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관상을 봐도 되는지요?

조회 수 6471 추천 수 86 2004.07.23 18:52:43
신자가 관상을 봐도 되는지요?

[질문]

관상이라던가 손금, 또는 팔자 타령 같은 것이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친구가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답변]

특이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부분에 아직 미련을 가지거나 심지어 믿는 분이 있고 신문과 잡지를 펼치면 가장 먼저 오늘의 운세부터 보는 사람이 이외로 많습니다. 신자라면 한 번쯤은 분명히 따져 보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제기된 문제가 ‘믿는 자가 관상을 보면 안 되는가?’ 이므로 가장 먼저 믿는다는 것의 올바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성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절대적 주권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천하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도 그 피조물들을 그 분만의 권세와 은총으로 영원히 섭리, 운행, 간섭, 통치하고 계십니다. 신자란 그 분의 의롭고 선한 통치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 그 분과 교제, 동행하여 그 뜻에 순종, 헌신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세밀한 부분에서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해 드리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야만 참된 믿음입니다.  

믿는다는 의미가 머리로 인정하고 수긍하여 자기의 정보 창고에 넣어 두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행기 여행이 모든 탈 것 중에 사고 날 확률이 가장 낮고 제일 안전하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믿는 자가 실제로는 겁을 내어 한 번도 타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반드시 믿는 상대에 대한 올바른 반응과 인격적 관계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장이 자기 회사의 경리 책임자가 자기가 없어도 절대 금고에 손을 대지 않을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급한 일이 있을 때 금고를 관리하라고 열쇠를 맡겨야 참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을 때는 그 분이 내 인생의 완전한 주인이며 지금도 범사에 모든 세밀한 부분까지 주관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만 그쳐선 안 됩니다. 그 주관 하심에 대해 진정한 신뢰와 사랑의 인격적 관계로 반응하셔야 합니다. 그 분만이 내 삶에 대한  최종 결재자이시며 끝까지 완전하게 책임질 분이기에 내 인생과 존재와 삶의 모든 부분을 그 분께만 전적으로 내어 맡기고 살아야 믿음입니다. 그 분의 계획하심이 없이는 내게 어떤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믿기에 그 믿은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에게는 우연(偶然)히 일어나는 일이 단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안에서 일어나는 필연(必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상, 사주, 팔자 같은 것을 믿고 의지하면 어떤 뜻이 됩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내 운명을 미리 결정해 놓았으며 지금도 그것이 내 삶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 그런 것들이 미신인가, 믿을 가치가 있는가,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가 아닌가, 그래도 경고적인 의미로써 참고만 하면 되지 않는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신자의 삶의 주인이자 주관하는 힘이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것에도 있을 수 있는가를 인정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것들을 의지하거나 참조한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하나님답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는 예언의 뜻은?  

그럼에도 그런 것들을 크게 개의치 않는 자들을 보면 그분들 나름대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도 예언을 하며 초월적 능력을 나타내는 선지자가 나오니까 하나님도 신자가 그런 사람을 찾아가 미래를 물어 대비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결과적 현상만 비슷한 것이지 그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마치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며 현실의 어려움을 기도로 이겨내는 모습이 같으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부인하고 모든 종교는 같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선지자라고 번역된 말이 한자로 따지면 미리 안다는 뜻(先知者)이라 그렇게 오해 될 소지는 있습니다. 선지자(prophet)로 번역된 원어 ‘nabi’는 ‘말하도록 부름 받은 자(one who is called to speak)’란 뜻입니다. 또 그들이 전해야 할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갖고 있는 뜻이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의 모든 메시지의 주제는 “죄에서 돌이키라.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간혹 장래 일을 예언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죄에서 돌이키지 않아 징계를 받을 모습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풀어 설명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장래 일을 가장 구체적으로 예언한 것의 대표적 예는 에레미야 선지자가 유다(남왕국)더러 임박한 바벨론의 침공에 대비해 애굽으로 가서 도움을 청하지 말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한 것일 것입니다.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르리라.”(렘37:7)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 같이 살리라.”(렘38:2)

언뜻 보면 장래에 일어날 불행에 대해 대비하라고 하나님이 미리 가르쳐 준 듯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가 취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렘38:3)고 했습니다.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유다를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들 앞에는 여전히 크나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악 중에 있는 이스라엘조차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조용히 항복하는 것보다 그들의 경쟁국인 애굽의 도움을 청하면 더 큰 불행을 겪을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에서 돌이키라는 간절한 호소를 한번 더 한 것이었지 장래 일을 미리 가르쳐주고자 한 것이 이 예언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살도록 깨우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뜻과 상관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안위와 형통만을 고집할 때는 항상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메시지였습니다.  

두 종류의 점쟁이  

소위 점쟁이들 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관상, 사주, 손금 같이 동양철학을 전공하여 그 이론대로 풀어나가는 점쟁이가 한 부류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박수 무당 같이 악령의 신내림을 받아 지나간 일을 알아 맞추거나 장래 일에 대해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동양철학을 하는 점쟁이

손금이나 관상은 그 형성된 바탕이 일종의 통계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장의사가 죽은 시체를 염을 하다 손을 보니 장수한 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생명선이 길어 보이고, 또 감옥에 갇힌 자들의 얼굴 골격 구조가 대체적으로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째졌다든지 하는 것들을 오랜 세월 동안 수집해서 하나의 데이터로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구학적 통계(demography)를 확률로 환산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 경계의 목적으로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신자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 통계를 확률로 환산 함에 있어 이론적 배경으로 동원 된 것은 음양 오행 사상입니다. 우주를 지배하고 이끌고 있는 힘은 음기와 양기인데 세상 만사가 이 두 기(氣)의 상호 교차, 충돌, 융합, 조정의 단계를 거쳐 이뤄진다는 이원론(二元論)입니다. 또 모든 세상의 운행이 불(火), 물(水), 나무(木), 금속(金), 흙(土)의 상호 작용으로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한 분만이 전 우주를 섭리한다는 성경 원리에 완전히 배치됩니다. 나아가 합리적인 원칙이 결여되고 우연히 발생하는 비인격적 현상이 우주를 다스리고 있으며 심지어 피조물 중에 가장 고급한 인간이 자신의 일을 저급한 물질이 좌우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따른다는 말이 됩니다.  

이 일은 그 사상이 미숙하다는 것으로만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모든 사상(事象 –일과 현상)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대적 사단의 흉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 항상 문 밖에 대기 하고 있습니다. 사단에게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면 그 악한 마수에 인간이 무기력하게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살전 5:22)

통계에 불과하니까 단순히 경계 목적으로 참조만 하겠다고 해도 이미 그 통계의 가치와 의미를 어느 정도 인정한 것입니다. 사단에게 자기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 준 셈입니다. 악은 악이지 악 중에 선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악을 조금 줄이면 선이 될 수도 있다는 법은 없습니다. 악이 없어져야 선이 되며 선이 없는 것이 악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이 둘을 절대 조화시킬 수 없으며 중간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통계학이란 항상 오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간을 단순한 수치로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통계로 구분 짓는 것은 사람을 물건이나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도매금 취급을 당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천하에 자기와 같은 품성, 인격, 자질, 은사를 가진 자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걸작품(masterpiece)이며 절대로 상품(merchandise) 취급을 당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인간을 짐짝 취급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사람마다 다른 특성들 그 모두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이루는데 가장 적합하도록 그 사람에게만 심어 주신 독특한(unique) 재능이자 은사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날 때부터 상대적인 장점과 단점을 갖고 나오며 그것들이 세상에서의 성공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심각한 단점을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오히려 그 약한 자를 들어 쓰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 약점을 고쳐 주시기도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경우는 그대로 두신 채 그 약점을 이용해 더 큰 일을 이루십니다. 믿음의 용사 기드온은 사실은 굉장히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약점을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은 미디안의 대적을 물리치게 합니다. 모세도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받고서도 입이 마르고 둔한 자기 약점 때문에 계속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 아론을 부쳐 주고 바로에게 전할 말을 입에 심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실제 그렇게 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26-31)

- 귀신이 들린 점쟁이

두 번째 부류의 점쟁이는 정말 악한 영이 들어가 자신의 의도와 생각과는 상관 없이 그 영이 시키는 대로 점을 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정도 과거를 알아 맞히고 미래 일을 예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이들이 예수 믿는 자를 보면 점괘가 나오지 않고 심한 경우 그 자리에서 헛소리를 하고  넘어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하나님의 아들임을 귀신 들린 자가 제일 먼저 알아 봤습니다.(막1:23-24) 가다라 지방의 군대 귀신들린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여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8)라고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사단과 그 졸개들을 완전히 멸망 시키실 분이라는 것을 악한 영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 때가 안 되었으므로 완전히 없애지는 말고 대신에 돼지 떼에게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사정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담을 죄로 빠트린 사단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광야의 유혹에서 사단을 이기셨고 공생애 기간 내내 귀신들린 자를 구해 주시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사단의 흉계를 완전히 깨부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본질적으로 사단의 멍에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비록 재림의 때까지 사단이 이 땅에 남아 설치기는 하지만 예수 믿는 자 앞에선 절대 힘을 발휘 하지 못합니다. 때때로 사단이 세상 사람을 자기 수하에 죄의 종으로 묶기 위해 무당을 통해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사단에게 완전히 승리한 예수의 영이 함께 하는 신자에게는 꼼짝 못합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이들의 말을 믿거나 인정하거나 참조한다면 하나님의 원수 앞에 가서 경배하는 꼴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들이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18:9-11)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신18: 13,14) 하나님이 신자더러 도덕적으로 거룩해서 완전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악령의 세력과 경쟁함에 힘에 부쳐서 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므로 오직 그 분만의 말씀만 들어라는 것입니다.

악령도 이적과 기사를 보이는데 그 근본적 목적이 사실은 사람으로 미신을 믿고 우상에게 경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능력에 신비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해 하나님 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주관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면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운세, 사주, 팔자, 점괘에 의존하면 하나님의 대적의 손을 들어 주고 스스로 사단의 종이 되겠다고 자초하는 셈이 됩니다. 성경은 그들을 쫓지 말라고 단순히 경고하지 않고 아예 돌로 쳐 죽이라고 엄숙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형통하려면 첩을 얻어라.

간혹 나쁜 일에 대해 미리 대비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합니다만 그런 생각의 깊은 내면에는 불신앙의 큰 죄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위험을 대비한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많은 쪽을 선택하겠다는 뜻입니다. 일신상의 안위와 세상에서 형통과 자신이 계획한 일의 성취에만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 위험을 대비한다면서 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분의 인도와 보호를 바라지 않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따라갑니까? 신문에 난 운세가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하심 보다 더 정확하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해 주신 까닭이 단순히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해 주셨고(엡1:4),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엡2:7)이었습니다. 성도가 인격과 품성과 영성에서 거룩해지고 주위에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 뜻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는 일에 참여 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해질까요, 또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룰 수 있을까요?”를 묻기 위해 오늘의 운세를 보거나 점쟁이를 찾아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손금, 사주, 관상의 점괘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일언반구라도 있습니까? 전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출세와 성공과 형통을 보장 받는 길을 찾고 혹시라도 그것을 방해 하는 액운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것뿐입니다. 사업 계획, 대학 입시 합격, 결혼, 출산 등 자신이 계획하고 마음 먹은 일을 잘 이루기 위한 방도를 찾고자 복채도 듬뿍 놓고 굿도 벌립니다.  

성경은 그들을 두고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엡2:2,3)고 합니다. 자기 일신 상의 안위를 자기 마음 먹은 대로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이 예수 믿기 전의 불신자의 모습이었는데 사단의 노예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3대 독자가 결혼한지 10년이 되어도 아직 아들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점쟁이에게 물으면 복채를 듬뿍 놓아라는 것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따로 첩을 얻으면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는 사업마다 실패하니 무슨 좋은 수가 없겠느냐고 무당에게 물으면 큰 굿을 하라는 것은 자연히 따라 나오는 처방이지만 지금 사는 마누라가 재수 없으니 이혼하라고도 합니다. 사단은 인간이 무슨 악한 짓을 하든 아무 상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한 짓을 하면 할수록 더 좋아 합니다. 악한 곳에는 하나님이 임재 하지 않음을 저들이 더 잘 아니까 그렇습니다. 사단은 거룩과 의와 영원한 생명에는 아무 흥미를 갖지 못하며 나아가 그런 선한 것과는 절대 공존조차 못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사단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잊게 만드는 방법은 현실에서 형통하여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출세와 성공을 통해 행복하게 살려는 것인데 반해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을 바라는 신자들은 신앙 생활에 화끈한(?) 만족을 하지 못합니다. 사단이 그 같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헛된 기대와 신앙상의 잘못을 파고 들어와 선수를 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점쟁이들은 과거사를 알아 맞추고 미래사도 작은 일에서부터 조금씩 이뤄지게 해 완전히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대신에 차츰 복채  액수가 커지고 굿 판을 벌리는 비용을 더 요구합니다. 또 사단을 찾는 자들에겐 갈수록 힘든 일이 더 생깁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자신들이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 속고 있는 줄을 모릅니다. 이전에 작은 일에 한두 번 맞아 떨어진 경험이 있었서 그것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도박장에서 한 두 번 터진 잭팟의 맛을 못 잊어 패가 망신하는 꼴과 같습니다. 도박이나 점술이나 그 뒤에 음흉한 사단의 미소가 번득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정과 하나님의 뜻

간혹 아무리 자기가 계획한 일을 하려 해도 잘 안되고 여러 번 실패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사주 팔자처럼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착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예정해 놓으신 것은 영원한 구원의 문제에 관한 것 뿐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거룩하게 변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예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관해선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임의로 선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흔히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에 자꾸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들 것인가만 따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거룩해지며 어떻게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느냐 뿐입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룩과 의와 생명력이 넘쳐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도록 하면 됩니다. 제대로 신자답게 서 있다면 자기가 하는 일의 종류를 인간 스스로 선택했더라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신자에게 필요한 것들은 다 아시고 더해 주신다고 했습니다.(마6:31-33)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오직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만 구한다고 합니다. 점이나 운수를 보는 이유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찾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마저 점쟁이들과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줄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들에게 그런 것을 묻지도 않는데 어찌 신자가 되려 그들을 의지하고 참조합니까? 불신자들이 그들을 찾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 말고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 끝에 결론으로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의 성공 가능성을 미리 염려하여 알아 맞추려는 점괘나 운수에 의지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기만 하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궁극적 승리는 언제나 보장되어 있습니다. 신자는 그 존재(Being)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는 일을 하고 세상의 일을 이루시는 것(Doing)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점과 운수는 오직 Doing이 형통 되는 데 관한 것이지 Being이 변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간혹 신자의 선택이 잘못되어 실패하고 심지어 그 일을 할 때에 시험과 죄악에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정말 주님의 뜻 안에서 살기를 원했다면 하나님은 잘못된 결과를 바로 잡아 주시고 엎질러진 물까지 새로 담아 주십니다. 여전히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므로 아무리 신자가 기도해도 하나님의 인도를 정확하게 받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아직은 죄의 본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에 제사가 아니라 순종하고 통회하는 우리의 심령 깊숙한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이 하나님께로 바로 서 있으면 내가 가진 은사와 재능을 제대로 발휘 못했고 설령 세상과 죄악의 방해로 완전히 넘어졌더라도 일을 선하게 마무리 짓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 땅에 실현 하심에 심지어 신자와 의논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여호와의 형상을 보여주며”(민12:8) 율법을 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 가면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르라함에게 숨기겠느냐”(18:16)고 하시며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의논하여 의인 50명에서부터 줄여 나가 의인 십 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자의 기도는 하늘 보좌마저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세상 사의 구체적인 문제는 신자의 온전한 믿음이 바탕이 된 순종 아래 완전히 맡기셨습니다. 주님의 거룩이 훼손되지 않는 한 신자의 기도를 통해 함께 의논하시며 현실의 구체적인 대소사를 수정, 보안, 변경, 취소 등 하실 수 있는 모든 선한 방법을 동원하셔서 오직 신자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누구랑 결혼해서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 없습니다.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 신자와 항상 함께 계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신자가 기도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운수를 보는 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진 운명만 따라 가든지 액땜을 조심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점술과 운명론은 사단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게 파 놓은 아주 교묘한 함정입니다.

성령의 예언의 은사

고린도전서 13장의 성령의 은사 가운데 예언의 은사도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는 은사이지 장래 일을 점치는 능력은 아닙니다. 물론 간혹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가운데 장래 일을 미리 말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에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행20:23)는 예언과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행21:11)는 구체적인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위험을 두려워 해 성령에게 장래 일을 물어 본 것이 아니라 성령이 먼저 바울에게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담대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습니다. 보통 점괘를 보는 사람은 자신의 필요와 욕심에 따라 본인이 먼저 찾아 가고 또 이런 식의 경고를 받으면 위험을 피할 길도 물어 방책을 세웁니다. 바울이 불신자였다면 당연히 예루살렘 여행 계획을 취소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대신 어떻게 말 했습니까?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먼저 하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수 만 명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복음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고(행21:20-26), 또 비록 사슬에 매인 몸이지만 당시 세계의 모든 부와 권력이 집중해 있는 로마-사단의 중심부에 가서 십자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0,31)

이처럼 성령의 예언의 은사는 오직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는 일을 위해 사용되어집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라는 것에 초점을 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또 성령의 은사는 성도가 온전한 믿음 위에서 주를 위해 헌신 할 때만 그 능력이 발휘 됩니다. 신자 개인의 욕심만 채우기 위해선 그 능력이 전혀 발휘되지도 않고 기도도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간혹 신자들 중에 성령의 예언 은사를 받았다는 능력자(?)에게 가서 장래 일을 의논하는 경우를 봅니다만 이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 같이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헌신도 없이 오직 현실의 일의 성공 가능성을 타진하고 위험을 미리 방지하자는 뜻으로는 하나님을 점쟁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짓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성도들에게 예언으로 경고를 주시는 뜻은 오직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가 무엇이겠습니까?  부정부패, 사기, 폭력, 도적, 간음, 동성애, 강도, 살인이겠습니까?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막4:28,29) 신자가 성령의 은사를 발휘하여 방언하고 신유의 이적을 베푸는데 방해 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단에 미혹된 영혼을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로 이끄는 일을 방해 하는 죄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사람을 사단의 하수인으로 이끄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찬양하도록 지으신 인간이 우상에게 절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 손상되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십게명의 첫 계명이 “너는 나 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하셨고 둘째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책임지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신자가 점이나 운수를 믿는 것이 깎아 만든 우상에 절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종교를 믿으려는 것도 아닌데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쉽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심에 사로 잡히게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을 외면하도록 만드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어떠한 것도 우상입니다. 출세만을 목표로 하나님을 외면하면 그 출세욕이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욕이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골3:5)

신자가 운세를 맞춰보고 점을 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아예 사단의 장난에 같이 장단을 맞춰 줄 뿐 아니라 일부러 찾아 가서 돈을 바쳐 가며 사단에게 고개 숙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룩하게 좌정하신 우리 영혼을 사단에게 팔아 바치는 행위 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더러  점쟁이와 무당을 반드시 돌로 쳐 죽이고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의 경내에는 발도 못 부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자기의 외아들을 주신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신자에게 넘치도록 주셔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에 대해 경고하지 않고 당장 눈 앞의 형통 만 보장해준다는 거짓 선지자들의 헛된 약속만 따르다 결국은 하나님의 불 같은 징계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어긴 것입니다.

이제 신약 시대에 하나님은 신자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서서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회복하라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신자는 새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또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셔서 모든 신자에게 내주하고 계십니다. 신자는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신자가 쉬지 말고 기도하면 구체적인 세상사의 진로까지도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지해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 즉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4:4,5) 신문을 펼쳐 들고 오늘의 운세부터 보는 것은 자기 삶의 목표와 우선적인 관심이 세상에서 일신 상의 형통에만 있다는 뜻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되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약에 와선 이 문제를 구약보다 더욱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점치는 것은 구약에서 그만큼 많이 가르치고 징계도 다 겪었으니까 아예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로 제쳐두고 그 보다 덜 심해 보이는 것마저 금하고 있습니다. “신화와 끝 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라”(딤전1:4)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방해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경륜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경계해 주셔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딤전1:5)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운수, 사주, 팔자에는 남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라는 것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원수 되는 세상에서 자기만의 안위가 있을 뿐입니다. 아무 문제 의식 없이 그것들을 참조하더라도 사단에게 자신의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주며 자신의 영혼만 파괴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죄악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 될 것이니라.”(신4:26)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신5:9)한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미신이냐 아니냐, 확률적으로 맞느냐 맞지 않느냐, 참조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경계의 목적이나 심심풀이의 차원에서 접근해선 안 됩니다. 신자의 영혼의 사활이 걸려 있으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느냐 방해 받느냐는 차원에서 보셔야 합니다.

신자는 “혈과 육에 관한 씨름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싸움”(엡6:12)에 매 순간 불림 받고 있음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사단의 가장 큰 흉계는 신자로 하여금 그런 싸움이 없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이런 하나님의 부름에 관한 확신이 없고 또 그런 싸움을 싸울 용의가 전혀 없다면 아무 생각 없이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부터 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자가 다른 어떤 죄를 저지르는 신자보다 이런 신자를 가장 안타깝게 여기고 심지어 강제로라도 되돌이키시려고 징계를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죄는 신자의 몸과 마음만 더럽힌 것이지만 점과 운수를 믿는 자는 영혼을 더럽혔을 뿐 아니라 서서히 성령의 좌소인 신자의 영을 사탄에게 내어 주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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