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래로 찬양하고 있는가?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양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 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여호아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행하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찌어다.”(시98:1-4)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럼 새 노래란 최근에 유행하는 그것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찬양입니까? 그래서 예배 때마다 전통 찬송가보다 가스펠을 현대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일어서서 박수치며 신나게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아 감사해 부르는 찬양입니까?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거창하고 기이한 은혜를 받았기에 이전보다 다른 각오로 찬양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새 노래는 위의 두 가지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동일합니다. 그분의 인간을 향한 뜻과 계획은 영원토록 신실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죄에 빠져 있는 인간에 대해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그분의 뜻은 태초부터 영원토록 오직 하나로,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과 아름다운 교제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버지가 되며 인간은 그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렇다면 그분의 뜻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데 신자더러는 왜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구원을 인간으로 알게 하셨는데 열방의 목전에 그 의를 명백히 나타내었고 땅의 모든 끝이 그 구원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의는 어떤 것입니까? 우선 당신의 제사장 나라로 삼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세상의 어느 민족도 알지 못하는 은혜를 끼친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애굽에서 일어난 큰 기적을 보고 두려워 떨었듯이 열방들이 그 의를 다 보아 알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말합니다. 본 시편의 기자는 당연히 골고다 사건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영감에 힘입어 십자가를 예언하고 있는데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고 온 땅이 그분을 찬양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만의 구원이었다면 틀림없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민족들의 멸망도 수반되어야 할 텐데 그럼 온 땅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새 노래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과 후, 둘로 나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악에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였습니다. 십자가가 있기 전에는 온 인류에게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있음으로 인해 이제는 온 인류가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어졌습니다. 온 땅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의 대상은 영원토록 하나님이며 그분의 뜻은 항상 동일합니다. 그러나 찬양을 부르는 자는 반드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을 때에 천국에선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 때 천국에서 불리는 찬양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부르게 되는 찬양이 새 노래입니다. 그 반대로 이 땅에서 한 명의 탕자가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면 그 찬양이 천국보좌까지 상달되어 그곳에서도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찬양이 새 노래입니다. 사단의 왕국을 허무는 찬양입니다.
교회의 예배 때나, 신자들의 모임이나, 성도 개인의 기도 시간이나 항상 새 노래로 찬양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만을 찬송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가 회상되지 않는 찬양은 참 찬양이 아닙니다. 혹 옛 노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새 노래는 아닙니다.
그럼 새롭게 구원을 얻은 성도가 생기지 않으면 새 노래로 찬양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새롭게 의인이 생기면 그 만큼 기쁜 찬양이 없겠지만 이미 구원 얻은 신자도 찬양하기 전에 항상 죄 씻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품고, 사악한 마음에 사로잡혀서, 찬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는 항상 죄에 담겨 살고 있으며 찬양할 때도 사실은 죄 중에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찬양을 통해 예수님의 은혜가 임하고 죄가 다시 씻기는 역사는 일어나야 합니다. 비록 찬양 예배가 옛 노래로 시작이 될지라도 예배 중이나 최소한 마칠 때는 새 노래의 찬양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예배 때 실제로 불리는 찬양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이름은 가사 가운데 많이 등장할지 몰라도 과연 진정한 새 노래의 찬양이 얼마나 있을까요? 축복해 달라, 힘과 능력을 달라는 것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뒤틀린 감정을 조금 조절하는 정도로 그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십자가의 감격으로 인해 목이 잠기고 눈물이 절로 솟구치는 찬양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 않습니까?
신앙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도 당연히 그것이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끝입니다. 신자는 매 순간순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내 전부를 온전히 그 은혜와 권능에 의탁할 때에 내 영혼이 새롭게 되어 그분에 대해서, 나의 삶과 인생에 대해서 항상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새 노래입니다.
지금 신자가 신앙생활에서 지켜야 할 지침과 의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새 노래로 찬양하지 못하면 이미 어딘가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은 진정 매일 새 노래로 찬양하고 있습니까? 혹시 찬양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3/8/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