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를 받아야만 목사가 되는가?

조회 수 5785 추천 수 112 2006.04.27 05:18:50
[질문]

아래 글은 평신도들이 목사에 대해 세 가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정순태님의 두 번째 성찰로 “목사임직 안수에 관한 이해”가 원래 제목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목사가 되려면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단에서 반드시 안수를 받아야만 하는 현재의 관례는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수에 대한 용어의 뜻에서부터 시작하여 신구약 성경의 용례(用例)를 다 망라하여 아주 세밀하게 분석해 주셨습니다. 안수에 관한 한 편의 논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첫 번째 나누는 글과 마찬가지로 다들 함께 나누기를 원하며 운영자로선 어쩌면 사족 같은 의견을 말미에 부쳐 놓았습니다.  

[정순태님의 의견]

▣ 들어가기

  ◉ 오늘은 성도들이 그 의미를 오해함으로써 참 신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용어를 살펴보는 2번째 시간으로서 ‘안수’입니다. 이 용어 역시 오용으로 말미암아 우리 신앙이 당하고 있는 불이익은 엄청나다 할 것입니다.
  ◉ 안수라는 용어의 진정한 성경적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안수’ 용어의 문자적 의미

  ◉ 안수란 어루만질 안(按) 손 수(手)로 이루어진 말로써, 단순히 ‘손을 얹는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도 ‘laying on of hands’입니다. 한글이나 영어의 문자적 의미는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것’입니다.
  ◉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나, 전문 사전에 기술된 설명을 중심으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히브리어로는 ‘손/능력’을 의미하는 ‘야드’(yad)의 용례로서, ‘손 안에’는 책임/돌봄/지배 등을 포함하는 권위를 의미하기도 하며, 소유라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고 합니다. 한편 ‘…에게 손을 올려놓다’라는 표현은 ①살해, ②축복, ③특정 직분이나 임무 위임, ④대속(희생제물)의 4가지 기본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출처 : 구약원어신학사전 / 요단출판사 / 844항).
    ○ 헬라어로는 ‘티데미’(tithemi)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일반적 의미는 ‘두다/놓다/세우다/임명하다’의 뜻으로 사용되며, 막8:25에서는 ‘안수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출처 : 신약성서신학사전(리틀 킷텔) / 요단출판사 / 791항). 한편 다른 학자는 ‘안수하다’라는 뜻의 동사 (헬)카디스테미(kadistemi)가 ‘임명하다’(ordain) 또는 ‘세우다’(appoint)라는 뜻을 지닌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 이상과 같은 문자적 의미, 즉 히브리어의 ③번 용례와 헬라어의 ‘임명’ 의미를 고려한다면, ‘안수’라는 용어가 목사 직분의 임직과 제법 관련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문제는 히브리어 및 헬라어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할 때 발생된다 하겠습니다. ‘안수’에 관한 신학적 의미부여 작업시,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과 특별한 사명을 위해 구별하는 행위’ 또는 ‘어떤 직분에 임명하는 엄숙한 의식’이라는 의미를 포함시킵니다.  여기서 ‘사명의 위임’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때, 잘못하면 상당한 오해가 가미될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 살펴보겠지만,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며 서로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보수주의 목사/신학자들은 ‘사명의 위임’의 의미를 굉장히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며(이는 목사성직론의 근거로 보는 자세임), 일부 학자들은 ‘사명의 위임’ 의미를 가능한 한 최소화시키려 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이 용어를 심각하게 검� 鄂�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평신도들은 보수주의 목사들의 견해만이 성경적인 것으로 잘못 이해함으로써, 용어의 참 의미를 모른 체 신앙생활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는 잘못된 교육의 결과로서 목사에게 신적인(솔직히 표현하면 ‘무당의 권위와 비슷한) 권위가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 상당한 의견대립을 각오하지 않고는 다룰 수 없는 경계선상의 개념임을 인식하고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안수의 신학적 의미 고찰(사전 및 일부 학자들의 설명)

  ◉ 아가페 신학사전의 설명입니다.

    ○ 안수와 관련된 기본사상은 안수 주체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것과, 어떤 것(복, 능력, 권위 등)을 대상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 설명은 ‘동질화’ 및 ‘능력전이’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안수 의식의 주요 용도들과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 ①복을 기원하거나 선언함(창48:8-20; 마19:13-15), ②병든 자에게 병고침을 상징하거나 그 능력을 전달함(막5:23; 눅13:13), ③성령의 은사를 받게 함(반드시 그렇지는 않으나 주로 세례 때 시행됨)(신34:9; 행8:14-19; 딤후1:6), ④교회에서 특별한 사역이나 직무를 맡을 사람을 임하거나 구별함(민8:10=레위인들; 민27:18-23=여호수아; 행6:5-6=장로들과 선교사들).
    ○ 교회는 여러 세기 동안 안수를 이런 용도로 사용해 왔으며, 어떤 교회는 세례 때, 어떤 교회는 병자 성사 때, 어떤 교회는 견신례 때 사용했다.
    ○ 감독제(주교제)를 채택한 교회들은 성직 임명 때 안수기도를 시행했으며 사도들로부터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이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적 연속성 개념을 강화시켜 주는 점에 있어서는 가치가 있을 수 있으나, 안수기도가 참된 교회 체제에 필요하다는 확실한 역사적 증거도 없고 신약의 증거도 없다.

  ◉ 톰슨 주석 성경의 주제별 사전의 설명입니다(5012-안수).

    ○ 제물에 대한 안수(레1:4; 3:2; 4:14 등).
    ○ 축복을 위한 안수(창48:14; 마19:15; 막10:16).
    ○ 치유를 위한 안수(막6:5; 눅4:40; 행28:8 등).
    ○ 성직 위임자를 위한 안수(민8:10; 신34:9; 행6:6; 딤전4:14; 딤후1:6 등).    
    ※ 제물 안수는 ‘동질화’ 개념으로, 축복/치유/성직 안수는 ‘능력전이’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 중에서 성직 안수가 크게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 프랭크 바이올라 著 ‘교화가 없다’의 설명입니다.

    ○ 신약성경에서 3번 나오는 장로들 안수 관련 구절들에 나오는 ‘안수하다’라는 말은 「직책을 만들어 거기 앉히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지지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공중 앞에서 장로들이나 다른 사역자들을 인정할 때, 일반적으로 사도들이 손을 얹었다.」는 의미이다.
    ○ 1세기에 손을 얹는 것은 직책에 앉히거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역할을 인정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이었다.
    ○ 후회스럽게도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는 그 반대의 뜻이 받아들여졌다.
    ○ 3세기 때는 ‘안수’가 완전히 다른 뜻으로 변해 버렸다. 공식적인 크리스천 의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 4세기에는 안수식은 상징적인 복장과 엄숙한 의식으로 꾸며졌다. 안수는 만민제사장주의를 짓밟는 교회의 계급을 만들어 내었다.
    ○ 이러한 안수 방식은 로마의 행정관리들을 임명하는 관습에서 도입한 것이었다. 이는 구약의 제사장 제도방식이 그리스 계급제도와 합쳐진 것으로서, 어거스틴 및 그레고리와 크리소스톰 등의 지지를 받아 그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 4세기 때의 문서는 이렇게 말한다. “감독은 말씀의 사역자요, 지식의 보존자요, 신성한 예배의 여러 부분에 있어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통치자인 동시에 총독입니다...그는 여러분으로부터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할 하나님 다음의 존재이며, 땅에 있는 여러분의 신입니다.”
    ○ 안수는 사제를 완전히 구별되고 거룩한 특권층으로 만들었다.
    ○ 이런 사상은 비성경적이다 못해 아주 해로운 것이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설교하고 세례(침례)를 주거나 주의 만찬을 인도하는 것이 ‘안수받은 사람’에 국한된다는 말은 없다.
    * 이상은 p.155-159를 발췌하여 일부 표현을 보완 정리한 것으로서, 큰 의미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직접 원문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 폴 스티븐스 著 ‘21세기를 향한 평신도 신학’의 설명입니다.

    ○ 제2장의 각주 18)번 설명입니다. “안수를 힘이나 직책을 부여하는 의식 혹은 의례로 여기는 사상은 한마디로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M. Warkentin, Ordination : A Biblical, Historical View, p.172). 루터는 “이 성례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것은 교회(천주교를 의미함)와 교황이 창안한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 제6장의 ‘안수’ 부분의 주요 언급은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신약성경에서 일곱 집사를 안수한 것과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선교사로 파송하는 것 등의 예를 보면, 신약성경이 리더십의 카리스마를 교회에 주어진 은사로서 높이 받든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하지만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들로는 안수의 위계적인 양상, 평생 가는 안수, 안수를 은총이 수반되는 성례로 보는 입장, 안수는 안수받는 자에게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겨 놓는다는 견해, 안수는 사제에게 성찬식을 집전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 또한 개신교에서 행하는 유의 안수, 즉 특히 칼빈주의 전통에서 안수받은 자에게만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배타적으로 주는 것(기독교 강요 Ⅳ.3.8)도 찾아볼 수 없다.

  ◉ 지금까지 설명 드린 내용들을 근거로 한 제 개인적인 이해를 간단히 요약하겠습니다.

    ○ 먼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목사에게 주어지는 안수는 성경적 근거가 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안수’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이는 성경의 지지가 매우 취약한 천주교 신학의 작품일 뿐입니다.
    ○ 다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목사직분에 대한 ‘신학적 안수’의 의미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견해로 알려지고 있으나 오히려 이 견해가 보다 충실한 ‘성경적 안수’ 개념인 것입니다.
    ○ 사실상 목사 안수 개념은 성경에 입각한 참다운 기독교 신앙 정립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사항입니다. 잘 알아야 할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저는, 두 번째 견해를 적극 지지합니다. 왜 그런지 지금부터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안수의 사례 검토

  ◉ 먼저 구약 및 신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번의 안수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가페 신학사전과 톰슨주석 성경은 약간 상이한 4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심각한 차이가 아니므로, 톰슨주석 성경의 설명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 제물에 대한 안수는 기본적으로 제물인 짐승과 안수하는 인간이 동일하다는 개념을 전제한 행위입니다. 즉, 죄인인 인간이 안수함으로써 희생제물인 짐승에게 죄가 전가되고, 짐승의 희생이 곧 인간 자신의 속죄의 행위가 된다는 뜻입니다. 일단 안수가 ‘동질화’를 의미한다고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는 더 이상 존속되지 않으므로 ‘동질화’ 의미의 안수(죄의 전가) 개념이 지금은 폐지되었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 둘째, 축복을 위한 안수입니다.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한 것이나 예수님이 아이들을 축복한 것이나 동일한 개념입니다. 어른이 사랑의 마음으로 손아래 사람들을 축복하는 그냥 단순한 개념입니다. 오늘날 부모가 자식들에게 손을 얹고(안수) 축복 기도하는 것과 아주 동일한 의미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없습니다. 복의 계승개념입니다.
    ○ 셋째, 치유를 위한 안수입니다. 예수님께서 또는 바울이 안수하여 병을 낫게 하신 것은 긍휼의 심정으로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비록 구약에는 분명한 치유안수의 예가 찾아지지는 않으나, 제사장들이 환자들을 검진하는 것도 치유 안수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치유 안수는 오늘날에도 신유기도나 신유행위를 통해 이어지고 있는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치유의 전이개념입니다.
    ○ 이상 살펴본 3가지 안수 용례는, 폐지되었든 계속사용 중이든, 별다른 쟁점을 야기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신학적 의미를 정립해야 할 필요나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 편하게 수용하면 되는 것입니다(축복안수, 치유안수).
    ○ 문제는 네번째 ‘성직임직 안수’입니다. 안수를 통해 신적인 권위가 임한다는 개념인데, 이것이 보통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랭크 바이올라나 폴 스티븐스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고 1세기 이후에 그 의미가 괴상하게 왜곡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네 번째 개념은 철저한 천주교적 개념인 것입니다. 이 잘못된 개념을 개신교가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오늘날 이처럼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원인은 목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향유를 위해, 알면서도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를 팔아먹는 행위(배도)라는 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 따라서 신약성경을 근거로, 네 번째 ‘성직임직안수’ 개념의 비성경성을 해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성직임직 안수 개념의 비성경성.

  ◉ 성직임직 안수 개념은 ‘목사에게 주어지는 안수는 신적인 권위를 수반하는 엄숙한 행위’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앞에서 누차 설명드린 바와 같이 이러한 이해는 지극히 비성경적이며 단지 성경을 왜곡시킨 천주교의 설명일 뿐입니다. 개신교는 당연히 이 설명을 거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욕심에 발목 잡힌 일부 목사들(기득권자들)에 의해 오히려 확대 수용되는 불가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조명을 받아가며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먼저, 일곱 집사 안수 사례입니다(행6:1-6).

    ○ 6절을 보니 안수 집행자는 사도들입니다. 이 한 가지만 가지고 얘기한다면 안수는 높은 직분자가 낮은 직분자에게 행하는 하향식 행위인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 간의 지위의 높고 낮음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아무튼 먼저 성숙된 자가 나중 성숙된 자를 안수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수를 ‘상급 존재가 하급 존재에게 베푸는 시혜’로 오해하는 과오는 절대로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택된 일곱 분들의 자질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안수를 받기 이전에 이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안수로 인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이런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받고 있었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성도들이 결코 놓쳐서는 아니 되는 성경의 핵심 교훈 중의 하나입니다! 바로 이점이 앞에 인용한 몇몇 분들이 지적하시는 바, ‘안수는 이미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는 행위일 뿐이다’라는 설명의 진정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안수의 개념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안수로 인하여 특정한 자질이나 권위가 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 지엽적인 교훈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일곱 집사를 누가 뽑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하게 교회의 회중들이 독자적으로(사도들의 영향력 없이) 선발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 전체’가 행하는 일의 성경적 개념입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가 행하는 성경적 일(사역)의 본보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본받아야 합니다. 만약 사도들이 지명하여 집사로 세웠다면 이는 교회 전체의 사역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배제되고 순수하게 온 교회가 합심하여 세웠기에 ‘교회 전체’의 행위가 되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안수 행위는 실제적인 영향력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요식적/형식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즉, 안수는 후속 확인 차원에� �사용된 방법인 것입니다.

  ◉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우는 사례입니다(행13:1-3).

    ○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은 안디옥 교회는 당시 5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인도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오늘날의 담임목사 직무는 바나바가 수행하고 있었고, “선지자들과 교사들”로 지칭된 바울을 포함한 4명은 바나바를 돕는 위치였을 것입니다(이것을 오늘날 담임목사제도의 당위성을 보증하는 설명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이처럼 묘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초대교회는 현재와 같은 일인독재체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결코 일인독재체제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 문제도 다룰 것입니다).
    ○ 이들 중 담임목사격인 바나바와 부목사격인 바울이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떠나게 됩니다(3절). 누가 안수를 주는 주체인가요? 교회입니다. 본문에 명확히 기록된 것은 아니나, 온 교인 전부가 돌아가며 안수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머지 3명의 지도자들이 대표 안수를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복수 대명사인 They는 어느 경우든 사용 가능한 단어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바나바나 바울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높은(?) 자에게 안수하는 모양새가 됩니다. 앞에서 안수를 ‘상급 존재가 하급 존재에게 베푸는 시혜’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바로 그 이유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곳의 의미는 ‘평신도를 포함하는 교회 전체가 목회자인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를 했다.’는 것으로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 마찬가지입니다. 바나바와 바울도 안수를 받음으로써 선교사의 자격과 권위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안수 받기 전에 선교사다운 자질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령께서도 인정하고 계셨습니다(2절). 이미 보유한 그 자질을 근거로 안수함으로써 확인하고 확정했을 뿐입니다. 여기서도 안수가 후속 확인 차원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유명한 감독의 자질입니다(딤전3:1-7 및 딛1:7-9).

    ○ 오늘날 크게 오해받고 있는 구절 중의 한 곳입니다. 목사에게 가장 철저하게 적용해야 할 구절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적용치 않는 구절입니다. 기껏해야 가끔 아주 피상적인 설교에서 인용될 뿐인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 구절은 목사 안수의 절대 요건이 담긴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현대교회는 이 구절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 위의 두 구절에 나오는 감독의 자질은 몇 가지나 될까요? 어떤 학자는 20가지라고 하던데, 제가 영어 및 한글 성경을 가지고 검토해 보니 19가지입니다. 일단 저는 영어/한글 성경을 기준하여 19가지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 이미 다른 묵상에서 여러 번 다루어서 중복됩니다만, 이야기 전개를 위해 불가피하므로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현대 목사안수 제도의 맹점입니다.
     - 현대 목사안수(자격부여)의 요건은 무엇일까요? 유일한 조건은 ‘신학교 졸업장’입니다. 이것 하나면 만병통치요 해결 안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 일부 목사들이 기득권 보호를 위해 거품 물고 강변하는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소명)’도 졸업장 앞에서는 꼬리를 내립니다. 졸업장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 잘 이해가 안 되신다고요? 예를 들으시면 쉽게 이해됩니다. 저를 예로 들겠습니다.  제가 작심만 한다면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는 데는 전혀 제약이 없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2-3년 정도 공부하고 실습도 하고 목사고시에 합격만 하면??? 저도 목사 될 수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제가 목사 되는 것을 반대하실 수 있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대교회가 필요충분조건으로 정해놓은 ‘신학교 졸업장’을 취득했기 때문입니다(구약의 철저한 실패를 아무 생각 없이 답습하는 모습이지요. = 왕상12:25-33).
      - 왜 저는 지금 목사 노릇 못합니까? 지식이 부족해서요? 능력이 없어서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이유는 오직 신학교 졸업장 하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자질과 은사와 무관하게, 오직 신학교 졸업장(지적요건 충족) 하나만으로 결정해 버리는 현대 목사안수 제도는 지극히 비성경적인 무지일 뿐입니다.  
    ○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아무 생각없이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 속에 성경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목사님들이 오해하듯 무슨 목소리나 특정 구절을 통해 오지 않습니다. 그 부르심은 바로 위의 두 구절을 통해서만 옵니다!!! 뭡니까? 예, 바로 감독의 19가지 자질입니다. 이것들이 목사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골고루 주시는 은사입니다만, 특정한 성도들(목사가 될 성도들)에게는 더욱 풍성히 주시는 은사들입니다. 이 은사들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발견되는 것입니다. 찾아지는 것입니다. 아무튼 특정 성도에게서 이 은사들이 두드러지게 발견되면 바로 그 성도를 목사로 안수해야 하는 것입니다(19가지 모두 만점인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성도가 곧 목사로 부르심 받은 자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인 것입니다. 강권적 부르심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며 달리 말하면 은사론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개인적 확신(감동)이 있다 해도, 19가지 자질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검증은 필히 받아야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정 성도에게 주신 ‘목사의 은사’를 누가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까? 자기 스스로 발견한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교회가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놀라운 진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목사의 은사를 자기 자신이 발견하고 교단이 확인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속은 것입니다. 개인의 생각은 환상일 뿐이고(눈물 한번 흘리고 콧물 한번 닦고 나면 너도 나도 목사 하겠다고 설칩니다), 교단은 결코 개인의 목사 은사 소유 여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목사은사는 함께 부딪치며 교회생활하면서 저절로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이런 목사은사가 발견된 자를 감독으로 안수하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입니다.
    ○ 누가 안수합니까? 아무 권한도 없는 교단이 합니까? 누가 교단에 목사 안수권을 주었습니까? 성경입니까? 오직 교단 스스로가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교단법이 유일한 근거일 뿐입니다. 교단법에 의해서만 정당성을 입증 받을 수 있는 교단 안수권 주장은 완벽한 허위일 뿐입니다(이것마저 스스로 창안한 것도 아니고 천주교에서 빌어온 것입니다). 목사안수는 철저하게 지역교회 고유의 임무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어느 한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철저한 실패 가운데 하나일망정………
    ○ 왜 교단이 목사안수를 할 수 없습니까? 또 왜 해서는 안 됩니까? 이유는, 교단(또는 신학교)은 개인이 목사은사를 받았는지를 검증 내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은사는 함께 생활하면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그런 성격의 자질들입니다. 도덕적이고 품성적이고 영적인 자질들이 뒤섞여서 오랜 세월의 검증을 받아야 확인되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2-3년 교육기간 동안 책이나 보고 시험이나 치루는 방법으로는 결단코 판정해 낼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불을 보듯 뻔한 이치 아닙니까? 신학교도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히 이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탐심 때문입니다. 엄청난 수업료가 달아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런 손해를 감수하겠습니까?
    ○ 다른 묵상에서 다루었기에 자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만, 신학교는 현재의 운영형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돈 받고 신학교육 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건 하나님의 사역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학교육은 지역교회가 목사로 안수한 예비목사들을 무료로 보습교육 시키는 체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학법 반대에 목이나 매고 있는 분들에게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해 봤댔자 입만 아프겠지요???!!!

  ◉ 지금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성직임직 안수의 비성경성’입니다. 이 논의의 초점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수를 통해 신적 권위가 위임된다.’는 개념은 철저히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에는 매우 교묘한 노림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안수권을 강조함으로써 안수 받는 자의 허영심을 만족시킨다는 점입니다. ‘나에게 그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안수를 실시하는 자의 격을 한 단계 더 격상시킨다는 점입니다. 안수 받는 자도 거룩한데, 하물며 안수 행하는 자야 오즉 하겠느냐는 생각입니다(지금 교단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안수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입니다(성직자들의 권익에 부합되는 현상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성경과 맞� �않는 완전한 오해에 불과할 뿐입니다. 한 곳만 살펴보겠습니다.

    ○ 딤전4:14절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라고 하십니다.
    ○ 디모데가 바울의 영적인 자녀이며 동역자/후계자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디모데는 바울에게 안수 받지 않았습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받을 수 있는 교훈은 무척 많습니다만, 오늘 묵상과 연계되는 한 가지만 살피는 것으로 한정하겠습니다.
    ○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장로의 회’(the body of elders)란 ‘장로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느 조직의 장로들 모임일까요? 예루살렘 교회일까요? 안디옥 교회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에베소 교회에 소속된 장로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서가 아니라 에베소 교회 장로 모임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행한 주체가 누구냐고요? 당연히 에베소 교회 장로들입니다. 지금 바울의 서신이 적용되는 이 시점에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담임목사(대표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14절은 디모데가 안수 받던 과거를 회상한 말입니다. 결국 ‘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그 교회의 장로들의 모임에서 안수를 시행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울도 간섭하지 않았던 지역교회 고유의 임무(권한)가 바로 담임목사 안수권입니다(안수의 의미도 ‘신적 권능의 위임’이 아니라 ‘목사은사 소유에 대한 확인’ 개념입니다). 이걸 현대의 교단은 아무 근거 없이 가로챘습니다.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 이런 황당한 일이 왜 일어났을까요? 천주교의 욕심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임을 앞에서 알아보았습니다.
    ○ 바울이 디모데와(딤전3:1-7) 디도에게(딛1:7-9) 감독 세우는 기준을 가르칠 때도, 결코 예루살렘 교회나 다른 교회의 인준을 받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자기 교회(여기서는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 자체적으로 시행할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지역교회 목사 안수는 지역교회 고유의 권한입니다. 결단코 지역교회 외부의 어떤 단체가 영향력을 끼칠 사안이 아닙니다(현재 교단들은 지역교회의 고유 권한을 꿀꺽 삼켜놓고도 시침 뚝 따고 눈만 껌뻑 껌뻑하고 있습니다. 연상되는 게 있으시지요?).
    ○ 그냥 수긍하기 싫으니까, 파송의 경우를 들어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파송의 경우라 하더라도 성경적 근본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역교회의 목사은사 확인 및 안수 후 다른 지역으로 파송한다는 것 외에는 전혀 동일할 뿐입니다.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일인 것입니다.  

▣ 나가기

  ◉  성경 용어인 ‘안수’를 제물(현재는 폐지)/축복/치유 등에 적용하는 경우에는 특별히 주의해야 할 유의점이 없습니다. 마음 편히 이행하면 족할 것입니다.
  ◉ 그러나 ‘안수’ 용어가 ‘목사임직’에 적용될 때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이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그 의미가 너무 다릅니다. 우리는 안수를 ‘위로부터의 능력 부음과 인정’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가르침의 영향 때문입니다.
  ◉ 하지만 오늘 알아본 것처럼, 우리가 아는 ‘목사임직’ 관련 안수는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고 초대교회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잘못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 그렇습니다. 목사임직 안수 개념은 2세기 이후 생겨난 천주교적 사상일 뿐입니다. 이 사상은 성경을 바르게 적용하려는 데 있지 않고, 특권층인 성직자를 보호하기 위한 논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참 성도라면 마땅히 버려야 할 오류인 것입니다.
  ◉ ‘교단에서 안수 받은 목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신적 기원의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성경의 보증을 받지 못하기에 속임수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너무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허위에 속은 결과는 당연히 허위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한마디로 요약하겠습니다. 목사직임과 관련된 안수의 성경적 개념은,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목사은사들이 발견된 성도에게, 지역교회가 책임지고 검증 및 확인함으로써, 주어지는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부르심)의 증표”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에는 ‘교단의 안수를 통해 목사에게 신적인 능력과 권위가 위임된다.’고 하는 천주교의 속임수는 포함될 수 있는 여지가 조금도 없습니다!
  ◉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바른 길을 가야합니다. 현재와 같은 목사안수 제도를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성경적인 목사안수 제도를 하루빨리 정립해야 합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자정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 우리 교회는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서 바른 건축을 지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소위 지도자들이라 하시는 분들로부터 이러한 참 깨우침에 기꺼이 공감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모든 교회로 확산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

♱ 추가 묵상 : 이 묵상을 읽고, ‘그러면 무슨 재미로 목사할거냐?’는 푸념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가 뭐 흑싸리 쭉찌냐!’며 흥분될 수도 있겠지요(흑싸리 쭉찌는 고스톱 칠 때 가장 푸대접 받는 제일 가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가지셨다면, 기필코 흑싸리 쭉찌(껍질 또는 껍데기)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권, 성례권, 축도권, 치리권, 행정권, 재정권 등 모든 권한을 다 내려놓고, 성도 중의 가장 말째가 될 필요가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성경은 목사에게 ‘교회의 말째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 포기하면 교회가 무너질 것이라 염려하지 마십시오. 일단 포기하고 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시금 목사에게 참 사역의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원리에 따른 ‘앞선 자’ ‘위에 선 자’로서의 사명이 아닙니다. 언제나 ‘아래 선 자’, ! ‘따르는 자’로서의 일일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성직론에 발목 잡힐 바에는 차라리 목사직임을 하루빨리 사임하는 것이 낫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칭찬을 받으면 천국에서는 더 이상의 상급이 없다.”고 확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목사님, 목사님, 우리 목사님”이라 불리며 한껏 칭찬받는 목사님들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사실을 얼른 깨달으시기 권고 드립니다(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상입니다). 만약 하늘에서도 그런 목사님들에게 뭔가 보상을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그런 거룩한 욕심까지 모두 다 버려야 합니다. 목사는 그냥 묵묵히 주님 따라 걷는 자의 표본일 뿐입니다. 힘든 직분입니다. 고통스런 직분입니다. 이를 악물어야 할 경우가 많고 지쳐 못 하겠다고 하소연할 때가 더 많은 그런 직분입니다. 성도들에게 존경받으며 거들먹거릴 시간이 조금도 없는 직분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참으로 엄청난 직분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시고 힘주시지 않으시면 단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그런 직분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 목자상에 근접한 생각입니다. 이러한 성경 진리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나마 깨우쳤기에 위와 같은 엄청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자만이 참 성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으로 보건데,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닌 자는 결코 많지 않다는 사실이 마음을 착잡하게 만듭니다.

사실상, 저는 현대교회의 위기의 원인을 목사론에서 찾고 싶습니다. 이런 이유입니다. 사자가 이끄는 양 군대와 양이 이끄는 사자 군대가 싸우면 어느 편이 이길 것 같습니까? 최종 승리는 사자가 이끄는 양 군대에게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사자가 지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목사는 현대교회에 있어서 누가 뭐래도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하나입니다. 장로도 중요하고 안수집사도 중요합니다만 목사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목사는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위기는, 목사들이 바로 서지 못하고 오직 천주교의 사제론에 빌붙어 대접받고 존경받고 권력 누리는 것에 심취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귀결일 뿐입니다. 목사들의 잘못이 너무나도 큽니다. 따라서 목사들이 바로 � ��합니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 저는 나름대로 이 문제(목사의 본연의 위상 회복)에 관한 긴 묵상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현재는 개략적인 초안을 잡은 상태이며 수년 이상의 시간이 더 소요될 것입니다. 아무튼, 목사를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참 목사로 세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러한 아픈 지적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  



[운영자의 의견]

정순태님의 의견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을 것입니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안수 중에 전가(동질화), 치유, 축복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목사 임직에 관한 안수는 비성경적이다. 즉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교단에서 시행하는 목사임직 안수 예배를 받아야만 목사가 된다는 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그 이유는;

-목사의 자격은 신학교만 졸업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인정을 해주어야 한다.
-안수로 신적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는 행위일 뿐이다.
-초대 교회에선 교단이 안수한 것이 아니라 교회, 즉 회중이 안수를 하였다.

따라서 목사 직임과 관련된 안수의 성경적 개념은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목사 은사들이 발견된 성도에게, 지역교회가 책임지고 검증 및 확인함으로써, 주어지는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부르심)의 증표”이다.]

상기의 의견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 하나 틀림없으며 운영자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단지 현실적인 상황에서 몇 가지 고려할 바를 첨가했으면 합니다. 그중에는 정순태님이 이미 다 밝혀 놓은 것을 표현만 다르게 한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과 사도들의 경우

신앙생활의 구체적 적용과 행동에 관해 어떤 의문이 생기면 가장 먼저 예수님과 신약의 사도들의 예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임직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특정한 임무를 맡긴다는 뜻인데 신약 성경에서 특정인을 임직시킬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마10:1,5) 제자들에게 처음 전도와 치유 사역의 임무를 주고 파송하는 장면입니다. 일종의 임직식이었지만 안수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가르치시고, 할 일을 맡긴 후 권능을 주셨고 그 후에도 아주 구체적으로 그 일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현재로 치면 모두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럼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기에, 즉 목사가 될 자격이 안 되었기에 안수를 하지 않은 것일까요?

반면에 초대 교회에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길 때에는 안수를 했습니다. 일곱 집사를 세울 때(행6:6),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행13;3)가 그 예입니다. 그럼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목사로서 자격이 충분하기에 안수를 했을까요?      

이 두 경우에서 열두 제자나 일곱 집사와 바울과 바나바 모두 안수 전에 이미 소명을 받았고 그 임무를 맡을 자격과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안수를 해야 특별한 신적 권능이 수여되고 그 직임을 맡을 자격과 능력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의 경우는 초대 교회와는 크게 다른 차이가 둘 있었습니다. 우선 임무를 주시는 자가 예수님 즉 하나님 당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치유와 전도 사역을 하게 된 것은 앞으로 사역할 내용에 관해 구체적인 소명을 하나님께 받은 것에 해당됩니다. 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한 것은 신학교 다니면서 실습을 행한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경우는 실습이 아니라 정식 임직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할 때는 오직 그들뿐이었습니다. 교회라는 조직체가 형성되어 회중이 참관하고 있지 않았기에 구태여 임직 예배가 필요 없었다는 뜻입니다. 설령 그런 회중이 있었다 해도 또는 제자들과 예수님만의 공동체를 교회로 본다 하더라도 실습은 임직과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초대 교회에서 안수한 가장 근본적인 뜻은 회중들 앞에서 그들의 임직을 확인시키는 예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캘빈은 “설교자가 신자들의 보편적인 동의를 받을 수 있도록” 어떤 형태의 공식적인 인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또 루터는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이미 성직에 임명된 사제, 주교 또는 교황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어떤 특별한 사람이 임의적으로 그 직분을 행사하는 것이 적절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오직 공동체의 동의와 명령만이 어떤 개인에게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속한 직분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임직 예배에 안수한 것이 꼭 그렇게 해야만 직분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피안수자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하고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그 일을 맡긴 공동체(교회와 회중) 앞에서 서약하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안수를 주는 이는 당연히 그 공동체의 대표들이어야 합니다.

또 교회와 회중의 입장에선 안수는 그 고유의 의미인 전가와 축복의 뜻이 적용됩니다. 즉 직분을 맡은 자는 공동체를 대표해 직접 일선에서 뛸 자인 반면에 공동체의 회중은 그 일을 직간접으로 후원하는 자가 되겠다는 동질화(전가)의 의미가 안수에 담겨져 있습니다. 또 그 일을 수행함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안수자와 피안수자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축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오늘 날의 목사 임직 예배에서 안수하는 것도 그 안수로 인해 신적 권능(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영적은사나 권리를 따로 받는 것)과 목회적 특권(특별히 성찬 집례와 축도할 수 있는 권한)이 그날로 부여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안수를 받아야만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목사가 된 자에게 안수를 주는 것입니다. 목사 개인은 헌신과 충성을 서약하고 회중은 그것을 인정하고 축복하며 그 영적 지도에 따르겠다는 약속의 의식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는 장로, 안수 집사, 권사 등의 임직과 선교사 파송 예배 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2. 신학교 졸업과 목사 자격              

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에는 아주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날의 교회도 무조건 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대로만 해야 된다고 고집하면 현실적으로 자칫 무리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선 초대 교회는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전이거나 기록되어가는 와중에 형성된 교회입니다. 당시 예배를 비롯한 교회 사역의 모든 초점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기념하는 일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직접 제자, 그에 준한 사도, 최소한 그분의 사역을 목격한 자(eyewitness)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지도자들은 익히 보고 듣고 체험하여 알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만 하면 되었기에 특별한 성경 교육이 필요 없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 관해선 공부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구약을 암송할 정도로 전문가입니다. 그리고 구약과 예수님의 연결은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로 체계적인 교육이 없어도 가능했습니다. 또 당시는 오순절 이래 성령이 아주 강하고도 충만하게 역사하던 시기라 헌신된 지도자들이라면 모두가 성령의 계시대로 구약을 해석하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에 관해 직접 듣고 본 자들이 다 사라지고난 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신약 성경이 전부 기록되어 정경화의 과정을 거친 후로는 교회에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 중에 성경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이끌어 가야할 지도자의 자격 요건에 초대 교회와는 달리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것 이외에도 성경을 잘 해석하는 능력이 추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현대 교회의 목사는 성경 해석과 적용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체계적인 성경 교육이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권에 관한 글에서도 밝힌 바대로 개인적으로 공부하든, 교회 안에 구비된 성경 공부 코스를 마치든, 신학교 졸업장과 상관없이 교회의 회중들이 그 사람의 성경 지식에 대해 인정해 주면 됩니다. 실제로 현대에 들어와서도 챨스 스펄전, D. L. 무디, C. S. 루이스, A. W. 토져 같이 신학교를 졸업도 하지 않고도 목회와 신학에서 큰 족적을 남긴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학교를 졸업한 자만 안수를 주는 것은 잘못이며 목사로 헌신하겠다고 자기가 섬기는 교회와 회중 앞에서 서약을 하고 회중이 그 자격을 인정하면 그 사실을 공적으로 확인하며 축하하는 징표로 임직 예배에서 안수 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3. 교단만 목사를 세울 권리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교단과 교파에 관하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성경적으로는 개별 교회의 회중이 목사를 선임하고 안수를 주는 일차적이고도 최종적 주체입니다.

문제는 목사 후보자가 그런 자격을 갖추었는지 개별 교회 스스로 객관적인 점검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로 든 미국의 남침례교회(그것도 일정 규모 이상의 큰 교회)같이 교회 내에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하고 있고 또 평신도라도 오랜 기간 설교자로 세워 그 영적 지도력을 검증할 수 있다면 구태여 교단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실제로 이 교단에선 개별 교회가 선임한 목사 후보를 별다른 하자가 없으면 그대로 인정해줍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만한 조직과 체계를 갖춘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또 한 교회에서 어떤 특정인이 영적 지도력을 회중으로부터 인정받을 기회도 너무 적습니다. 설령 그런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목사가 맡아야 할 직무인 예배, 교육, 선교, 전도, 상담, 심방, 지역사회 사역 등 다방면에 걸친 훈련을 받기가 개별 교회 내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목사 선임 절차가 교회 내부에서만 이뤄질 때는 자칫 인간적 정실 관계가 개입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느 날 친구 사이로 있다가 영적 지도자로 모시려면 그 관계가 서먹해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인처럼 공사 관계가 불분명한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여러 현실적 제약 때문에 신학교에서 체계적으로 훈련 받은 사람이 영적 지도력을 일정 기간 동안 검증을 받은 후에 회중의 찬성과 추대로 목사로 선임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입니다. 또 선임 후에도 외부의 객관적이고도 전문적인 기관에 의뢰해 한 번 더 그 소명과 자질과 성경 지식과 가족을 포함한 인간관계 등에 관해 검증을 한 후에, 안수는 교회 안의 장로나 집사들이 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외부의 검증 기관으로는 목사 후보자가 졸업한 신학교가, 혹은 초교파 신학교를 졸업했다면 본인이 소속된 교단이면 절차상 서로 유익할 것입니다. 교단이 목사 선임이나 안수를 관리 감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목사로 선임하여 안수하고자 하는 절차를 당해 교회가 합법적 성경적으로 진행 하였는가 또 선임 된 자가 과연 제대로 자격을 갖춘 자인지 확인하는 절차만 담당하는 것입니다.    
  
교단만이 목사 안수를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적으로는 개별 교회가 가져야 하므로 교단에서 안수를 받지 않았다고 개별 교회가 합법적으로 선임한 자의 목사 자격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교단이 회중이 인정한 목사에 대한 검증 절차를 중립적 입장에서 대신해 주었다면 당연히 안수 예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해야만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지만 신학교를 졸업한 자가 목사가 되는 것이 유익합니다. 마찬가지로 교단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있는 것이 여러모로 단점보다 장점이 많습니다. 문제는 교단과 개별 교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개신교단 내에서도 거의 카토릭 수준의 중앙집권적 형태에서부터 개별 교회 중심의 회중교회 체제까지 심지어 완전한 초교파 개별 독립교회도 있습니다. 후자에 갈수록 교회 내에 자체적으로 규정해 놓은 목사 선임 절차를 따르고 교단의 간섭은 적게 받습니다.

말하자면 현재도 얼마든지 신약 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선례를 따라 목사를 선임 임직하는 교회와 교단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엄격한 자격 검증 절차와 고시를 거치게 하는 교단도 목사 안수는 소속 교회에서 이미 청빙을 받은 자의 임직을 확인하는 것이지 그 안수를 통해 목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정작 따져야 할 것은 안수 임직 예배라기보다는 목사 선임 규정입니다. 교단에서 목사가 되는 자격을 아주 까다롭게 정하는 것은 개별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를 검증하고 선임하는 성경적 목사 임직 제도와 거리가 먼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런 까다로운 절차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여 그 교단에 소속된 교회로선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을 것입니다. 가장 큰 유익은 아무래도 목사의 자질이 높아질 확률이 많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개별 교회로선 교단 파송 목사라도 자체적으로 검증하여 거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보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교단과 교회에서 목사 청빙은 회중의 찬성을 가장 큰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개별 교회가 목사를 선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최종 관건은 청빙 시에 얼마나 철저하게 목사 후보의 소명, 비전, 헌신도, 자질, 인격, 성경적 지식, 영성, 가족과 인간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가로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민27:15-20)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이미 성령에 감동되었고 오랜 기간 모세의 부관으로서 지도자의 자격 수업을 받았으며 그 모든 사실을 회중들이 알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제 모세가 늙어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대신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지도자가 절실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여호수아를 세우고 임직 예배 때에 안수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직접 성령을 통해 교회의 모든 일을 처리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사가 겸비하게 낮아지는 길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목사의 자질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회중의 인정뿐입니다.

정순태님의 의견은 맞고 또 맞습니다. 개별 교회의 전적 책임 하에 목사를 선임하고 안수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큰 문제는 그 일을 해야 할 회중들이 자기들에게 그런 권한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그것은 솔직히 자신들의 권위를 스스로 높이려고 목사들이 성경적인 목사 임직에 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순태님의 글들이 특별히 한국 교회의 무지와 오해와 독선을 일깨우고 새로운 목사상을 정립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4/26/2006

                                                                                                                                                                
                      
                                                                                                                                                                                                                                                                                      

김문수

2006.04.27 14:17:12
*.91.200.245

정순태님 온유와절제와겸손을 유지하기 힘드시겠네요 .
목사님께서 이렇게 칭찬하시는 경우는 처음보네요.샬롬

정순태

2006.04.28 01:22:23
*.95.73.2

목사님, 생각의 방향이 같다고 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혹 잘못된 오해이면 어찌할까 하는 걱정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문수 형제님, 솔직히 제 글과 목사님 글을 비교해 보셨지요? 저는 목사님 답글을 읽는 순간, 형제님 말씀처럼 우쭐하기는커녕,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습니다. 성경해석과 글의 내용에 있어서, 태양과 반디불의 차이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목사님과 비교할 수준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 올리곤,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깔끔한 교통정리를 통해 좀더 높은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흡족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시133:1)이 선한 것만큼이나, 형제가 성경의 뜻을 함께 나눔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샬롬.

김문수

2006.04.28 02:30:59
*.74.56.127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옮겨 생명으로
들어간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자는 사망에거하느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요구하는사항중에서 가장실행하기어렵고
은혜없이는 불가능한............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정순태님 얼굴은못뵈었지만 하나님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샬롬

허경조

2006.04.29 20:56:22
*.113.44.57

저역시도 현대의 교회들이 너무 세속화하고 힘을 잃어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교역자들에게 있다고 봅니다.
정확한 지적이 제시됬지만 이것을 어떻게 검증받아서 교회개혁을 시작해야 합니까?

사라의 웃음

2012.11.03 23:01:19
*.109.85.156

가지런히 정리된 목사안수에 대한 글을 읽으며 세 분 하나님이 생각납니다. 서로 서로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귀히 여기시며 역사하시어,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나 서로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자로 자라가길 지금도 염원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그러나 원죄의 흔적들로 인해 교회안에서도 아파하며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시며 더더욱 아파하실 하나님이...

권위 보다는 아비의 맘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런 목사님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가르치되 목숨 아끼지 아니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그런 목사님들이,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천국백성이 되어지길 소원하고 소원하는 그런 목사님들이 점점 더 많아지길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 또한 귀한 진리의 말씀 앞에 맘을 추스리며, 맘을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모하는 자로 자라가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또 깨달아서 그 은혜가 어찌나 감사한지, 이 몹쓸 죄인들을 이렇게나 사랑하시어 영원한 나라로 옮겨 놓으시길 목숨 버리시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맘을 깨달아 가는 일에 게으리지 않는 성도의 한 사람으로 자라가길 기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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