아로 인정해야 할 것 아닌가? 최소한 랍비로 존경해주던지 아니면 그 권위를 인정은 해주어야 할 것 아니냐?”

“무엇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고 한 말을 생각해보라. 내가 부활이라고 즉, 내가 구원과 심판을 주는 유일한 자라고 말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면 진짜 하나님이거나 미친 사람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미친 자나 귀신 들린 자를 말 한마디로 치유해주었지 않느냐? 과연 내가 누구인지 정말로 합리적으로 따져보면 내가 말한 그 모든 것이 사실이요 진리라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지 않느냐?”  

마지막 회개의 기회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의 위는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왕으로 그 위가 영원할 자는 아무도 없다. 사무엘하의 그 언약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문자적 해석만이라도 정확히 했다면 메시아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뜻은 성령의 감동으로 저작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가 절대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이다. 종교권력을 확장하고 개인의 명예를 높이려는 사적인 욕심으로 말씀을 해석 적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한자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 기록 그대로 다윗의 후손이면서 영원한 왕이신 분이 메시아로 분명 오신다는 것이다.

즉, 다윗의 24대 후손 요셉(마1:17)과 그와 정혼해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 사이에 나사렛에서 난 아기가 그 메시아라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이 예언한 “하나님이 주신바 된 아들”(사9:6)이라는 것이다. 또 그 아기는 바로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 다윗에게도 이사야에게도 아버지이자 주라는 뜻임. - 평강의 왕”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고난 주간의 이틀 째 날이다. 비록 이해하는 차원이 단순하고 초보적이었지만 대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야 할 지도자들은 완악하고도 교만하게 메시아를 거부하다 못해 살인하려고 모의했다. 그것도 성경을 두고 토론하며 대꾸조차 못했기에 그분의 영적 권위를 내심 결코 부인하지 못했을 것이면서 말이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자들마저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마지막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기회가 없다. 며칠 후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다윗의 시편 그대로 성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한과  바울은 천국에 올라가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고 주님의 이 땅에서 선포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임을 확증했다.

지금 바리새인들에겐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 예수님을 바로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며,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장 심판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감히 묻기를 그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더 늦기 전에 예수님께 항복하고 메시아로 영접했어만 했으나 불행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어진 마태복음 23장에서 주님께 일곱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실제로 바로 며칠 후에 십자가에 돌아가셨기에 더 이상의 구원 기회는 사라지고 심판만 선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자의 제 2의 번영

본문은 진짜로 심각한 내용이다. 예수님만이 영생을 얻느냐 못 얻느냐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이다. 그분 외에 구원 얻을 다른 길은 절대로 없다. 하나님이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인류에게 준 적이 없다. 모든 기독교인들도 그 교리를 잘 알고 또 믿고 있다.

문제는 지금 바리새인들이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 즉, 육신의 후손으로 온다고 믿듯이 예수님을 믿는 교인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성자 하나님이 동정녀 탄생으로 성육신 하신 메시아로 몸소 오실 줄 몰랐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성령의 감동을 입어 이 시편을 저작한 다윗도 구체적으로 몰랐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우쳐 주었는데도 회개치 않았다. 만약 그들이 그때라도 주님을 영접했다면 예수님의 저주를 받지 않았을 것이며 마태복음도 23장 이후의 기록이 달라졌을 텐데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그들은 오직 다윗 왕처럼 사방 대적을 패배시켜 주는 메시아만 기대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무슨 뜻이 되는가? 지금도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믿기 믿되 그 믿는 이유와 믿음으로써 얻게 될 보상을 오직 자신의 사방 대적을 패배시켜주는 예수님에만 두는 자들은 바로 본문의 바리새인과 똑같다는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기 전에 세상에서 사업에 실패한 것, 큰 질병에 걸린 것, 인간관계에서 겪은 정서적 상처와 고뇌 등을 예수님이 다 해결해주어서 자기 인생에 제2의 번영기를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에만 믿음을 동원 적용하고 있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구세주가 되지도 않는다. 그들이 비록 교회 안에 있을지 몰라도 구원 밖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가 바로 메시아라고 선포한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죄를 저주한다는 것이다. 대신에 죄인들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여서 당신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청지기의 직분을 맡겼기에 아무리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어도 너무나 안타깝고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 인생의 제2의 번영은 창조 당시의 모습과 목적대로 우리를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다. 또 그 일을 우리보다 당신께서 더 간절히 소망하시기에 당신의 독생자로 우리 모든 죄 값을 십자가에서 감당하게 하셨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인간을 묶고 있는 사탄의 죄악의 사슬을 끊으셨다. 다윗 시편 그대로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두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예수님이 단순히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거나, 심지어 우리 모든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죽으셨다고만 이해하고 그쳐선 안 된다. 모든 신자 한 명 한 명을 대신해서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신자라면 십자가에서 바로 자신이 죽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는 생생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 자기가 죽음으로써 이미 용서 받은 죄인이 되었다. 또 주님의 부활에 연합했기에 진짜로 새로운 인생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 비록 아직은 연약하여 수시로 죄에 넘어질 수는 있다. 그러니까 더더욱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매일 통회 자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이 가신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형통과 안일만 바라며 가고 있는 쉽고 넓은 길을 거슬러서 하늘의 소망을 품고 걸어가야만 한다. 예수님 대신에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남들이 나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비쳐 나오는 예수님의 빛을 보고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끔 해야 한다. 바로 그런 인생만이 신자의 참된 제2의 번영일 뿐이다.    

당신은 어느 쪽에 서있는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주변 환경이 강성해지는 것만을 소망하며 예수님을 믿거나, 또 강성할 때는 기뻐하고 감사하다가 조금만 고난이 닥치면 다시 의심과 불만에 빠지는 신자들이 많다. 주님의 표현을 빌리면 “쭉정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자신에게 이미 덧입혀져 있음을 확신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고 있는 신자가 있다.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였고 지금은 예수 안에 있기에 세상 모든 것들이 다 헛것임을 실감하게 된 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만이 기쁨과 소망과 목적이 된다. 한 마디로 예수로 인해 이전과 전혀 다르게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진 자다. 그런 자를 주님은 “알곡”이라고 표현했다. 쭉정이와 알곡의 영원한 운명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영생을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인용한 다윗의 시편 110:1과 똑같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메시아로 보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골고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드러난 진리와 은혜와 권능을 아는 것이다.  

십자가 구원을 안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또 어떤 결과로 맺어지는가? 자기 인생과 삶과 존재에서 예수님의 사랑 외에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갖추었어도 하나도 가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 반대로 다른 모든 것들이 없고 세상에서 자기 신분이 정말 하찮아도 예수님을 보배로 모셨기에 세상, 아니 우주의 전부를 가졌음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앎의 바탕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덕적 하자가 전혀 없는 성자가 된 것이 아니다. 어떤 고난도 믿음으로 다 이길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신자는 수시로 세상 죄에 넘어가고 세상 속에서 그 유혹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러나 신자가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며 확신하는 사항은 딱 하나 있다.

비록 그렇게 수시로 넘어져도 예수님 쪽으로 걸어가는 중에 넘어졌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향해서 넘어졌으며 우리 시선도 그분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또 주님만 바라보고 있기에 주님이 지체지 않고 곧바로 우리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이끌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가진 이유는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고, 또 그분의 십자가 권능과 은혜를 덧입은 생생한 체험이 있고, 나아가 그런 체험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고 절대적 진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안락과 평강이 중요치 않기에 현실에서 도피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셨기에 감사하며 기쁘게 누려야 한다. 그러나 인생을 정말로 보람차고 의미 있게 보내려고 강구하다 보면 그 결론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외에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세상의 것들은 더 이상 전혀 중요치 않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어느 쪽을 향해 서있는가? 주님만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는 중인가 아닌가?

3/16/2014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 앞에 섭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지금도 하나님을 내 사방 주변의 대적을 파해주는 분으로만 소망하고 믿음 생활에 적용하고 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제2의 현실적 번영만을 예수 믿는 목적과 보상으로 여기고 뜨겁게 기도하면서 교회 생활에 열심히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불행히도 저 같은 목사님들이 잘못 가르친 탓이 가장 큼을 고백합니다. 메시아를 그런 모습으로 대망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일곱 저주를 받았음을 오늘 말씀으로 깨닫습니다. 우리 중에 많은 교인들의 마지막도 그렇게 될 터인데 전혀 잘못인 줄 모르고 오히려 아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오해하고 자랑까지 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비옵기는 저를 비롯한 모든 목사님들부터 진정으로 겸비하게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되돌아오게 하시고 십자가 복음만 순전한 복음 그대로 전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만이 선포되게 해주시옵소서. 성령께서 간섭하시어 교인들에게 그분의 의가 덧입혀지는 역사들이 교회마다 일어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인생의 참 된 제2 번영이 신자들마다 실현되게 하시옵소서. 이미 부활에 연합하여 용서 받은 죄인임을 확신하고 주님의 거룩한 빛만을 세상에 비추는 자들 되게 하시옵소서. 이 일을 스스로 실현하고 또 가르쳐야 할 저의 소명에 끝까지 충성할 수 있게 이 부족한 종을 들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시고 참 생명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라의 웃음

2014.03.16 23: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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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으로 오심의 의미를 다윗처럼 나라를 부강케, 자신을 형통케, 그래서 세상적 복 많이 받아 누림의 목적을 달성시켜주시는 분이 메사야이기에 그 기다림이 애탐이 된 자들 처럼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종교적으론 하나님 인정 받는 자라 스스로 만족하며 얼마든지 복 받을만 한 자로 여기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모습 속에 제가 들어있진 않은지 되돌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독생자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고 아는자. 그 앎이 아직도 복 주심을 바라며 또 자신을 높여주실 것을 믿으며 종교적으론 교회에 열심을 내는 자타가 공인하는 성도임이 분명하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 받았음을 분명 믿기에 내심 안심하며 여전히 자신의 유익만을 바라며 신앙생활하는 자리에 머물고 있진 않은지, 그러면서도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엔 저는 제외든 듯, 저는 그런 바리새인이 아닌 듯 여기고 싶은 이 이기심들을 또 종교성으로 채색해 가면서요...

에수님을 알아가는 자로 살아감에 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며 예수님 안에 있는 듯 여기나 실은 밖에 있는 모습들을 회개하며 오직 예수님께로만 작은 발걸음 또 한 발자욱 떼며 걷는 매일이 되길 기도합니다.

운영자

2014.03.17 20:29:37
*.119.140.171

다른 설교에선 설교 마침 기도를 녹음하지 않고 글로도 옮기지 않았습니다만,
어제 주일만은 그 기도문까지 글로 적어놓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시 한 번 간절히 이 기도를 주님께 올려드리며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도 기도에 함께 동참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샬롬!

국중후

2014.03.18 16:28:07
*.243.238.62

아멘!
아멘!!

임화평

2014.03.28 22:37:14
*.200.155.194

예수를 믿기 시작한 동기가 팔자를 고쳐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참 어리석은 동기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의 팔자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저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욕심을 절제로,무모한 도전을 분별력으로,분을 이해로
그렇게 저를 변화시키시며 평안을 주셨습니다
쭉정이에서 알곡으로 키워지기를 소망합니다

목사님의 기도에 간절한 마음으로 동참합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길을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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