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27:13-23) 사탄에게 속아버린 욥과 친구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13)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포악자가 전능자에게서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그의 자손은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의 후손은 음식물로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그 남은 자들은 죽음의 병이 돌 때에 묻히리니 그들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준비할지라도 그가 준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의 은은 죄 없는 자가 차지할 것이며 그가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파수꾼의 초막 같을 것이며 부자로 누우려니와 다시는 그렇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아무것도 없으리라 두려움이 물 같이 그에게 닥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앗아갈 것이며 동풍이 그를 들어올리리니 그는 사라질 것이며 그의 처소에서 그를 몰아내리라 하나님은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던져 버릴 것이니 그의 손에서 도망치려고 힘쓰리라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손뼉치고 그의 처소에서 그를 비웃으리라.”(욥27:13-23)

 

사탄이 원흉인데?

 

지금도 세상에는 억울해 보이는 고난과 재앙이 너무 많은데 왜 하나님이 미리 막아주지 않고 또 계속 방치하는지 따져보고 있습니다. 모든 세대가 하나님이 미리 막아주지 않았다는 불만을 품는다면 세상에 불의와 불법이 성행하여 공의가 굽어진 현상이 인간의 죄악 때문이지 하나님이 주관하지 않았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담을 타락시켜서 인간을 죄의 노예로 만든 사탄에게 궁극적인 책임을 물으려 듭니다. 하나님이 왜 사탄을 아예 멸하거나 미리 악하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지 않았는지 다음 단계의 의심이 생깁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인간도 사탄의 유혹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신(神)과 같은 완벽한 존재로 창조해야 했다는 원망으로까지 발전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정죄하는 셈입니다. 비유하자면 아이가 부모에게 왜 나를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게 했느냐고 따지는 꼴입니다. 이왕에 벌어진 지난 일은 굳이 따지지 말라는 무책임한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적 이슈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완벽하게 계시해 놓은 성경에 비추어서 해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선 기억할 사항은 인간은 종말까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탄의 끊임없는 미혹과 사악한 훼방 아래 놓여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경고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면했고 입신(入神)하여 천국의 비밀까지 보고 듣고 온 바울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라고 가르쳤습니다. 

 

마귀가 굶주려서 먹잇감만 보이면 바로 덮치려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자로선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조치에 관한 타당성을 따지기 전에 현실 삶에서 그와 싸워 이기는 것이 더 급선무입니다. 사탄은 워낙 교묘하고 음흉하므로 신자를 넘어뜨리는 방식부터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가 믿음으로 사탄을 이기게 되면 죄의 궁극적인 기원도 깨트리게 되므로 사실상 지금 따지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문의 최종적 해답도 얻는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탄

 

그 해답을 얻을 결정적인 힌트가 욥기의 본문입니다. 욥은 구약에서, 아니 신약의 바울까지 포함해 성경 전체에서 믿음이 좋은데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최고로 억울한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것도 천상의 어전 회의에서 사탄과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걸고 두 번에 걸쳐 내기한 결과로 말입니다. 천상에서 이미 결정된 일이므로 인간 욥으로선 자기가 겪는 고난의 원인은 평생을 가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가 겪은 고난의 과정을 간단히 다시 살펴보자면, 사탄은 먼저 욥의 믿음이 견고한 까닭은 하나님께 받은 복이 많기 때문이므로 그의 소유 전부를 없애면 믿음이 나빠진다고 장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탄이 욥의 모든 소유와 자식마저 일거에 다 앗아가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기대대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오히려 그분을 찬양했습니다. 

 

사탄은 첫째 고난은 욥 본인에게 임한 것이 아니기에 믿음을 지킬 수 있었으나 자기 생명에 큰 위협이 가해지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고 두 번째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않는 한도에서 그마저 허락했고, 사탄은 욥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했습니다. 이번에도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2:10)라고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감정 섞인 말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두 번의 하나님과의 내기에 아주 무참하게 졌고 그 후로 욥기는 사탄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욥을 무너뜨리는 일을 완전히 포기했을 것이라고 여긴다면 사탄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순진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먼저 창조한 천사 중에 가장 뛰어난 루시퍼 천사가 당신을 거역하자 영계에서 지상으로 쫓아냈습니다. 사탄더러 공중 권세를 잡고서 인간을 유혹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 창조 전에 이미 에덴에서 인간을 유혹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목적을 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밝혔습니다. 너희가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우상을 숭배하는 그런 족속들에게 둘러싸여서 살게 될 것이지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13:3)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이방 국가에 설치도록 허락하고 당신의 백성을 그들 속에서 살도록 한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검증하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과 당신 중에 뜻과 힘을 다해 진심으로 섬길 자를 택하라고 했으나, 하나님이 사탄을 당신과 동격의 경쟁 상대로 제시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탄이 강력한 권세를 갖고서 인간을 맘껏 유혹 시험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욥기 서론에 기록된 대로 그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인간에게는 당신만을 기꺼이 따를 수 있도록 당신의 모든 선한 것을 제공해 주셨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최초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풍요를 누렸습니다. 사탄은 현실 삶에서 유혹할 거리는 전혀 없었기에 인간의 그 똑똑한 이성을 건드리기로 했습니다. 인간더러 하나님이 될 수 있으므로 그분을 배역하고 에덴을 독차지하라고 부추겼습니다. 완전한 거짓말이었는데도 너무나 달콤해서 아담이 그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고, 그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순전한 영적인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하나님은 사탄을 바로 멸하거나 그 활동을 중지시키지 않고 계속해서 사탄더러 인간을 유혹 시험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대신에 때가 되면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만 했습니다. 그전에라도 모든 좋은 것을 주시고서 누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를 알려고 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해선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당신 앞으로 나와 진심으로 고백하고 겸손히 순종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인간더러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면서 열방들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세우고 여자의 후손의 오심에 대해 점진적으로 계시해 주면서 구약의 역사를 이끄셨습니다. 

 

숨어버린 사탄

 

흔히들 사탄이 엄청난 불행과 재앙이나 무섭고 괴기한 현상을 일으켜서 시험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의 유일한 존재 목적이 사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하는 것인데, 무서운 일이나 환난을 겪으면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 찾습니다. 사탄이 사용하는 비장의 무기는 C. S. 루이스가 말했듯이 자기 존재를 완전히 숨기는 것입니다.

 

사탄은 욥의 믿음을 걸고 행한 두 번의 내기에 지자 2장 이후로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욥이 미처 알지 못했어도 그를 떠나지 않고 주변에서 그를 넘어뜨리려는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두 번째 환난 후에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고 남편을 다그친 것이 그 첫째 증거입니다. 욥의 아내지만 열 명의 자녀를 둔 엄마인데 자식이 다 죽은 첫째 환난에 그 말을 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도 욥과 비슷한 믿음을 가졌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죄이므로 아무리 억울해도 절제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환난으로 남편마저 불치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게 되자 하나님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의 그 엄청난 환난에도 믿음을 지킨 남편인데 다시 이런 고통을 준다면 더 이상 하나님으로 섬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탄이 외적으로 행한 일은 하나도 없지만, 그녀의 생각을 눈에 보이는 현실에 묶어둠으로써 하나님을 등지도록 영적인 권세를 작동한 것입니다. 

 

그 후로는 위로하러 온 세 친구와 욥 사이에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논쟁이 아주 지루하게 반복됩니다. 서로 자기 의견만 옳다고 우기니까 곁에서 보다 못한 젊은 엘리후가 중재하러 나섰어도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음성을 발하는 38장 앞까지는 같은 내용을 표현만 바꿔서 말꼬리 잡기 시합을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면 당시에 믿음이 좋은 그 다섯 명의 길고 긴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고 전부 틀렸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들끼리 종교적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것도 사탄의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뜻입니다. 상대를 이기려고 더 예리하게 자기 의견을 다듬느라 정작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뒷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진짜 목적은 시간 낭비를 넘어서 하나님께 야단맞은 그 틀린 주장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탄은 하나님이 인간, 특별히 신자에게 가장 먼저 바라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잊어버리고 그 외의 사소한 일들에 몰두하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등지게 하려면 아주 매력적이거나 의로운 미끼를 동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에겐 하나님의 지위와 권력을 보장했고, 욥과 그 친구들엔 서로 신학적으로 우월 의식을 갖게끔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한 열띤 토론을 했으므로 사탄의 모략에 넘어간 줄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십자가 복음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은 뒷전이고 종교적 행사에 집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사탄에게 놀아난 측면도 많은데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행하고 있기에 그분께 아주 충성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변절한 욥

 

본문은 욥까지 사탄의 그 결정적 모략에 넘어갔다는 증거입니다. 위로하러 왔던 세 친구가 욥의 형편이 너무 비참해 칠 일간이나 아무 말도 못 했을 정도이므로 욥의 고난은 인생살이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하루 안에 그 엄청난 일들이 다 일어났기에 가뜩이나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한다고 믿는 욥으로선 그분이 이 일에 개입하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께 그런 엄청난 형벌을, 그것도 순식간에 받아야 할 만큼 잘못한 적이 없었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라 욥에게 반드시 숨겨진 큰 죄가 있어서 그에 상응한 벌을 받았다고 우겼습니다. 그러나 욥은 젊은 자식들이 생일 잔치를 하다 혹시라도 범죄 했을까 염려해 대신해서 제사를 지내줄 정도로 의로웠습니다. 그러니까 이 환난이 자기 죄에 대한 형벌이 절대 아님을 확신했고 하나님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계속 항변했습니다. 욥의 주장은 친구들에게 도무지 씨가 먹히지 않았고, 욥에게도 환난의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침묵이었습니다. 욥은 견디다 못해 차라리 자기를 빨리 죽여달라는 기도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욥은 급기야 악인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에 상응한 벌을 받는다는 친구들의 의견에 동조해 버렸습니다. 비록 악인이 평안하게 죽어도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며(19, 23절), 그리고 자식이 반드시 벌을 받고(14절), 나아가 그 소유를 의인이 대신 차지하게 해준다고 말했습니다.(17절) 세 친구의 일관된 주장과 같아졌습니다. 굳이 다른 점 하나를 찾자면 친구들은 악인은 곧바로 벌 받는다고 했으나, 욥은 부자로 누울 수도 있지만 후대에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기만 다를 뿐이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원리와 방식은 권선징악으로 같습니다. 

 

그가 논쟁에 지쳐서 친구들의 입을 막으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욥기가 거기서 끝나야 하나 그 후로 오히려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욥은 이래저래 갈등하다가 고난의 원인을 찾는 일은 포기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만 인정한 셈입니다. 바꿔 말해 그분의 자비로운 속성은 알지 못했거나 알아도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자비를 베풀기 위해 때로 이유 없는 고난을 허락한다는 진리는 끝내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유를 모르는 고난도 있다는 처음 주장에서 나아진 것이 하나 없습니다. 

 

사탄의 치명적 함정

 

사탄이 모든 인간에게, 특별히 믿음이 좋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을 넘어트리는 치명적인 함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욥까지 세 친구에게 동조한 대로 모든 세상사가 인과응보에 따라 결정되고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이 권선징악 원리로 통치한다고 굳게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상적인 세상사는 대체로 그 두 원칙에 따라 주관 통치하십니다. 그러나 그 둘만이 그분의 통치 원리라고 제한하면 그 법칙이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세상 만물을 만들면서 그 법칙에 따라 작동되도록 조치한 후에 손을 놓고 있는 하나님이 됩니다. 이 땅의 운행과 각 인간의 삶과 인류의 역사와는 완전히 초월해 있는 존재입니다. 

 

당신께서 인간 세상에 내재하여서 범사를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거룩하게 주관하지 않으면 인간 쪽에서 그분께 감사 경배할, 아니 굳이 찾아서 따를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인생사가 인과응보에 따라 움직이므로 환난이 닥치면 그 잘못된 원인만 추적해서 고치면 됩니다. 

 

하나님이 권선징악만 실현한다면 최대한 착하게 살아서 신의 보상을 받아 풍요롭게 사는 것이 인생 목표가 됩니다. 신에게 치성을 얼마나 많이 바치느냐가 모든 종교인의 첫째 의무가 되고 혹시라도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 바침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과 개인적 인격적인 관계는 전혀 형성되지 않고 물질로 서로 주고받는 계약 관계에 머무릅니다. 결국 사탄 쪽에선 너무나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불신 세상이 지금 바로 그렇게 사탄의 권세 아래에 완전히 묶여 있는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작금 교회 안에도 기복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사탄에게 무참히 패배한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는 일부 신자들까지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사람이 믿는 진화론입니다. 사람들은 만약 신이 있다면 착하게 살면 반드시 복을 주어야 하고 악한 짓을 하면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말도 안 되는 재앙과 이해할 수 없는 참극이 벌어졌어도 하나님 쪽에서의 그에 적절한 상벌이 전혀 따르지 않으므로 그런 존재는 실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필연적으로 세상의 실체는 물질뿐이고 그래서 인과응보라는 과학 법칙에 따라 진보하는 것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리석다 못해서 웃기지 않습니까? 인과응보 법칙을 벗어나고 권선징악이 작동되지 않는 인생사가 많다고 스스로 인정했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첫째 이유로 삼았습니다. 그런 법칙이 작동되지 않는 일이 많다고 전제하고선 곧바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그 법칙만이 우주의 실체라고 주장합니다.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으면서 그중 하나는 절대 진리고 다른 하나는 절대 거짓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상 둘 다 옳다고 믿으면서 겉으로는 하나만 믿는다고 말하는 꼴입니다. 아주 똑똑한 과학자들이 자가당착인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사탄에게 놀아났다는 설명밖에 할 수 없습니다. 

 

마치 고아가 너무 힘든 어린 시절을 겪음으로써 자기에겐 부모가 있을 리 없다고 확언하고서, 그와 동시에 앞으로도 얼마든지 부모가 안 도와주어도 끝까지 혼자서 버티며 잘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꼴입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을 믿는 세상 사람들의 삶이 부모 잃은 고아처럼 평생토록 허망하고 갈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은 공의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로 착하게 살게끔 이끄는 일반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흔적이 양심으로 남아 있는 인간들이 고안한 세상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 안에만 머무르기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뜻에 반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그 의로운 법칙에 무임 승차해서 인간으로 그것만 옳다고 우기게끔 배후에서 교묘하게 조종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행위 구원만 고집하는 까닭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 욥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이 창조 때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왜곡 파괴되었으므로 그런 원리로는 크게 부족합니다. 원죄 하의 모든 인간에게는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에 실현한 특별한 은총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욥이 당한 고난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고난받는 동안에 너무 고통스럽고 원인을 몰라서 마치 하나님과 관계마저 끊어진 것 같아서 깊은 고뇌와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길은 인간 욥의 생각과 길과는 다를 뿐 아니라,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완벽하고 절대적으로 선하고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그 교묘하고 끈질긴 도발마저도 이용해서 욥에게 아무 이유 없어 보이는 고난을 겪게 함으로써 인간과는 다른 당신만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려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아주 좋았던 욥에게 그 뜻을 알게 하려고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지만 아주 비상한 방식의 고난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더러 먼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는 고백부터 하게 했습니다. 욥으로 하나님이 내가 가는 길을 아시니까 절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떤 환난에서도 건져주시라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견고하게 되는 것이 미래의 일이라고 말했기에 고난이 완전히 끝나야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안타깝게도 격심한 고통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욥의 믿음은 그 고백대로 견고해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단련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고백한 후에도 본문처럼 거꾸로 세 친구의 의견에 동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욥처럼 똑같은 고백을 입술로는 하지만, 결국에는 욥의 본문처럼 똑같이 실패하듯이 말입니다. 바꿔 말해서 고난으로 믿음이 순금처럼 된다는 의미가 흔히 짐작하듯이 고난 중에 하나님만 끝까지 의지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던지신 물질계의 이치에 관한 백여 개 질문에 대한 답을 전혀 하지 못한 후에 욥이 마지막으로 항복한 내용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42: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단순한 진리의 고백이 아닙니다. 무슨 계획이든 못 하실 것이 없다고 했으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만약 고난이라면 반드시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가 죄 없이 억울하게 엄청난 고난들을 당한 이유만이라도 알고자 따졌는데 이제 그 답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일상적으로는 창조 때부터 제정하신 인과응보와 권선징악 법칙에 따라 통치하지만 언제든 그것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제야 순전한 믿음으로 겸손히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 두 법칙을 초월하는 더 크고 완전한 방식으로 당신의 공의를 세우시는 존재임을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자기에게 그 엄청난 두 고난을 허락하셨다고 드디어 깨달은 것입니다. 

 

쉽게 말해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이 죄를 지을 때마다 벌을 주는 권선징악의 방안보다는 오히려 죄인들을 참으시고 또 참으시며 끝까지 인자를 베푸시는 방식으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따지면 선을 했다고 꼭 상을 주는 방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도 자기 생각에는 죄 없이 고난받았다고 여겼으므로 죄와 무관하게 벌을 받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를 불공평하게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원리를 제대로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인간이 지은 죄와 상관 없이 당신의 거룩하고 완전한 뜻과 계획대로만 시행되는 이유도 정확히 밝혔습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4절)라고 말입니다. 단 한 명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므로 일일이 권선징악을 시행해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사해주고 인간은 다시 살려주는 자비가 없으면 인간 세상은 사탄에게만 지배되는 죽음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자비는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고 진토 같은 욥에게도 당연히 베풀어졌습니다. 우선 자기에게 말도 안 되는 고난을 허락했으니 하나님 쪽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덤빈 것부터 죄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데도 억울한 고난을 받았다고 항변하다가 지쳐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요구한 일은 더 큰 죄였습니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 죄는 따로 있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죽은 자식들 열 명은 더 억울했는데도 욥은 생명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앗아가는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죽지도 않았는데 그 진리를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고서 하나님께 내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달라고 덤볐습니다. 무엇보다 자기는 이런 벌을 받을 짓을 하지 않은 의인이라고 끝까지 고집했습니다. 마치 그 이유를 알려주면 하나님을 의심 원망했던 오해를 풀고 자기가 하나님을 용서해 주겠다는 꼴입니다. 

 

사탄에게 넘어가는 의인들

 

결국 당대의 최고 의인 욥마저도 마지막의 이 고백 전까지 사탄에게 완전히 패배했던 것입니다. 처음 두 번의 시험에서도 입술로는 사탄에게 승리했으나 사실은 세 친구를 포함해 욥도 사탄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농락당한 것입니다. 

 

사탄은 모든 인간에게 계속 너는 똑똑하고 의로우니 너 혼자 얼마든지 세상사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으므로 네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유혹합니다. 네가 네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므로 그 주인 행세를 당당히 잘하라고 쉬지 않고 부추깁니다. 사실상 불신 세상은 이미 사탄에게 완전히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신자만 먹잇감으로 삼아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이기적 탐욕과 교만으로 찌들었던 악한 본성이 시들어 가고 있는데, 그 꺼져가려는 불씨를 자꾸 되살리려 드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동안 갈고 닦은 신앙 양심으로 버티지 못하게끔 도덕과 종교로 아주 의로운 색채를 덧칠합니다. 요컨대 신자마저 권선징악의 하나님에게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이미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있는 신자들에게 사탄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경고한 까닭입니다. 

 

성경에 욥기가 있음에 신자는 물론 모든 인간이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 십자가를 아는 신자라면 자신은 물론 주변에서 수시로 겪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절대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에 따른 것이 아님을 깨우쳐 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마지막 고백도 바로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과 인간을 계속해서 사탄의 권세 아래 두실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인생사의 고난은 물론 그 원인인 인간의 죄악과 사탄의 미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안에서 거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골고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역사상 최고로 억울한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가장 큰소리쳐야 할 사람은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었고 실제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나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엄청난 고난을 겪음으로써 사탄의 머리가 완전히 상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를 공의로 심판하는 일을 덮고도 남는, 아니 온 세상과 온 우주를 덮고도 남는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졌고 바로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였습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 권선징악만 실현하는 하나님이라고 인간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가장 큰 거짓임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지금도 일부 신자들이 조금만 큰 재앙이 일어나면 십자가 예수님의 완전한 승리는 잊어버립니다. 그런 비극이 인간의 죄악 때문이라는 진리도 외면하고 사탄이 일으킨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번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마지막 때의 아마겟돈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며 푸틴이 적그리스도라고 호들갑을 떨고 크게 두려워합니다. 왜 하나님은 어서 빨리 공의를 실현하지 않느냐고 의심하기 바쁩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악인을 죄지을 때마다 즉시 벌주신다면 그렇게 원망하는 신자 본인도 큰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욥이나 바울이 너무나 억울한 고난들을 겪었어도 스스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절감하고 오직 십자가만을 유일한 소망으로 붙들었다는 성경의 진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마음은 긍휼과 자비뿐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제자답게 살면 불신 세상으로부터 이런저런 핍박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은 모든 환난 가운데 모든 위로로 채워주십니다. 신자들이 먼저 고난을 더 심하게 겪게 되어도 오직 십자가 복음대로 살아서 세상 죄인들에 의해 굽어진 공의를 올바르게 세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신자가 받을 하늘의 최고가는 여덟 복중에서도 마지막 최고의 복으로 십자가 의로 인하여 세상으로부터 핍박받는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마5:10,11) 이것이 종교적 공치사나 의무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따르는 인생이 당연히 최고로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2/25/2024)


모루두개

2024.02.25 21:27:20
*.230.44.2

가장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아내에게 면박 당하고도 울지 않았던 욥이 친구들을 만난 후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은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하더라고요.

'사단에게 속은 건 친구들뿐만 아니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감히 알 수 없어야 한다' 욥기는 묵상할수록 오묘한 것 같습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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