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어떤 자세로 봉사해야 하나요?

조회 수 430 추천 수 2 2022.09.16 11:00:22

신자는 어떤 자세로 봉사해야 하나요?

 

[질문]

 

성경에서 말하는 남을 사랑하는 방법이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둘째는 남을 돌보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신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봉사해야 하는가요? 선뜻 내키지 않거나 그리 즐겁지 않은데도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간혹 봉사에 등한한 교회가 있는데 규모가 작아서 여유가 없기 때문인지 봉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서일까요?

 

[답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님이 한 율법사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지 묻자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둘째 이웃 사랑을 첫째 하나님 사랑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도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중의 율법인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가르친 말씀입니다. 전반의 네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고, 후반의 여섯 계명은 이웃 사랑에 속하는데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는 이웃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으면서 서로 돕는 배필이 되라고 했습니다. 삼위 하나님끼리 온전한 사랑을 하시기에 인간도 그렇게 서로 온전한 사랑을 하며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아담이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높이려 들면서 거역하는 죄로 타락하자 부부 사이도 이전과 달리 서로 부끄러워지고 자기 잘못을 상대에게 전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의 온전한 사랑이 파괴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기 전 죄에 찌들어 있을 때에는 절대로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나가면서 온전한 사랑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서 신자의 이웃에 대한 봉사는 단순히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해드리고 좋은 것을 베풀며 섬기는 모습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힘든 이웃을 돕는 일은 불신자도 매우 잘합니다. 신자의 봉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전해지는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바탕에서 이웃을 바라보고 섬겨야 합니다. 신자니까 불신자보다 단순히 질과 양에서 더 뛰어나야 하거나, 성경이 또는 하나님이 시키니까 의무감으로 봉사해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중심을 보시며 (의무적인) 제사보다 (자발적인) 순종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신자도 연약한 인간인데다 자기를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때로는 섬기기 싫은 사람도 있고 또 힘들고 귀찮아서 억지로 섬기는 것 같은 기분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연약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육신적 반응이므로 정죄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근본적인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8,9) 

 

바울은 신자더러 선을 행하다가 낙심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신자도 죄의 본성과 연약한 육신을 갖고 있지만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그런 것을 극복하고 영적인 회복을 시켜주고 새 힘을 심어주셔서 반드시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낙심될 때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여서 그분과 영적인 교제가 다시 충만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적 생각에 치우쳐서 마지못해 의무감에 따라 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근본 마음이 있고 그 섬김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면 성령이 역사해준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거둔다고 했으므로 섬김을 받는 자도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베풀어졌다고 깨닫게 해주는 모습으로 결실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신자더러 어떻게 살라고 가르쳤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가장 먼저 주목할 사항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소금과 빛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자가 도덕적으로 아주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서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은 소원이 있고 또 그렇게 노력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의 열매가 금지하는 법이 없이 반드시 신자의 삶을 통해 열린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세상이 부패하지 않게 하고 빛은 세상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스스로 부패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도 그가 소금인 줄 알고 또 그 빛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죄악에 빠지는 것을 막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리를 보여주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사람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신자가 소금과 빛이 된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청소년에 대한 공립학교에서의 무상 평등 교육은 교회가 시발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 때까지만 해도 공교육은 왕족 귀족 부호들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평민 자녀들은 공장에서 종일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의무 교육 제도는 없었고 세속 정부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교회가 그런 불쌍한 자녀들에게도 필수적인 기본지식을 가르치고 나아가 예수님의 복음도 소개하기 위해서 주일에 학교를 개설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Sunday School이었고 인권과 자유가 점점 신장됨으로써 공교육이 제도화된 것입니다. 아프리카 같은 미개국에도 병원, 농사기술과 도구, 주거시설 등을 먼저 제공했기에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자들은 역시 다르다는 칭찬과 함께 복음도 활발히 전파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재정적 도움부터 주어야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자기 능력 밖의 것을 손해 보며 빚을 져서라도 도와주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의 봉사는 자원 재물 등으로 현실적으로 도와주는 차원과는 달라야, 최소한 그런 정도로 그치지는 말아야 합니다. 현실적 도움에 집중 내지 우선하면 단순히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으로 그칩니다.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주 드는 비유이지만 재벌회사 회장님을 그 회사 수위가 도울 수 있어야 신자의 봉사라는 뜻입니다. 수위가 회장에게 현실적인 도움은 전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신자 회장은 회사 일은 물론 재산 다툼을 하는 자식들 탓에 너무 골치가 아프고 때로 불안 염려에 빠집니다. 그런데 신자 수위는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친절히 대하는 데다 가족 간에 화목하여 즐겁게 살며 자식이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효자라는 소식까지 들립니다. 그래서 회장이 따로 수위를 비밀리에 불러서 수입도 쥐꼬리만큼 적은데 그렇게 즐겁게 사는 비결이 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때 수위는 회장에게 진심으로 기도해주면서 예수님을 진솔하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회장은 성령이 역사하면 예수를 영접하거나 수위의 기도를 받을 때 최소한 처음으로 온전한 심령의 평강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더러 그렇게 예수를 드러내라고 성령이 내주해주실 뿐만 아니라 각 사람에게 합당한 성령의 은사까지 나눠 주십니다. (고전 12장, 롬12장 참조) 하나님께 이미 받은 재능도 있습니다. 신자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사용하여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도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고 권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봉사를 먼저 교회 안의 성도를 위해서 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고 했습니다. 또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는 목적이 여러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를 사랑으로 돌아보아서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고전12-14장) 

 

그렇다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으로 하나님이 신자만 사랑하기에 신자들끼리만 사랑하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많지만 어쨌든 구원에 가장 가까운 자들입니다. 그들부터 섬겨서 온전한 믿음 위에 세우면 그들더러도 기존의 성도와 힘을 합쳐서 새로 출석하는 연약한 신자는 물론 교회 밖의 사람들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 때부터 영원토록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는 신령한 공동체를(조직체 교회만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성도들의 모임) 확장시켜 나가는 것 하나입니다. 

 

작은 교회가 봉사에 등한히 하는 이유도 우선 교회 안의 그런 섬김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행할 첫째 임무가 복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여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장래의 봉사자가 될 사람, 먼저 세우고 양육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병을 고치러 아침부터 찾아온 자를 멀리하고 다른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떠났습니다.(막1:35-39) 주님은 병을 고치거나 현실적 풍요를 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씀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였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이 복음 전파에 집중해야 하고 굳이 봉사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적 이유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러모로 열악했던 옛날에는 국가나 지방 정부가 구제를 충분히 행하지 못했습니다. 교통과 통신도 미개해서 작은 촌락에 교회가 그런 일을 책임지지 않으면 마땅히 구제나 봉사할 자원이 없었습니다. 사실상 교회가 지역사회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요즘은 국가가 복지에 힘을 많이 쏟고 비영리 구호 봉사 기관들도 많아졌습니다. 교회가 봉사에 나설 필요성이 이전보다 많이 줄었고 성경대로 영혼 구원에 집중하면 됩니다. 

 

물론 교회는 교인들더러 삶에서 참된 이웃 사랑을 하라고 가르치고 실현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주일 하루는 세상에서의 엿새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예수님 말씀대로 신자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더 옳은 방안입니다. 말로 기독교 교리를 전하는 것보다는 신자의 변화된 거룩한 삶과 이웃을 차별 없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더욱 복음에 가까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한마디로 신자의 삶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예수님의 성육신 정신과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분의 고귀한 이름이 어떤 방식으로든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부터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중생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나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고 믿은 후에도 여전히 그분의 긍휼 없이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는 볼쌍한 존재라고 철두철미 자각해야 합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관점도 똑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그도 너무 불쌍하고 나도 너무 불쌍하기에 우리를 바로 세워줄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자연히 성육신 정신과 방식을 따르는 진정한 크리스천 봉사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9/16/2022)


master

2022.09.16 14:31:35
*.115.238.222

성경에충실한삶님 개인적으로도 질문과 상담이 밀려서 답변이 조금 늦었습니다. ㅠㅠ

성경에충실한삶

2022.09.19 07:54:55
*.178.167.13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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