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3:6-10) 하나님은 불신자의 기도에도 계획을 바꾸는가?

요나서 강해 (8)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6-10)

 

요나가 하나님이 명하신 심판의 메시지를 딱 하루만 전했는데도 니느웨에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사십일 후에 이 큰 성읍이 멸망할 것이라는 선포에 큰 자나 작은 자나 굵은 베 옷을 입고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니느웨의 왕도 조서를 내려서 백성들로 더 적극적으로 금식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으라고 명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여호와가 악독했던 이방인의 기도를 들어준 위에 당신의 심판 계획까지 취소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며 또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본문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효율을 무시하는 하나님의 역사

 

우선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라고 합니다. 요나가 왕궁에 가지 않고 길거리에서 외쳤으므로 백성들부터 먼저 회개했습니다. 성중의 이상한 동향에 대해선 수시로 왕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며 어쩌면 수많은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왕궁에까지 들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라면 요나가 왕부터 회개시켰더라면 백성들이 쉽게 따라올 것이므로 며칠 씩 성읍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을 것 아닙니까? 실제로 미국의 한 기독교 이단종파가 최근 아프리카에 급속히 전파되고 있는데 그들의 선교전략이 그러합니다. 각 지역의 추장부터 만나서 마을의 숙원 사업이나 골칫거리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당장 해결해주기로 약속합니다. 그 대가로 추장은 종족 전체가 그 종교로 개종하도록 명령하는데 아주 손쉽게 교세를 확장하게 됩니다.

 

최소의 비용을 투자해서 최고의 효율을 올리는 식은 세상의 경영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성령이 강력히 역사해서 모든 택한 자를 일순간에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 내일이라도 주님이 재림하셔서 구원과 심판을 완성시키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효율적으로 일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신자로 이 땅에서 연단으로 성숙시키고 불신자는 계속해서 환난으로 힘들게 하시려는 뜻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하나님이 최대한 능률만 높여버리면 신자가 행할 일이 하나도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모든 인간을 당신을 대리해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청지기로 세웠고 타락 이후는 신자로 그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하나님은 죽어 마땅한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세상에서 불러내어서 선교사로 바꾸어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신자는 그분의 전권대사입니다. 대사가 하는 말과 행동은 자기나라의 모든 것을 대변합니다. 외교관과 그 관저는 거주하고 있는 나라의 법률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나라의 법에 따릅니다. 마치 한 나라 안에 다른 나라가 있는 격입니다.

 

신자도 거주는 세상나라에서 하지만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하늘나라 외교관으로서 세상에 천국을 대변하는 자입니다. 신자가 우선적 궁극적으로 따라야 할 법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신자가 언제 어디에 있던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좋은 소식을 전하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선포했습니다.(사52:7) 니느웨로 보내심을 받았던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갈 때 그 발은 너무나 추악했습니다. 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니느웨의 회개를 외치며 성읍을 돌아다니는 그 발을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았기에 성중에 그런 회개가 일어났고 왕까지 동참하게 만든 것입니다.

 

백성들이 왕의 명령으로 강제로 개종하면 참 회개가 아니며 본인들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호와에 대해 체험적으로 제대로 알아야만 순전히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성중의 백성들은 요나가 고래에 삼켰어도 살아났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의 간증은 모두가 사실이었기에 여호와의 크신 권능에 대해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가 전하는 메시지도 진리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인류에게 의미가 있었던 개혁과 부흥은 한 연약하고 이름 없는 헌신된 종에게서 시작되어서 세상이 거역할 수 없는 큰 흐름으로 발전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똑똑하고 힘 있는 자가 선도하면 외적으로 빨리 성장할 수는 있어도 결국 지도자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눈이 멀어 인간 사회를 더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비겁했던 요나부터 당신의 권능을 체험시켜서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그 권능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니느웨 백성들로 대대적으로 회개케 했습니다. 마지막에 왕과 권력자들도 따르게 만들었는데 높은 사람이 아래 사람을 따르려면 정말로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면 안 됩니다.

 

살아있는 신도 회개한다.

 

그런데 니느웨 왕은 회개는커녕 현재 상황을 이해도 못하는 짐승들마저 금식시키고 굵은 베 옷을 입도록 명했습니다. 아주 미개해 보이고 최대한의 치성을 바쳐서 신의 노여움을 풀려는 우상 종교의 냄새를 풍깁니다. 고대 중근동 지역의 이방족속들은 국가적 대사에 짐승에게도 굵은 베옷을 입혀서 회개에 참여시키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아끼던 가축이나 애완동물이 굶어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봄으로써 주인들이 더 애통해하며 회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개한 모습이긴 해도 더 간절히 회개하겠다는 동기는 선하다고 봐줘야 합니다.

 

신자가 하늘나라의 전권대사이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일꾼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왕은 그 나라와 백성 모두가 자기 소유로 신들처럼 매사를 자기 마음먹은 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백성이 먼저 회개했어도 본인이 틀렸다고 생각되거나 기분에 안 들면 곧바로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가축까지 회개에 동원시켰다는 것은 왕의 회개도 백성들 못지않게 아주 진실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쉽게 넘겨선 안 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여호와를 믿거나 그 예언을 따르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항복하는 셈입니다. 그들을 지금껏 식민지로 지배해왔던 나라의 왕으로서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출애굽 때에 애굽의 바로는 엄청난 재앙을 아홉 번이나 당하고도 완강히 버티다가 마지막 열 번째 자기 아들이 죽자 어쩔 수 없이 모세의 말을 따랐습니다. 일차적으로 다음에는 자신이 죽을 차례이니까 크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세계 최강국 애굽이 노예들의 신에게 순종할 수는 결코 없었고 바로는 살아있는 신으로 애굽의 여러 우상 신들보다 최고위 신으로 숭배되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풀어주고도 그 노동력이 없어지는 것이 아깝기도 했지만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홍해까지 쫓아간 것입니다.

 

니느웨 왕의 신분과 위치도 애굽의 바로와 같은데 지금 성중의 상황만 전해 듣고 회개했습니다. 앗수르라는 나라 전체가 이스라엘에게, 자기들의 모든 신들이 여호와에게 항복하는 것이며, 자신의 신적인 권세도 몽땅 포기하는 일입니다. 왕은 여호와에게 순복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십 일 후에 심판이 임할 것이며 살아남을 길은 오직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 뿐이라고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왕이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는 일은 자식이 죽었거나 나라가 절대 절명의 위기에 빠져야만 행하는 일입니다. 니느웨에 발생한 역병이 요나가 방문하기 전이었을 가능성을 다시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때의 바로처럼 자기 왕위를 계승할 장남이 역병으로 졸지에 죽었다면 요나의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또 역병으로 가축들도 많이 죽었을 것이므로 관습을 떠나서 짐승들도 회개에 동참시켜서 살려보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역병 때문이라면 여호와의 힘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으로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단번에 효율적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역병과 관계없이 백성은 물론 왕에게도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왕에게 자기는 신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선 모든 인간은 공평합니다. 왕의 권세도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죽음 이후의 구원을 염려하게 됩니다. 최소한 요나처럼 살려만 주면 반드시 여호와의 뜻대로 순종하겠다고 진심어린 간구를 한 것입니다.

 

거기다 왕은 백성과 가축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라는 명령을 구두로 하지 않고 조서로 남겼습니다. 그들의 역사 대대로 개종한 반역자라는 기록이 남아 두고두고 후손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비유컨대 한국의 왕이 조서를 내려 일본에 항복하고 일본의 신사를 참배하게끔 명령한 꼴입니다. 머리에 총을 갖다 대고 협박받지 않는 한 자기 의지로는 결코 하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 왕에게 아무도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고 성중의 동향 보고만 받고서 스스로 조서를 내렸습니다. 성령이 강력히 역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회개하는 것은 그 권능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폭군이 아니라 인격적이신 분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단 한 치도 제한하지 않고도 당신의 뜻대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순전히 깨달아 진정으로 그분께 겸손하게 엎드리게끔 인간 내면에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십니다. 결국 요나서의 결론처럼 하나님은 니느웨 왕도 정말로 사랑했기에 그로 회개하게끔 인도했고 왕도 여호와께 진심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불신자의 기도에 응답하는가?

 

이제 살펴야 할 주제는 니느웨가 금식하며 뜨겁게 기도했다고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변경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어제까지도 니느웨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잔혹하기 짝이 없었던 원수였지 않습니까? 그럼 또 지금 코로나 사태도 세상 사람들이 사십 일간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종식시켜주실까요? 하나님의 이런 응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원칙적으로 불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습니다. 순전한 믿음이 따르지 않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언제가 비유했지만 남의 집 아버지에게 어떤 일을 해달라고 부탁해봐야 아주 위급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 상황의 위급함이나 부탁의 간절함 등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들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는 것처럼 기도 응답도 신자 쪽의 믿음보다 하나님 그분과의 관계가 우선적입니다.

 

본문의 경우는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순전한 믿음으로 진정한 회개를 함으로써 여호와의 관계는 이미 맺어졌습니다. 흔히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 기도의 응답도 잘 되고 그 믿음이 가장 순수했다고 말하듯이 생전 처음 하는 진정한 회개인지라 여호와를 순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바꾸신 데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왕은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명한 후에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8절)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죄악을 짓지 말고 강포 즉, 폭력에서 떠나라고 명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합심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뜨겁게 기도하면 다 이뤄진다고 단순하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도 당신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할 것이며(마18:20),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이루리라고(요14:13)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면 기도의 양이 차지 않아서, 믿음과 열정이 부족해서 응답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기도에 관해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도 역대하 7:14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구절의 문자적인 뜻도 정확히 모르고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여 여호와께 봉헌식을 마친 후에 여호와가 그의 꿈에 나타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기도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행할 일이 하나 있는데 니느웨 왕의 명령처럼 악한 길에서 떠나고 스스로 겸비해지라고 합니다. 단순히 기도했다고 응답해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할 때도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성전에 와서 혹은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죄를 사해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 중에 최고의 부귀를 쌓은 솔로몬조차 세상에서 형통과 출세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고난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구약시대의 미숙한 믿음이었다 쳐도 간절한 기도보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고 또 그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해주신다는 약속의 뜻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현실적 형통과 출세를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가난은 너희와 항상 함께 한다고 즉, 이 땅의 삶에서 아무도 고난을 피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병을 고침 받으러 오는 자들을 피해서 다른 동네로 복음부터 전하러 갔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실제로 따르고 있는 신자가 그 길을 잘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진짜 의미입니다. 기도를 마칠 때 반드시 후렴구로 넣어야 하는 종교적 수사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은혜와 권능이 그렇게 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정미한지 아셔야 합니다. 본문 10절에서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재앙을 취소했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10절)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나서 응답했습니다. 단순히 실천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떠났습니다. 사십 일간의 회개 부흥 기간에는 정말로 폭행을 포함한 모든 죄악이 니느웨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영국 웨일즈, 한국의 평양, 미국 엘에이의 아주사 거리 부흥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방언 신유 같은 초자연적 은사가 함께 나타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세 번 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눈물 흘리며 모든 죄를 토설했고, 성도들끼리 자발적으로 지은 죄에 대해 서로에게 용서를 빌었고, 어떤 죄도 범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쉽게 말해 돈 떼먹고 도망갔다든지, 음주로 인한 시비 다툼마저 없어져서 경찰서가 할 일이 없어져 개점휴업 할 판이었습니다.

 

회개는 행동이다.

 

회개는 자기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하나님에게 일대일로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잘못을 범했다고 고백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회개만 하면 용서해준다고 하니까 얼마나 간단하고 편리합니까? 실제로 그 잘못을 온전히 고쳐야 참 회개입니다. 한자말로 풀이하자면 잘못을 뉘우치는 회(悔)와 바르게 고치는 개(改) 자가 합쳐져야 합니다.

 

우리 심령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진실로 자기 잘못을 토설하면 하나님이 용서는 해주시나 그 잘못을 고치려고 내렸던 징계의 형벌은 여전히 계속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입술로만 잘못했다고 시인했지 고쳐진 증거는 나타나지 않으니까 하나님도 용서하신 가시적 증거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도 아이가 잘못했다고 빌어도 예정했던 회초리는 때립니다. 앞으로는 그 잘못에서 완전히 떠나라는 경고의 뜻입니다.

 

신자가 행동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행동으로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니느웨의 회개와 기도는 갓 예수를 믿은 초신자처럼 아주 순수했습니다. 거기다 실제로 모든 악행을 멈췄기에 크게 기뻐하시며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임해 자신들의 지난 악행과 폭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철저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작금의 코로나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신자들도 대면 예배로 모여서 합심하고 금식하며 기도만 한다고 하나님이 종식시켜주는 기적을 일으켜 주지 않습니다. 지난 잘못을 입술로만 회개해선 안 되고 행동으로 고쳐나가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완전히 고쳐지기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았던 악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깨닫고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려고 결단하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솔직히 신자들과 교회들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잘못을 범했습니까? 오죽하면 가장 신뢰하지 못하는 종교와 그 지도자로 기독교와 목사가 뽑혔겠습니까? 개독교라는 별칭으로 비방 받고 있지 않습니까? 신자는 성경 진리를 말로는 외우면서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 죄부터 철저히 회개해야 즉, 예수님이 가신 길을 목숨을 걸고 실제로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는 형통과 출세를 보장하는 기복적 기독교는 쓰레기통에 완전히 던져버리고 순전한 십자가 복음만 선포하고 하나님의 참 진리로만 신자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춰내야 합니다. 단순히 전도에 힘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해결책까지 강구해야 합니다. 예컨대 지구 온난화를 지연시키는 일에 당장의 효과가 나지 않더라도 실현 가능한 일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이번 사태로 현실적으로 궁핍해지고 영적으로도 피폐해진 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봉사의 손길이 필요한 곳마다 신자들이 앞장서 자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응답하시는가?

 

니느웨 왕에게는 정말로 우리가 본받을만한 믿음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9절)고 말했습니다. 심판을 거두지 않는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보다는 강렬한 소망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럼 그 반대로 니느웨가 악한 길에서 떠난 후에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 셈입니다. 말하자면 요나 사건의 자초지종을 듣고 여호와의 큰 권능에는 완전히 항복했으나 그분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껏 헛된 우상들만 음란하게 섬긴데다 이스라엘에게 오래 동안 강포를 행한 죄를 생각하면 유대인들의 신 여호와에게 긍휼을 바란다는 것이 도무지 염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금식하며 기도하고 회개한다고 해서 심지어 악행을 그친다고 해서 그분의 용서를 받을 자격은 자기들에게는 없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어도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회개는 해야 했던 것이며 모든 결과는 오직 여호와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로 니느웨 왕의 회개는 진실했고 스스로 자기를 낮춘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악한 길에서 떠나면 땅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불합리한 말입니다.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면 더 이상 고쳐줄 일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신자에게 진정한 회개를 바라신다는 뜻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기도했고 그 기도한 대로 실천하면 사실상 문제가 해결되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한 재앙도 멈춰진다는 뜻입니다.

 

작금 코로나뿐만 아니라 나라들마다 분열과 분노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유럽에선 종교 갈등이 폭발했고 이번 주에는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이 완전히 세계의 망신감이 되었습니다. 종말이 실제로 다가온 것처럼 여겨져서 모든 이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이 사태를 어서 빨리 해결해 달라고 기도만 해선 안 됩니다.

 

그런 기도 이전에 혹은 동시에 세상이 썩지 않게 만드는 소금으로 또 사람들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바른 길을 비춰주는 빛의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들로 사람들이 자기 탐욕만 채우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으며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세상 전부를 바꾸겠다고 거창하게 덤비지 마시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그럼 그 공동체의 문제의 대부분이 해결되고 영적으로 순전해지기에 하나님이 은밀히 베푸시는 축복도 자연히 찾아서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한국 신자들은 가뜩이나 성질이 급한데다 지금껏 잘못 배워서 신앙에서 마저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새벽 모임에 나와서 어서 빨리 고난에서 꺼내 달라고 빌고 응답을 빨리 받으려는 의도로 입술로만 잠시 용서를 빌고 치웁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을 붙드는 것밖에 할 줄 모르고 그분의 뜻과 계획도 아예 자기의 것으로 대체해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기도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인지라 신자가 반드시 본 받아야 할 기도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하나님의 처분에 맡긴다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장이나 생업으로 돌아가선 세상 사람과 똑 같이 때로는 더 영악하게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기도 응답이 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에서 뉘우치고 떠난 분명한 증거를 신자에게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기억할 사항은 인간의 믿음이 순수하고 회개한 증거가 확실하다고 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바꾸거나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이해 수준에 맞춰준 표현일 뿐입니다. 니느웨의 회개도 당신의 뜻과 계획에 이미 확정되어 있었기에 요나를 고래에서 살려주면서까지 니느웨로 오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진정한 회개와 부흥을 일으키는데 있었습니다. 요나로 당신의 전권대사로서 당신의 메시지를 단 하나 가감하지 않고 담대히 전하게 했습니다. 니느웨 왕으로 여호와에게 긍휼을 받을 자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음을 절감하게 해서 모든 처분은 여호와께 맡기겠다는 진정한 고백을 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 특별히 기도하는 모습을 진솔하게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아무런 행동의 변화도 없이, 아니 시도도 안 해보고, 단지 그렇게 오래 뜨겁게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다고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기 바쁘지 않습니까? 코로나 사태에도 기독교에 대한 실제적인 종교 박해는 없는데도 교회로 못 모이게 하는 세상 권력을 고쳐달라고 마치 핍박 받는 순교자 코스프레만 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자신의 안락을 보장 받고 기독교의 교세를 효율적으로 확장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중에 단 한 명도 예수를 믿은 후에도 심지어 그분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하고 있어도 그분의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정말로 순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면 특별히 그분이 주시는 소명을 실천하고 있으면 구태여 기도하지 않아도 신자에게 재앙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을 따라가는 삶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어떤 고난이 닥쳐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맺자면 작금의 코로나 사태를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은 신자들더러 최소한 니느웨 만큼이라도 진정한 회개와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11/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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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31,32) 인간에게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은? [3]

(눅15:31,32) 인간에게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은? 돌아온 탕자 시리즈 (9)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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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8
  • 조회 수 271

(눅15:25-30) 최후의 도피성마저 무너뜨린 바리새인들

(눅15:25-30) 최후의 도피성마저 무너뜨린 바리새인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8)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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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28
  • 조회 수 215

(눅15:22-24)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야할 세 가지 축복 [2]

(눅15:22-24)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야할 세 가지 축복 돌아온 탕자 시리즈 (7)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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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21
  • 조회 수 494

(눅15:20,21) 믿음의 본질은 뻔뻔함이다. [4]

(눅15:20,21) 믿음의 본질은 뻔뻔함이다. 돌아온 탕자 시리즈 (6)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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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14
  • 조회 수 359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5)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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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7
  • 조회 수 255

(눅15:11-14) 아버지를 죽여버린 둘째 아들

(눅15:11-14) 아버지를 죽여버린 둘째 아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4)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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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31
  • 조회 수 244

(눅15:8-10) 하나님은 코로나 사태를 기뻐하신다.

(눅15:8-10) 하나님은 코로나 사태를 기뻐하신다. 돌아온 탕자 시리즈 (3)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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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24
  • 조회 수 471

(눅15:3-7) 잃어버린 양이 과연 누구인가? [3]

(눅15:3-7) 잃어버린 양이 과연 누구인가? 돌아온 탕자 시리즈 (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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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17
  • 조회 수 983

(눅15:1,2) 올해를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

(눅15:1,2) 올해를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 돌아온 탕자 시리즈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1,2)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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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10
  • 조회 수 424

(학1:1-4)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1]

(학1:1-4)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2021 신년주일 설교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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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03
  • 조회 수 309

(롬13:11-14)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1]

(롬13:11-14)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2020년 송구영신 설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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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27
  • 조회 수 331

(요7:37-43)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가? [1]

(요7:37-43)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가? 2020 성탄 주일 설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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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20
  • 조회 수 409

(욘1:1,2 & 4:10,11) 하나님께 받을 신자의 진정한 복 [1]

(욘1:1,2 & 4:10,11) 하나님께 받을 신자의 진정한 복. 요나서 강해 (12-完)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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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3
  • 조회 수 246

(욘4:10,11) 신자의 어쩔 수 없는 숙명 [2]

(욘4:10,11) 신자의 어쩔 수 없는 숙명 요나서 강해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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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06
  • 조회 수 217

(욘4:5-9) 신자가 평생토록 행해야할 한가지 일 [1]

(욘4:5-9) 신자가 평생토록 행해야할 한가지 일 요나서 강해 (10)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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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9
  • 조회 수 347

(눅17:11–19) 평생 처음 드리는 성경적 추수감사절 [1]

(눅17:11–19) 평생 처음 드리는 성경적 추수감사절 2020추수 감사절 설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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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2
  • 조회 수 224

(욘4:1-4)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 [3]

(욘4:1-4)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 요나서 강해 (9)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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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5
  • 조회 수 452

(욘3:6-10) 하나님은 불신자의 기도에도 계획을 바꾸는가?

(욘3:6-10) 하나님은 불신자의 기도에도 계획을 바꾸는가? 요나서 강해 (8)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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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8
  • 조회 수 231

(욘3:1-5) 단답형 믿음인가? 논술형 믿음인가? [1]

(욘3:1-5) 단답형 믿음인가? 논술형 믿음인가? 요나서 강해 (7)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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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1
  • 조회 수 225

(욘2:5-10) 복음의 네 가지 핵심과 코로나 사태 [8]

(욘2:5-10) 복음의 네 가지 핵심과 코로나 사태 요나서 강해 (6)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

  • master
  • 2020-10-25
  • 조회 수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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