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8:1-6) 성육신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행28:1-6)

 

미개한 원주민

 

삼차 선교 여행을 마친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를 수행하던 중 그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음해하며 고소했습니다. 로마 총독들이 유대인들 눈치를 보느라 재판을 계속 지연시켰고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로마 황제에게 직소했습니다. 로마로 가던 배가 폭풍우를 만나 파선했으나 그에게 주님이 계시해 준 대로 승객들은 한 명도 죽지 않고 멜리데라는 섬에 무사히 상륙했습니다. 비가 오고 기온이 낮아서 추위에 벌벌 떨었는데 원주민들이 모닥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주워서 불에 넣었는데 마침 그 나무에 붙어 있던 독사가 그를 물었습니다. 성경이 ‘물고 있다’ 또 ‘손에 매달려 있다’라고 표현했는데, 뱀이 놀라서 한 번만 문 것이 아니라 꽉 물고서 놓아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원주민으로선 그 뱀이 독사인 줄 잘 아니까 바울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 일이 없었던 양 독사를 불에 툴툴 털어버렸습니다. 바울이 죽기는커녕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멀쩡하니까 원주민들은 그를 신(神)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이 기사를 접하는 신자들은 인간을 신으로 숭배하려 했던 토착민들에 대해선 미개하다고 여기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보호해 주시는 은혜와 권능에만 주목하고 우리도 어떤 위험과 환난에서도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보호해 주시리라고만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아무리 믿음이 좋고 간절히 오랫동안 기도해도 고난에서 건져주시기는커녕 고난이 더 겹치는 경우마저 종종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이야말로 엄밀히 따져서 미개합니다.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맞으면 반드시 합당한 결과가 따른다면,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자동판매기 같은 기계적 범주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원주민들도 우리 생각만큼 미개하지는 않았습니다. 특정 지역에 서식하는 토착 동식물에 대해선 원주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상륙한 시간이 아침이었고(행27:39) 모닥불을 밝히고 있어서 뱀의 종류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그 뱀에게 물려 즉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으므로 원주민들은 바울을 인간이 아닌 신이라고 나름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분문 기록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단순히 바울이 죽지 않았다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도 아닙니다. 그들 생각에 미개했던 차원은 정작 따로 있는데 그들이 말한 내용을 앞뒤로 잘 살펴봐야 합니다. 

 

짐승과 다른 인간

 

뱀이 바울을 물자 먼저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4절)라고 말했습니다. 뱀이 바울을 물자 곧바로 살인 죄인이라고 단정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바울은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났고 또 독사에게 물렸기에 큰 고난이 두 번 겹쳤으며, 특별히 뱀을 신이 공의를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폭풍우를 만난 일부터 세상 공의를 주관하는 신의 벌이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바다에선 바울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신이 볼 때 도무지 살려두어서는 안 되는 살인자라서 다시 독사를 보내어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의 그런 사고의 흐름에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아주 단순하게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가지고 순간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전후 사정은 고려하지 않았고, 특별히 상대의 입장은 전혀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의 초라한 행색과 로마 군인들이 좌우에서 단단히 지키는 모습을 보고서 이미 죄수라고 짐작했던 터라 물어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섣부르게 바울을 신이라고 판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신이 신에게 독사를 보내어서 죽이려 시도했다는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 봉사와 벙어리가 된 자를 고쳐 주자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고쳤다고 비난했습니다. 주님은 귀신들끼리 스스로 분쟁하면 사탄의 나라가 망하므로 그것은 틀린 생각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마12:26) 원주민들도 자기들이 틀린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신이 신을 죽이려 든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이 먼저 폭풍으로 바울에게 벌을 주려 했다면 그 배에 함께 탄 선원과 승객 모두도 어쨌든 벌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아니면 바울 때문에 억울하게 함께 벌 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그 배에 탔던 사람이 276명이었는데(행27:37), 바울까지 포함해 한 사람도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아니하고 생존했습니다.

 

원주민들의 판단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승객들이 죄인이긴 해도 폭풍우로 며칠간 크게 시달린 것으로 벌을 다 받았으나, 바울만 반드시 죽음으로 심판받아야 할 유일한 살인자여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에게 재판받으러 가는 죄인이 바울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며, 그런 다른 죄인 중에 살인죄까지는 아니라도 폭행 강도 같은 흉악범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도 추가로 벌레에 쏘이거나 풍토병에 걸리는 벌을 주어야 공평해질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타당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한다는 것이나,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살인자는 자기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는 원리는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살펴보니까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순간적으로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판단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여러 모순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은 그들이 마냥 어리석게도 단순하게 판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순간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고 판단해도 반드시 자기만의 어떤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육으로 습득한 지식과 삶에서 체험한 지혜로 형성된 가치관에 따라서 분석 선택 판단 결정한 후에 말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는 뛰어난 두뇌를 주어서 그 과정이 ‘나노’(nano) 초(秒) 단위로 너무 빠르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행동한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일상적 생활 습관을 제외하고 사고 활동까지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고 제한하는 일관된 방향과 맥락이 사람마다 다 있습니다. 그것을 사상, 믿음, 종교,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어떻게 표현하던 자기 주관이 없는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한가지 목표에 묶여서 무조건 본능에만 따르는 동물과는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세계관이 문제다.

     

원주민들이 바울을 두고 살인자라고 했다가 금방 신이라고 바꿔서 말한 것도 자기들 나름의 가치관이 작용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절대자에게서 벌을 받고, 거꾸로 착한 일을 하면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 세계관입니다. 

 

그런 세계관이 형성된 데는 세상만사는 특정한 원인에 따라서 특정한 결과가 나타나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식으로 돌아간다고 오랜 시간 경험으로 체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행과 악행이라는 원인이 생기면 절대자의 보상과 형벌이라는 결과도 반드시 따른다고 믿는 것입니다.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어감상 미개하게 여겨지나 단순히 섬의 주민이라는 뜻이며 ‘표준새번역본’ 성경도 그래서 ‘섬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그것도 공의로운 신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신을 믿었든 간에 종교성이 풍부했기에 오늘날의 무신론자나 불신자와 달랐습니다. 요컨대 영적으로는 현대인들보다 더 똑똑했던 것입니다. 

 

현대의 불신자들은 세상은 물질이 전부이고 인간도 물질에 불과하므로 좋은 물질을 얼마나 많이 차지하느냐의 싸움이 모든 인간사를 주관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므로 살아 있는 동안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것만이 자기들 인생의 목표가 됩니다. 인간 사회 전체의 질서만 위중하게 무너뜨리지 않는 한에는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고 물질을 풍부하게 누리며 제 멋대로 살아가는 일이 최선의 도덕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종종 세상에 선과 악이 공의롭게 실현되어서 억울한 약자나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자가당착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우연히 물질에서 진화하여 물질로 마감하고 신이 없다고 믿는데 굳이 세상이 공의로울 필요가 어디에 있으며 또 그런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질끼리만 살아가는 영역에선 물질적 법칙이 최고이며 그 법칙을 깨트리는 일만 없으면 그만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 능력이 모자라거나 게으른 탓일 뿐입니다. 신이 없기에 절대적으로 온전한 공의는 따질 필요가 전혀 없으며 그 사회의 질서만 지키게 하는 법과 제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이 외에도 자기들이 믿는 무신론과 진화론에 모순되는 말과 행동을 많이 합니다. 자신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단적인 예로 본문처럼 살인을 저지른 흉악한 범죄자는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천벌(天罰)은, 인간 사회의 법률제도가 미처 벌하지 못했거나 부족하게 벌했어도, 절대자 신이 반드시 그에 합당한 형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 단어를 사용했다는 자체로 신이 있다고 이미 인정한 것입니다. 

 

또 아주 위급한 일이 생기면 하느님 도와달라고 기도하는데 세상만사를 주관하는 신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죽기 직전에는 한결같이 신에게 심판받지 않나 크게 두려워합니다. 인생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영계로 들어가게 되며 그곳은 영원한 구원과 심판이라는 두 차원으로 나뉜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평생토록 물질이 전부이고 물질을 주인으로 살아놓고서 죽기 직전에 후회해 봐야 지나간 버스 보고 손 흔드는 꼴밖에 안 됩니다. 한마디로 인간 중에 완전한 무신론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멜리데 섬 주민들은 선악을 주관하는 공의로운 신이 독사를 사용해 살인죄를 범한 바울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멀쩡하니까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고 그 판단을 곧바로 뒤집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이 아니고 분명히 인간이었기에 이 사건에 대해 권선징악적 세계관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공의로운 하나님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는 바울은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일차 전도 여행 중에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를 고쳐주자 사람들이 곧바로 신으로 숭배하려 했습니다.(행14:11-14) 지금도 독사에게 물렸으나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섬의 지도자 보블리오의 부친의 열병과 이질을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해주었습니다.그러자 섬의 병자들이 몰려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7-9절) 바울은 더 확실히 신적 존재가 되었을 텐데도 멜리데 사람이 그를 경배했다는 언급이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멜리데 원주민들이 루스드라 사람보다 이성적으로 더 깨인 탓은 아닙니다. 바다에 접해서 태풍을 자주 겪는 섬사람들이라 오히려 더 미신적일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권선징악적 유신론을 믿고 있었습니다. 멜리데 사람들도 처음에는 틀림없이 루스드라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나, 바울이 루스드라에서처럼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자”(행14:15a)이므로 제발 인간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미신적 행위는 절대 하지 말라고 적극 만류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이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으므로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석 달이나 머물렀으므로(28:11) 그동안 십자가 복음을 그 주민들에게 자세히 또 충분히 전했을 것입니다. 본문 기록을 역으로 추적해 보면 그는 우선 하나님이 세상에 공의를 세우신다는 그들의 생각이 옳다고 인정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절대로 죄를 지은 자를 벌하지 않거나 의로운 자를 상 주지 않는 분이 아니라고 전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의를 세우는 방식이 너희들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 생각대로 잘못을 범한 자마다, 범한 죄마다 일일이 제때제때 벌을 주면 채찍을 든 아주 두려운 하나님일 뿐입니다. 인간 사회 법정도 정상 참작을 해주고 초범일 때는 훈방도 합니다. 만약 매번 벌준다면 하나님은 인간 법관보다 못한 잔인한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선행할 때마다 상을 주는 하나님도 이상해집니다. 인간 부모도 자식의 이빨이 썩지 말라고 매번 사탕을 주지 않으며 때로 강하게 훈련하려고 고난에 버려둡니다. 

 

일일이 선행과 악행에 따라 상벌을 주면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기계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는 전혀 형성되지 않고 권선징악이라는 법칙이 하나님을 대체합니다. 인간은 단지 두려워서 악을 멀리하며 형식적으로 신을 믿는 척만 할 것이고, 또 신의 보상만 바라는 이기적 욕심으로 겉으로만 선을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자체에 이미 부정적이고 추악한 폐해와 부작용을 내포해 놓았습니다. 죄악의 열매가 의롭거나 즐거운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인간이 비록 원죄로 타락했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흔적이 남아 있기에 반드시 스스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고 큰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기 마련입니다. 간혹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 죄 자체를 즐기는 것 같은 천성적 악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행을 범할 때 순간적으로 짜릿해지는 쾌감에 불과하지, 나중에 혼자 있을 때는 소시오패스가 아니면 반드시 괴로워합니다. 그 죄에 동참했거나 영향을 받는 자들끼리의 다툼과 분쟁도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회 전체가 괴로움을 겪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일일이 죄인을 벌주지 않아도 이 땅에서부터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마련입니다. 죽을 때까지 현실적으로 형통해 보여도 겉모습일 뿐입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아무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없었다 쳐도 죽은 후에 처절하게 고통스러운 지옥 심판이 기다립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세상 악과 악인에 대해 공의를 굽게 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공의 실현이 더디게 보이는 경우는 많으나, 죄인 한 명이라도 더 회개하도록 기다려 주시려는 뜻입니다. 

 

바울의 전도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공의를 올바르게 가르친다고 해서 멜리데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권선징악에 대해 종합적으로 궁극적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니까 오히려 공의로운 하나님만 더 견고하게 붙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배를 침몰시켰으나 모든 승객을 안전하게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하고 바울에게 이런 사건을 일으킨 뜻이 그것으로 그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는 욥기에서 보듯이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상충하지는 않고 더 높은 차원으로 초월합니다. 그런 세계관에만 묶이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바울은 십자가 복음과 비교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권선징악은 자신이 평균 이상으로 선하다고 자부하는, 최소한 얼마든지 더 선해질 수 있기에 죽어서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이 가지는 세계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단지 공의를 더디게 실현할 뿐인데, 그것도 그런 자들을 회개시키려고 그러는 데도, 그들은 세상에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하나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죄를 지으면 최대한의 치성과 제물을 바치고 선행을 하면 사후에 신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권선징악적 세계관으로 따지면 바울만 한 의인이 없습니다. 율법으로 흠이 없으니까 그로선 그분의 상을 받을 일만 남았고, 실제로 유대 사회 최고 상류층의 지위와 특권을 누렸습니다. 나아가 권선징악적인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그와 반대되는 주장과 실천을 하는 것 같은 예수 믿는 자들을 심하게 핍박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을 대리하는 심판관 노릇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흘간 자기를 죽음과 방불하게 완전히 봉사로 만들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박해한 그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데도 다시 광명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단순히 바울이 그런 주님의 큰 능력에 저항 한번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바꿔 먹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는 유대 장로가 정한 규정대로 이방인들을 정죄하며 식사 교제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족 유대인이라도 율법을 어기고도 정결례를 행하지 않으면 죄인으로 취급해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이방인 죄인 창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했습니다. 바울이 판단하기로는 여호와의 공의를 무너뜨리고 유대 사회의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단 교주였기에 그 추종자들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음과 방불한 처절한 절망에서 예수님이 다시 건져주었기에. 그분은 당신이 생전에 선포한 대로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사람들을 차별한 것이 율법에는 없고 단순히 유대의 인간 지도자들이 만든 종교적 규례였기에 아무리 성실히 준행해도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한다고 여겼던 자신이야말로 그분을 거역하는 대적이었다고 절감하고서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이 절로 나온 것입니다. 

 

그동안 율법을, 즉 권선징악적인 세계관을 철저히 지키려 했으나 사실은 남들보다 자신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우월하다는 헛되고 사악한 교만이었다고 절감했습니다. 만약 정말로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을 일일이 벌을 준다면 자기부터 가장 먼저 죽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모든 죄인을 외모로 전혀 차별하지 않고 대하셨던 그 사랑의 모습은 물론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뜻에 비추면 어떤 사람도 감히 스스로 의롭다고 고개를 쳐들 수 없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천국 문 맨 앞에 서 있다고 자부했으나 사실은 지옥문 맨 앞에 서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그 다메섹 사건으로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그런 죄인 중의 괴수를 당신의 사도로 세워주었습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단순히 윤리적 선과 악으로 사람을 심판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현된 아무 조건이 없고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사랑을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라도 구원해 주신다는 진리를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권선징악적으로 절대자의 공의를 따지는 멜리데 섬 사람들에게도 자기를 신으로 숭배하려 했던 루스드라 사람에게 전했던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5)고 말입니다. 단순히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알면 그런 헛된 일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그 복음은 권선징악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자 사랑의 은혜이므로 너희들의 헛된 신을 버리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진심으로 간절히 호소했을 것입니다. 그 전에 구약성경을 펼쳐서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8)는 기적도 일어난다고 이미 예언해 놓았다고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의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쉽게 말하면 인간들은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 가야 한다는 생각을 절대 고쳐먹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온전히 실현됩니다. 문제는 모든 이가 자기는 천국 갈 자신이 있다고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교만이 아담을 타락으로 이끈 사탄의 거짓이었습니다. 자신이 의롭고 혹은 의롭게 행해서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자신이 사탄에 미혹되어서 하나님께 죽음의 벌을 받아야 할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는 생각은 평생토록 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세상 모든 사람에겐, 어떤 종교와 도덕과 사상과 가치관을 따르던, 여전히 권선징악이라는 한가지 가치관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가도 자기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이 멜리데와 루스드라 사람이 갖고 있는 가치관에서 한 걸음도 진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한결같이 이해하기는커녕 아예 엉터리 같은 이야기 하지도 말라고 반박하지 않습니까? 

 

지금 세상 밖 사람들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원죄로 타락해 사탄에 미혹된 본성은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십자가 복음에 귀를 엽니다. 문제는 여전히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세계관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와 있지 않거나, 은혜를 믿어도 실제 자신들의 삶에 구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기독교 특유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을 다메섹 이전의 바울처럼 마치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인 양 신자들에게 강요하고 조금이라도 어기면 판단 정죄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이 성가시게 굴면 사랑으로 타이르든지 자기들끼리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마련해주지 않고 큰소리로 야단부터 칩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들게끔 만들어서 커서 교회를 멀리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는 아주 큰 죄인 줄 모르고 자신은 하나님께 거꾸로 권선징악으로 충성한다고 믿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몰상식한 일들은 비교적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자가 암 같은 중병이 걸리거나 가정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여깁니다. 심지어 그동안 믿음이 부족해서 교회 충성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더니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투의 뒷담화까지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난이 생겨도 그런 비난을 받을까 봐 함부로 털어놓지도 못하는 분위기가 교회 안에 조성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교회는 어떤 고난도 서로 모여서 전심으로 기도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면서 함께 이겨내야 할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합니다. 거꾸로 자기 믿음을 종교적 도덕적으로 포장해서 자랑하는 경연장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순전한 신자들도 많지만, 막상 자기 문제에 대해선 솔직히 따지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다 죄를 지으면 벌 받지 않나 덜컥 겁부터 나고, 고난이 끊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주는가보다 의심부터 합니다. 욥의 세 친구와 똑같은 신앙입니다. 욥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고난을 받을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당당함을 갖고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부터 묻고 또 묻는 신자는 찾기 힘듭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만 구해야 합니다. 아니 여전히 수시로 죄에 넘어지기에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에 완전히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권선징악으로 세상사를 판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내가 이렇게 교회 봉사 많이 했고 이웃을 섬기며 전도했으므로 복을 더 많이 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요구하거나,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괜히 섭섭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을 권선징악으로 다루지 않고 십자가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는 자신의 신자 된 정체성을 놓치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놓치면 다시 이전의 죄로, 흉악한 범죄가 아니라 도덕과 종교로 자기를 치장 자랑하려는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또 그런 감사로만 끝내야 합니다. 

 

(7/1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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