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키울 수 있는 확실한 비결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시77:7-11)
미국에 이민 와서 노년이 되도록 고생을 많이 한 혼자 사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갈수록 건강이 쇠약해가지만 은퇴 연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속 힘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에 일을 하려면 건강이 따라가 주지 않아 너무 힘드시지 않느냐?”라고 물어봤습니다.
되돌아오는 대답이 “몸이 고달픈 것은 견딜 만한데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일을 마치고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텅 빈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문을 열기가 마치 지옥문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였습니다. 종일 힘들었으니까 샤워하고 쉴 것을 생각하며 기쁘게 집에 들어갈 것 같지만 그 정반대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신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의 타격이 더 커다는 증거입니다. 본능에 따라 생존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살게 되어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남들과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참 의미와 행복을 느끼게끔 창조되어졌기에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 결핍되면 그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비록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하는 경우가 생겨도 하나님이 함께 하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로와 사랑은 오직 그분께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면 그 때야말로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 가운데 헤매게 됩니다. 최근 기독교 신자인 여자 연예인들이 우울증이 도져서 연달아 자살을 한 것이 예사로 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 시편의 기자는 바로 그런 상황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나아질 조짐은 아예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 갑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라고 토로했습니다. 인생사란 희비가 교차하게 마련이고 비록 환난 중에라도 다른 좋은 일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의심하고 불만을 가질 리는 없습니다. 좋은 일은 전혀 생기지 않고 환난만 겹쳐진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기자의 심경에 극적인 변환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환난이 끝나고 상황이 아주 호전된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혹시 그동안 비관적, 부정적이었던 자기 생각을 낙관적, 긍정적으로 의도적으로 바꾸었습니까? 아니면 아예 모든 것을 자포자기해버렸습니까? 그래서 자족하여 마음이라도 편하게 된 것입니까? 그도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럼 신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습니까? 우리의 흔한 생각과는 다릅니다. 즉 그 연약함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해 인간이 불완전하고 무능하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구원을 애절하게 기도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 자기를 잊어버린 것 같이 여겨진 바로 그 생각이 연약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라고 한 것이 실제로는 의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따져보았더니 주께서 그럴 리는 결코 없다는 부정의 뜻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내가 옛날 곧 ‘이전 해(old days, years)’를 생각하였아오며”(5절)라고 했듯이 그분께 받았던 은혜를 회상해 보았더니 잘못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버리신 것은 아닐까?”라고 하면 의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는 일시적은 몰라도 영원히 버리실 리 없다는 생각이 내포된 것입니다. 아무리 그분을 묵상해보아도,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겠는가? 인자하심이 길이 다할 수 있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을 잊을 리 있겠는가? 노하심이 긍휼을 막을 정도로 그 긍휼에 한도가 있을 리 있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는 결론밖에 내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자를 향한 은혜가 ‘영원히’ 끊어진다는 것, ‘다시는’ 베풀지 않는다는 것, 인자가 ‘길이 다한다는’ 것, 은혜 베푸심을 ‘잊는다는’ 것, 긍휼이 ‘막힌다는’ 것 등은 하나님에게 전혀 해당 사항이 아닙니다. 비록 신자가 아무리 위급한 환난 중에 있어도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the years of the right hand of the most High)에서 체험했던 지난 일들을 기억해 내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정작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연약하다고 인정해야 할 부분은 능력의 측면이 아닙니다. 인간이 무능하고 불완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전혀 흉이 되지 않는 사실이자 하나님도 잘 아십니다. “저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다 해 주시옵소서!”가 믿음의 출발이자 기도의 본질인 것만은 분명하며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나 기도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자녀가 매번 “아빠! 내가 힘이 없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 나는 너무 연약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라고 아빠에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너무나 웃기는 일 아닙니까? 아기는 단순히 아빠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구만 하면 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대신에 아이는 “아빠가 왜 빨리 한 해주지?”라는 불평과 의심은 끊임없이 합니다.
말하자면 아기는 능력이 부족해 아빠에게 의존하는 측면에선 전혀 연약하지 않고 너무나 잘합니다. 반면에 아빠의 진정성과 성의에 대해선 자주 의심합니다. 대부분의 신자의 믿음도 이와 똑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자 또한 정작 연약하다고 고백할 부분도 하나님의 긍휼을 의심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를 잊지 않으십니다. 자식은 부모를 떠날 수 있어도 부모는 절대 자식을 포기하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잊는 것조차 신자의 연약함이 아닙니다. 이 또한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아기가 약하고 무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듯이 신자가 하나님을 잊는 것은 거의 본성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자에게 정작 연약한 것은 “하나님이 신자를 잊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환난 중에 신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환난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이전에 자신의 이 연약함부터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긍휼을 그칠 리가 없다는 진리를 지난 세월의 은혜에 비춰서라도 확고하게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분의 나를 향한 긍휼은 그분의 나를 향한 분노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므로 그 긍휼을 막을 것은 이 세상에는 절대로 아무 것도 없다는 진리입니다.
연약함을 없애면 강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흔히들 믿음을 강하게 하려고 어떤 노력들을 합니까? 교회에서 하는 종교적 활동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신자들은 기도나 말씀에 약하면 믿음이 약하다고 믿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가 기도나 말씀에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믿음 자체가 약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 자체를 가장 약하게 만드는 연약한 부분을 개선시키면 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평이 생기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 약해짐은 그분의 긍휼에 제한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시작하지 기도나 말씀을 덜 보았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착각은 지금 닥친 환난에만 신경이 팔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때일수록 기도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묵상하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외면당하는 일이란, 특별히 신자에겐 너무나 비일비재하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의 긍휼은 절대로 다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신을 잊어버렸는지 의심이 들 때마저도 당신만 바라보라는 것 아닙니까?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환난은 잠시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뿐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6,17)
지금 혹시 환난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영원히 당신을 잊겠습니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겠습니까?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겠습니까?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겠습니까? 은혜 베푸심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 중에 하나라도 답이 ‘예스’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믿지 않아도 심지어 불평해도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잠잠히 주만 바라보십시오. 혹시라도 그렇게 하기 힘드시면 하나님과 교통했던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최소한도 예수님의 십자가라도 바라보십시오. 과연 신자를 향한 그분의 긍휼에 끝이 있겠는가를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2/12/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