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2:1-8) 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

기도시리즈 (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22:1-8)

 

혼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간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인생은 본문의 여호와께 이삭을 바치는 사건으로 거의 끝나게 됩니다. 아내 사라가 죽고 외아들 이삭을 장가보내는 두 사건이 더 있지만 그가 직접 당사자는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신앙 여정은 사실상 완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고 그가 기도했다는 언급은 없지만 기도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생각까지 통촉하시므로 마음속으로 당신의 긍휼을 소원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기도입니다. 심지어 그분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생각을 해도 기도입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다는 진리를 어쨌든 인정한다는 증거인데다 정말로 그분을 사랑해야만 정말로 그분을 미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관련된 어떤 이슈를 두고 하나님을 진지하게 묵상만 해도 신자의 모든 상황을 다 아시고 그 전에 그런 상황을 주관하셨으니까 당신의 거룩한 뜻대로 인도해주십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당신께 번제로 즉, 완전히 불로 태워서 바치라는 명령을 받자 다음날 일찍 군말 없이 순종했다고 말합니다.(3절) 마치 굳건한 믿음으로 아무 불평 주저 없이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것 같습니다. 그가 비록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어도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연약한 인간입니다. 세상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듣고 곧바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아브라함으로선 더더구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 의심과 원망을 품고서 크게 갈등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참으로 짓궂다 못해 너무 냉혹한 것 같습니다. 만약 충직한 종 엘리에셀이나 계집 종 하갈에서 낳은 이스마엘을, 심지어 아내 사라를 바치라고 했다면 갈등과 괴로움이 훨씬 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네 아들이고 네 사랑하는 아들이며 외아들”(2절)이라고 이삭이 그에게 주는 의미를 세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되며, 반드시 백세에 얻은 아들이자, 자기 생명과 바꿔도 절대 아깝지 않을 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거기다 굳이 사흘 길을 걸어가서 모리아 산에서 바치라고 했으니 그 며칠 간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우선 이삭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가려는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이 75세에 우르에서 하나님께 불려 나올 때에 후손을 창대케 해준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후 25년간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고 부부 둘 다 생리적으로 불임이었기에 초자연적 간섭을 통해 얻은 아들입니다. 그더러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면서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삭이 며칠간 도보여행을 한 후에 등산까지 하고 제물의 종류를 알 정도면 청소년기는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삭이 없어지면 이삭이 최하 열 살이라 해도 자기 인생에서 35년이 실종되고 그간의 연단과 시련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백 살도 훨씬 넘게 살은 자기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인생의 싹도 피어보지 못했는데 지금 꺾어버리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그럼 또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창성케 해주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실 것입니까 등의 질문이 꼬리를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또 하나님의 계시를 혼자만 받았기에 겉으로는 성경말씀대로 담대히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사라에게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이 세 번 강조했지만 사라에겐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귀한 아들입니다.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몸에서 낳았기에 모정이 부정보다 강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다 사라는 이삭을 자기 품에 안기까지 너무나 긴 인고의 세월을 거쳤습니다. 그것도 이방 왕들과 자기 하녀에게서 온갖 수모를 받아가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수치를 다 겪게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심술이 나서 다시 데려가려 하느냐고 당장 따지고 들 것입니다. 절대 그 명령에 따를 수 없다면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데려가려면 자기를 먼저 죽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버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성격이 온유한데다 두 번이나 사라에게 결정적 잘못을 범했기에 그런 저항을 결코 뿌리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사정을 털어놓고 의논할 수 없으므로 아브라함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날 밤도 혼자 속으로 온갖 고민과 갈등을 하며 뜬 눈으로 지샜을 것입니다. 날이 밝자마자 사라에게 단순히 이삭과 함께 여호와께 제사 드리고 오겠다는 식으로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고서 부랴부랴 떠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행하는 사환들은 물론 특별히 이삭이 이상한 낌새를 맡지 못하게 시종일관 평소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으로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믿음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선 안 됩니다.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자기가 6번이나 중보기도를 했어도 완전히 멸망당하는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직통계시로 구체적으로 지시한 명령을 어긴다면 어떤 결과가 될지 너무나 빤히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 자기를 위해서 중보 기도해줄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 모리아 산을 향한 그의 여정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질질 끌고 가는 형국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다섯 가지 반응

 

퀴블러 로스라는 미국 정신과 의사 겸 심리학자는 사람이 말기 암 같은 죽음을 선고 받으면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한두 단계가 생략되거나 순서가 뒤바뀔 수 있지만 대체로 일리 있는 이론입니다. 먼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죽음 자체를 부인하다가, 확정된 사실이므로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일어나야만 하는지 분노하고, 대체 방안이 없을지 추구하거나 시일을 최대한 늦춰보려 노력하다가,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음을 알고는 우울증에 빠지고, 결국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심정의 변화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이삭을 죽여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아브라함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이 멍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다가 너무나 분명한 음성이라 이럴 수는 없다고 부인하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로선 여러 번 잘못을 범했지만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께 충성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너무 하다 싶어서 분노의 감정도 치솟았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삭과 사라가 너무 불쌍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부인과 분노의 감정은 의지적으로 가라앉힌 후에 뭔가 해결책이 없을지 따져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두 가지 상호 모순되는 명제가 양립하고 있어서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믿음의 후손을 세울 것이라고 약속해놓고 지금은 그를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 둘은 절대로 동시에 실현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과제입니다.

 

그래서 틀림없이 하나님에게 이삭 대신에 차라리 늙은 내가 번제로 바쳐지면 안 될까요라고 계속 기도했을 텐데 퀴블러의 이론으로는 협상하는 것에 해당됩니다. 그 방안 말고는 하나님이 죽은 이삭을 다시 살려주시거나 사라와의 사이에 새 아들을 또 주셔야만 합니다. 그 자리에서 부활시키는 것은 제물로 바치게 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삭 대신 둘째 아들을 준다 해도 두 사람의 나이로 보아 너무 무리이고 두 번이나 바로와 아비멜렉에게서 사라의 정결을 지켜주신 의미 또한 전혀 없습니다.

 

모세와 바울이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들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했지만 불특정 다수의 구원과 자기 구원을 간접적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생명을 자기의 것과 직접 바꾸어 달라는 뜻이라 정말로 진지하고 애타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거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이삭을 기어이 데려가겠다면 번제로 바친 후에 자기도 죽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삭을 번제로 바친 후에 혼자 돌아가면 더 이상 사라와는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며 그 사실을 알게 될 아내가 너무 불쌍하니 제발 이 명령을 거두어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속으로 그런 기도를 아무리 간절히 해도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직통으로 구체적으로 주신 명령을 다시 번복 취소할 리는 없습니다. 아무리 해결책이 안 서도 퀴블러의 넷째 단계인 우울증에 빠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대신 거두어가 달라는 기도를 하는 동시에 너무나도 무리한 지시를 내리신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계속해서 따지고 물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선 하나님이 지난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역사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회상해서 그 뜻을 추정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은 매 사건마다 달라도 당신의 거룩한 목적이 이뤄지는 방향으로만 진행됩니다. 이미 받았던 은혜의 체험들을 비교해보면 그분이 사역하시는 공통되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퀴블러의 이론은 일반인이 대상입니다. 사망선고처럼 사방이 다 막혀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기도하고 순종함으로써 사태를 역전시키거나 그럴 수 있다는 소망을 키워가는 신자에겐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사흘간 무엇을 고민했는가?

 

아브라함은 사라를 통해 이삭을 얻게 된 경위부터 천천히 되돌아봤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적 생각으로 충실한 종으로 후사를 삼으려 했으나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여야 한다고 거절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고에 따라서 첩 하갈과 관계를 맺고서 자기 몸에서 이스마엘을 얻었지만 가정의 분란만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본처 사라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야 온전히 그의 몸에선 난자로 약속의 후손이 된다고 다시 깨우쳐주었습니다. 자신의 두 번의 큰 실수에도 끝까지 사라에게 이방 왕들의 씨가 섞이는 것을 당신께서 혼자서 다 막아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도합 네 번이나 간섭하여서 약속의 씨앗이 반드시 사라에게서 나도록 주관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얻은 이삭이라면 반드시 그를 통해 후손을 이어가겠다는 약속도 그 구체적인 방식은 몰라도 절대 어길 리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을 것입니다.

 

우르에서 갈 바 모른 채 불려 나온 이후의 자기 인생도 곰곰이 따져보니까 큰 실패, 기근, 전쟁 등 여러 시련을 거쳤으나 그분의 거룩한 뜻은 반드시 이뤄졌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을 당신께선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본문은 “그 일 후에”라고 시작하는데 그 일은 당연히 바로 앞의 사건(창21:22-34)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우물을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은 일로 인하여 두 사람이 오랜만에 다시 만나서 서로의 오해를 풀고 이전에 맺었던 동맹관계를 재확인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회상은 아비멜렉과의 첫 만남까지 이어져 그 사건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했는지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럼 “아내 사래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가 닫혔으나 자신이 기도하여 치유되어 후손을 얻게 된” 일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아비멜렉 집안의 태가 열린 다음에 성경이 어떻게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창21:1-2)라고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뤘다”는 것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려는 약속대로 어김없이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사흘간의 영적씨름 끝에 당신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하나님 역사의 일관된 원리를 깨달은 내용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만 주목하다보니 그로 인해 생긴 자신의 감정에 묶여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어렵게 주신 외아들을 왜 빼앗으려는 지에 초점이 모이고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만만 생겼습니다. 그런데 지난 일들을 곰곰이 따져보니까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그와 정반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사라를 지켜주실 것 같고 어쨌든 합력하여 선하게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소돔을 위해 기도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간절함으로 사흘 내내 자기를 이삭 대신에 제물로 받아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삭과 단 둘이 산에 올라갔을 때 자기를 제물로 드려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하나님이 제물을 따로 준비 해놓은 것은 아닐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을 것입니다. 그럼 상호 충돌되는 두 명제가 동시에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삭에게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리라”(8절)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제물이 없지 않느냐고 물은 것에 대한 답변이긴 하지만 그를 안심시키려고 둘러댄 거짓말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아들과 둘이 함께 산에 오르며 종들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4절) 이삭이 번제로 바칠 제물에 대해서 묻기(7절) 전이었는데도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복수로 즉, 이삭과 함께 온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게 된 아브라함

 

그로선 약 이천 년 후에 지금 오르고 있는 모리아 산이 나중에 골고다 언덕이 되고 그 곳에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할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바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이삭이 죽을 판입니다. 사방이 다 막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로선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하나님만의 긍휼만 전적으로 즉, 십자가에 실현된 하나님의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그분의 긍휼을 바랄 자격이 안 되어도 결코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니 그럴수록 더더욱 바랄 것은 하나님의 긍휼뿐입니다.

 

결국 사흘간의 심히 괴로웠던 갈등 끝에 하나님이 따로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최소한 소망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의 모든 생각을 통촉하시는 성령님이 그의 생각의 흐름까지 다 주관하시면서 당신께서 심어주신 생각입니다. 아브라함의 혼란스러워 캄캄했던 심령에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비춰진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아브라함의 믿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전되었는지는 어느 누구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배경을 살피면 그가 확실하게 깨달은 사항은 분명히 하나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한데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당신의 뜻대로 세상 어떤 존재에게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실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이고 영원불변의 진리 외에는 자기로선 감히 그분을 이렇다 저렇다 알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자기와 이삭을 죽이시든 살리시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자기 전부를 그분께 던진 것입니다. 이제 이 문제는 내 손에서 완전히 떠났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를 마쳤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삭은 물론 자기 생명까지 완전히 주님께 내어드린 것입니다. 그는 모든 외부의 현실적 상황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들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과만 일대일로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마주서게 된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그러자 의심과 불평에서 비로소 해방되었고 대신에 소망과 믿음이 조금씩 자기 속에 역사하기 시작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의심 불만 원망을 이길만한 성령님이 주시는 평강이 그의 심령에 채워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따져보자면 상당한 모험이자 큰 위험부담이 걸린 일종의 도박이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순종하지 않고 이삭을 살리려고 요나처럼 도망갔더라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는 계획은 물론 그 유다지파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구속마저 무산 될 판입니다. 요나처럼 붙들어와 다시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진 그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집니다. 후손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본받아야 할 믿음도 어차피 하나님이 다시 끌고 올 것이니까 도망가도 된다는 식이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사건은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을 맞바꾸는 엄청난 시험이었습니다.

 

그 중요한 시험의 목적은 크게 둘입니다. 우선 그가 떠나온 우르의 이름이 ‘불’(fire)이듯이 사람을 번제로 태워서 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유명했고 아브라함은 75년 간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혹시라도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인신 제물로 신을 섬기는 관습과 사고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라 절대로 인간 제물을 받지 않는다는 진리를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인간이 아무리 지극한 치성을 바쳐도 그것에 비례해서 복을 주어서 현실 삶만 풍요케만 해주는 분이 아니라는 진리를 정확히 드러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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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당시 세상 최고의 의인이었던 아브라함의 두 번의 실수에서 생생히 증명되듯이 인간의 선행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합격점수에 들지 못하니까 그 죄로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과 원수가 된 죄까지도 당신만의 긍휼로 용서해주시되 그 죄 값은 너무나 크기에 당신의 독생자를 대신 제물로 받으시고 그 은혜를 겸손히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자더러 당신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면서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비추면 아브라함처럼 그가 밟는 모든 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과 십자가라는 구체적 사실까지는 몰라도 이 사건으로 복음의 원리는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자격이 없는 것을 넘어서 벌을 받아 마땅한 자기에게 조건 없는 긍휼을 베풀어 용서해주시고 더 선하게 이끄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자신은 물론 자기 후손들의 인생도 오직 그런 긍휼의 복음으로만 이끌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 믿음마저도 사실은 하나님이 형성시켜준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믿음과 기도의 완성

 

아브라함이 이런 고백을 하기 까지는 그도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사흘간의 여정이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았을 것이며, 영적으로는 주님이 사흘간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상황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의 모든 생각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 십자가 복음을 계시해주면서 굳건한 믿음에 세우게 하려는 하나님만의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완성시키고 또 그래서 기도도 완성시키려고 이런 시험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가 이 엄청난 시험을 통과한 근거는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매우 단순하며 원색적이고 순전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세상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당신 혼자만으로 만족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 뜻대로 하시고 죽으라고 하면 죽을 테니까 앞으로 이 종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거룩한 뜻대로만 인도해달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완전히 내려놓습니다라는 기도를 합니다. 병원에서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렸을 때, 사업이 부도가 나서 끼니마저 걱정해야 할 때, 자기 소원과 계획을 이루려 아무리 노력해도 오히려 고난만 덮칠 때 등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알아서 하시라고 두 손 두 발 다 들면 비로소 기도가 조금씩 응답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실은 아브라함처럼 완전히 내려놓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목할 사항은 아브라함에게 이 사건 전후에 현실상황이 바뀐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죽지 않은 것이 큰 은혜이긴 해도 원래 살아있던 그대로이고 오로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보려 한 것입니다. 단지 그의 믿음과 기도의 내용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믿음의 변화는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하다는 확신이 생겼고, 기도의 변화는 자기 요구는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 마음대로 자신의 전부를 들어 사용해달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기적적 방식으로 말기 암이 나아야 하고 사업이 다시 회복되어야 하고 내 계획이 풍성히 이뤄지기만 바랍니다. 그것은 정말로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뜻과 계획을 잠시만 유보할 테니까 여전히 자기의 것을 하나님이 더 좋고 풍성하게 바꿔달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는 기도를 당연히 해야 하지만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완성부터 되어야, 최소한 그런 목표는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진 모든 것은 물론 그 자신마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다 돌려드린다고 해야 지금 아브라함이 내려놓은 모습과 같아집니다. 이 사건 뒤에 사라가 죽는 기사가 따라 나옵니다. 물론 수명이 다 되어서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이 온전한 믿음의 조상으로 섰고 이삭 또한 아브라함을 잇는 둘째 조상으로 든든히 설 것이니까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에서 사라의 역할은 끝난 것입니다.

 

섣불리 이삭을 바친 믿음을 본받아 실천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뱁새가 황새 따르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고백을 인생 말년에서야 겨우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가나안 전쟁의 승리 말고는 사실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전쟁조차 진짜로 생사가 오가니까 가장 큰 걱정과 고통을 동반합니다. 요컨대 그는 평생토록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중에는 자기 혼자 살려고 두 번이나 마누라를 파는 역사상 가장 치사하고 비겁한 남편의 불명예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나흘 정도 죽었다 살아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가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백십 여년이 걸렸습니다. 모든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사악한 세상 앞에 드러내어야 할 신자는 아브라함과 유사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고 반드시 그와 같은 영적씨름을 겪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명령은 아무리 우리 마음에 들지 않고 너무 힘들어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소용없고 결국은 당신께서 하신 말씀대로 되고야맙니다. 그럼 처음부터 그분께 전부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완성은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것 모두가 없어지더라도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거나 삶의 목적이거나 심지어 염려꺼리가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자기 안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만 죽으라고 희생하고 손해 보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지금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이삭을 대신할 제물을 미리 준비해 놓았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인생 모두 당신의 영광스런 일에 동참시켰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당장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처해 있어도 우리의 하나님은 당신만의 선한 것을 미리 준비하셔서 앞서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그런 믿음 최소한 그런 소망을 놓지 말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그분을 따라가십시오. 그럼 우리의 믿음과 기도를 그분께서 십자가 복음 안에서 완성시켜주실 것입니다.

 

(2/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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