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의 모순을 그냥 두시는가?(마3:13-17)

조회 수 2593 추천 수 258 2006.07.22 15: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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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19)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3-17)

이해가 안 되는 이 땅의 모순들

본문에는 쉽게 이해하기는 힘든 구절이 나온다. 요한이 증거 했듯이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어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메시야 본인이다. 그런데도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하고 그 준비를 위해 죄인을 회개시키는 세례를 주는 인간 요한에게 세례 받기를 자청했고 또 강권하다시피 해서 받았다. 예수님에게는 씻을 죄가 없지 않는가라는 질문부터 당장 생긴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은 까닭은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의를 이루는 데 합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경이 더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자마자 하늘에서 성령이 임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럼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스스로 자화자찬하려고 일부러 쇼우 한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마치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전에 공모한 일에 애꿎은 요한만 동원시킨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이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의(義)를 이루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여기서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다. 그럼 하나님의 의란 과연 어떤 것인가? 또 어떻게 해야 그 의가 이뤄지는가? 선뜻 대답하기가 힘든가? 그럼 질문을 바꾸어보자. 지금 현재의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모습이 의로워 보이는가?

최근의 중동 사태를 보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살인자라고 비난하며 신(神)은 자기들 정의의 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각기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대를 응징할 것이라고 벼른다. 정치적 윤리적으로 누가 옳고 그른지를 떠나서 과연 하나님은 어느 편일까?  

한국에서 출세해 큰 소리 치는 지도층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한 결 같이 인격적 도덕적으로 제대로 갖춘 자들이 없다. 권력에 기대고 법망을 교묘히 빠져가며 사기나 투기 등 부정한 수단을 가리지 않은 자들뿐이다. 착하고 의롭게 법을 제대로 지킨 자들은 오히려 전부 손해만 보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굽어져 보이고 세상은 불공평이 판을 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전도하려 해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의롭지 않고 그분도 힘을 잃은 것 같이 보여서 전하는 자가 도리어 힘이 빠지지 않는가? 세상은 갈수록 피폐해지며 사람들은 어차피 불공평한 세상이라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고 믿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죄와 영원에 대해서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콧방귀부터 뀐다.

신자들도 덩달아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는데 모든 초점을 두고 있지 않는가?   마치 하나님마저 세상에 당신의 의를 실현하는 일을 이젠 포기한 듯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과연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런 식의 의심이 꼬리를 물 수 밖에 없다.  
  
차 사고를 낸 미성년자

어떤 미성년자가 면허를 따기 전 운전이 서투른데도 아버지 차를 몰고 나가 남의 집 차고 문을 부수는 사고를 냈다고 가정해 보자. 주인이 뛰어 나오고 난리가 날 것이다. 이럴 때에 그 주인이 어떻게 해야 잘 처리하는 것인가? 여러분이 그 집 주인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우선 법(法)대로 처리하는 길이 있다. 경찰에 신고하여 사고 경위 조사서를 작성하고 가해자가 아직 어려 보상 능력이 없으므로 부모에게 연락해서 손해를 보상받는다. 그 아이는 무면허로 사고를 내었기에 특별 교육을 마칠 때까지 면허 취득이 연기되고 마침 인명 피해가 없어 감옥에는 안 갈지라도 학교에도 연락을 해서 정학을 당하든 사회봉사를 하게될 것이다. 자기 부모로부터도 당연히 별도의 응징을 받게 될 것이다. 아이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고 그에 따라 당연한 벌을 받았다. 이를 두고 그 처리가 불공평하거나 의롭지 못하다고 시비 걸 수는 없다.

다음으로는 그 아이와 주인끼리만 처리하는 수도 있다. 미성년자가 호기심으로 한 번 실수한 것을 법에 호소하면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무면허운전의 사고 기록이 남을 것이고 학교에선 불량학생으로 찍히고 부모에게는 엄청 야단을 맞을 테니까 집주인이 경찰과 부모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손해 본 것은 어떻게 하든 고쳐야 한다. 우선 주인이 자기 부담으로 고칠 테니까 혹시 저금해 놓은 돈이 있으면 가져 오고 모자라면 지금부터라도 아르바이트해서라도 갚으라고 서로 약속하는 것이다. 여러 번 나눠서 조금씩 갚아도 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대신에 차가 부서진 것은 부모에게 네가 적당히 둘러 대라고 타일러서 돌려보낸다. 사고 당시의 아이의 형편과 정상을 참작해 주는 해결책이다.    

순전히 객관적인 관점에선 이 문제를 법대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 면허도 없이 차를 몰다 남의 집 차고를 부순 자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미성년자인데다 초범이라 정상을 참작해 벌을 주지는 않더라도 스스로 자기 잘못을 다 감당시키는 것이 공평하다.

그런데 하나님도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면서 동일하게 그런 공평한 방법으로 세상만사를 처리한다면 과연 왜곡된 불의와 억울한 불공평이 수정될 것 같은가? 착하게 사는 자는 이 땅에서부터 상을 받고 악하게 사는 자는 이 땅에서부터 벌을 받게 한다고 과연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실현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수십 년이 넘도록 지속되어 온 이스라엘과 아랍권과의 중동 분쟁은 어떤 형태로든 결판이 나있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둘 다 없어지든지 아니면 둘 중 하나가 엄청나게 망해져 있든지 말이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벌써 무너졌거나 그보다 김일성 때에 이미 남북통일이 되었어야 한다. 공산주의나 나찌 독일은 아예 나타나지 않았어야 하거나 나타나자마자 곧 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이 두 가지 길과는 다르고 또 그런 방법은 거의 쓰지 않는다. 예의 사고를 낸 미성년자를 처리하는 데에 제 3의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차고 문이 박살이 나서 뛰쳐나온 집 주인이 곧 모든 정황을 파악했다. 그런데도 아이에게 아무 야단을 치지 않고 경찰과 부모에게도 연락하지 않는다. 너 어디에 사는 누구 자식이냐고 따지지도 않는다. 눈 한번 부라리지도 않고 상을 찡그리지 않는다.

대신에 “너도 너무 놀랐지? 혹시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정신 좀 차리게 집 안으로 들어가 좀 쉬자.”라고 하면서 소파에 앉히고 쥬스를 갖다 준다. 당연히 야단을 맞으리라 기대했던 아이는 어리둥절해지기 시작한다. 주인이 또 “아무 걱정 하지마.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게.  차고 부서진 것도 내 보험에서 처리하고 만약 카버가 안 되면 내가 알아서 고칠 테니 염려 안 해도 돼”라고 하니 더 당황스럽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차도 그 상태로 갖고 가면 아버지한테 야단맞을 것이니까 내가 고쳐 줄게. 쥬스 한 잔 하고 정신 차리면 바로 수리점부터 연락하도록 하자.”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로 꾸중 한 번 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을 내어서 다 고쳐주고, 그 모든 비용까지 다 부담해준다. 그리고는 “나에게도 너 만한 아들이 있으니 언제든 다시 놀러와. 그리고 이번 일을 거울삼아 앞으로는 괜히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아. 혹시라도 부모나 친구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서 의논해도 되”라고 위로하면서 친절하게도 집에까지 데려다 준다.

이게 왠 떡이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며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신학적으로도 열 가지가 넘게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야인 하나님 당신께서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 온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죄인처럼 물세례를 받아 죄를 씻으면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둘 째 아담으로서 모든 죄인을 대신해 스스로 그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메시야가 된다. 이게 그 사역을 감당하겠다는 표시로 세례를 받았고 또 그것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공표한 것이다. 한마디로 앞으로 예수님이 공적으로 담당하실 사역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세상의 인간들을, 사실은 그 전부가 죄인인, 다루는 방식은 예의 미성년자 차사고 사건에서의 세 번째 방법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자비와 긍휼만으로 이 세상에 당신의 의로우심을 증명하시고 또 그 의로만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예를 든 경우에 누가 가해자이며 누가 피해자인가? 누가 보상을 해야 하며 누가 보상을 받아야 하는가? 학생이 가해자고 집 주인이 피해자다. 그런데도 오히려 집주인이 학생에게 모든 것을 보상해 주었다. 자기 집 뿐만 아니라 사고를 낸 차도 고쳐주었고 부모와 학교와 경찰에서 받을 모든 벌도 면제해주었다. 이것이 도대체 상식으로 이해가 되는가?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우리 모두를 대신해 죽이시어 우리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으십시오”라고 전도한다. 그러면 되돌아오는 보편적인 반응은 어떠한가? “대체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와 내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사람들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도대체 공의라고는 없는데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어?”이다.

예의 차사고 사건에 비추어 보면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가? 피해자가 세 번째 해결 방법으로 모든 잘못을 용서 해주겠다는 데도 그 앞에다 대고 “당신 미쳤어?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시요!”라고 대드는 꼴이다. 만약 실제 상황이었다면 틀림없이 진정으로 송구하고 고마워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혹은 속으로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았네”라고 의아해 하면서도 그래도 “이게 왠 떡이냐?”이냐 싶어 계면쩍게 그 제안을 다 받아 들였을 것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공의는 반드시 일부 정상 참작이 허용되더라도 엄격하게 법이 적용되는 모습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죄를 용서하고 피해보상마저 시키지 않는 것, 나아가 납세자가 낸 정부의 돈으로 보상해주는 것은 도저히 생각을 못할뿐더러 이해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예로 따져만 봐도 어느 것이 참다운 의인지, 나아가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베푸셔야 할 의인지 분명히 알 수 있지 않는가?

이처럼 하나님의 의는 세상 상식의 잣대로는 평가는커녕 이해도 안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기껏 인간적 상식으로만 판단해서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이유로만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십자가의 방식으로만 “십자가의 의”를 알지 못하는 자연인의 눈에는 그 통치가 공의로워 보일 리가 없다.

십자가의 의란 무엇인가? 누구든지 죄 있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 앞에 엎드리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죄인이 십자가 앞에 올 때까지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와 인내로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자기를 못 박은 가해자들마저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셨지 않는가?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 사람들이 세상에 죄악이 성행하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지금도 기다려 주고 계시니, 즉 죄인이 죄를 짓고 있어도 그 당장은 벌을 안 주고 참아 주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전부 나타나 있고 또 완성되었다.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의 차이

그러나 인간의 의는 즉각적으로 죄인을 벌하고 하나님의 의는 참아 주다가 더디게 벌한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악인에 대해 벌을 주기는 주되 죽은 후에 천당과 지옥으로 나누는 일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이해하는 공정한 방식은 엄격하게 법대로 적용하거나 정상을 참작하여 벌을 주거나 둘 다 근본 목적은 피해 보상에만 있다. 정상 참작이 가해자의 개인적 사정을 좀 봐주긴 하지만 그래도 피해자의 손해만은 보전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세 번째 전적으로 용서해 주는  방법은 그 목적이 자신이 당한 피해 보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이자 범법자인 학생을 선도하여 변화시키는 데 있다. 요컨대 인간은 재물에 관심이 있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을 있다는 뜻이다.

세상이 불공평하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나보다 악해 보이는 사람이 세상에서 더 형통하고 큰소리만 떵떵 치니까 그렇다. 이 불만을 진짜 솔직하게 한 번 분석해보자. 그 불만의 초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나보다 많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악하게 보인다고 했으면 나에게는 그 사람보다 더 선한 부분이 있다는 뜻인데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감사하거나 안도하는 것은 없다. 그럼 나의 관심도 결국은 오직 재물에만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 잘 나가는 사람은 당연히 오직 재물만 목표로 살았기에 온갖 악한 방법을 동원했을 것이다. 자신의 사람됨을 바르게 하려고 했더라면 절대 그만큼 돈을 벌었을 리가 없다. 그 사람이 악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나도 그 사람 못지않게 비겁하고 치사하고 죄 많은 인간이라는 반성이나 회개가 전혀 없지 않는가? 나 또한 나의 됨됨이를 의롭게 바꾸려는 뜻은 없이 재물만 목표로 살면서 적게 벌었다고, 다른 말로 내가 동원한 방법이 그 사람만큼은 덜 영악했는가 보다하고  불평하고 있는 꼴이지 않는가 말이다.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욕심에 눈이 어두워 저지른 스스로의 죄악으로 세상이 불공평해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불공평해진 세상에 하나님 당신만의 방법으로 당신의 의를 실현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는 오히려 의가 실현되지 않고 공평하게 되지 않았다. 오직 재물에만 관심 있는 인간들이 도리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난리를 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제 삼의 방법으로 인간 자체를 고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또 인간들이 그 십자가가 도저히 엉터리라고 야단이다. 도무지 인간은 어떻게 따져도 구제불능이다. 하나님 당신이 인간의 그런 비겁하고 치사하고 완악한 부분까지 안타까이 여기셔서 다 감당하시고 직접 죽으시지 않고는 과연 인간에게 다른 어떤 소망이라도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쯤에서 사고를 낸 그 미성년자의 입장을 한 번 따져보자. 법대로만 엄격히 처리하는 것은 아이의 앞날을 완전히 망치는 것과 같다. 한 번 실수한 것에 비해 너무 가혹하다. 손해 배상은 완전하게 될지 몰라도 아이가 변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정상을 참작해주는 것도 사실 크게 다를 바 없다. 당장 벌을 안 받으니까 우선은 안도의 한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달 그 부채를 갚아 나가는 것은 어린 학생에게는 과중한 부담이다. 그것 갚는 돈을 버느라 다른 공부도 제대로 못한다. 양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멍에다. 그리고 어떻게 겨우 그 돈을 다 갚고 나면 처음에 고마웠던 마음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이 일 때문에 다른 공부를 다 망쳤다 싶어 오히려 그 주인이 미워질 것이다. 이젠 나도 떳떳해졌다. 나중에 돈이 많아지면 한 번 신나게 그 사람 차고 문을 부수고 수십 배로 물어주는 것으로 복수해야지라는 마음이 들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러나 세 번째 방식의 경우는 전혀 달라진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 했다. 속으로는 조금 불안했을 수도 있다. 이러다 나중에 진짜 경찰, 학교, 부모에게 통보하고 엄청나게 보상을 요구는 것은 아닐까 싶다. 전화만 와도 괜히 그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지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무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학교나, 부모나, 경찰에서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사고 난 얼마 후에 살짝 그 집 앞에 가보았더니 차고는 정말 말짱하게 고쳐져 있다. 또 우연히 주인을 마주쳤는데 여전히 친절하게 대해주며 공부 잘하고 있는지 다시 그런 사고를 안치는지 오히려 더 염려하고 위로 해 준다. 정말 저분의 용서가 사랑에서 우러난 진심이었구나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이 그 사람을 의심하고 불안해했던 것이 더 죄송하고 미안해진다. 도저히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 같은 죄책감에 견딜 수 없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찾아가 그간의 고뇌를 털어놓고 다시 진정한 용서를 빈다. 사고 났을 때는 얼떨결에 미안하고 불안한 마음에서 사과를 하는둥 마는둥 했지만 이번에는 진정으로 사과한다.

나아가 그렇게 해 준 덕택에 운전면허도 정상적으로 땄고, 주위 사람들 모두 내가 그런 엄청난 사고를 낸 전과자라는 것을 모르고 모범생으로 대해주었으며, 정상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좋은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어 진정으로 감사하게 된다. 잘못을 범한 그 본인이 진정으로 바뀐 것이다.

신자도 똑 같다.

“왜 악한 자가 형통하고 선한 자가 박해를 받는가? 왜 테러리스트들이 무고한 어린 아이까지 희생시키는가?”라는 불만들을 한 마디로 바꾸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이다. 인간의 관심이 오직 현실에서 가시적으로 맺히는 성취와 업적에만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의 의는 실종되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 하는가?”라는 불만은 무슨 뜻인가? 인간이 하나님도 어떤 일을 멋지게, 정확하게는 자기 마음에 들도록 이루어 주어야만 진짜 하나님으로 인정하겠다는 심보다.  

이 세상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분명히 왜곡과 모순투성이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악인이 바뀌어야 하는 데는 관심조차 없다. 요나처럼 니느웨와 그 악한 성읍에 있는 모든 악한 자는 천벌을 받아 그 자리에서 당장 죽으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라치면 자신도 거기에 포함되고 아니 가장 먼저 벼락 맞아 죽으리라고는 꿈도 못 꾼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부터 먼저 구해야 하는 신자들조차 너희는 너희끼리 세상에서만 타락해서 언제가는 천 벌을 받을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끼리 교회에 모여 박수치고 찬양하여 먼저 휴거될 것이다라고 뽐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생기는 환난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만 모든 신앙 활동을 다 투자한다.

자신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고 지금 눈앞에 닥친 일처리에만 골몰한다. 그 일이 정상이 아니고 꼬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자 또한 하나님이 뭔가 불공평하다고 여긴 증거다. 만약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확신한다면 당장 없애달라기 앞서서 그 의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관심과 계획은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일을 멋지게 마무리하기 위해 악인을 벌주고 선인을 상주는 분이 아니라, 악인을 바꾸고 선인은 더 선하게 만들기 위해 일을 동원할 뿐이다. 사실은 그분에게는 악인과 선인의 구별이 따로 없다. 다 같이 무면허로 차를 모는 미성년자로 본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연약하고 무능하고 불완전하기에 항상 사고만 칠 수 밖에 없는 철부지로 보신다.      

하나님이 세상, 즉 일부터 먼저 바로 잡아 주지 않는 이유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을 바로 잡는다고 인간 자체가 변화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일을 한두 개 고쳐 준다고 사람이 잠시 감사할 수는 있어도 그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헤매는 동안이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가장 편하고 축복을 받은 시기였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를 주셔서 주리지도 갈증 나지도 않게 하셨다. 또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보호해주어 의복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았고 사막의 혹독한 날씨와 이방 족속들의 방해를 막아 주셨다. 정말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의  먹고 입는 것이 동일했다. 상식적으로 불공평에 대한 불만이 있을 리가 없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며 하나님에게 불평만 늘어놓았다.  

엄밀히 말해 그들의 불평은 공평한 것이 싫으니 좀 불공평하게 대우해달라고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매일 똑 같은 것을 먹고 마시니까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남보다 내가 더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더 빨리 먹어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으니 도무지 사는 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거둘 때에 많게도 적게도 걷지 말라고 미리 당부까지 하셨다. 그럼에도 더 거둔 자가 많이 나타났지 않았는가? 또 그렇게 거둔 만나를 하나님은 썩게 만드셨다. 인간은 공평한 것이 싫으니 불공평하게 살겠다고 덤볐지만 하나님은 그 불공평을 다시금 공평하게 바꾸셨지 않았는가?    

인간이 변하기 전에는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게 심지어 공평하게 변해도 인간에겐 여전히 불공평하며  하나님의 의가 실종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갖고 있는 불공평, 즉 자기 우월을 추구하는 끝없는 탐욕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변화되는 길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간섭으로 그 존재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는 길 뿐이다.

그리고 성령이 죄인 된 인간 각자에게 임하기 위해선 예수님이 인간의 그 모든 탐욕에 희생되면서 동시에 그 탐욕을 다 안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다. 또 그러기 위해선 그분이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와 같은 인간이자 죄인인 침례 요한에게 죄를 씻는 물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자 전부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절대적 사랑, 무조건적 사랑, 무한한 사랑 없이는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세 번째 방법이 아니고는 사고를 낸 그 미성년자의 인생이 손상되지 않으면서 사고 이전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원죄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그 첫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길도 십자가 밖에 없다. 이런 의를 의롭지 않다고 불평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인간이 의롭지 않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인간이 참 인간다워지며 동시에 세상도 공평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4/21/2002 나무십자가 교회 주일 설교, 7/22/2006 정리)


국중후

2006.07.23 05:48:01
*.147.129.60

할렐루야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인간이 참 인간다워지며 동시에 세상도 공평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

아멘!!!!!!!

김문수

2006.07.23 05:58:03
*.75.121.9

아멘!!!!!!!!!!!!!!!!!!!!!!!!!!!!!!!!!!!!!!!!!!!!!!!!!!!!!!!!!!!!!!!!!!!!!!!!!!!!!!!!!

허경조

2006.07.25 22:48:04
*.27.229.11

amen amen

김순희

2010.02.11 10:08:56
*.254.209.141

성령이 죄인 된 인간 각자에게 임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인간의 그 모든 탐욕에 희생되면서 동시에 그 탐욕을 다 안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했다. 아멘 아멘!!

날마다순종

2020.11.23 17: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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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분이신줄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공의, 그 한량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이 천하의 죄인도 새생명을 얻었으니 평생을 영원토록 찬양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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