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50 삶이 찬양인가? 찬양이 삶인가?

조회 수 598 추천 수 32 2009.09.18 02:5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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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찬양인가? 찬양이 삶인가?M


할렐루야 그 성소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찌어다. 큰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찌어다. 호홉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시편150)


본시는 찬양을 주제로 하여 할렐루야로 시작해 할렐루야로 마치는(‘할렐시’) 일련의 시편(146-150)의 마지막이자 시편 전체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이 짧은 시 안에 찬양의 장소,  대상, 방법, 주체 등을 정확히 밝혀 놓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을 촉구하면서도 간결하게 조화된 내용이 뛰어납니다. 마치 찬양 자체를 찬양하고 있는 것 같아 시편의 결론으로 충분히 어울립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먼저 성소와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합니다. 예배처소로서의 성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다 성소입니다. 무소부재(omnipresent) 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기에 세상 모두가 성소입니다. 교회도 성소지만, 가정, 직장, 세속의 모든 장소 심지어 도덕적 종교적으로 깨끗하다고 볼 수 없는 곳도 성소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함께 함을 확신하며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기꺼이 받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성소입니다. 아니 통치가 임하기를 소원만 해도 그렇습니다. 신자에겐 이미 성령 하나님 내주하고 계시기에 신자가 종으로 횡으로 행하는 모든 곳이 성소입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그 땅을 신자에게 다 주시겠다고 믿음의 최초 조상 적부터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신자가 언제 어디서라도 찬양해야 함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기자는 나아가 권능의 궁창에서도 찬양하라고 합니다. 성소와 대비 되었기에 찬양할 장소에 하늘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이 그 일차적인 뜻입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서도 찬양해야, 아니 그곳에선 주로 하는 일이 찬양입니다. 구원이 완성되어 죄가 없고 눈물과 한숨이 사라진 곳에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 하는데 어찌 찬양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편 기자는 분명히 살아 있는 신자더러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천국을 향해 영생을 소망하여 찬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원 얻은 것에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천국의 사역을 두고 찬양해야 합니다. 지금도 하늘에서 한 시도 쉬지 않고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영적 전투를 신자 또한 한시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서 신자의 모든 기도를 듣고 중보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부터 사단이 세력이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그 역사가 땅으로 내려와 하늘의 뜻이 이곳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하늘의 궁창에서부터 신자가 있는 곳에까지 이어집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특별히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기도를 하면서 그 기도가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미리 기뻐하며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천국 열쇠를 사용해 흑암에 싸인 영혼들을 구해주고 죄에 넘어진 성도들을 용납하며 사랑해 줄 때에 바로 그곳이 성소이자 권능의 궁창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자는 이어서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과 지극히 광대하심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단순히 신자가 기도했더니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이 끝난 것만 찬양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도 응답해 주시는 일을 평가절하 하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능하시고 지극히 광대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으로선 너무나 기쁜 일이자 너무나 쉬운 일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하늘에서 영적인 전투를 엄청난 규모로 격렬하게 벌리고 있는 그 광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라도 되찾고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죄인이 빛의 자녀로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권능을 목도해야 합니다. 참으로 부족하고 연약하며 어리석고 무능한 우리가, 때로는 온갖 죄에 찌들려 있으면서도, 드리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기도를 통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하나님은 얼마나 능하고 강대하십니까?  

신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태에 있든지 오직 하나님의 광대하심만 바라보면 하나님도 그 능하신 손을 광대하시게 사용하십니다. 신자가 인정하는 광대하심의 크기에 따라 하나님의 광대하심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변할 리는 만무하지만, 그분의 광대하심이 이 땅의 현실에 나타나는 것은 오직 신자의 기도에 따라, 그것도 진정으로 그분을 찬양하며 드리는 기도에 따라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신에 관계되는 일을 광대하게 정해서 하나님을 광대하게 끌어넣으려 해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하건대 그분의 광대하심을 광대하게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이 땅에 광대하게 펼칠 때에 그분의 광대함도 같이 따라 옵니다. 그분의 뜻은 인간을 사나 죽으나 당신을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찬양하는 자로만 채우는 것입니다.

또 모든 악기를 다 동원해서 찬양하라고 합니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만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악기 종류는 불문(不問)하기에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춤을 추면서 찬양하라고도 했습니다. 악기는 단순히 악보 따라 연주하면 되지만 춤이란 저절로 신명이 나지 않고는 출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기꺼이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형식, 아부, 의무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고 체질이 진토 같습니다. 아직도 더러운 정욕의 찌끼가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가 되지 않고 항상 기쁠 수 없습니다. 눈물과 한숨과 짜증이 마를 새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춤을 추며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광대하심 때문입니다. 그분이 독생자를 우리 대신에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고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 스스로 실망하고 비탄에 빠져 그 사랑을 못 보거나 죄와 시험에 져서 외면하는 일 말고는 말입니다.

요컨대 그분이 한신 일을 찬양하려면 결코 언제 어디서나 찬양할 수 없고 춤추기는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라고 했다고 단순히 기도 응답해 준 일이라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그의 능하신 행동은 여전히 그분 자체를 말하지 그분이 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극히 광대하심’도 하나님 당신을 나타내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하나님이 남아 있다면 춤추며 찬양해야 합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을 잃고 다른 모든 것을 얻게 되면 찬양이 멈춰야 합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가장 큰 불행, 아니 죽음이 닥쳤다고 비탄에 빠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찬양을 하되 죽기 직전까지 찬양해야 합니다. 죽은 후는 당연히 찬양할 것이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졌기에 그것이 모든 인생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찬양을 의무로 부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또 그에 맞게 올바로 반응 하여 살기만 하면 호흡이 있는 동안에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분의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 그리고 호흡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언제 어디서나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다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고 우리를 구원해 참 찬양의 기쁨을 알게 해 주셨는데 신자라면 어찌 호흡이 있을 동안에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 가만히 상상해 보십시오. 이 땅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모든 악기를 동원해 춤을 추며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말입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광대하겠습니까? 아니 성도들이 모인 곳에서라도 항상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권능과 은혜가 넘치겠습니까? 아니 성도들의 가정에서만이라도, 아니 성도 개인이라도 그렇게 한다면 너무나 광대한 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신자라면 얼마나 이 땅이 그분의 광대하심을 제대로 못 받아들이고 있는지 정말로 안타깝게 여겨야 합니다. 광대한 영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이 땅이 대신 죄악으로 관영해 있는 것을 보고 침상을 눈물로 적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 같은 자의 찬양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토를 단 한 치라도 더 넓히겠다는 소원과 열정을 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즉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의 광대함을 전해야 할 신자가 오히려 그 광대함을 깎고 있지는 않는지요? 기껏 자기 삶만 광대하게 만들려고 안달복달 하면서 말입니다. 지금 호흡하고 있습니까? 그럼 찬양이 함께 나오고 있습니까? 삶이 찬양인지 찬양이 삶인지 구분이  되는지 안 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4/1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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