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4:10,11) 신자의 어쩔 수 없는 숙명
요나서 강해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10,11)
하나님이 요나를 꾸중하신 뜻
요나가 한낮의 무더위를 이기도록 하나님은 박 넝쿨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가 하루 만에 시들게 한 후에 뜨거운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마디로 장막을 걷으라는 뜻인데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모든 생명의 살고 죽음은 당신의 절대적 주관사항이므로 인간이 시비를 걸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진정으로 회개하고 악에서 떠난 니느웨에 대한 재앙은 완전히 취소했으므로 더 이상 지켜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증오심에 불타서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가 옳다고 대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당신의 뜻을 간단하게 정리해 그를 꾸중하는 것으로 요나서는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박 넝쿨은 요나가 심지도 재배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나던지 죽던지 요나의 계획이나 뜻과 전혀 무관한 일이므로 하루라도 시원했으면 감사하고 치울 일이라는 것입니다 시들어져 그늘이 없어진 것이 분명 아쉽긴하겠지만 죽기까지 화를 낼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느웨 성읍의 수많은 백성과 가축들은 하나님 당신께서 심고 재배했다는 뜻입니다. 농부가 자기가 심은 작물은 스스로 말라죽거나 다른 작물에 큰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뽑아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심은 니느웨를 아낀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니느웨 백성들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정미하지 않습니까? 니느웨 백성은 아무 이성이 없이 생존만 하는 박 넝쿨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요나 너는 좌우를 분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너는 나를 알고 모세의 거룩한 율법을 배워서 실천할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 가르치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네가 박 넝쿨을 아꼈던 그 마음을 니느웨 백성에게 조금이라도 적용했더라면 두 번이나 화를 내며 죽겠다고 덤비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루아침에 났다가 시들었지만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식물과 아무리 악독해도 인간과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은 당신의 뜻을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회개했는데 너는 내가 어떤 생각인지 전혀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박 넝쿨로 시청각 교육까지 시켰는데도 네 고집만 피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박 넝쿨은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어보지도 못하고 하루 만에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를 시원케 하고 그로 당신의 뜻을 깨우쳐주려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속으로 잔뜩 불만과 원망을 품고서 억지로 수행했고 다 끝나고 나서도 하나님이 틀렸다고 대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너는 회개한 니느웨 백성은 둘째 치고 이 박 넝쿨보다도 좌우를 분변하지 못한다고 꾸짖고 있는 셈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요나의 니느웨에 대한 증오심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할 만큼 뼈에 사무쳤기에 일방적으로 정죄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지만 만약 그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요나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미아가 된 요나의 억울한 입장
요나를 위해 변명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그로선 이 일로 자기 인생이 완전히 끝났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니느웨는 심판받아 마땅한 원수입니다. 그런데 요나로 인해 예정되었던 재앙이 취소되었다면 이스라엘에선 더 이상 선지자로 활동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과 요나 둘 사이만 아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 자신의 사정을 선원들에게 다 실토했고 니느웨에 요나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잔인하고 사악한 니느웨가 자기들 식민지 나라의 신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악에서 떠났다는 것은 당시의 모든 민족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뉴스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 배후에 요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니느웨가 멸망당할 절호의 찬스인데 요나가 들어서 무산시켜버렸습니다. 격랑이 이는 바다에 뛰어들 정도의 용기라면 고래가 살려주었어도 자결해버리면 니느웨의 회개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요나가 하나님에게 두 번이나 죽겠다고 대든 것도 내가 죽도록 가만 버려두지 왜 살려냈느냐는 항변일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진토 같으며 그 정신은 더더욱 미약합니다. 요나는 막상 사방이 컴컴하고 비릿한 냄새만 진동하는 고래 배속에 사흘간 삼켜져서 음부의 문턱까지 갔더니 죽음이 너무 두려워졌습니다. 처음 다시스로 도망갈 때에 품었던 이스라엘을 위해 내 한 몸 바쳐야지 하는 용기는 싹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거기다 여호와의 엄청난 권능을 실제로 겪어보니까 자살 시도를 해도 다시 막을 것이며, 설령 자기가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다시 맡길 것이라는 점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니느웨가 회개하여 심판이 무산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으나 울며 겨자 먹기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요나도 하나님이 취소한 재앙을 번복할 리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조국이 자기를 완전히 버릴 것이며 돌아가자마자 돌에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이스라엘에선 일제 강점기 때의 이완용 이상으로 평생토록 민족의 배반자로 몰리고 자손 대대로 손가락질을 당할 것입니다.
그로선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니느웨에 들어가서 그들과 살 수도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올데갈데없는 미아가 되었습니다. 바꿔 말해 죽지 못해 사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성 밖에 장막이나 짓고 은둔 생활하는 것이 났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박 넝쿨 때문에 화를 낸 것은 어쩌면 핑계였을 뿐입니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된 원인을 하나님 당신이 제공했고 모든 과정을 전적으로 주관했으니 뭔가 책임져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투정이었습니다.
문제는 요나의 그 억지 같은 항변이 단순히 헛소리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회개는 역사상 이 한 번으로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하나님도 결국은 니느웨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럼 요나의 말이 옳았거나 억울하게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를 부려먹은 것 아닙니까?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의 이스라엘 왕인 여로보암 2세는 BC780 년경에 즉위했습니다. 그가 죽고 BC 752 년경에 앗수르 왕 불이 이스라엘을 침략했는데 당시 므나헴 왕은 앗수르에 은 일천 달란트를 바쳐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왕하15:20) 따라서 최고로 길게 잡아도 28년 즉,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앗수르는 다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요나가 그 사건 때까지 생존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장막을 짓고 니느웨를 지켜보려는 데에 또 다른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비록 이번에는 니느웨가 진심으로 회개해 심판이 취소되었지만 곧바로 다시 옛날로 돌아가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어차피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언젠가 하나님이 심판하실 테니 끝까지 장막에서 지켜보겠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그런 의도까지도 아시고 동풍을 불어서 장막을 소용없게 만들면서 당신의 뜻을 명백히 밝혀준 것입니다.
혹시라도 요나 때에 재앙을 겪지 않은 니느웨 백성 십이만 여명이 구원받았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영원한 운명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일은 오직 개인적으로 행해집니다. 한 나라 전체가 구원 받거나 심판 받는 법은 없습니다. 요나서도 그래서 니느웨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전체 4장 중에서 3장 한 장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느웨의 구원여부에는 신경 쓰지 말고 요나서가 더 강조하려는 다른 주제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나서의 진짜 주제
나머지 세 장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과 그분의 선지자 요나의 의견이 서로 달라 사사건건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당신의 마음을 제발 알아달라고 했고 요나는 그 마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따졌습니다. 결론도 니느웨의 좌우를 분변하지 않는 백성을 아끼는 당신의 마음을 요나더러 이해하지 못한다고 야단치며 끝납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평생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종종 우리 생각과는 너무 다르게 역사한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나처럼 내 신세가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책임인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 않습니까? 살펴본 대로 요나 나름의 이해해줄 만한 사정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힌 가해자이고 이스라엘은 계속 당하기만 한 피해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이스라엘을 위해서 니느웨를 심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잊고 있거나 잘 모르고 있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에 대해서도 예정했던 재앙을 취소한 것은 이번 한 번뿐이며 결국 심판해서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게 만들었습니다. 심판의 방식과 시기만 우리의 생각과 다를 뿐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죄악이자 유대인에게 최고의 원수였던 나치제국도 결국 멸망했고 독일 후손들에겐 너무 부끄러워서 지우고 싶은 흑역사로 남아있지 않습니까?
신자들이 자기 생애 안에 악인의 심판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악한 세력들이 맘껏 형통하도록 내버려둔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악한 세력은 반드시 벌주어서 공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거룩한 분노라면 사줄만 합니다. 그러나 요나같이 원수들이 철저히 패망하는 모습을 보아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비뚤어진 복수심이라면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이끌어가는 첫째 원칙은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일차적으로 또 중점적으로 베푼다는 것입니다. 요나서의 주제에 비추어서 쉬운 말로 바꾸자면 원수에 대해선 신경을 완전히 끊으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요나가 개인적으로는 이런저런 이유로 억울하게 여겨지겠지만 하나님으로선 그에게 당신의 거룩한 일을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세상 앞에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당신을 싫어하고 대적하므로 그분의 일에 충성하는 종에게는 핍박이 반드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세상은 끝까지 하나님에게서 도망가려 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세상을 당신의 품 안으로 되돌리려 하는 것이 인류 역사의 실체입니다.
그분의 일이 편안하고 멋진 경우는 우리끼리 교회에서 종교적 의식과 관습을 행할 때뿐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준비 연습 훈련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하나님을 더 완악하게 대적할 것이므로 진정으로 헌신된 당신의 종에게는 희생과 수고와 박해도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의 좌우도 분변 못했던 십이만여 백성들이 일시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회개한 것은 역사상 최고의 부흥사건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이 연약한 유대인 선지자 한 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외치자, 그것도 억지로 전하는 메시지임에도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일으켜주었습니다. 그 결실을 맺기까지 하나님은 요나에게 열 번 가량이나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는 기적도 동원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오직 인간을 창조하셨던 목적 그대로입니다. 당신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기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뜻을 세상에 실현시키는 그분의 종에게 베푸는 당신의 권능은 요나서에 보다시피 전혀 예상도 못할 만큼 엄청나고 신묘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뜻이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단순히 그들의 형통 내지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완악한 본성상 현실적으로 번영할 때는 솔로몬 왕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진노의 벌을 더 쌓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오직 당신과 맺은 언약에 따라서 진행시켰습니다.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 언약에 따라 오직 하나입니다. 당신의 율법에 순종하고 거룩하게 살면서 모든 열방들 앞에서 여호와를 알게 만드는 복의 근원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럼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에게 요구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전혀 얼토당토 않는 아주 이상한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한 번도 이방 족속에게 여호와를 제대로 증거한 적이 없으니 이번 한번만이라도 니느웨에 직접 가서 제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애굽에서 불러낼 때 시내 산에서 피의 제사를 지내며 죽기까지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맹세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출24:1-8) 그럼 이방인의 상태가 어떠하든 상관하지 말고, 아니 그들이 완악할수록 더 그래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에게 네부터 맹세를 어겼으니 억울해할 것 하나도 없고 오히려 너부터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핍박 받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마저 그 본성은 거룩한 삶을 싫어하거나 귀찮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요나는 원수의 나라에서 혼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는데도 아무도 박해는커녕 비웃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가정이긴 하지만 따져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에 니느웨에 일어난 역병과 요나의 사역 시기가 겹쳤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선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간 또 다른 변명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전도가 급해도 코로나 확진자들을 만나러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반면에 니느웨 백성들로선 죽음을 눈앞에 두었기에 회개할 마음이 쉽게 생겼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역병마저 영적부흥의 기회로 삼았고 또 그 일에 수고하는 당신의 종 요나는 끝까지 안전하게 보호해준 것입니다.
반면에 당사자인 요나는, 우리라도 틀림없이 그랬겠지만, 사십일 내내 이 역병으로 니느웨는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죽으라고 그것이 안 되면 비록 죽음이 두렵긴 해도 차라리 내가 죽고 싶다고 빌고 또 빌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두 번이나 죽여 달라고 덤빈 것을 보면 무리한 추측은 아닐 것입니다. 요나의 항변이 겉으로는 악인을 심판해야 한다고 의로워 보이지만 정작 그 속내를 시쳇말로 바꾸면 네 죽고 나 죽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요나의 생각이 도저히 맞닿을 수 없는 “동(東)과 서(西)만큼 멀리 떨어져”(시103:8)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인데 반해 여호와의 종인데도 그 생각은 최악으로 원수끼리 서로 치고받아 서로 망하자는 것입니다.
욥은 성경 인물 중에 최고로 큰 고난을 아무 이유 없이 당했음에도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지울 수 없어서 하나님에게 따졌지만 결국에는 이런 고백을 했지 않습니까?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2,3)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는 동과 서로 떨어질 만큼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위치
지금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정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은혜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시는 순간 하나님 앞에 요나와 같은 위치와 신분으로 서는 것이며 그래서 11절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주는 꾸중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니느웨 같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여호와처럼 아끼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며 죄악에 찌들어 세속의 음란한 풍속을 따르는 자들까지, 예컨대 게이나 공산주의자들도 불쌍히 여기고 십자가 복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십자가 구속사역을 위해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가룟 유다의 밀고로 대제사장의 관원들과 로마 군인들이 주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관원 중의 하나인 말고의 귀를 칼로 잘랐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마저도 참아야 한다면서 그 귀를 만지셔서 원상대로 회복시켜주었습니다.(요18:10, 눅22:51)
그 종은 전혀 믿음이 없었고 치료를 해달라고 요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체포하러 검을 들고 온 대적이라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치료해주었습니다. 단지 주님은 귀가 떨어져 피가 흐르는 그가 불쌍해서 고쳐준 것입니다. 그의 신분, 직책, 인종, 교육, 사상, 종교 등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써 힘든 일을 겪고 있고 그대로 두면 앞으로 계속 힘들어질 것만 안타까이 여겼습니다. 여호와가 박 넝쿨, 니느웨의 생축까지 당신께서 심고 재배하는 당신의 피조물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말고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기록이 없으니까 그런 기적을 체험하고도 주님을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 땅을 창조하신 여호와가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은 믿었으나 자신이 천하의 죄인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에게 천하 죄인 중의 괴수인 당신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은혜를 믿으라고 아무리 권해도 전혀 이해를 못하고 오히려 화만 냈을 것입니다.
신자가 불신자들에게 심지어 주변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처럼 아끼며 사랑으로 섬겨도 돌아오는 것은 칭찬 보상 감사보다는 정반대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나를 미워했기에 너희도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요15:19,16:33) 신자가 혼자서만 교회나 집에서 거룩하게 종교생활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처지와 여건과 사건으로 인도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한 것이 아니라 어둠을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빛이 싫기 때문에 신자도 싫어해서 그런 것입니다.
요나는 어쩔 수 없었지만 원수의 구원을 위해 일했는데도 거꾸로 나라와 민족과 가문과 가족에게 원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족끼리도 당신으로 인해 원수가 된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되면 맞게 될 평생의 숙명입니다. 이미 좁은 문으로 들어섰고 그 협착한 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상징적이긴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한 후에 쫓아오는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고 바다로 막음으로서 애굽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결론이 없는 요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기도가 언제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모든 이로부터 온갖 조롱을 당하며 죽어갈 때였습니다. 그 내용은 당신의 원수들이 자기들 하는 짓을 모르니 즉, 오늘 본문대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하나님이 불쌍히 아끼는 자들이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기도니까 신자들이 더더욱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비록 우리의 감정상 쉽게 내키지 않아도 하나님이 아끼시기에 원수의 구원을 위해 사랑으로 섬기고 최소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았으나 오직 예수님의 긍휼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 새 생명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일이 너무 귀하고 의미 있다는 것을 풍성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좋아서 주변에 나눠주지 않고는 못 견딥니다.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원수를 증오하는 마음은 점점 주는 대신에 연민이 점점 늘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평생 행해야 할 씨름입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할 때입니다. 이 사태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까닭 없이 서로 증오하고 정죄하며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따르지 않는 저쪽 편 모두는 반드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난리칩니다. 신자들마저 왜 저런 천하의 악독한 자들을 그냥 두고 보시느냐고 하나님께 불평 원망하기 바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대답은 바로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저들이 좌우를 분변 못하니까 내가 아끼지 않느냐?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또 간절히 새벽마다 기도를 하는 너희가 왜 아직도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들을 너희 곁에 붙여두는 이유는 너희더러 좌우가 어디인지 가르쳐 주라고 맡긴 양떼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코비나 균에 대항할 백신이 개발되어서 크리스마스 전까지 이천만 명에게 접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가장 먼저 환자들을 직접 대면하여 치료하는 의료진들에게 둘째로 기저질환이 있어 요양시설에 수용된 노인층에게 셋째는 경찰관 소방관 공무원 교사 같은 공공의 봉사자들 순서로 접종할 것이라고 합니다. 직업상 사람을 많이 접촉해야 하므로 코로나 병균에 감염되기 쉬운 자들입니다.
신자에게 원수란 사탄에게 가장 가까운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백신을 가장 먼저 맞지 않으면 가장 먼저 멸망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도 우리가 복음의 백신을 가장 먼저 놓아줄 자가 바로 우리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 일에 게으르면 그만큼 세상에는 코로나 이전처럼 원수들만 자꾸 생기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일만 자꾸 늘어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에 결론이 없이 유야무야로 끝나는 책이 두 권인데 사도행전과 요나서입니다. 사도행전은 신자들이 바울의 선교의 사명을 이어받아서 나머지 페이지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요나의 잘못을 범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들고 원수의 땅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반드시 임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못 헤아렸기에 매번 말다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체험하지 못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불신자나 교회 안의 쭉정이 신자들을 아끼는 것 하나뿐입니다. 신자가 평생 영혼 속에 간직해야 할 마음입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가는 곳에 신자의 마음도 함께 가는 것이고 그분이 생각하는 그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 어떻게 말하고 행할지는 하나님이 다 이끌어 주십니다. 나아가 요나처럼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는 기적을 그때그때 예비하여서 끝까지 보호 주관해주십니다.
(12/6/2020)
진토같은 성정과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마음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졸렬한 기준으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지만 바로 이 숙명이 우리들 신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기에 또한 그 반대로 가장 귀하고 거룩하며 기뻐하며 기꺼이 순종해야할 숙명임을 오늘 강해로 깨닫습니다.
요나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고집과 완악함으로 똘똘 뭉친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저이지만 이것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깨닫게 해주시어 마치 철옹성같던 이 어리석음을 깨칠 수 있도록 도우심에 감사드리며, 깨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로 행함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성령님 더욱 더 도와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